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 아트로 그린 장면. 집과 분수, 꽃밭과 과일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두 인물이 나무를 돌본다. 아이는 흰 삽을 들고 서 있고, 남자는 물뿌리개로 사과나무에 물을 준다.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꽃과 나무 위는 하트와 빛으로 반짝인다.

며칠째 황금나무 씨앗은 그대로다. 물뿌리개로 물을 줘도 잎은 자라지 않는다. 이제는 풀밭에서 반짝이는 씨앗이 얄밉기까지 했다. 화가 나 자두나무 사이로 씨앗을 던져버렸다. 앗, 이게 얼마짜리인데! 다시 주워 아이템 상자에 넣었다.
  퉁퉁 퉁퉁.
  소리에 놀라 게임기에서 눈을 뗐다. 세탁기 안에서 누군가의 빨래가 비명을 질렀다. 탈수 중인가보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의자에 기대어 소리 나게 기지개를 켰다. 이곳은 5평 남짓한 무인 빨래방이라 주인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부모님 눈치도. 정석수학학원 이름이 새겨진 천 가방을 탁자 위에 툭 내려놓았다.
  ‘으으. 게임 시간이 이렇게 적은 게 말이 돼?’
  사실 나도 탈수 상태다. 조금 전 학원에서 시험을 보고 에너지가 쫙 빠졌다. 오늘 같은 금요일은 예비 중1 선행 특강으로 밤 10시에 수업이 끝난다. 학원에서 몇 걸음 걸으면 부모님이 운영하는 치킨집이 있다. 학원에서 집까지 거리가 먼 탓에 나는 치킨집 옆 무인 빨래방에서 부모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간다. 입이 거친 형들이 타는 학원버스와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치킨집은…… 잠시도 있기 싫다.
  내가 하는 ‘해피 빌리지’는 몇 년 전 유행했다가 이제는 한물간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텅 빈 섬에서 자신만의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 이 게임의 전부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주민들과 생활하며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고, 도구와 집을 만들며 자급자족한다. 나는 몇 년째 이 게임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해피 빌리지’ 속 내 마을을 운영한다.
  버튼을 눌러 자두나무의 자두를 수확할 때다. 빨래통을 든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나를 가출 소년 보듯 위아래로 훑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 또 들어왔다. 검은 반팔 티를 입은 형이다. 눈썹 위를 덮은 앞머리 때문에 눈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어? 등판에 서울대 로고가 새겨져 있다! 덕분에 깡마른 형의 등이 듬직해 보인다. 내가 정석수학학원을 다니는 이유도 저 로고 때문이다. 아니, 로고에 집착하는 부모님 때문이다. 우리 학원에서 명문대 합격생들이 줄줄이 나왔으니까. 원래는 중고등 전문 학원인데 올해부터 예비 중1 반이 생겨서 나도 떠밀리듯 입학했다.
  ‘입학 테스트에 통과하지 말아야 했어.’
  1점 차이로 간신히 학원에 입학한 나는 밤낮없이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 저 형도 갑갑한 학창 시절을 보냈을까? 더 했겠지? 형이 불쌍해졌다.
  형은 세탁기에 누런 이불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이 빙빙 돈다. 형이 뒤를 도는데 아뿔싸, 눈이 마주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곤충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해피 빌리지’는 계절마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데 지금은 현실과 같은 여름이다. 게임기에서 폭죽 소리와 함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푸른사슴벌레를 잡으세요! 푸른사슴벌레를 잡으면 마을에서 별똥별을 볼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이템 상자에서 잠자리채를 꺼냈다. 그때 게임 화면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드니 형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요즘도 곤충 이벤트 하네!”
  “네?”
  당황해서 게임기를 탁자 위에 엎었다. 형은 게임기 쪽으로 턱짓했다.
  “푸른사슴벌레 어디서 나오는지 가르쳐줄까?”
  아무리 형이라도 처음 보자마자 반말하는 게 좀 별로였지만 일단 게임기를 건넸다. 형은 방향키를 눌러 야자수가 있는 해변가로 갔다. 그리고 야자수에 잠자리채를 휘둘렀다.
  띠링!
  푸른사슴벌레가 잡혔다.
  “어떻게 알았어요? 형이 이 게임을 했을 리는 없고……”
  “나는 하면 안 돼? 왜?”
  “공부만 했을 것 같아서요.”
  나는 형의 옷을 가리켰다.
  “하여튼 이 티셔츠만 입으면 편해.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다르잖아? 이러니 땀에 절어도 티셔츠를 빨 수가 없어요. 근데 말이야, 내가 이 게임 출시일부터 하던 선배거든. 낚시해봐도 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아이템 상자에서 낚싯대를 꺼냈다. 게임을 조작하는 손이 노련했다. 형이 캐릭터를 움직여 연못에 낚싯대를 던지니 메기가 튀어올랐다. 한 번 더 던지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낚싯대가 사라졌다. 값싼 낚싯대라 금방 수명이 다한 거다. 게임 골드가 없는 걸 들킨 것 같아 귀가 달아올랐다. 그때 빨래방 문을 열리더니 엄마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유찬. 마감 거의 다 했으니까 슬슬 가자. 치킨집에서 기다리라니까 말을 진짜 안 들어.”
  “잠깐만요.”
  “게임 좀 그만하고. 학원에서 점수 떨어졌다는 연락 또 받았다. 긴말 안 할게.”
  엄마는 바쁜지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형도 있는데 사람 창피하게…… 맨날 이런 식이다. 엄마나 아빠나 똑같다. 공부 안 하면 몸이 고생이라며 좋은 대학에 가라고 난리다. 두 사람 모두 시험 점수에는 예민하면서 내가 숙제를 해치우느라 친구들과 멀어진 건 관심 없다.
  형은 나를 슬쩍 보며 눈치를 살폈다. 퉁퉁. 세탁기 도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너 바로 옆 크런치 치킨집 아들 맞지?”
  “어? 저 알아요?”
  “가게에 갔을 때 본 적 있어. 치킨집에서 맨 구석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남자애, 치킨에 제일 관심 없는 남자애, 누가 봐도 치킨집 아들이잖아.”
  추리력이 엄청나다. 역시 좋은 대학은 아무나 가는 게 아니다.
  “‘해피 빌리지’ 자주 하면 다음에 아이템 넘겨줄까? 난 이제 게임 안 하니까 필요 없거든. 혹시나 하는데 아이템을 빌미로 코 묻은 용돈 뺏을 생각은 없어. 무료 나눔이랄까. 내가 오늘 기분이 좋거든. 유찬이랬나? 너 완전 운 좋은 날이다.”
  분명 세탁기에 빨래를 넣을 땐 고민이 많아 보였는데. 뭐, 어쨌거나.
  “진짜요? 진짜 아이템 줄 거예요?”
  아차 싶어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 처음 본 형인 걸 잊고 있었다.
  “아, 아녜요. 아이템이 궁하긴 해도 덥석 받는 건 좀……”
  말끝을 흐리는데 형이 소리 내어 웃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왜 웃어요?”
  “미안. 하루 종일 재밌는 일이 생겨서 말이야.”
  “또 뭐가 재밌는데요?”
  “오늘부터 학교 기말고사 기간인데 자느라 시험을 못 봤거든. 푸하하. 시계 보고 망했다 싶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웃음이 나와. 시험 빠지는 거 꽤 재밌더라? 왜 안 하고 살았나 싶어.”
  “네? 서울대까지 가서 시험을 안 보면 어떡해요?”
  “다들 열심히 하면 교수님들이 점수 주기 얼마나 힘드시겠냐? 아무튼 아이템 안 받는다는 거지? 중학생 때부터 모은 육 년치의 아이템인데. 아깝다. 어쩔 수 없지.”
  “어…… 받, 받을래요!”
  우리는 다음주에 빨래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 보는 형과 약속을 잡다니. 사기꾼이나 미친 사람일까봐 걱정됐지만 왠지 믿어보고 싶었다. 형 말대로 ‘해피 빌리지’의 선배여서일까?
  일주일 뒤, 빨래방에 들어서자마자 비에 젖은 옷을 닦았다. 밖은 비바람이 몰아쳤다. 탁자에 앉아 게임기를 꺼냈다. 나와 마주 앉은 아저씨는 핸드폰을 보고, 그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창밖을 보며 ‘어머, 저 아가씨 우산 다 뒤집어졌네’와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서 빨래 말고 사람을 기다리는 건 나뿐일 거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 확인했지만 형이 아니었다. 모르는 형을 무턱대고 믿은 내가 잘못이다. 완전히 낚인 거다.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손님 없어서 마감 빨리할 거니까 치킨집으로 와.’
  게임을 종료하고 학원 가방을 챙기려는 순간 빨래방 문이 열렸다. 형이다! 형은 우산을 썼는데도 비를 흠뻑 맞았는지 양손으로 머리를 말리며 들어왔다. 역시나 등에 서울대 로고가 새겨진 반팔티를 입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안 오는 줄 알았다고요.”
  나도 모르게 투정이 나왔다. 형은 주머니에서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미안. 생각해보니 게임기가 자취방에 없더라고. 이거 가지러 본가까지 갔잖아. 너는 대체 무슨 복이냐. 감사의 절은 노노, 사양한다.”
  형은 뿌듯한지 입꼬리를 올리며 그동안 밀린 게임 업데이트를 했다.
  “게임기 하나 가지러 본가에 간 거예요?”
  “그건 아니고 겸사겸사. 버스 타면 금방인데 자취 시작하고 한 번도 집에 안 갔거든. 부모님이 얼굴 좀 비추라길래 갔다가 대판 싸웠네. 시험 안 본 거 말했다가 집이 뒤집어졌지 뭐야. 취업 안 할 거냐고, 여태 말 잘 듣다가 왜 말썽이냐며. 참 웃겨. 좋은 대학만 가면 어떻게 살든 신경 안 쓰겠다더니? 어어, 접속 완료! 아이디 교환하자.”
  머릿속에 여러 질문들이 맴돌았지만 일단 게임을 실행했다. 형의 아이디를 검색해 친구 신청을 눌렀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친구 목록에서 친구의 아이디 옆에 초록 불이 켜지면 친구가 접속중이라는 뜻이고 ‘마을 가기’ 버튼이 활성화되면서 친구의 마을에 입장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허락해야 한다. 나는 형 아이디 옆 ‘마을 가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하얀빛을 뿜어내다가 이내 형의 마을로 접속하는 데 성공했다.
  “우와……”
  마을을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마을은 온통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과일나무마다 사과며 복숭아며 열매가 주렁주렁 맺혔고 흰색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있었다. 광장 중앙에 자리한 대리석 분수는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었다. 마을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가꾼 티가 났다. 형의 캐릭터는 빨간 폭탄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갈색 멜빵 바지를 입었는데 꼭, 지옥에서 온 농부 같았다. 마을을 구경하는 사이 형은 분수 옆에 서서 아이템을 휙휙 던졌다. 꽃무늬 삽, 은도끼, 조개껍데기로 만든 물뿌리개, 대나무 낚싯대, 상점에 팔면 값이 나가는 공룡 화석, 요정의 지팡이, 해적의 보물 상자…… 여기는 천국인가?
  “뭐해! 얼른 주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이템을 줍는데 불쑥, 엄마가 빨래방 문을 열었다.
  “강유찬. 빨리 나오라니까. 옆엔 누……구?”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머리가 쭈뼛 섰다. 엄마의 시선이 형의 등에 꽂혔다.
  “어머. 유찬아. 아는 형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나는 부리나케 게임을 종료한 뒤 엄마의 등을 문 쪽으로 밀었다. 형은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슬며시 눈인사를 건넸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엄마와 아빠는 서울대 형과 어떻게 아냐며 번갈아 질문을 해댔다. 내 마음은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으면서. 입을 꾹 닫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방에 들어와 게임을 실행하니 형은 오프라인 상태다. 급하게 나가느라 형에게 감사 인사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마을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썼다. ‘해피 빌리지’에서는 친구끼리 엽서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형이 다시 접속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음, 아이템 감사해요. 다음에 또 형 마을 놀러 가도 돼요? ―유찬

엽서를 보낸 후 형이 준 아이템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다.
  “강유찬. 게임 하는 거 아니지? 자는 시간이다.”
  문밖에서 아빠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네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한 번 더 하면 방으로 쳐들어갈 거라는 경고다. 우리 집의 규칙 중 하나는 ‘방문 잠그지 않기’다. 아빠가 정한 규칙이다. 그러니까 게임 하는 걸 들키면 속수무책으로 게임기를 압수당할 거다. 서둘러 게임을 종료하고 이불에 들어갔다. 슬쩍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음 날 저녁, 학원 숙제를 끝내자마자 침대에 누워 게임기를 켰다.
  ‘답장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런데 엽서 한 장이 도착해 있다! 처음 받아보는 엽서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랜만에 접속했더니 마을 주민들이 반겨주네. 아이템 좋은 거 많이 넘겼어. 낚싯대는 고등학생 때 내가 직접 만든 거야. 튼튼하게 만들려고 대나무 오십 개 수집하느라 죽을 뻔. ㅜㅜ 그거면 물고기 백 마리도 거뜬해. 낚시 실력까지 넘겨주긴 어려우니까 잘 잡아봐.
기운 내라. ―빨래방 형

엽서를 읽음 즉시 친구 목록을 켰다. 어? 형의 아이디 옆에 초록 불이 켜져 있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잽싸게 ‘마을 가기’ 버튼을 눌렀다.
  내 캐릭터는 형의 마을로 떨어졌다.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 길 위에 줄지은 가로등이 불을 밝혔다. 방향키를 눌러 형을 찾아다녔다. 폭포수 앞 벽돌 다리를 건너 노란 지붕의 집을 지나 바닷가로 가니 빨간 머리통 하나가 삐죽 솟아 있다. 형은 큰 바위에 걸터앉아 낚시중이다. 채팅 모드에서 말하기 모드로 전환했다. 게임에 접속한 유저들끼리 통화하듯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모드다.
  “형!”
  “잠깐 조용. 집중해야 해.”
  형이 낚싯대를 힘껏 들어올리니 은빛 농어가 튀어올랐다. 나도 형 옆에 걸터앉아 형이 준 낚싯대를 던졌다. 여러 번이나 허탕을 치다가 마침내 송어를 낚았다. 내가 배를 잡고 웃는 동작을 하자 형도 따라 웃었다.
  해변가 야자수 기둥에는 형 말대로 푸른사슴벌레가 붙어 있었다. 캐릭터의 걷기 속도를 줄인 뒤 잠자리채를 이용해 낚아챘다. 나도 형에게 푸른사슴벌레를 건넸다.
  강 하구로 가니 노란 텐트 하나가 있었다. 텐트 앞에 깔린 돗자리, 그 옆 바비큐 그릴, 드럼통 위에 올라간 낡은 라디오 때문에 이곳은 꼭 캠핑장 같다. 형이 라디오를 틀자 빠른 박자의 음악이 흘러나와 우리는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형은 아까 잡은 농어를 그릴에 구워서 농어 허브 구이를 만들었다. 맛있게 먹는 캐릭터들을 보자 나까지 군침이 돌았다.
  날이 어두워져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실제로 나는 수영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게임 속 수영은 좋다. 캐릭터가 헤엄칠 때마다 생기는 잔물결을 보는 것도, 출렁이는 물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솔직히 바다를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부모님은 가게를 닫을 수 없다며 매번 미루니까.
  형은 바다 깊숙이 잠수했다. 밤에만 나오는 해양 생물을 잡으려는 거다. 그런데 형 주위로 무언가 다가왔다. 돌고래다! 형은 돌고래 위로 날쌔게 올라탔다. 물살을 가르는 형의 뒷모습을 좇는데 내 옆으로도 돌고래가 지나갔다. 타이밍을 보다가 나도 돌고래 위로 올라탔다. 돌고래는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다 바닷속으로 풍덩! 보고만 있어도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어부의 그물처럼 아이템 상자가 물고기로 가득찬 우리는 바다를 보며 모래밭에 앉았다.
  “돌고래 타기는 쉬운 기술이 아닌데. 역시 너도 이 게임 오래 했구나. 인정.”
  “당연하죠. 형은 진짜 ‘해피 빌리지’ 선배가 맞네요. 마을 보고 솔직히 놀랐어요.”
  “그치? 하하하. 우리 마을에 온 걸 정식으로 환영한다.”
  형은 양손을 들며 환호하는 동작을 했고 나도 형을 따라 했다. 형과 게임을 즐기다보니 문득 형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형은 이 게임의 선배다. 그렇다면 혼자 끙끙거리던 일도 비웃지 않고 도와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형. 다음에는 제 마을도 놀러 와요. 형처럼 잘 꾸며놓진 않았지만 제가 직접 만든 나무 그네도 있고 벽돌 우물도 있어요! 그……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부탁이 뭔데?”
  “황금나무 씨앗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당연하지.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같이 심어줄 수 있어요?”
  얼마 전 마을을 떠도는 방랑 상인을 만났다. 방랑 상인은 정해진 날짜 없이 불쑥 나타나는 NPC인데 보라색 보따리를 메고 다니며 상점에 없는 희귀한 물건을 팔았다. 그날 판매하던 아이템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황금나무 씨앗이었다. 나무가 자라면 값비싼 황금열매가 열린다는 말에 어렵게 모은 골드를 몽땅 내고 샀다. 그런데 씨앗 정보를 꼼꼼히 안 읽은 게 문제였다. 알고 보니 황금나무 씨앗은 두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물을 주어야 자란다는 조건이 있었다. 조건을 무시한 채 혼자 물을 줬더니 씨앗은 입을 꾹 다문 조개처럼 꿈적도 안 했다.
  형이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짜식, 너 친구 없구나?”
  “예? 있, 있어요! 단지 ‘해피 빌리지’를 하는 친구가 없을 뿐이고요. 이거 요즘 애들 잘 안 하잖아요. 유치하다고. 형도 잘 알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미안. 근데 나도 친구 없어. 그러니까 여기 있지. 기말고사 끝났다고 동기들끼리 오늘 술 한잔 한다던데 나한텐 아무도 안 묻더라? 그럴 수밖에. 애들이랑 좀 어색하거든. 중고등학생 때 부모님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친구는 대학 가서 사귀라는 거였다? 근데 막상 대학 가니까 사람들이랑 친해지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스무 살 먹고 이런 고민하는 거 진짜 쪽팔린다고. 너 정석수학학원 다니지?”
  “네. 맞는데 설마 형도……”
  “맞아. 빨래방에서 학원 가방 보고 놀랐어. 나도 거기 다녔거든. 내 이름 알 걸? 정석수학학원 졸업생 최민형.”
  최민형? 우리 학원이 배출한 최고의 인재라던 최민형? 수능에서 전 과목 1등급을 받았다던 형? 형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학원 입구 위에 걸려 있어서 수강생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형 얘기 지겹게 했어요. 꼭 상상의 동물을 만난 거 같아요. 아, 죄송해요. 사람한테.”
  “그래서 실제로 만나보니까 어때?”
  “그냥…… 잘 모르겠어요.”
  예전 같으면 부럽다고 했을 텐데.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마을은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형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형을 뒤쫓았다. 형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넓은 텃밭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 불쌍하게 보진 마. 그래도 마을에 오면 되게 뿌듯하다? 나도 중고등학생 때 답답하면 여기서 곤충 잡고 수영하고 그랬어. 그때 친구들 사이에서 총 쏘는 게임이 유행이었거든? 내 뒷자리에 앉은 애도, 앞자리에 앉은 애도 우다다다 총질만 하는 거야. 그래서 친구 따라 해봤는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 결국 ‘해피 빌리지’로 다시 왔어. 학원에서 들들 볶으면 감자랑 당근 심고, 집에서 들들 볶으면 튤립이랑 팬지 심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멋진 마을이 됐잖아? 너도 비슷할 거 같은데. 그치?”
  “맞아요. 저도 답답할 때마다 ‘해피 빌리지’에 와요. 사실 게임을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쉬고 싶어서랄까.”
  맞다. 나는 쉴 곳이 필요하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가고 싶은 집이 어딘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일단 지금은 ‘해피 빌리지’의 내 마을이 그 집이다.
  “쉬는 거 중요하지. 공부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다들 참견하는데 쉬는 방법은 아무도 안 알려주잖아. 그래 놓고 자기 방식대로 쉬면 어른들이 그건 또 마음에 안 든다고 뭐라 하고. 진짜 웃기지 않냐?”
  형의 말에 꽉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아. 황금나무 씨앗 심는 거야 일도 아니지. 시험도 끝났겠다, 놀 사람도 없고, 넘치는 게 시간이다. 지금 당장 심자고!”
  좋다고 대답하려는 그때,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재빨리 게임기를 이불 속에 넣었다. 하마터면 게임 하는 걸 들켰을 거다. 침대 위에서 얼어붙은 나를 보고 엄마가 팔짱을 꼈다.
  “이 늦은 시간까지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대화 소리가 들리던데?”
  “아, 아니에요.”
  “맞잖아. 말소리 들린 거. 숙제는 다 했고?”
  나는 보란 듯이 책상을 가리켰다. 수학 공식이 어지럽게 적힌 문제집을 보고도 엄마는 탐탁지 않은지 방을 두리번댔다. 핸드폰을 찾는 거다. 핸드폰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걸 확인한 후에야 엄마는 팔짱을 풀었다.
  “근데 엄마. 들어올 때 노크 좀 하면 안 돼요?”
  “엄마가 아들 방 들어가는데 뭔 놈의 노크?”
  용기 내서 말했건만 내 말은 저 멀리 튕겨져나갔다. 엄마는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의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노크를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나도 규칙을 어기는 수밖에. 툭. 방문을 잠갔다. 뒷감당은 나중 일이다.
  “형. 다 들었죠? 시간 없어요. 지금 제 마을로 접속해줘요.”
  “좋아.”
  형의 마을에서 빠져나와 내 마을로 접속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알림 메시지가 왔다.

친구의 마을 방문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수락/ 거절

수락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 형의 캐릭터가 마을 광장으로 떨어졌다. 형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씨앗을 찾는 것 같았다.
  “형, 이쪽이에요!”
  나는 앞장서서 풀밭을 걸었다. 자두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에 황금나무 씨앗을 심을 예정이었다. 그때 거칠게 문고리 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외쳤다.
  “강유찬!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은 절대 잠그지 말랬잖아. 엄마 아빠는 너를 바르게 키울 의무가 있어. 여보, 나와봐. 유찬이 얘가 문을 잠갔다니까?”
  풀밭의 공간을 확보한 후 나는 아이템 상자에서 황금나무 씨앗을 꺼내 떨어뜨렸다. 형은 씨앗 앞으로 다가가 정보를 확인했다.

황금나무 씨앗: 황금열매가 열리는 황금나무 씨앗이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두 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물을 줘야 한다. 나무의 크기를 보고 놀라지 말 것!
※주의할 점: 물을 주면 나무가 실시간으로 자라난다. 가지에 열매가 맺힐 때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 물을 줄 것.

“심어볼까?”
  형은 삽으로 흙을 파냈다. 나는 그 안에 씨앗을 넣고 흙을 덮었다. 이젠 물을 줄 차례. 각자 물뿌리개를 꺼냈다.
  내가 한 번, 형이 한 번 조르르.
  씨앗에서 초록색 이파리가 돋아났다. 또 물을 뿌렸다. 내가 한 번, 형이 한 번 조르르. 뿌리를 내린 나무는 하늘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빠르게 위로 솟아올랐다. 황금빛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멈추지 않고 조르르, 조르르. 나무 몸통이 점점 굵어져서 우리는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당장 문 열어. 엄마 아빠 걱정시키지 말고.”
  아빠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가슴에 불덩이 같은 게 번졌다. 게임 속 씨앗 하나 심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니. 형은 잠시 물뿌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내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고르고 문밖의 부모님을 향해 말했다.
  “저 좀 잠깐 쉴게요. 네? 제 방식으로 잠깐만 쉰다고요. 그게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밖은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조르르. 조르르.
  마침내 가지마다 황금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꼭 크리스마스 나무에 달린 금색 구슬 같았다. 빛나는 열매 덕분에 조명을 켠 듯 주위가 환해졌다. 잎이 무성한 황금나무는 화면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우람했다. 형은 아이템 상자에서 사다리를 꺼내 나무에 세웠다.
  “올라가보자.”
  형과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걸터앉았다. 화면을 줌아웃했더니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내가 만든 나무 그네, 벽돌 우물, 작은 정원이 있는 빨간 지붕의 우리 집까지도. 별똥별이 떨어졌다. 맞다, 푸른사슴벌레! 잊고 있었는데 형이 잡아준 덕분이다. 형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래서 마을 구경은 언제 시켜줄 거야?”
  “형이 다음에 접속하는 그때요. 우리 또 만나는 거죠?”
  형이 작게 웃었다. 마을에서 부는 바람이 열린 창문을 타고 내 방까지 흘러들어왔다. 휴식 시간이다. 나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이했다.

민지인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로 2024년 KB창작동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25년 서울신문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여름의 씨앗」은 5학년 남자 어린이와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을 하다가 영감을 얻어 쓴 이야기입니다. 저의 지저분한 섬을 깨끗이 청소하고 떠난 김○원 어린이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25/10/01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