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4대강 사업은 강행되려는 참이었고 제주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이었다. 2009년의 일이니, 그간 한 사람이 태어나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이던 사람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경력을 쌓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무심코 흐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 뒤돌아보면 그저 제자리인 듯하다. 시간으로부터 인간은 제대로 배우는 것 하나 없이 더 엄혹한 시절을 만들었다. 실수인지 악행인지 모를 것들을 반복한다. 2009년에 작가들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 ‘6‧9 작가선언’을 낭독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의 작가 188명이 한 줄씩 시국 선언을 내고 이를 배포한 것이다. 당시 나는 갓 등단한 신인이었기에 선배들을 돕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심부름꾼이 되려 했다. 물론 선배들은 후배라고 하여 함부로 뭔가를 시키려 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고민이 많은 작가이자 사람이었다.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는 데 공력깨나 든 것으로 기억한다. 문구 하나, 뉘앙스 하나를 두고도 크고 작은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디데이에 광장에서 선언문을 읽었고, 그 소식은 주요 뉴스에서 짤막하게 다뤄졌다. 우리는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 몇 잔 나누고 헤어졌다. 어째서인지 허기졌다. 우리의 문장들이 누군가의 밥이 되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지는 듯했다. 손에 잡히는 것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명박 다음 대통령은 당시 선언에 참여한 작가 대다수의 바람과 달리 이전 대통령과 같은 당에서 배출되었다. 알다시피 박근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국회에서의 탄핵 이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생애 그와 같은 형식의 문장을 다시 들을 줄은 몰랐다. 그 문장을 듣기가 이토록 힘겨운 일인지도, 역시 몰랐다.
  2024년 12월 3일 내란이 일어났다. 우리가 현수막을 펴고 한 사람씩 마이크를 잡고 각자의 선언문을 낭독하던 자리에는 이제 전광훈 목사를 따르는 이들의 천막이 놓인 채다. 뉴스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쏟아졌다. 나는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처단이라는 말을 뇌까렸다. 불법 비상계엄은 국회에 의해 해산되었다. 국회에 진입했던 군인은 서서히 물러났다. 윤석열은 석연치 않은 사과와 함께 부정 선거, 중국 개입설 같은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를 기점으로 소위 아스팔트 극우가 극적으로 발호했다. 집권 여당의 보이콧으로 탄핵 투표가 불성립했다. 국회 앞에서 2, 30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응원봉 집회가 계속되었다. 2차 표결에서 윤석열은 가까스로 탄핵되었다. 국무총리인 한덕수가 대통령 대행 역할을 하며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루고 특검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석열의 내란죄를 둘러싼 수사권 논란이 불거졌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던 한덕수가 탄핵되었고 최상목이 대행의 대행이 되었다. 최상목은 국회가 추천한 3인의 헌법재판관 후보 중, 임의로 2인만 임명했다. 공수처가 신청한 윤석열 체포영장이 법원에 의해 발부되었다. 윤석열은 한남동 사저에서 경호처를 동원해 농성에 돌입했다. 남태령에서 농민과 여성이 연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도심 곳곳에서 빛의 혁명이 일었다. 동시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극우 세력의 혐오와 선동이 발호했다. 대규모 작전 끝에 윤석열은 체포되었다. 윤석열은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서부지법 폭동 사태가 일어났다. 윤석열의 신병을 인계받은 검찰은 구속 기간 연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검찰은 구속 기간 연장 없이 윤석열을 구속기소 했고, 윤석열 측은 구속 취소 청구서를 제출했다.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판사는 구속 기간을 산정하는 데 날이 아닌 시간을 기준으로 삼는 초유의 계산법을 제시하며 구속 취소를 결정했다. 윤석열은 카퍼레이드를 방불케 하는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또한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심리에 참여해 거짓말을 일삼고 부하에게 책임을 미루었다. 헌법재판소의 변론기일이 마무리되었다. 많은 시민의 기대와 달리 선고 기일이 결정되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찬탄, 반탄 시위가 주말마다 대규모로 열렸다. 헌법재판관 2인의 퇴임일이 가까워질수록, 광장에 실질적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여기까지가 12월 3일 내란의 밤에서부터 4월 4일 오전의 파면까지 나를 잡아먹은 뉴스의 매우 간략한 서술이다. 분노와 불안감, 투쟁심과 무기력증이 번갈아 찾아왔다. 광장에 나가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연단에 오른 시민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것만 같았다. 출판인으로서는 몇몇 여성 작가와 활동가에게 긴급히 글을 요청해 앤솔러지 『다시 만날 세계에서』를 냈다. 제목 그대로 책이 나올 즈음에 윤석열은 파면되고 최소한 그가 현직 대통령이 아닌 상태에서 다시 만날 세계를 고민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3월 8일 여성의 날에 책을 들고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수많은 깃발이 비장하게 휘날렸다. 소녀시대의 노래를 배경으로 깃발을 따라 사람들이 행진했다. 그 발걸음에 비해 책은 너무 느린 것 같았다. 책은 어쩌면 둔감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소심하며 어쩔 수 없이 앞장서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책에는 의도적으로 이른바 문단 작가의 몫을 최소한으로 하였다. 그들이 글로 표할 수 있는 문학적 입장과 결과물은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 정리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학의 느림은 태생적인 동시에 의도적이다. 섣부르지 않고 끈질기다. 하지만 2025년 3월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게 진중하고 느릿한 서생의 끈질긴 암중모색이었을까? 비상계엄이 있던 주,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노벨상 주간 행사가 한창이었다. 긴긴 암중모색 끝에 한국문학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줄을 남겼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분명 5월의 죽음은 올해 봄의 생명을 살리고 있었다. 윤석열의 내란에도 문학의 느리고 충실한 걸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었다. 동시에 내란이 일어난 이 시대가 지금 문학에게 요구하는 즉각적 반응 또한 분명히 있었다. 문학이 긴 호흡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만큼, 거친 호흡이더라도 감행하는 뜀박질도 필요했다. 달릴 때는 달려야 한다.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십수 년 전 6‧9 작가선언이 떠올랐다. 작가는 글로 말해야 한다. 작가는 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은 곧 글이다. 작가선언은 작가 한 명 한 명의 선언문이 독립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작가는 글로 말한다는 앞선 명제를 실현한다. 2024년 12월 3일 내란 사태 이후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노하고 투쟁한 작가들이 많았다. 2009년에도 우리는 분노하고 투쟁했었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보다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있었다. 2025년 3월 21일. 오은, 유희경 시인 등, 작란 동인과 함께 일을 도모했다. 2009년의 작가선언의 모델을 따랐으나 그때처럼 작가 공론장의 논의를 길게 가져가기는 어려웠다. 헌법재판소에 파면 선고를 서두르길 촉구하는 취지를 설명하는 안내문을 빠르게 작성했고 각자의 성명을 남길 수 있는 링크 문서를 만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평소 안부를 나누어온 작가들에게 먼저 메일과 문자, 카카오톡 메신저 등으로 링크를 전달했다. 잘 지내세요? 하는 인사에 마냥 잘 지낸다고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상대가 답장을 작성하는 동안, 후딱 링크를 보냈다. 이런 걸 하려고 해요. 확인 한번 해주세요. 이게 다였다. 그들은 확인했고 공감했으며 성명을 보내주었다. 당시 링크 문서에 써두었던 글은 아래와 같다.

시 동인 ‘작란’의 제안으로,
뜻을 같이하는 몇몇 작가와 함께 다음과 같은 방식의 선언문 작성을 준비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명의 주체가 되어 하나의 뜻을 개별의 목소리로 전하려 합니다.


*

피소추인 윤석열의 대통령직 파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가 이유 없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불법 비상계엄 이후 100일이 넘는 동안 시민의 일상은 무너지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희는 당일 자행된 반헌법이고 불법인 행위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피소추인 윤석열의 대통령직 파면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는 지체되어서는 안 되며 파면 외 다른 결정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에 우리는 헌법재판소에 요구합니다. “지금 당장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하라.” 아래 414명의 작가는 각자의 목소리로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헌법재판소에 닿길 바랍니다.


* 150자 이내로 탄핵을 촉구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문장을 써주세요.

* 마감은 3월 23일 일요일에서 24일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으로 하겠습니다.

* 성명문은 한데 모아 배포할 예정입니다.

* 이 링크를 주변에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에세이스트, 아동문학가, 극작가 등 장르를 최대한 열어놓고 성명을 받고자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성명이 모였다. 시인은 시인대로, SF 작가는 SF 작가대로, 평론가는 평론가대로 문장의 스타일이 엿보이는 게 흥미로웠다. “제발 빠른 파면을 촉구합니다. 진심 스트레스 받아서 이 한 줄도 못 쓰겠어요!”라는 김초엽 작가의 일갈은 그야말로 마감을 앞둔 작가의 하소연이라 웃기며 슬펐다. “공동체가 이룩한 상식의 최소한”을 지켜달라는 김사인 시인의 당부에서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평가했던 세대의 어쩔 수 없는 허탈감을 엿볼 수 있었다. “봄의 북촌길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이 사태를 매듭”지어 달라는 김멜라 작가의 촉구는 당시 난장판이라 할 수밖에 없던 헌법재판소 앞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었다. 성명을 보내준 작가의 이름에 경중을 따질 일은 전혀 아니겠으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소설가 한강의 참여는 현실적으로 성명의 무게감을 달리했다. 한강 작가는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 일은 보편타당했다. 결국 일은 보편타당하게 흘러가게 마련이다. 성명을 모으면서 그러한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
  작가의 성명을 모으는 동시에 평소에 신뢰와 감탄을 보내며 함께 작업해온 이지선 북디자이너에게 성명의 시각화 작업을 요청했다. 각각의 성명이 한 페이지에 담았다. 검정 바탕의 흰색 명조체가 시인성을 더했다. 거기에 전체 성명을 아우르는 빨간색 선이 이 사태의 엄중함을 날카롭게 표현했다. 마감을 넘기고 추가로 도착한 성명들이 있어 가나다순을 맞추느라 디자이너를 실시간으로 괴롭혔다. 디자이너의 기꺼운 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편 나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토록 많은 작가가 참여한 만큼 되도록 많은 독자가 이 성명을 알아보고 불안한 시국에서 나처럼 위로와 응원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것이 더 나아가 헌법재판소에도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빨리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길 원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을 했다는 정도의 자족에서 머물 일은 아니었다. 분명한 성과가 필요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성과였다. 보편적 가치를 위한 일이었다. 잰걸음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몇몇 진보 언론에 메일로 소식을 알렸고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많은 언론사에서 주요하게 다루었다. X(구 트위터)를 시작으로 많은 독자가 성명을 공유해주기도 했다. 성명에 참여한 작가도 자신의 SNS에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414명의 성명은 넓고 빠르게 퍼졌다.
  많은 독자와 시민의 관심을 받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따랐다. 워낙 짧은 기간 성명을 모으기도 했고, 애초에 세상 모든 작가에게 연락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윤석열의 파면을 간절히 바라는데도 성명에 참여하지 못한 작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몇몇 작가는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일부 독자가 성명에 이름을 미처 올리지 못한 작가를 찾아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에는 별수 없이 씁쓸했다. 하지만 다수의 독자와 시민은 성명의 문장을 곱씹으며 위로받고 힘을 냈다는 반응이었다. 성명이 발표되고 하루이틀은 잦은 인터뷰 때문인지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헌재에서는 소식이 없었고, 언론에서는 심지어 5:3 대치설, 데드락설 같은 것이 떠돌았다. 짧은 뉴스 인터뷰를 본 고향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걱정할 부모님을 생각해 짐짓 쾌활하게 모든 일은 순리대로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게, 그러하지 않으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니, 하고 답했다. 어머니는 아들 걱정보다 나라 걱정이 우선이었던 걸까.
  4월 4일 선고 기일이 잡혔다. 기일이 잡히고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파면이 아니고서야 다른 결론은 있을 수 없으니까. 예상대로 윤석열은 파면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보편적 가치를 지켜냈다. 어머니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왔다. 왜인지 당신은 엉엉 울었다. 많이 걱정했다고 하면서. 나라 걱정치고는 울음소리가 꽤 사적으로 들렸다. 나는 담담했다. 성명을 함께 모은 친구들과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다. 성명에 참여한 작가들께도 인사 메일을 돌렸다. 수고했다는 답신이 왔다. 맞다. 우리는 참 수고했다. 별안간 닥친 미증유의 사태에 담대한 태도로 담담히 맞섰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명은 작가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분연한 일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내란 이후 봄이 오기까지 사실 많은 시민이 성명의 발표자였다. 여의도와 남태령에서, 광화문과 한강진에서, 인터넷과 거리에서…… 우리를 과거로 잡아끄는 구태에 맞서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의지가 있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는 연대와 포용이 있었다. 작가들의 성명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일부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일부가 맞다면 영광이겠다. 작가로서, 시민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믿는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다시 만날 세계의 초입에 섰다. 그 세계가 조금은 기대된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효인

시인. 시집 『여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거기에는 없다』와 다수의 산문집을 냈다.

2025/12/03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