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는 기후 악당이 되지 않을 거야
진형민의 『왜왜왜 동아리』
정은숙의 『그래도 사랑을』
배미주의 『너의 초록에 닿으면』
정은숙의 『그래도 사랑을』
배미주의 『너의 초록에 닿으면』
해마다 최고치를 갱신하는 지구의 온도를 견디며 뜨거운 지구가 보내는 이 서늘한 경고를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은 어떻게 체감할까. 기후 위기가 모두의 문제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선택과 무관하게 기후 세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물려준 기후 악당이라는 억울한 오명은 끊을 수 없는 대물림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 누구보다 안전한 기후를 누릴 권리를 지닌 존재들을 ‘기후 ○○’이란 수식어로 호명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일까, 혹은 기후 문제의 해결책과 부담을 슬그머니 떠넘기려는 전략일까. 후자는 너무 비약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이 글의 첫 문단에서부터 ‘기후 세대’ ‘기후 악당’이란 표현을 그 어떠한 인용이나 강조 없이 사용한 어느 필자부터 의심해보아도 좋다. 기후 위기는 근본적으로 인류를 취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지독한 생존본능을 일깨우며 펄펄 끓는 지구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지상 최대의 과제를 던졌다. 근래 출간된 세 편의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통해 이 과제를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수행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진형민의 동화 『왜왜왜 동아리』(창비, 2024)는 기후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전면으로 다루되 이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가는 어린이들의 당당함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언뜻 보면 세상을 망가뜨리는 어른들과 이를 막으려는 아이들의 대결 구도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하나가 언급한 바 있는 “기성의 질서가 짜놓은 구획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지 않고, 새로운 구획을 추가하고 싶다며 되묻는 어린이들”의 등장1)에 초점을 두고 싶다. 현재가 중요한 어른들과 자신들이 살아갈 앞날이 중요한 어린이들의 이해관계의 다름 속에서 아이들은 “그래 봤자 모두 아이들”(153쪽)이라는 어른들의 멸시에도 기죽지 않고 기득권을 쥔 대상을 향해 자신들의 기후 권리를 떳떳하게 요구한다.
눈치 보지 않고 놀기 위한 명분을 위해 즉흥적으로 결성한 왜왜왜 동아리는 궁금한 것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간소하면서도 결연한 목표를 가지고 출범한다. 저마다 관심 있는 의제를 선정하고 계획과 조사를 통해 문제의식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이들이 마주한 문제는 기후 위기가 저 멀리가 아닌 ‘나’와 ‘우리’의 문제로 자신들 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교과서적 상식으로 접했던 기후 위기가 나의 경험으로 현실화될 때 위기는 곧 현실이 되어 나와 우리 곁에 항상 도사리는 변수가 된다. 내가 살던 세상이 한순간에 변해버리는 경험을 치렀음에도 “어른들은 우리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살기를 바라는 것”(43쪽)처럼 미온적일 뿐이다. 아이들은 이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말할 권리”(149-150쪽)는 자기들 스스로 움켜쥘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기후 위기를 곧장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로 받아들인 아이들은 지속적인 개발과 발전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이전 세대들의 견고한 믿음을 조금씩 허물어보기로 한다. 그것은 기후 위기를 중단시킬 지속력 있는 계획과 합법적 권리, 그리고 책임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쉽게 열리지 않을 골문을 향한 경기를 시작한 셈이다. 골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그 어떤 기후 악당보다 센 어른들의 무관심과 기후 위기에 대한 근시안적 태도가 아닐지. 종횡무진하며 드리블하다 언젠가 짜릿한 골맛을 경험할 아이들의 전반전 시작을 응원한다.
이처럼 기후 위기를 현재 진행중인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현세대 어린이들의 변화와 움직임을 따라가는 작품과 달리, 이미 회복 불가능한 지구로 넘어온 미래 세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들도 있다. ‘기후 위기는 ‘왜’ 일어날까’라는 질문은 이제 이전 세계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불과할 뿐, 이 세대들은 이미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정은숙의 청소년소설 『그래도 사랑을』(창비, 2024)은 기후 재앙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팍팍하게 말라가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떠한 형태로든 각인되어 퇴색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42년의 대한민국은 기후 재앙에 대응하기 위한 전 지구적 환경 보호 켐페인인 ‘지구 회복 운동’에 한창이다.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정부는 사랑의 감정을 고통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안티 러브 칩’이라는 극단적 정책을 내놓는데, 이는 기후 재앙으로 사막화된 국토와 급격히 줄어든 인구, 이에 따른 저출생 문제 등으로 인적·물적 자원 급감에 대한 대응책이다. 출생을 하면 동시에 생활 환경 부담금이 부과되기에 출산을 막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안티 러브 칩을 이식하면 생활 환경 부담금이 감면될 뿐만 아니라 입시, 취업, 대출 등 사회 진출시 거쳐야 하는 단계마다 혜택이 주어진다. 안티 러브 칩 이식 문제는 청소년들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닌 성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절차에 가까워 보인다.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 기후 재앙과 함께 무너져 버린 인간의 감정보다 물적 토대의 재구축이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이 시점에서 청소년들의 삶은 더욱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을 택한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 노동은 유해하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제 사랑은 물질적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고유 자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석하지만 당연하게도 안티 러브 칩 이식자는 사랑이라는 고유 자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혹은 소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적 약자라는 낙인이 뒤따른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 타령을 하며 안티 러브 칩을 반대하는 ‘준서’는 정부의 지원을 무시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님에도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또 어디 있냐고 말했다. 아니, 주장했다.”(19쪽) 사랑이 언제부터 효과적인 결실의 유무에 따른 성과주의의 영역이 되어버린 걸까.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빠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노동에 자신을 선뜻 맡길 수 없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2042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망해버린 지구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하고 되살려야 할 것은 어쩌면 불모로 변해가는 인간의 마음 한편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는 사랑 한 줌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지나친 낙관적 상상이라고, 때가 어느 때인데 사랑 타령이냐고 힐난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지구가 망하기 전이나 후나 낭만에 기대어 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들 아니던가.
배미주의 청소년소설 『너의 초록에 닿으면』(창비, 2024)은 기후 재앙으로 황폐화된 세계를 견디는 세대 간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단절된 두 세계에서 닿을 수 없었던 ‘이경’과 ‘라르스’의 연결을 그린다. 구세계 몰락 후 이전 세대가 ‘개척’이라는 키워드로 무너진 세계를 복구하려 했다면, 다음 2세대들은 단절된 세계의 이음새를 ‘연결’이라는 끈으로 잇고자 한다.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경험한 개척인들은 “존재는 찰나일 뿐, 변화가 세계의 본질”(165쪽)이라는 신념하에 구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지상 개척에 몰두한다.
개척인들은 오랜 지하생활로 변화를 꺼리는 보수적인 시타델인들을 지상으로 영구 이주시키는 것을 중대한 사명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마존 열대를 품은 지하와 빙하기로 얼어붙은 지상의 두 이질적인 세계가 모종 이식하듯 손쉽게 결합될 수 있을까. 분리되고 단절된 세계에서 개척인들이 선택한 삶을 이어받은 개척 2세대 ‘라르스’는 이전 세대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냉혹한 지상에서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는 비극을 초래하기 십상”(98쪽)임을 뼈아프게 경험한 바 있기에 소중한 것을 품는 것을 경계한다.
한편 지하 도시의 디자이너이자 연결자인 ‘이경’은 동물의 신경계에 접속하여 동물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연결’ 작업을 통해 다른 생명체의 감각을 공유한다.2) “감각과 감정의 공유를 넘어 지배당할 위험이 항상 존재”(31쪽)하는 이 연결 작업은 매우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각이 요구된다. 각각 ‘개척’과 ‘연결’이라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왔던 라르스와 이경은 서로의 세계를 오가고 경험하며 자신들의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새삼 실감한다. 개척 대원 라르스의 눈에 비친 이경의 세계 아마존은 새로운 공간의 창조가 아닌 이미 사라진 구세계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무용하다. 현실적이고도 생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낙원적 풍경의 재현은 이미 죽어버린 구세계를 박제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경의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끝나고 더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듯 “그냥 살아남았으니 살아가는 거지.”(73쪽)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켜온 오래된 세계에서 “살아 있으니 살아가게 두라고!”(73쪽) 새로운 세계를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과 이전의 꿈같은 곳에서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이들의 연결과 교감이 처음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모양새가 조금씩 다를 뿐,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원초적인 소망에서 비롯됨을 지하의 소녀와 지상의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앞에서 살펴본 세 작품을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험한 기후 위기의 연쇄 작용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기후 위기가 진행 중인 동시대 어린이들의 시의적 목소리를 들려주는 진형민의 동화, 기후 재앙에 휩쓸려 메말라버린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촉촉한 단비를 기다리는 낭만적인 정은숙의 소설, 우리가 살던 세계는 몰락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며 끈끈하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배미주의 소설까지. 변한 건 세상이지 결국 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줄기차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우리만의 방법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발붙이고 살 거야. 그리고 우리는 기후 악당이 되지 않을 거야.’
진형민의 동화 『왜왜왜 동아리』(창비, 2024)는 기후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전면으로 다루되 이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가는 어린이들의 당당함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언뜻 보면 세상을 망가뜨리는 어른들과 이를 막으려는 아이들의 대결 구도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하나가 언급한 바 있는 “기성의 질서가 짜놓은 구획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지 않고, 새로운 구획을 추가하고 싶다며 되묻는 어린이들”의 등장1)에 초점을 두고 싶다. 현재가 중요한 어른들과 자신들이 살아갈 앞날이 중요한 어린이들의 이해관계의 다름 속에서 아이들은 “그래 봤자 모두 아이들”(153쪽)이라는 어른들의 멸시에도 기죽지 않고 기득권을 쥔 대상을 향해 자신들의 기후 권리를 떳떳하게 요구한다.
눈치 보지 않고 놀기 위한 명분을 위해 즉흥적으로 결성한 왜왜왜 동아리는 궁금한 것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간소하면서도 결연한 목표를 가지고 출범한다. 저마다 관심 있는 의제를 선정하고 계획과 조사를 통해 문제의식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이들이 마주한 문제는 기후 위기가 저 멀리가 아닌 ‘나’와 ‘우리’의 문제로 자신들 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교과서적 상식으로 접했던 기후 위기가 나의 경험으로 현실화될 때 위기는 곧 현실이 되어 나와 우리 곁에 항상 도사리는 변수가 된다. 내가 살던 세상이 한순간에 변해버리는 경험을 치렀음에도 “어른들은 우리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살기를 바라는 것”(43쪽)처럼 미온적일 뿐이다. 아이들은 이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말할 권리”(149-150쪽)는 자기들 스스로 움켜쥘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기후 위기를 곧장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로 받아들인 아이들은 지속적인 개발과 발전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이전 세대들의 견고한 믿음을 조금씩 허물어보기로 한다. 그것은 기후 위기를 중단시킬 지속력 있는 계획과 합법적 권리, 그리고 책임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쉽게 열리지 않을 골문을 향한 경기를 시작한 셈이다. 골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그 어떤 기후 악당보다 센 어른들의 무관심과 기후 위기에 대한 근시안적 태도가 아닐지. 종횡무진하며 드리블하다 언젠가 짜릿한 골맛을 경험할 아이들의 전반전 시작을 응원한다.
이처럼 기후 위기를 현재 진행중인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현세대 어린이들의 변화와 움직임을 따라가는 작품과 달리, 이미 회복 불가능한 지구로 넘어온 미래 세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들도 있다. ‘기후 위기는 ‘왜’ 일어날까’라는 질문은 이제 이전 세계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불과할 뿐, 이 세대들은 이미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정은숙의 청소년소설 『그래도 사랑을』(창비, 2024)은 기후 재앙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팍팍하게 말라가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떠한 형태로든 각인되어 퇴색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42년의 대한민국은 기후 재앙에 대응하기 위한 전 지구적 환경 보호 켐페인인 ‘지구 회복 운동’에 한창이다.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정부는 사랑의 감정을 고통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안티 러브 칩’이라는 극단적 정책을 내놓는데, 이는 기후 재앙으로 사막화된 국토와 급격히 줄어든 인구, 이에 따른 저출생 문제 등으로 인적·물적 자원 급감에 대한 대응책이다. 출생을 하면 동시에 생활 환경 부담금이 부과되기에 출산을 막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안티 러브 칩을 이식하면 생활 환경 부담금이 감면될 뿐만 아니라 입시, 취업, 대출 등 사회 진출시 거쳐야 하는 단계마다 혜택이 주어진다. 안티 러브 칩 이식 문제는 청소년들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닌 성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절차에 가까워 보인다.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 기후 재앙과 함께 무너져 버린 인간의 감정보다 물적 토대의 재구축이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이 시점에서 청소년들의 삶은 더욱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을 택한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 노동은 유해하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제 사랑은 물질적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고유 자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석하지만 당연하게도 안티 러브 칩 이식자는 사랑이라는 고유 자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혹은 소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적 약자라는 낙인이 뒤따른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 타령을 하며 안티 러브 칩을 반대하는 ‘준서’는 정부의 지원을 무시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님에도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또 어디 있냐고 말했다. 아니, 주장했다.”(19쪽) 사랑이 언제부터 효과적인 결실의 유무에 따른 성과주의의 영역이 되어버린 걸까.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빠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노동에 자신을 선뜻 맡길 수 없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2042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망해버린 지구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하고 되살려야 할 것은 어쩌면 불모로 변해가는 인간의 마음 한편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는 사랑 한 줌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지나친 낙관적 상상이라고, 때가 어느 때인데 사랑 타령이냐고 힐난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지구가 망하기 전이나 후나 낭만에 기대어 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들 아니던가.
배미주의 청소년소설 『너의 초록에 닿으면』(창비, 2024)은 기후 재앙으로 황폐화된 세계를 견디는 세대 간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단절된 두 세계에서 닿을 수 없었던 ‘이경’과 ‘라르스’의 연결을 그린다. 구세계 몰락 후 이전 세대가 ‘개척’이라는 키워드로 무너진 세계를 복구하려 했다면, 다음 2세대들은 단절된 세계의 이음새를 ‘연결’이라는 끈으로 잇고자 한다.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경험한 개척인들은 “존재는 찰나일 뿐, 변화가 세계의 본질”(165쪽)이라는 신념하에 구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지상 개척에 몰두한다.
개척인들은 오랜 지하생활로 변화를 꺼리는 보수적인 시타델인들을 지상으로 영구 이주시키는 것을 중대한 사명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마존 열대를 품은 지하와 빙하기로 얼어붙은 지상의 두 이질적인 세계가 모종 이식하듯 손쉽게 결합될 수 있을까. 분리되고 단절된 세계에서 개척인들이 선택한 삶을 이어받은 개척 2세대 ‘라르스’는 이전 세대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냉혹한 지상에서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는 비극을 초래하기 십상”(98쪽)임을 뼈아프게 경험한 바 있기에 소중한 것을 품는 것을 경계한다.
한편 지하 도시의 디자이너이자 연결자인 ‘이경’은 동물의 신경계에 접속하여 동물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연결’ 작업을 통해 다른 생명체의 감각을 공유한다.2) “감각과 감정의 공유를 넘어 지배당할 위험이 항상 존재”(31쪽)하는 이 연결 작업은 매우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각이 요구된다. 각각 ‘개척’과 ‘연결’이라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왔던 라르스와 이경은 서로의 세계를 오가고 경험하며 자신들의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새삼 실감한다. 개척 대원 라르스의 눈에 비친 이경의 세계 아마존은 새로운 공간의 창조가 아닌 이미 사라진 구세계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무용하다. 현실적이고도 생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낙원적 풍경의 재현은 이미 죽어버린 구세계를 박제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경의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끝나고 더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듯 “그냥 살아남았으니 살아가는 거지.”(73쪽)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켜온 오래된 세계에서 “살아 있으니 살아가게 두라고!”(73쪽) 새로운 세계를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과 이전의 꿈같은 곳에서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이들의 연결과 교감이 처음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모양새가 조금씩 다를 뿐,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원초적인 소망에서 비롯됨을 지하의 소녀와 지상의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앞에서 살펴본 세 작품을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험한 기후 위기의 연쇄 작용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기후 위기가 진행 중인 동시대 어린이들의 시의적 목소리를 들려주는 진형민의 동화, 기후 재앙에 휩쓸려 메말라버린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촉촉한 단비를 기다리는 낭만적인 정은숙의 소설, 우리가 살던 세계는 몰락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며 끈끈하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배미주의 소설까지. 변한 건 세상이지 결국 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줄기차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우리만의 방법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발붙이고 살 거야. 그리고 우리는 기후 악당이 되지 않을 거야.’
김젬마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2020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2025/10/01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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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나, 「탈중심을 가능케 하는 기타 등등의 상상력」, 웹진 《비유》 71호. 바로가기
- 2
- 이경이 개발한 아마존 어드벤처 게임은 작가의 전작인 『싱커』(창비, 2010)에서 뇌파 동조를 통해 직접 아마존을 체험하는 게임인 ‘싱커’와 연결되는 세계관을 공유한다. 두 게임 모두 가상 현실 게임이 아닌 일종의 뇌-인터페이스 게임으로 일체된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