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저편에서 댄스풍의 캐럴이 쿵쿵 흘러나왔다. 현장 분위기도 띄울 겸 촬영 콘셉트에 맞춰 누군가 틀어둔 음악일 터였다. 벌써 연말 화보 시즌이구나. 수안은 발밑에서 점점 크게 울리는 베이스음을 느끼며 주차장과 연결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둥글게 늘어선 스태프들 사이로 포즈를 취하는 멤버들이 보였다. 밝게 탈색한 머리에 루돌프 뿔 머리띠를 한 여자아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호가 짝사랑한 얼음공주 양미솔. 동네에서 제일 예뻤던 열한 살 꼬마. 거의 십오 년만이었다.
  와, 실장님 방금 에이컷 나온 것 같은데요? 카메라 옆에서 과장 섞인 말투로 감탄하던 여자가 수안을 보고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후배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수안은 미솔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발끝을 세우고 턱을 높이 쳐들었다. 성형으로 이목구비가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눈꺼풀에 반쯤 가려 매사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라든가 그에 따른 성숙한 분위기는 어릴 적 그대로였다.
  누나, 양미솔 만나면 초등학교 때 자기 쫓아다니던 새가슴 기억하냐고 물어봐봐. 뭐라고 하나. 지난 추석 연휴에 음악 방송에 출연한 미솔을 보며 빈정거리던 남동생이 떠올라 수안은 피식 웃었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일로 수호가 공포에 떨고 집 안에 구급대원이 들이닥치고 하여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긴 했으니까. 수안은 몰라도 수호라면, 이름까진 아니어도 얼굴이나 별명 정도는 기억할지 몰랐다.
  웬일이에요? 선배가 아이돌 그룹 인터뷰를 단번에 오케이하고. 이런 일 싫어서 잡지사 그만두신 거 아니었어요?
  쉬는 시간을 틈타 촬영장을 빠져나온 후배가 수선을 떨며 수안을 스튜디오 뒤편으로 안내했다.
  아이돌이 무슨 죄야. 정해진 질문에 정해진 답변만 하는 인터뷰가 지루할 뿐이지. 수안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프리랜서로 독립하고 처음으로 선뜻 응한 아이돌 인터뷰인 건 사실이었다.
  조금 이따 영상 촬영 끝낸 멤버부터 한 명씩 여기로 보낼게요. 촬영은 제가 알아서 할 거고 선배는 인터뷰만 도와주시면 돼요. 미솔씨부터 차례로 십오 분씩이요.
  후배가 수안을 메이크업룸으로 밀어넣으며 덧붙였다.
  아시죠? 인터뷰 때 매니저 동석할 거예요. 별로 빡빡한 소속사 아니니까 그냥 투명인간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
  출입문이 닫히자 시끄럽던 음악 소리가 돌연 먹먹해졌다. 창문도 없고 난방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이었지만 사방이 트인 스튜디오에서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이 유일하다는 걸 수안도 잘 알았다. 미용실에서 쓰는 회전의자와 화장대가 각각 두 개씩 놓인 공간 귀퉁이에 크리스마스 술 장식을 두른 고무나무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마저도 누가 작정하고 꾸민 게 아니라, 촬영용으로 쓰고 남은 소품을 그저 되는대로 친친 감아둔 모양새였다. 수안은 망설이다 그나마 아늑한 느낌이 드는 안쪽 자리를 택했다. 페달을 밟아 의자 높이를 조절해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안정감이 들지 않았다. 포기하고 그대로 화장대 앞에 앉아 질문지를 펼치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미솔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미솔이 아이돌답게 깍듯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촬영이 고됐는지 인조속눈썹을 길게 이어붙인 눈이 무겁고 피로해 보였다.
  반가워요.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잘해봐요.
  수안이 매니저에게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미솔이 자신을 기억할지, 기억한다면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미솔이 수안의 오른편에 앉았다. 화장대 거울 테두리를 따라 박힌 알전구 조명이 두 여자의 얼굴을 나란히 밝혔다.
  촬영 재미있었어요? 수안이 미솔 쪽으로 돌아앉으며 가볍게 운을 띄웠다. 호응하듯 옆으로 몸을 튼 미솔은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뒤편에서 접이식 의자를 펼치던 매니저가 황급히 수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기자님, 아시겠지만 우리 미솔이 왼쪽 귀가 잘 안 들려요. 죄송한데 조금만 더 큰 소리로 질문해주시겠어요?
  아. 예전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어려서 고열을 앓아 왼쪽 귀의 청력이 80퍼센트 이상 손실되었다고 했던가. 미솔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수안으로서는 다소 의아한 이야기였지만 미솔네 가족이 다른 동네로 이사한 후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불편하시면 저랑 자리 바꾸실래요?
  수안이 큰 소리로 말하자 미솔이 그 정도로 안 들리진 않아요, 하고 명랑하게 웃었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은 사람 특유의 체념과 너그러움이 밴 미소였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애였네. 티브이를 보며 기막혀하는 수호 옆에서 수안 역시 은은한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야말로 그 시절 미솔의 트레이드마크였으니까. 아무튼 잘됐네. 쟤네 집 팔자 폈겠네. 팔자? 수안이 되물었다. 기억 안 나? 양미솔 쟤 임대아파트 살았잖아. 중앙시장 건너편에 있는. 아, 갑자기 억울해지네. 내가 그때 문방구에서 쟤 줄넘기랑 피구공도 대신 사주고 그랬는데.
  먼저 앨범 얘기부터 할게요. 수안이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유닛이 아닌 완전체로는 거의 삼 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 앨범인데요.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어요. 그러느라 발매가 예정보다 좀 늦어지기도 했고요.
  타이틀곡이 꽤 다크하던데요. 기존에 발표한 노래들하고 색깔이 완전히 달라요.
  그렇죠? 저희도 그 점이 되게 마음에 들어요. 전부터 이런 장르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컴백 무대는 어땠어요?
  끝나고 저희 멤버 다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오랜만에 팬분들 만나니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우리가 이래서 음악을 하는구나 싶고……
  정해진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동안 수안은 연휴 내내 소파에 모로 누워 있던 남동생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과 동갑인 미솔이 장애까지 딛고 어엿한 가수로 성장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문득 속상함이 밀려든 거였다.
  대학을 졸업한 수호는 집에서 공부가 제일 잘 된다는 이유로 벌써 몇 년째 본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토록 자신 있어 하던 경찰 공무원 시험에 연달아 낙방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학원 수강을 핑계로 아빠에게 용돈이며 생활비까지 정기적으로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이게 다 녀석이 극성스러운 과보호 속에 자란 탓이라고 수안은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새가슴이라 불리는 흉곽 기형을 앓은 수호는 한동안 가슴에 알루미늄 띠로 된 교정기를 차고 생활했는데 그래서인지 부모님뿐 아니라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도 몸이 불편한 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티셔츠 밖으로 불룩 솟아오른 수호의 가슴뼈를 신기해하면서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 수안의 아빠가 ‘가슴을 건드리는 순간 수호는 죽는다’고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무사히 가슴 교정을 마친 수호는 그러나 고학년이 된 후에도 여전히 약골처럼 행동하며 부모님으로부터 원하는 걸 손쉽게 얻어내곤 했다. 사양 좋은 게임기나 최신식 디지털카메라 같은 것들. 몇 년 전 폐수종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두루도 당시 녀석이 그렇게 받아낸 선물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노래할 때 지장이 많을 텐데.
  수안이 손에 쥔 볼펜 자루로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 적응했어요. 무대에서 모니터할 때 멤버들이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요. 미솔이 수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는 거죠. 저기 저 트리처럼요.
  트리요?
  미솔이 구석에 삐죽 솟은 고무나무 화분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신기했는데…… 어려서 친구 집에 저거랑 똑같은 트리가 있었거든요. 밖에서 파는 조립식 트리 말고, 집에서 키우는 벤자민 화분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요.
  벤자민은 열대식물 아니에요?
  수안이 농담조로 묻자 미솔이 그러니까요, 하고 따라 웃었다.
  어릴 때 미솔씨는 어떤 아이였어요?
  어릴 때요, 음……
  생각에 잠긴 미솔이 불빛을 받아 한층 밝아진 금발을 천천히 쓸어넘겼다. 외출복을 고르는 사람처럼 머릿속에 몇몇 장면들을 펼쳐두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그때 매니저가 뒤에서 기자님, 하고 수안을 부르더니 한손을 활짝 펴며 양해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오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너무 길어질 만한 화제는 피하라는 뜻이었다.
  엄마 말이, 굉장히 흥이 넘치는 아이였대요.
  눈치 빠른 미솔이 얼른 정답을 내놓았다.
  명절날 친척들 앞에서 보란 듯이 원더걸스 노래 부르고. 하하.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한테 칭찬받는 게 좋아서 더 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원더걸스? 수안의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볼펜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소속사에서 정해준 모범답안이라기엔 그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인 탓이었다. 사이코패스였는지도 몰라. 카메라를 향해 엔딩포즈를 취하는 미솔을 보며 수호가 중얼거렸다. 유튜브에 나온 프로파일러가 그러는데, 사패들의 공통된 특징이 거짓말이랑 동물 학대래. 양미솔 우리 집 놀러왔을 때 기억하지? 자기는 개 싫어한다면서 가엾은 우리 두루를 베란다에 가둬놨었잖아. 그래놓고 두루가 제 발로 나간 거라고 막 우기고.
  회복기에 접어든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그날의 기억이 수안의 머릿속에 띄엄띄엄 떠올랐다. 참다못한 수호가 한번 만져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며 대형견인 두루를 미솔의 품에 억지로 안겼던 것. 미솔의 완강한 저항에 거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수호가 티셔츠를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였던 것,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수안이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던 일까지. 그때는 정말 수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누나인 자신이 하나뿐인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평화롭던 집안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난 거라고.
  수안은 답변하는 미솔의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서늘한 삼백안. 아이돌이 된 미솔을 한눈에 알아본 이유도 저 삼백안 때문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듯 맥없이 허공을 향한 눈. 그럼에도 끝끝내 세상을 올려다보는 듯한 집요한 결기 또한 느껴지는. 티브이에서 그 눈동자를 다시 본 순간 수안은 생각했다. 반드시 미솔을 만나야 한다고. 만나서 저 아이에게 뭔가를 일깨워줘야 한다고. 미솔이 혹 과거 사건을 떠올리며 미안해하면 그때는 성숙한 어른답게 선선히 넘어가줄 생각이었다. 다 지난 일인데 뭘 그래요, 하고 부드럽게 표정을 풀면서. 수호요? 그 녀석 이제 가진 건 건강뿐이에요,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인터뷰를 마친 수안이 미솔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찰나, 매니저가 급히 핸드폰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미솔은 한동안 제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안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정쩡한 높이의 의자가 둘 사이에 내려앉은 적막감을 가중시키는 듯했다. 바깥에서 흥겨운 캐럴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시간 참 빠르죠. 수안이 침묵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을 때 미솔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전 제가 맞은 줄도 몰랐어요.
  ……?
  실은 아파서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미솔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왼쪽 귀를 감싸며 말했다.
  어려서 친구네 아빠가 제 뺨을 때렸거든요. 턱이 돌아갈 정도로 아주 세게요.
  거울을 바라보는 미솔의 인조속눈썹이 차분하게 깜빡였다. 평소에는 인사도 잘 받아주시는 분이었어요. 미솔이 스스로의 말에 확신을 더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의는 아니었을 거예요. 자기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으니까요. 갈 곳 잃은 수안의 시선이 메이크업 도구들 사이를 맴돌다 벽면 구석으로 힘없이 미끄러졌다. 이윽고 해가 기울 듯, 그녀의 가슴 위로 검고 긴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 해인가 수안의 집 거실 한편을 지키고 있던 벤자민 트리. 집에 트리가 없다며 칭얼대는 수호를 달래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전선을 두르고 장식을 달았던. 태평하게 겨울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목덜미를 잡힌 두더지처럼, 그 장면이 땅속 깊은 곳에서 지상으로 버둥버둥 끌려나왔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메이크업룸에 냉기가 감돌았다. 수안은 아까부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면 방금 일어난 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날 밤에도 수안은 지금처럼 홀로 집에 남아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에서 전화가 오길 기다리면서. 수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당장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막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생의 우선순위가 그렇듯, 시간이 필요한 일은 늘 가장 뒤로 미뤄진다. 언제나 눈앞에 닥친 감정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조바심.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나 가당찮은 행운을 누리고 있는지 하루빨리 깨우쳐주고 싶은 마음.
  잠시 후 매니저가 열린 문틈으로 몸을 들이밀며 참, 기자님 아까 그 이야기 말인데요, 하고 운을 뗐다. 청각장애 말씀이시죠? 안 쓸 테니 걱정 마세요. 수안이 대꾸하자 매니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거 말고 트리 이야기요, 하고 정정했다. 트리? 그 이야기를 굳이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으려던 수안은 이내 마음을 바꿔 알겠다고 대답했다. 언뜻 흐릿하고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자산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저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 이야기는 언제 새로운 은유를 덮어쓰고 돌아와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모른다. 요령껏 잘 치웠다고 생각했지만 카펫 속에 숨어 있다가 기어이 연한 살갗을 찌르고야 마는 유리 파편처럼.
  새로운 멤버가 매니저와 함께 메이크업룸으로 들어왔다.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시간 참 빠르죠. 수안이 겨우 입을 뗐다. 저물녘 햇빛을 닮은 오렌지색 불빛 속에 몸을 깊숙이 담근 채로. 그러게요. 벌써 크리스마스네요. 새로운 멤버가 활달하게 대답했다. 아직 따뜻한 시월 오후였다.

강보라

책장 맨 아래 칸에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 한 묶음이 잠자듯 누워 있습니다.
웃음이 헤픕니다.

2024/02/07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