해상도 높은 장면
흐르는 물 잇기 있기 이끼
‘해상도 높은 장면’에는 종종 협업의 과정과 대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를 만들고, 소리를 내고, 연기를 하며 종종 함께 작업하는 김그레이스(김성은), 오로민경, 배선희가 ‘셋이 한 몸’이 되어 제주 강정마을과 바다에서 들은 물의 다성적 충돌과 얽힘을 펼쳐냅니다.
1. 흐르는
2. 물
네, 다 기억해볼게요.1) 알로하. 하와이에서 왔습니다. 나는 여기 처음 왔어요. 필리핀과 하와이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왔는데, 지금 여기에, 평화를 위해 서 있고, 과한2)에서 왔는데 우리 섬은 이미 35%가 군사 기지예요. 전쟁 말고 평화와 함께합니다. 나는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 여기 오니까 고향과 얼마나 비슷한지 많이 느끼고 있어요.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책임, 우리가 공유하는…… 바다- 바다-, 바다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를 위한 비전, 탈 군사화의 비전을 함께 공유합니다.3) 이어서 소개해주실 분? 제비다, 제비, 어디 어디, 아! 저렇게 작은데도 다 보이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열렬히 환영해요. 오늘부터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여러분들이 막 들이닥치니까 너무 반갑고 감격이 돼요. 아이고 이 멍석 깔고 버티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구나. 먼 곳에서도 우리 잊지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하고요. 여러분들 이야기 들으면서 또 감동이 되고.
저희가 섬들의 이야기를 연결하고 싶었거든요. 무동력 보트를 여섯 명이 타고 107일 동안 항해를 했어.4) 내내 바다에 있었던 거는 35일. 제주에서 오키나와, 그리고 대만에 갔다가 다시 여기 오는 거를. 바람과 물의 힘으로만 움직여서 다녀온 건데, 대만에서 제주로 올 때는 열흘 동안 바다에 있었다는 거야. 한 사람당 여섯 시간씩인가 연달아 교대하면서 키 잡고. 실제로 그거를 내 친구가 했다고 하니까,
무섭진 않았어요? 너무 무서울 때는 내려가서 잠이 들길 기도해. 한번은 풍랑주의보 때 배를 타고 나간 적이 있어요. 2m 이상의 파도여서 원래는 못 나가는 건데 그땐 몰랐고, 그냥 괜찮을 것 같아서 나갔어요. 그때 마을에서 대리 액땜이 계속 있었어. 막 발톱 부러지고, 깁스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다쳤어. 헉, 그분들 덕에 살았네. 근데 나가자마자 파도가 꽤 높은 거예요. 그때 처음 한 생각이 무섭다기보다는 아름답다였어요. 다시 가고 싶어. 되게 무서운데 동시에 아름답다.
즐거운 상상에 빠졌어.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육지 사람들은 섬을 고립된 장소로 느끼는데 그렇지 않아요. 섬사람들한테 바다는 전부 길이거든요. 유랑단을 하나 만들어야겠는데요? 지금도 다들 배를 탈 수 있으면, 자전거 타는 것처럼 그럴 수 있으면, 좀 더 친구라는 감각이 있을 거 같은데 다른 나라랑.
중국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강 건너편에서 처소를 지키느라 띄엄띄엄 서 있는 북한 군인들을 봤어요. 신부님이 군인들을 향해서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를 했어요. 우리는 형제다, 하는 의미로다가. 환하게 웃으며. 그 사람들, 움직이면 안 되니까 두 눈만 끔뻑끔뻑. 강을 따라 끝까지 갔다가 그대로 돌아 나오면서도 신부님이, 군인들한테 계속 손을 흔들었어요. 그때 갑자기 제일 끝에 서 있던 북한 군인 한 명이 처소 옆에서, 몰래.
한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친 다음
양옆으로 작게
손을 흔든다
내 인생에서 제일 평화로운 공간이었어. 주변이 다 바다뿐일 때. 바람이 안 불어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땐 괴롭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좋았어요. 다른 시간대에 있는 느낌. 계속해서 바람을 느껴야 돼요, 피부로.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에요.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돛을 그 방향으로 돌려야 되고, 그 감각이 진짜, 하루는
밤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되게 맑은 날이라서 별이 많고 또 밑에 플랑크톤이 있어서 경계가 없는 빛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그런 느낌. 망망대해에, 바다 위에서, 이렇게 별이 있고 여기도 빛나고 있고, 거기를 우리가 이렇게 가르고 있고, 그 순간이 저한테 제일 아름다웠던 순간 중에 하나.
마법 양탄자 탄 것처럼
우리가 가는 길 뒤로
반짝반짝반짝반짝
반짝반짝반짝반짝
보름달 같은 그런 게 바다에, 달빛이 그대로 바다에, 진짜 멋지다고, 해 뜨고 해지는 거. 깜깜했다가 해 뜨면 너무 반가워요. 그때마다 애들이 야, 해 뜰 때 꼭 깨워줘. 아무리 피곤해도 해 뜨는 거 보고 싶어. 맨날, 해 뜰 때 깨워줘. 야, 해 뜬다, 일어나! 그리고 돌고래 있으면 무조건 깨워야 되고. 비상, 비상! 이래도 안 일어나던 애들이, 야, 돌고래다! 하면 벌떡 일어나고. 너무 웃겨, 비상하면 안 일어나는데 돌고래다 하면 일어나는 게. 배 밑은 이렇게 돼 있어서 소리가 들리거든요. 멀리서부터 돌고래 오는 소리가. 그러면은, 뭐지? 오는 건가? 하고 딱 나가면, 언젠가 여기가 우리한테 올 거라는 거 뻔할 뻔 자예요.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이 안에 들어가서 평화롭게, 죽어가는 붉은발말똥게라든지 새뱅이라든지 보말들 종류대로 살아나는 것들을 관찰하는 날이 분명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날까지 여러분들 꾸준히 관심 가져주시고 그날이 왔을 때 여기서 큰 잔치하도록 합시다.
돌고래 우는 소리. 높은 소리. 고주파 소리. 옆에 있을 때 내려가면, 끼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소리.
여러분들 환영하는 의미에서 내가 18번 노래 하나 하겠습니다.
그리고 밤에 돌고래가 홀로그램처럼. 그게 진짜 예뻐, 너무 멋있어. 돌고래가 착 가면 그 길 따라 빛이 착. 깜깜해서 안 보이는데 빛만 이렇게, 접촉 빛이 순간적으로 돌고래를 따라 생기는. 플랑크톤이야? 돌고래에 붙어 있는? 그건 아닌데 맑은 바다에 모든 물에 있어. 낮에는 빛을 받고 밤 되면 발광을 하는? 그런 과학적인 원리까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걔네들은 만져지면 발광을 한다 그래서, 요요요, 여기 이 화단 있죠? 여러분들 불편하게 하려고 해군 기지에서 갖다 놓은 건데, 의자가 됐어. 저 펜스를 보면은 아주 날카로운, 우리 저런 데 즐겨 앉거든요. 앉지 못하게 저렇게 날카로운 톱날을 심어 놓기도 하는데, 요게 우리한테 꽤 도움이 돼요. 바람 부는 날에는 피켓 같은 거 고정하는 틀로 쓰기도 하고, 우리는 생명을 키우는 사람들이라서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일들을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찾아낼 수가 있어요. 배한테도 그렇게 돼요, 빛이. 배가 지나갈 때마다, 생기는구나, 빛이. 닿을 때. 신기하다. 마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우리 춤출까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인간 띠 잇기를 하는지 종료 멘트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춤을 출게요. “고맙습니다. 내일 낮 12시에도 이곳에서 다시 만나 인간 띠 잇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우리들이 잡고 있는 손의 힘으로, 뻔뻔하게 울리는 군가를 잡아먹는 노래의 힘으로, 이곳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이 살아나고, 부당한 해군 기지 대신 구럼비와 저 바다가 본래 있던 그 모습을 되찾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소망합니다. 더불어 온 세상 생명들이 평안히 살아갈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그 기도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강정 댄스를 추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고 하고요. 강정마을에 친구들이 있어서 몇 년 전에도 왔었는데 오늘 좀 오랜만에 이 자리에 함께 왔어요. 마이크 잡으니까 조금 떨리는데 근데 또 오랜만에 오니까 계속 여전히 이곳에서 이 기지 앞에서 이렇게 외치시는 목소리나 그리고 그 사이로 이렇게 차들이 지나가고 뭔가 더 많이 바뀐 이 모습에서 또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이 있어요. 오신 분들 얘기를 들으니까 좀 왈칵왈칵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지금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있는 자리들이 되게 소중하게 느껴져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중간에 약간 저렇게 막 저거 돌고래 같은데 돌고래네 돌고래 맞아 어머 돌고래 아니 맞잖아 맞잖아 빙글빙글 도는데 저기 중간에 뭐가 하나가 있어 근데 뭔가 바위가 작은 게 있나 아 그럴 수도 있어 저기만 물살이 달라 그래서,
3. 있기
4. 잇기
나는 ‘세계가 하나’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그레이스, 선희와 함께한 여행을 떠나기 전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5)를 느슨하게 읽고 있었는데, 그가 중국 주 왕조의 ‘천명(天命)’ 개념을 가져와 해석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천하(天下)’는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이지만, 로벨리는 이를 ‘하나의 하늘 아래’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며, 자신의 정치적 꿈을 다음과 같은 믿음의 언어로 풀어냈다.
‘흐르는 물 잇기 있기 이끼’를 위한 여정에서, 우리 셋이 함께 만든 구글드라이브 폴더의 이름은 ‘셋이 한 몸’이었다. 여기서 ‘한 몸’은 ‘하나의 조국’이나 ‘통일된 미래’와 같이 단일성을 주장하는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안에 함께 존재하는 개별 생명들’로서의 하나, 즉 서로 다른 존재들이 부분으로서 전체를 구성하는 감각을 말한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듣고 싶었다. 복수성의 ‘하나’들을 떠올리며……모두가 ‘하나의 하늘 아래’의 인류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중심에 두는 정치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전 세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6)
2025년 8월, 그레이스가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제주의 강정마을을 찾았다. 해군기지 건설로 아름다웠던 구럼비 바위를 잃은 이 마을의 투쟁은 2012년을 지나 어느덧 십 년의 세월 동안 세대를 넘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머물고 있는 사람, 떠나간 사람, 새로 도착한 사람들. 구럼비 바위를 지키고자 시작되었던 투쟁은 단단한 울타리에 둘러싸인 해군기지와 함께 변화하는 풍경 속에서 여전히 아침 백배 기도와 ‘인간 띠 잇기’로 이어지고 있었고, 이제는 제주시 내의 환경 개발 저항과 넓은 평화운동의 진동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여행 첫날, ‘인간 띠 잇기’에 참여한 우리는 마침 하와이, 오키나와, 필리핀, 캘리포니아, 괌에서 찾아온 이들이 전하는 군사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희는 노래를 불렀다. 깃발들, 어색하고 다정한 인사들, 끈끈하면서도 무심한 표정들, 해군기지 앞이라는 날 선 긴장감이 어딘가에서 계속 부딪혔다. 그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동그랗게 모여 춤을 추었다.
‘인간 띠 잇기’를 마친 후, 강정마을 한 바퀴를 돌고 강정천7)으로 향했다. 냇가에 수중 마이크를 물속에 넣고, 동시에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선희와 나는 하나의 마이크에 이어폰 분배기를 연결해 같은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고, 그레이스의 마이크도 비슷한 위치에 설치했다. 모두 고요하게 서로를 인지하면서도 각자에게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렇게 ‘우리가 한 몸’이라는 전제를 안고,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강정천의 하얗게 부딪히고 흩어지는 포말에 매료되었다. 우리가 듣는 물의 소리는 셀 수 없이 얽혀 흐르는 물결들의 부딪힘을 통해 발생한다. 이 부딪힘 안에서 생기는 미세한 차이음(주파수)들이 하나, 둘을 넘어 셋 이상이 되면, 그 음들은 다음을 기대하는 복수성의 리듬이 되고, 이러한 반복 속에서 특정한 물길의 성질을 드러내는 소리의 패턴이 생긴다.
물은 주어진 공간 자체로 그곳에 흐른다. 어떤 곳을 통과하고, 어떤 깊이를 지나, 어떤 모양의 표면과 부딪히는지에 따라 물의 소리 패턴은 변화한다. 강정천처럼 유속이 빠른 냇가에서는 계곡의 바위와 자갈에 부딪히며 생기는 고주파 소리가 청량하고 맑은 음악처럼 들려온다. 나는 물결들이 부딪히는 자리들을 찾아가 그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하얀 포말이 부숴지는 자리는 가장 많은 충돌이 일어나는 장소이기에, 그곳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
헌데 많은 충돌이 일어날수록 더 풍부한 소리가 존재할 것이라 기대하게 되는 이 자리에서는, 오히려 구분 가능한 낱개의 물결 소리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부딪힘이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차이를 가진 물결들의 다성적 소리는 더이상 분리되거나 인식되지 않는다. 모든 음이 겹치고 쏟아져 하나하나의 소리가 아닌 전체가 하나의 ‘밀도’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대부분 이를 소음이라 부른다.
이러한 계곡의 포말은, 실제로 핑크노이즈와 유사한 소리를 낸다. 하나의 소음처럼 들리는 이 속에는, 수없이 많은 억겁의 부딪힘들이 조율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뭉쳐진 물결을 우리는 하나의 냇물이라 부르고, 강정천이라는 하나의 물결들은 복수의 몸으로 해군기지가 설치된 하나의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하얀 포말의 자리. 개별적 하나들이 사라진 소리의 세계에서 나는 나른해질 정도로 깊은 평화를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소음을 이루는 다성의 소리 행진이 ‘셋이 한 몸’을 말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닮았다고 느낀다. 수많은 부딪힘으로 인해 서로의 개별성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도착하고 있는 각 존재의 주파수들을 맞이하고 있다.
카를로 로벨리가 말한 ‘하나의 하늘 아래 인류’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대지 아래에 속해있는 공동체임을 조용히 강조한다. 충돌하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각자의 목소리들이 임계치에 도달해 기어코 아무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올 때, 그 들리지 않는 공명이 다시 하나의 흐르는 물이 될 수 있을까? 이 모든 충돌과 엉킴 속에서, 한 몸으로서 세상을 듣고자 하는 행위가 다성의 정치적 실천이자, 세계를 축하는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전 세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물에서 밀려오는 것들. 유리병에 담긴 편지가 이 물의 흐름을 따라 계속 우리에게 떠밀려 오고 있는 상상을 했어. 이 파동 속에서 무수한 편지들이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매일같이 축하 편지를 받고 있어.
5. 이끼
김그레이스(김성은), 오로민경, 배선희
제주도 기반의 영화감독, 연구자이자 협력자이다. 기억이 어떻게 영화 안에서 감각되고 전달되는지를 탐구한다. 우화, 잠재적 역사와 예언을 바탕으로 기억을 다층적이고 비선형적인 현상으로 접근한다. 잊히거나 침잠한 것을 떠올리는 동시에, 아직 출현하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은 세계를 상상한다. 영화를 '듣기' 위한 매체로, 섬세한 저항과 관계 맺기의 감각적·수행적 가능성을 품고, 확장해나가려 한다. (김그레이스)
공간을 만들고, 글을 쓰고, 소리를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끝의 입자 연구소 지킴이로서 지층과 우주 사이의 그리운 감정을 관측하고 있다.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소리의 풍경들을 마주하고 들어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개인의 기억, 흔들리는 잎의 미묘한 떨림 등을 관찰하며 '더 작은 힘'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질문해보고 있다. (오로민경)
배우. 쓰고 연기하는 사람. 반응되는 것에 충실하고자 애쓴다. 여성적 향유와 글쓰기, 의미를 초과하는 몸의 수행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행위의 이중성과 모호성을 반영한 '시적연기설계'를 정교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는 연극과 본인의 관계를 서로 돌보는 사이로 생각한다. 몸과 몸이 접촉하는 순간 극장은 생겨나고, 삶이 곧 연극이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 숲 산책 안내자와 가락지 부착 조사자가 되는 게 꿈이다. (배선희)
셋이 한 몸일 때, 우연히 들른 절에서 연잎을 타고 구르는 물방울을 본 적이 있다. 봉긋한 물방울이 오목한 연잎 위를 빙그르르 돌다가 원심력을 벗어난 즉시 우리에게로 떨어졌고 손바닥의 피부를 통해 몸속에 전부 스며들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 '흐르는 물 잇기 있기 이끼'에서 만난 모든 것이 마치 그날의 물방울처럼 왔다. 강정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빛을 품은 물방울로서 낯선 우리에게로 전부 와 스며들었다.
공평해(共平海) 프로젝트의 경험을 들려준 여름의 해초는 조만간 바닷길을 통해 봉쇄된 가자 지구로 갈 거라고 했다. 구호물품을 실은 천 개의 배를 가자 지구로 보내는 프로젝트('가자로 가는 천 개의 마들린호(TMTG)')가 있어 신청했다고 했다. 여름이 지나고 작업을 마무리 짓던 어느 날, '알라 알 나자르 호(Alaa Al Najjar)'에 탑승한 해초가 항해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이 그가 무사히 가자 지구에 도착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응원했다. 출항한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알라 알 나자르 호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나포됐다. 하룻밤 새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초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10월 10일, 마침내 그는 석방됐다. 같은 날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휴전이 발효됐다. 해초는 한국이 아닌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에 있는 '천 개의 마들린호' 사무실에 머물며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계속해 '잇기' 위해서였다. (바로가기)
우리가 만났던 여름에는 조금도 상상치 못한 일들이 '흐르는 물 잇기 있기 이끼'를 다시 듣고 보고 살피는 동안 일어났다. 어느 날엔 바닷물에 띄운 해초의 편지가 우리가 있는 곳까지 흘러왔다. "바다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닷물이 '가자'에 닿는다는 생각에 더욱 슬픕니다. 매일 수많은 별들과 대자연, 그리고 함께 동행하는 선단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 '빛'을 가지고 '가자'로 가야겠습니다.(2025년 10월 3일, #해초가자항해, @gangjeong79s)"
그의 항로를 좇으며 수평선을 향해 너울대는 바다가 실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내리는 생명의 물임을 깨달았다. 시간이 걸릴 뿐 흐르고 흘러 기어코 가닿는 게 물의 속성이란 사실을 해초와 강정마을에서 만난 물방울들이 알려줬다. 정말이었다. 바다는 전부 길이라고 한 그의 말은 은유가 아니었다. 바다가 전부 길인 게 아니라, 그들이 곧 전부인 바다였다.
2025/12/03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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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로민경, 김그레이스(김성은), 배선희가 2025년 8월 7일부터 9일까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보냈던 시간을 녹음 기록 파일과 기억을 바탕으로 받아쓰기한 글이다. 우연히 만나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 및 재구성한 글로, 모든 문장의 출처는 강정친구들의 활동가들(정선녀, 해초, 지혜, 수산, 카레), 같은 날 인간 띠 잇기에 참석한 Detours: The Decolonial Guide Series의 연구자님들, 그리고 그레이스, 오로, 선희에게 있음을 밝힌다.
- 2
- 과한은 차모로어 Guahan를 한국어로 표기한 것으로, 영어로 축약된 괌(Guam)의 본래 이름이다.
- 3
- Detours : The Decolonial Guide Series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웹사이트 참고. 바로가기
- 4
- 2023년 6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제주 강정마을에서 무동력 요트를 타고 출발, 제주-오키나와-대만을 잇는 5,000km의 "동아시아의 바다를 공존과 평화의 바다 공평해(共平海)로" 만들고자 진행된 요트 항해 프로젝트다. 자세한 내용과 소식은 @peacean.forall(바로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 5
- 카를로 로벨리,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2025.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카를로 로벨리가 지난 몇 년간 유럽 여러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원제는 『여기 호수 위에서 알았네 Lo sapevo, qui, sopra il fiume Hao』로, 위 인용문은 장자와 혜시가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알 수 있는지 논의하는 짧은 대화에서 따왔다.
- 6
- 카를로 로벨리,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2025, 65쪽.
- 7
- 강정천은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동쪽에 위치한 용천수 하천이다. 한라산의 천연 암반수가 사계절 내내 흐르며, 맷부리를 지나 강정 앞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을 이룬다. 이곳은 무더위에 지친 강정마을 활동가들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찾는 쉼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