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경계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자리
성명진의 『밤 버스에 달이 타 있어』
성명진은 그동안 순한 주체를 통해 어진 바탕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비춰왔다. 어린 사람의 시간은 가능성을 탐구하고 쉼 없이 갈망한다. 한편으론 자신의 내부와 외부 사이 경계를 어떻게 보호할지 막막하다. 이렇게 보면 타인을 대할 때는 개인의 경계를 존중함이 마땅하다. 무서운 바깥 세계의 역할을 지느라 가려졌던 순한 얼굴은 「또다른 우리」한테는 내보여도 된다.차갑고 단단하게 굴더니// 그새 부드럽게 풀려/ 저쪽으로 흘러간다// 야, 이지호/ 너 이제 보니/ 물이었구나// 사실 나도 그래/ 같이 가자
―「얼음덩이」 전문
성명진은 대상이 순하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거듭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 폭력적 관점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함부로 비교하거나(“꽃은 꽃이고/ 우리는 우리랍니다”, 「잎사귀들」), 무시하거나(“조그만 나 혼자/ 정류장에 서 있어서 그랬는지/ 버스가 그냥 가버렸어요”, 「나의 구름 버스」)하는 상황은 어린 사람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자리에서 겪는 폭력일 것이다. 평화를 위해 경계를 지킬 때에야 안쪽 세계는 안온해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굽잇길」과 「개 둘」은 소수자의 연대를 보여준다. 굽잇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할머니와 개가 있다. “기운 없는”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앞장서 가는 개”는 개대로 서로가 미덥고 고맙다. ““도망갈까?”/ “아냐.”// “짖을까?”/ “그래 짖자.””와 같은 대응처럼. 개만 보면 “다짜고짜 막대기를 휘두르는 사람” 앞에서 나와 ‘또다른 나’가 뜻을 모은다면 폭력도 단호히 대처할 용기가 난다. 이번 동시집에서 성명진은 어린 사람부터 어진 어른들까지 함께 읽을 수 있게 평화의 스펙트럼을 열어 보였다.
2. 안과 바깥의 경계, 언덕을 넘어오는 것들
“하나도 안 무서운 저녁이 오지요”(「저녁에 언덕을 넘어오는 것들」) “가족들은 사나워 보여도/ 사실은 순해요”(「작은 모닥불」) 등에서 보듯이 저녁이 오면 말없이 작은 모닥불을 쬐는 평화가 찾아온다. 하루 동안 겪은 억압으로부터 풀려나 안쪽이 아무는 시간이다. 가족이 모일 수 없어 저녁에 혼자 지내는 이라면 노래하고 연주하고 그림 그리고 시 읽는 시간이 “작은 모닥불”을 대신할 만하다. 자기 회복과 치유는 고요하게 창조성의 문을 열고 내면세계를 돌보는 동안 안쪽에서 일어날 테니.아빠는/ 노루 발을 내놓았고// 엄마는/ 개구리 손을 내놓았어요// 형은/ 토끼 얼굴을 내놓았고요// 돈을 벌 때/ 공을 찰 때/ 가족들은 사나워 보여도/ 사실은 순해요// 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노래도 불렀어요
―「작은 모닥불」 전문
이를테면 「나의 구름 버스」에서 혼자 정류장에 남겨진 아이는 창조성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힘을 가졌다. 아이는 “푹신한 의자와 솜사탕,/ 친구들이 있는/ 나의 구름 버스를” 그려낸다. 아이의 내적 세계가 갈망하는 또다른 현실이다. 결여된 바를 향한 갈망은 창조성을 추동하기도 한다. 아이의 갈망은 나와 또다른 나를 태우고 갈 구름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살면서 “염소 한 마리”1)를 이끌고 걸어왔다는 시인은 염소와 길동무 사이가 되었다. “자주 버티었다”가도 “따라 걷기도 했다”고 하던 염소는 시인과 “길 양쪽을 나눠 걸을 때” “햇살을 향해 나란하다“. 염소들은 하루를 보내고 쉴 곳을 찾아 마을로 오는 중이다. 원래 마을에 속해 있는 데다가 제자리를 아는 염소는 무해하다. 굳이 이끌지 않아도 염소들은 마을 안 보금자리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성명진은 마을 안과 밖의 경계인 언덕을 통해 평화의 상태를 그렸다. 마을은 독립된 개인의 안쪽 세계인데 이 경계인 언덕을 함부로 침범할 때 평화는 훼손된다.멀리 언덕을/ 구물구물 넘어오는 것들// 마을로 다가오면 보여요/ 염소들이에요/ 그게 좋아요// 사납거나/ 징그러운 것 아닌/ 염소들이라서 좋아요// 그것들을 따라/ 우리 마을로 살며시/ 하나도 안 무서운 저녁이 오지요// 달도 따라서요
―「저녁에 언덕을 넘어오는 것들」 전문
『아티스트 웨이』2)에 따르면 창조성을 가진 예술가는 그 자신 안의 힘으로 삶을 회복할 수 있다. 그는 내부에서 힘이 차오르면 자연스럽게 껍질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에게는 알 속에 웅크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알의 구조는 균열이 가기 쉽고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그런데 왜 동물들은 이렇게 취약한 구조로 알을 설계한 걸까. “알 자체가 관통할 수 없는 벽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창 발달중인 새끼와 환경이 서로 분리된다.”3)나는/ 갓 생겨나 알 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좀더 자라면/ 스스로 나가려고/ 껍질을 얇게 지었습니다// 밖에서 아무나/ 함부로 깨뜨리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알」 전문
그러니까 알껍데기는 발달중인 새끼를 환경으로부터 분리하면서도 알 속의 새끼가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이 작품은 경계의 역할에 관해 사유할 지점을 준다. 탄생의 순간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개체가 바깥 세계에 처음 노출된다. “눈뜰 때 새끼가 무서워하지 않게 어둠을 막고 있어”(「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 이런 까닭에 불빛은 새끼가 어둠에 조금씩 적응하게끔 자극을 완화해준다.
3. 어린이로 돌아가자
「자목련」과 「아버지」에 오면 치유의 언어는 무르익는다. 아버지는 무거운 삶을 내려놓고 “갯벌에 비스듬히 누운/ 어린 고깃배”(「아버지」)가 되어 어린이가 되어도 좋은 시간으로 돌아가셨다. “큰 물결이 들어와/ 일으켜 세워서는// 넓은 세상으로/ 데리고 나갔어요”하며 아버지와 이별로 아픈 마음을 다독인다. 「자목련」에서 우리는 몸이 아픈 아빠께 위안을 드리려고 온갖 환한 것을 모아 온다. 맛난 음식과 생일 축하 노래, 그리고 자목련 촛불을 밝히는 손길에는 간절한 사랑이 인상적으로 그려졌다.이번 자주빛 꽃은 우리가 켜놓았습니다 아주 밝은 몇 송이를 우리가 골라 손으로 부드럽게 만지고 쓰다듬어 우리 것으로 삼았습니다// 꽃들을 촛불로 켜놓은 겁니다 그 아래에 맛난 음식을 차리고는 힘들게 일하다가 몸을 다친 아빠를 이끌었습니다 오늘은 아빠의 생일입니다// 우리는 아빠가 환히 웃도록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며 놀았습니다 그런 다음 촛불들을 다시 꽃으로 돌려보내주었습니다
―「자목련」 전문
이 자리는 아빠가 겪는 고난을 달래고 그 고난을 지켜보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준다는 면에서 의식과 같은 면이 있다.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피워올리는 지향이 단아하다. 자목련은 어린 꽃봉오리일 때 촛불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아빠 생일을 축하하려고 그 환하고 어린 꽃을 빌린다. 그 빛을 고이 쓰고 다시 꽃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은 아름답고 처연하다. 자목련의 색은 대림 시기와 사순절에 가톨릭 사제가 입는 자주색 제의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염소들이 마을로 돌아오는 저녁, 자목련 촛불을 돌려보내는 손길, 어린 조각배가 되어 바다로 돌아간 아버지 등의 장면에서 고통과 치유에 관해 머물게 된다. 「그 눈망울」은 강력한 폭력의 상징인 총알과 죽음의 장면 속에서 노루의 눈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다. 평화라는 주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폭력을 지켜보는 시선에서 들려준다.
「그 눈망울」은 온갖 목숨이 깃든 품으로서 한 생명을 성찰하게 된다. 노루는 자기 안에 깃든 목숨의 존재를 안다. “별안간 날아든 총알에 맞아/ 쓰러진 노루”는 “바들바들 떨면서/ 눈을 감았다// 무서운 밖을 보지 말라고” 눈을 감는다. 제 안에 깃든 목숨이 바깥을 보고 무서울까봐 눈을 감는다는 노루한테서 약한 생명을 수호하는 신성이 어린다. 노루는 약자와 연대하는 주체로 보이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국가 폭력에 의해 주권이 침탈당했던 제주 4·3 사건이나 5·18민주화운동을 추념하는 작품으로 읽히기도 한다.
경계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자리」에는 저만의 빛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내면에는 빛이 있고 이 빛이 사람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생명력이라고 한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이 떠오른다. 성명진의 메타포 ‘불빛’은 영적 회복을 말하던 함석헌의 비폭력 사상과 이어지면서 읽힌다. 성명진의 『밤 버스에 달이 타 있어』(창비, 2025) 안에는 평화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있어 오래도록 곁에 서서 지켜보고 싶다.꽃들이/ 봉오리째 떨어져 있다.// “어쩔꼬, 요 목숨들 어쩔꼬.”//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꽃봉오리들을 주워 든다.// 꽃들이 할머니 손에서/ 한 번 더 피어난다.
―「동백꽃」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창비 2011)
앵두나무 가지에// 아주 작은 자리// 여린 꽃이 앉는 자리가 있어// 꽃이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귀여운 앵두가 앉지// 둘이 번갈아 앉는 그 자리// 영원히 예약돼 있어서// 누구도 넘볼 수 없고말고
―「자리」 전문
우경숙
1972년 예천에서 태어났다. 2023년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는 자유 정신―이안론」으로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해설을 쓴 동시집으로 『우리 여우 꿈을 꾼 거니?』(강기원), 『내 눈에 무지개가 떴다』(함민복), 『시를 위한 패턴 연습』(이안)이 있다.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5/10/01
75호
- 1
- 성명진, 「염소」, 『그 순간』, 문학들, 2014.
- 2
- 줄리아 캐머론, 임지호 옮김, 경당, 2003, 2012 개정.
- 3
- 대나 스타프, 『어린 것들의 거대한 세계』, 주민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4, 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