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악마의 검을 뽑아라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가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젠 학교도 못가고 여행도 못 간다.
“바람의 언덕에 가자!”
한 달째 우리 집에 사는 사촌 동생 윤형이를 데리고 마스크를 쓴 뒤 집을 나왔다. 바람의 언덕은 우리 집에서 삼십 분만 걸어가면 된다. 물론 느려터진 윤형이와 함께라면 한 시간은 걸리겠지만. 바람의 언덕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아, 바람은 있구나. 그냥 바닷가 근처 언덕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뭐 볼 게 있다고 바람의 언덕에 놀러오는지 속을 모르겠다.
“가는 길 잘 알아, 형아?”
“걱정 마라. 길은 다 외운다. 그런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했다. 할 말을 못 참는 것이 나의 유일한 단점이다.
“한 군데 조심해야 하는 데가 있다. 조기, 산 돌아가마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한 채 있거덩. 거기가 쫌 무시무시하다. 귀신이 있다나 도깨비가 산다나.”
윤형이 눈이 둥그레졌다.
“걱정 마라. 대낮에는 괘안타.”
나는 윤형이 손을 잡아줬다.
“야, 촉새. 니, 어디 가나?”
그때 누군가 내 별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나서 가만 안 두려고 돌아보니 리리였다.
“어어, 걍 바람의 언덕 간다.”
리리한테는 대들면 안 된다. 크게 망한다.
“니 형이가?”
“아이다. 내 동생이다. 키만 크모 다 형이가?”
나는 그만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 피라. 죽을래?”
리리가 계속 줄넘기를 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누나도 우리랑 같이 가?”
윤형이가 묻자 리리는 환하게 웃었다.
“하모. 쟈는 겁이 억수로 많다. 내가 쟈 보호자 아이가.”
“모라카노, 가시내?”
“그라고 내도 마침 가려던 길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노?”
심심해서 그냥 따라오는 거면서 꼭 저렇게 말한다. 우리 셋은 유진연립 모퉁이를 돌았다. 마을을 지나 바닷가로 가는 낮은 산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헤이, 어데 가노?”
4학년 해미 누나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우리 앞에 멈췄다.
“바람의 언덕.”
우리는 합창을 했다.
“내도 가자.”
누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우리를 따라왔다. 전염병 때문에 학교에 못 가니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다.
“야야. 야들아, 야야.”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바다 근처 작은 산에 있는 약사암에 사는 도토리묵 아저씨다. 아저씨는 나이는 많지만 하는 짓은 우리 또래다. 우리만 보면 달려와서 딱지치기하자고 조른다. 도토리묵을 무지무지 좋아해서 스님이 가끔 한 솥 가득 묵을 쒀 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준식이라는 이름보다 별명을 부른다. 암자에서 우리를 본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막 달려왔다.
뿡뿡 뿌웅뿡뿡
역시나 방귀를 뀌면서 달려왔다.
“아아아악.”
우리는 마스크 위로 코를 싸쥐었다. 도토리묵 아저씨는 학교 갈 때도 따라오다가 교문 앞에서 돌아가곤 한다. 선생님이 무서운지 교실까지 따라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합창을 하면서 산길을 넘어 바닷가 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바다를 왼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바람의 언덕이 나온다. 그 전에 도깨비집이 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귀신 집>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아무도 안 살고 비어있다.
“밤에 차로 저기 지나가다가 도깨비불을 봤다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리리가 말했다. 윤형이를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이다. 다 헛소리다. 도깨비가 어딨고 귀신이 어딨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신 집 대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우리 또래 여자아이가 툭, 나왔다.
“팔천구백이십오만 사천삼백오십오, 팔천구백이십오만 사천삼백오십육.”
그 애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옴마야!”
우리는 깜짝 놀라 도망쳤다. 그곳에서 사람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달리다 허전해서 보니 윤형이가 없었다.
“헉. 잠깐만. 내 동생.”
뒤를 돌아보니 윤형이는 그 집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게다가 여자애와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애는 마스크도 쓰고 있지 않았다.
“너, 누꼬? 와 마스크도 안 쓰고 있나? 마스크를 꼭 쓰고 손을 항상 깨끗이 닦고……”
여자애가 내 말을 무시하고 윤형이에게 물었다.
“쟤, 니 동생이니?”
나는 머리 뚜껑이 열렸다.
“내가 형이거든!”
윤형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데도 키가 한 뼘은 더 크다. 게다가 나는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워서 어려 보이는데 윤형이는 얼굴이 허여멀건한 데다가 말도 잘 안 해서 늙어 보인다.
“아무튼. 너네 형제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자애는 우리를 보더니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야는 우리 이모 아들이다. 한 달 전에 이모가 두고 갔는데 이름은 윤형이다. 내 이름은 재윤이다, 김재윤.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몬 가고 친구들도 몬 만난다 아이가. 야도 마찬가지로 학교도 몬가고 있어서 바다가 있는 우리 집에 놀러 온 기다. 니도 요즘 학교 안 가제? 멫 학년, 이름이 뭐꼬? 우리 학교 안 다니나? 첨 보는 얼굴이네.”
“아휴,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난 원래 학교 안 다녀. 이름은 도도해.”
“학교를 안 다닌다고? 으째서?”
“나? 나는 도깨비야.”
“말도 안 된다. 도깨비가 무신 여자고? 그런 말 내 평생 처음 듣는다.”
우리는 헤헤헤 웃었다. 도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도깨비에 대한 편견이 너무 많아. 도깨비가 남자만 있다고 누가 그래? 너도 내가 도깨비라는 거 못 믿냐?”
도해가 콕 집어 윤형이한테 물었다.
“믿어.”
나는 윤형이를 바라봤다. 배신자.
“그럼 됐어. 넌 그냥 믿지 마. 너네 바람의 언덕 가는 중이지?”
윤형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참, 어차피 이 길은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밖에 없는데 놀라기는.
“걸어갈래, 날아갈래?”
“날아갈래.”
대답 안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는데 나도 모르게 제일 먼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좋아, 서로 꽉 잡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붕 떠오르는 바람에 나는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우리가 서로의 팔을 끼자마자 도해는 하늘로 날았다. 우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약간 흐린 하늘을 날아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우웩! 이 무신 일이고?”
하늘을 날아가는 게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지럽고 놀라서 오줌을 쌀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돈 우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저거 뭐냐?”
바닷가 한쪽이 뭉텅 잘려나가 검붉은 흙이 드러났고 그 위에 검은 뼈대가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몰랐냐? 우리가 학교 안 가는 동안 공사했잖아.”
”뭐하는 건데?“
”몰라. 무슨 센타 같은 거 짓는다고 하던데.“
산을 마구 깎아 버린 모습은 흉측해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산이나 바다를 그냥 좀 놔두면 안 되나? 그곳을 지나 나무 계단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갔다. 앞에는 아주아주 커다랗고 오래돼 보이는 나무가 있었다. 바람의 언덕에 올 때마다 본 나무인데 오늘은 이상해 보였다.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잎사귀가 아니라 나무 몸통이 마구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잘 들어. 이제부터 할 일이 있어.”
도해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할 일이라니?”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야. 너네 지금 왜 학교 안 가지?”
도해의 말에 윤형이가 대답했다.
“전염병.”
“그렇지. 전염병이 왜 생겼지?”
도해의 말에 내가 나섰다.
“나 참. 답답하네. 그야 우리는 모르지. 뭐 사실 어른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이가. 어쨌든 우리 책임은 아이다. 우리는 지구에 산 지 십 년도 안 됐다.”
“전염병을 너희, 아니 우리가 막을 수 있어.”
도해의 말에 나는 풋 웃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뭔 소리고? 우리가 전염병을 으짠다고? 어른들도 지금 으짤줄 몰라하는구만 무신 우리가?”
도해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엄청 오래된 옛날에 여기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어. 너희들 이곳 바람의 언덕이 지구의 한 가운데라는 건 알고 있지?”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해미 누나가 말했다.
“요즘은 그것도 안 가르치냐?”
도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이곳 바람의 언덕이 지구의 중심이다 이 말이야. 아주아주 중요한 곳이지. 사람으로 따지면 배꼽 같은 곳이지. 중심.”
“심장이 더 중요하지 않나?”
윤형이의 말에 도해는 당황한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 심장 같은 곳이야. 아주 아주 옛날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얼마나 평화로웠냐 하면.”
“그건 됐고. 뭔 일이 생겼는데?”
내가 도해의 말을 자르자 도해는 얼굴이 빨간 찐빵같이 되었다가 간신히 되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북쪽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동물을 타고 달려와 이곳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어.”
“전쟁이 난 거가? 이곳은 힘이 약했나?”
내 말에 도도해는 발끈했다.
“그렇지 않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하지만 서로를 죽이는 싸움을 계속할 수 없어서 이곳 사람들은 싸움을 그만둔 거야.”
“졌네, 졌어.”
내 말에 도도해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조용히 좀 해라. 아. 그래서?”
리리가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북쪽 사람들은 이곳의 힘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생명의 나무뿌리에 검은 검을 꽂았지.”
“칼 말이가? 뽑아 뿌지 와?”
“강한 마법이 걸려서 누구도 뽑을 수가 없었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세상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물들었지.”
“무신 말이고? 참 나.”
“악의 기운이 너무 커서 이제 이 별에 사는 생명체가 모두 멸종될 수도 있는 위기가 닥쳤단 말이야. 이제 그 검을 뽑아야 해. 너희들이. 더 늦기 전에.”
“우리?”
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도해를 보다가 윤형이를 보다가 피식 콧방귀를 꼈다.
“헐, 말도 안 된다. 우리가 무신 어벤져스도 아이고. 참말로.”
“너희들이 뽑을 수 있는 애들이야. 확실해.”
“증거를 대라, 증거.”
도해는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너, 몸에 커다란 점 있지?”
나는 깜짝 놀랐다. 점은 또 언제 봤지? 윤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등을 가리켰다.
“어어어? 형, 여기.”
얘는 아주 눈치를 쌈 싸 먹었다.
“즈, 증거가 그거 하나가?”
나는 도해에게 다시 물었다.
“살아있는 것을 죽인 적 있지?”
“살인?”
“사람이 아니고 애벌레나 곤충. 일부러 죽인 적이 있잖아.”
“에, 뭐, 많이 그런 거는 아니다.”
나는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바지에 오줌 싼 적 있지?”
그건 정말 단순한 실수였다. 그걸 말할 줄은 예상 못했다. 리리가 눈을 반짝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선수를 쳤다.
“아, 뭐, 그렇다 치고. 그래, 검 뽑으러 가자.”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나 수천 년은 더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갔다.
“잠깐, 너희들이 검을 뽑을 운명의 아이가 아니라면 검은 뽑히지 않을 거야.”
“우리가 운명의 아이라며? 거짓말했나?”
도해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사실 수천 년 동안 운명의 아이를 찾아 헤맸거든. 열 살 또래 아이가 검을 뽑을 거라는 예언 때문에 무조건 이곳으로 아이들을 데려왔지. 수천 년 동안 말이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팔천몇백만 어쩌고 한 게 애들 데려온 숫자가?”
도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우리가 운명의 아이라 검을 뽑는다면?”
그러자 도해가 우리 가까이 다가와 작게 말했다.
“만약 검을 뽑으면 그 즉시 샘물에 식혀야 해.”
하지만 나무를 한 바퀴 돌아도 검은 보이지 않았다.
“검이 있어야 뭐 뽑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자 도해가 나무의 북쪽으로 갔다. 그곳의 잎사귀는 다른 곳에 비해 생기가 없고 시들어있었다. 도해는 나무줄기를 껴안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휙휙휙
나무 밑 흙이 푹푹 파여 옆으로 날아가 쌓였다. 잠시 후,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우와. 뿌리가 까맣게 썩었네.”
해미 누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썩고 있어.”
도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어디 있노?”
리리 말에 도해가 도깨비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와, 도깨비방망이 맞제? 그거 든 거 보니 참말로 도깨비 맞네?”
내 말에 도해는 나무를 톡톡 쳤다. 우리들은 얼른 도해 옆으로 가 도해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우와!”
나무뿌리에 붉고 날카로운 기다란 칼이 꽂혀 있었다. 칼이 꽂힌 곳에는 나무 진액이 진뜩하니 나와 있었다. 꼭 나무의 눈물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칼이 어디서 나왔지?”
해미 누나 말에 도해가 말했다.
“눈에 안 보였던 것뿐이야. 저 칼을 뽑아야 해.”
“내가 뽑을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얼른 다가가 붉은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으악.”
손잡이는 엄청 뜨거웠다. 손바닥을 보니 칼자루 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쓰리고 아팠다.
“에휴, 너는 아닌가보다. 다음.”
형과 누나들은 줄을 서서 도전했다. 모두 칼을 빼지 못하고 손에 무늬만 새겼다. 리리가 나갔다.
“으라차차.”
우리 반 장군 리리가 뽑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니가 해 봐.”
마지막으로 윤형이를 보며 도해가 말했다. 윤형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안 되는데 야가 될 리가 있나?”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도해는 윤형이에게 얼른 칼을 뽑으라고 말했다. 윤형이는 자신 없는 몸짓으로 다가가다가 도토리묵 아저씨 손을 잡았다. 도토리묵 아저씨는 좋아라 윤형이와 같이 칼을 잡으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다 빨리 이리 와.”
“맞다. 함께 뽑으면 되지 뭘 따로 뽑나?”
우리는 우르르 달려들어 한꺼번에 칼을 잡았다.
“하나 둘 셋!”
있는 힘껏 칼을 잡아당겼다.
“으악.”
그 순간 우리는 칼을 잡은 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검이 뽑히는 순간 나무 밑 동굴이 나타났다.
“오! 오! 오! 너희들이 운명의 아이였어.”
도해는 눈물을 흘리며 팔짝팔짝 뛰며 그 말만 계속했다.
“와, 검을 뽑았네.”
검이 뜨거워서 그런지 김이 났다. 손이 타버릴 것 같았다.
“빨리 샘으로 가자.”
도해가 우리를 데리고 나무를 지나 왼편 바닷가 벼랑으로 갔다. 붉은 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쓰윽 쓰윽 쓰윽
아주 기분 나쁜 소리였다.
도해가 도깨비방망이를 땅에 대고 두드렸다. 땅이 파이며 물이 조금 고였다. 도해는 계속 방망이를 두드렸다. 점점 물이 늘어나 작은 샘이 됐다.
“빨리 저 샘에 칼을 담가.”
치이이이익
마치 검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이 은색으로 변했어.”
“잘했어. 이제 생명의 녹색 돌을 찾아서 나무 밑에 묻으면 돼.”
그때였다. 샘 옆 오른쪽 검은 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콰라라라
냄새도 심하게 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뭔 냄새가 이리 심하노?”
그때 다시 한번 동굴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도망가자.”
우리가 막 뒤로 도는 순간. 동굴 안쪽에서 반짝 빛이 났다.
“저게 생명의 녹색 돌 아니가?”
내가 속삭였다.
“맞아, 저걸 가져와야 해.”
“말도 안 돼. 저걸 가지러 갔다가 다 죽는다.”
해미 누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해가 앞으로 나갔다. 그 뒤를 리리 장군이 뒤따르고 그 뒤를 윤형이가 칼을 든 채 따라갔다.
“야, 윤형아.”
나는 목소리를 낮춰 불렀지만 윤형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갔다.
“미치겠다. 말도 잘 안 하는 기 진짜 쇠고집이다.”
나는 얼른 윤형이를 따라갔다.
크르르르릉
그때 괴물이 움직였다. 냄새는 더 심해졌다. 코가 썩을 것 같았다.
동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괴물의 몸이 차츰 보였다. 괴물은 동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머리가 몇 개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는데 각기 따로 놀았다. 물렁물렁한 몸은 쉴 새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괴물의 몸 한가운데 둥근 녹색 돌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 괴물 몸이 찌익 늘어났다. 그러더니 해미 누나와 자전거를 삼켰다.
“으악. 누나, 누나.”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은 도토리묵 아저씨, 도도해, 그리고 나와 윤형이도 한꺼번에 삼켜 버렸다.
“아휴, 냄새. 여기 괴물 뱃속 맞지?”
리리가 물었다. 도해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해미 누나가 핸드폰을 켰다. 괴물의 뱃속이 그대로 드러났다. 회색과 누런색이 섞여 있는 괴물 뱃속을 보니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따릉따릉 소리가 났다. 도토리묵 아저씨가 해미 누나 자전거 벨을 누른 것이다.
“나, 자전거 태워줄 사람.”
도토리묵 아저씨가 물었다.
“지금 자전거 탈 때가 아니다, 아저씨야.”
리리 말에 가만히 있던 도도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괴물 몸은 한없이 늘어나는 것 같으니까 자전거를 한 번 타보자.”
해미 언니가 도토리묵 아저씨를 태우고 자전거를 달렸다.
“야호!”
아저씨는 좋아서 막 소리를 쳤다. 괴물의 몸이 점점 넓어졌다.
“우리는 줄넘기 할까?”
리리와 도해도 줄넘기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도 놀자.”
나와 윤형이는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듯이 막 놀았다. 잠시 후. 괴물 몸이 막 흔들렸다.
“어어어. 왜 이러지?”
그 순간 우리는 괴물의 몸 한쪽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러다 갑자기 밖으로 튕겨나왔다.
“으악.”
괴물이 어지러워서 토한 것 같았다. 괴물도 놀랬는지 슬금슬금 움직이다 점점 쪼그라들더니 사라졌다. 자전거와 줄넘기와 칼을 검은 뱃속에 두고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우리는 얼른 녹색 생명의 돌을 들고 바람의 언덕 커다란 나무로 달려갔다. 검은 뿌리 밑에 생명의 돌을 넣었다.
푸르르르
나무가 재채기를 하듯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꼬? 시시하다.”
하지만 도해는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잘했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얼른 집에 가자.”
우리는 또 도해와 함께 하늘을 날아 동네로 왔다.
“잘 가라 다들. 너희들에게 작은 선물 하나씩 보낼게.”
도깨비 도도해가 말했다. 몹시 피곤해서 고맙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누나, 내일 또 만나자.”
윤형이 말에 도도해는 씨익 웃었지만 대답은 안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와 아빠가 TV를 보고 있었다. 나와 윤형이를 본 엄마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치료 약이 개발됐대. 윤형아, 엄마 내일 온대. 너희 아빠도 이제 금방 나을 거야.”
나와 윤형이는 서로 마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도해 누나 말이 맞았네?”
“바람의 언덕에 가자!”
한 달째 우리 집에 사는 사촌 동생 윤형이를 데리고 마스크를 쓴 뒤 집을 나왔다. 바람의 언덕은 우리 집에서 삼십 분만 걸어가면 된다. 물론 느려터진 윤형이와 함께라면 한 시간은 걸리겠지만. 바람의 언덕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아, 바람은 있구나. 그냥 바닷가 근처 언덕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뭐 볼 게 있다고 바람의 언덕에 놀러오는지 속을 모르겠다.
“가는 길 잘 알아, 형아?”
“걱정 마라. 길은 다 외운다. 그런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했다. 할 말을 못 참는 것이 나의 유일한 단점이다.
“한 군데 조심해야 하는 데가 있다. 조기, 산 돌아가마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한 채 있거덩. 거기가 쫌 무시무시하다. 귀신이 있다나 도깨비가 산다나.”
윤형이 눈이 둥그레졌다.
“걱정 마라. 대낮에는 괘안타.”
나는 윤형이 손을 잡아줬다.
“야, 촉새. 니, 어디 가나?”
그때 누군가 내 별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나서 가만 안 두려고 돌아보니 리리였다.
“어어, 걍 바람의 언덕 간다.”
리리한테는 대들면 안 된다. 크게 망한다.
“니 형이가?”
“아이다. 내 동생이다. 키만 크모 다 형이가?”
나는 그만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 피라. 죽을래?”
리리가 계속 줄넘기를 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누나도 우리랑 같이 가?”
윤형이가 묻자 리리는 환하게 웃었다.
“하모. 쟈는 겁이 억수로 많다. 내가 쟈 보호자 아이가.”
“모라카노, 가시내?”
“그라고 내도 마침 가려던 길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노?”
심심해서 그냥 따라오는 거면서 꼭 저렇게 말한다. 우리 셋은 유진연립 모퉁이를 돌았다. 마을을 지나 바닷가로 가는 낮은 산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헤이, 어데 가노?”
4학년 해미 누나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우리 앞에 멈췄다.
“바람의 언덕.”
우리는 합창을 했다.
“내도 가자.”
누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우리를 따라왔다. 전염병 때문에 학교에 못 가니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다.
“야야. 야들아, 야야.”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바다 근처 작은 산에 있는 약사암에 사는 도토리묵 아저씨다. 아저씨는 나이는 많지만 하는 짓은 우리 또래다. 우리만 보면 달려와서 딱지치기하자고 조른다. 도토리묵을 무지무지 좋아해서 스님이 가끔 한 솥 가득 묵을 쒀 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준식이라는 이름보다 별명을 부른다. 암자에서 우리를 본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막 달려왔다.
뿡뿡 뿌웅뿡뿡
역시나 방귀를 뀌면서 달려왔다.
“아아아악.”
우리는 마스크 위로 코를 싸쥐었다. 도토리묵 아저씨는 학교 갈 때도 따라오다가 교문 앞에서 돌아가곤 한다. 선생님이 무서운지 교실까지 따라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합창을 하면서 산길을 넘어 바닷가 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바다를 왼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바람의 언덕이 나온다. 그 전에 도깨비집이 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귀신 집>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아무도 안 살고 비어있다.
“밤에 차로 저기 지나가다가 도깨비불을 봤다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리리가 말했다. 윤형이를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이다. 다 헛소리다. 도깨비가 어딨고 귀신이 어딨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신 집 대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우리 또래 여자아이가 툭, 나왔다.
“팔천구백이십오만 사천삼백오십오, 팔천구백이십오만 사천삼백오십육.”
그 애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옴마야!”
우리는 깜짝 놀라 도망쳤다. 그곳에서 사람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달리다 허전해서 보니 윤형이가 없었다.
“헉. 잠깐만. 내 동생.”
뒤를 돌아보니 윤형이는 그 집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게다가 여자애와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애는 마스크도 쓰고 있지 않았다.
“너, 누꼬? 와 마스크도 안 쓰고 있나? 마스크를 꼭 쓰고 손을 항상 깨끗이 닦고……”
여자애가 내 말을 무시하고 윤형이에게 물었다.
“쟤, 니 동생이니?”
나는 머리 뚜껑이 열렸다.
“내가 형이거든!”
윤형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데도 키가 한 뼘은 더 크다. 게다가 나는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워서 어려 보이는데 윤형이는 얼굴이 허여멀건한 데다가 말도 잘 안 해서 늙어 보인다.
“아무튼. 너네 형제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자애는 우리를 보더니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야는 우리 이모 아들이다. 한 달 전에 이모가 두고 갔는데 이름은 윤형이다. 내 이름은 재윤이다, 김재윤.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몬 가고 친구들도 몬 만난다 아이가. 야도 마찬가지로 학교도 몬가고 있어서 바다가 있는 우리 집에 놀러 온 기다. 니도 요즘 학교 안 가제? 멫 학년, 이름이 뭐꼬? 우리 학교 안 다니나? 첨 보는 얼굴이네.”
“아휴,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난 원래 학교 안 다녀. 이름은 도도해.”
“학교를 안 다닌다고? 으째서?”
“나? 나는 도깨비야.”
“말도 안 된다. 도깨비가 무신 여자고? 그런 말 내 평생 처음 듣는다.”
우리는 헤헤헤 웃었다. 도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도깨비에 대한 편견이 너무 많아. 도깨비가 남자만 있다고 누가 그래? 너도 내가 도깨비라는 거 못 믿냐?”
도해가 콕 집어 윤형이한테 물었다.
“믿어.”
나는 윤형이를 바라봤다. 배신자.
“그럼 됐어. 넌 그냥 믿지 마. 너네 바람의 언덕 가는 중이지?”
윤형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참, 어차피 이 길은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밖에 없는데 놀라기는.
“걸어갈래, 날아갈래?”
“날아갈래.”
대답 안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는데 나도 모르게 제일 먼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좋아, 서로 꽉 잡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붕 떠오르는 바람에 나는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우리가 서로의 팔을 끼자마자 도해는 하늘로 날았다. 우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약간 흐린 하늘을 날아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우웩! 이 무신 일이고?”
하늘을 날아가는 게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지럽고 놀라서 오줌을 쌀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돈 우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저거 뭐냐?”
바닷가 한쪽이 뭉텅 잘려나가 검붉은 흙이 드러났고 그 위에 검은 뼈대가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몰랐냐? 우리가 학교 안 가는 동안 공사했잖아.”
”뭐하는 건데?“
”몰라. 무슨 센타 같은 거 짓는다고 하던데.“
산을 마구 깎아 버린 모습은 흉측해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산이나 바다를 그냥 좀 놔두면 안 되나? 그곳을 지나 나무 계단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갔다. 앞에는 아주아주 커다랗고 오래돼 보이는 나무가 있었다. 바람의 언덕에 올 때마다 본 나무인데 오늘은 이상해 보였다.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잎사귀가 아니라 나무 몸통이 마구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잘 들어. 이제부터 할 일이 있어.”
도해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할 일이라니?”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야. 너네 지금 왜 학교 안 가지?”
도해의 말에 윤형이가 대답했다.
“전염병.”
“그렇지. 전염병이 왜 생겼지?”
도해의 말에 내가 나섰다.
“나 참. 답답하네. 그야 우리는 모르지. 뭐 사실 어른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이가. 어쨌든 우리 책임은 아이다. 우리는 지구에 산 지 십 년도 안 됐다.”
“전염병을 너희, 아니 우리가 막을 수 있어.”
도해의 말에 나는 풋 웃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뭔 소리고? 우리가 전염병을 으짠다고? 어른들도 지금 으짤줄 몰라하는구만 무신 우리가?”
도해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엄청 오래된 옛날에 여기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어. 너희들 이곳 바람의 언덕이 지구의 한 가운데라는 건 알고 있지?”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해미 누나가 말했다.
“요즘은 그것도 안 가르치냐?”
도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이곳 바람의 언덕이 지구의 중심이다 이 말이야. 아주아주 중요한 곳이지. 사람으로 따지면 배꼽 같은 곳이지. 중심.”
“심장이 더 중요하지 않나?”
윤형이의 말에 도해는 당황한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 심장 같은 곳이야. 아주 아주 옛날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얼마나 평화로웠냐 하면.”
“그건 됐고. 뭔 일이 생겼는데?”
내가 도해의 말을 자르자 도해는 얼굴이 빨간 찐빵같이 되었다가 간신히 되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북쪽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동물을 타고 달려와 이곳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어.”
“전쟁이 난 거가? 이곳은 힘이 약했나?”
내 말에 도도해는 발끈했다.
“그렇지 않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하지만 서로를 죽이는 싸움을 계속할 수 없어서 이곳 사람들은 싸움을 그만둔 거야.”
“졌네, 졌어.”
내 말에 도도해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조용히 좀 해라. 아. 그래서?”
리리가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북쪽 사람들은 이곳의 힘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생명의 나무뿌리에 검은 검을 꽂았지.”
“칼 말이가? 뽑아 뿌지 와?”
“강한 마법이 걸려서 누구도 뽑을 수가 없었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세상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물들었지.”
“무신 말이고? 참 나.”
“악의 기운이 너무 커서 이제 이 별에 사는 생명체가 모두 멸종될 수도 있는 위기가 닥쳤단 말이야. 이제 그 검을 뽑아야 해. 너희들이. 더 늦기 전에.”
“우리?”
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도해를 보다가 윤형이를 보다가 피식 콧방귀를 꼈다.
“헐, 말도 안 된다. 우리가 무신 어벤져스도 아이고. 참말로.”
“너희들이 뽑을 수 있는 애들이야. 확실해.”
“증거를 대라, 증거.”
도해는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너, 몸에 커다란 점 있지?”
나는 깜짝 놀랐다. 점은 또 언제 봤지? 윤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등을 가리켰다.
“어어어? 형, 여기.”
얘는 아주 눈치를 쌈 싸 먹었다.
“즈, 증거가 그거 하나가?”
나는 도해에게 다시 물었다.
“살아있는 것을 죽인 적 있지?”
“살인?”
“사람이 아니고 애벌레나 곤충. 일부러 죽인 적이 있잖아.”
“에, 뭐, 많이 그런 거는 아니다.”
나는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바지에 오줌 싼 적 있지?”
그건 정말 단순한 실수였다. 그걸 말할 줄은 예상 못했다. 리리가 눈을 반짝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선수를 쳤다.
“아, 뭐, 그렇다 치고. 그래, 검 뽑으러 가자.”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나 수천 년은 더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갔다.
“잠깐, 너희들이 검을 뽑을 운명의 아이가 아니라면 검은 뽑히지 않을 거야.”
“우리가 운명의 아이라며? 거짓말했나?”
도해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사실 수천 년 동안 운명의 아이를 찾아 헤맸거든. 열 살 또래 아이가 검을 뽑을 거라는 예언 때문에 무조건 이곳으로 아이들을 데려왔지. 수천 년 동안 말이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팔천몇백만 어쩌고 한 게 애들 데려온 숫자가?”
도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우리가 운명의 아이라 검을 뽑는다면?”
그러자 도해가 우리 가까이 다가와 작게 말했다.
“만약 검을 뽑으면 그 즉시 샘물에 식혀야 해.”
하지만 나무를 한 바퀴 돌아도 검은 보이지 않았다.
“검이 있어야 뭐 뽑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자 도해가 나무의 북쪽으로 갔다. 그곳의 잎사귀는 다른 곳에 비해 생기가 없고 시들어있었다. 도해는 나무줄기를 껴안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휙휙휙
나무 밑 흙이 푹푹 파여 옆으로 날아가 쌓였다. 잠시 후,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우와. 뿌리가 까맣게 썩었네.”
해미 누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썩고 있어.”
도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어디 있노?”
리리 말에 도해가 도깨비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와, 도깨비방망이 맞제? 그거 든 거 보니 참말로 도깨비 맞네?”
내 말에 도해는 나무를 톡톡 쳤다. 우리들은 얼른 도해 옆으로 가 도해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우와!”
나무뿌리에 붉고 날카로운 기다란 칼이 꽂혀 있었다. 칼이 꽂힌 곳에는 나무 진액이 진뜩하니 나와 있었다. 꼭 나무의 눈물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칼이 어디서 나왔지?”
해미 누나 말에 도해가 말했다.
“눈에 안 보였던 것뿐이야. 저 칼을 뽑아야 해.”
“내가 뽑을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얼른 다가가 붉은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으악.”
손잡이는 엄청 뜨거웠다. 손바닥을 보니 칼자루 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쓰리고 아팠다.
“에휴, 너는 아닌가보다. 다음.”
형과 누나들은 줄을 서서 도전했다. 모두 칼을 빼지 못하고 손에 무늬만 새겼다. 리리가 나갔다.
“으라차차.”
우리 반 장군 리리가 뽑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니가 해 봐.”
마지막으로 윤형이를 보며 도해가 말했다. 윤형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안 되는데 야가 될 리가 있나?”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도해는 윤형이에게 얼른 칼을 뽑으라고 말했다. 윤형이는 자신 없는 몸짓으로 다가가다가 도토리묵 아저씨 손을 잡았다. 도토리묵 아저씨는 좋아라 윤형이와 같이 칼을 잡으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다 빨리 이리 와.”
“맞다. 함께 뽑으면 되지 뭘 따로 뽑나?”
우리는 우르르 달려들어 한꺼번에 칼을 잡았다.
“하나 둘 셋!”
있는 힘껏 칼을 잡아당겼다.
“으악.”
그 순간 우리는 칼을 잡은 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검이 뽑히는 순간 나무 밑 동굴이 나타났다.
“오! 오! 오! 너희들이 운명의 아이였어.”
도해는 눈물을 흘리며 팔짝팔짝 뛰며 그 말만 계속했다.
“와, 검을 뽑았네.”
검이 뜨거워서 그런지 김이 났다. 손이 타버릴 것 같았다.
“빨리 샘으로 가자.”
도해가 우리를 데리고 나무를 지나 왼편 바닷가 벼랑으로 갔다. 붉은 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쓰윽 쓰윽 쓰윽
아주 기분 나쁜 소리였다.
도해가 도깨비방망이를 땅에 대고 두드렸다. 땅이 파이며 물이 조금 고였다. 도해는 계속 방망이를 두드렸다. 점점 물이 늘어나 작은 샘이 됐다.
“빨리 저 샘에 칼을 담가.”
치이이이익
마치 검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이 은색으로 변했어.”
“잘했어. 이제 생명의 녹색 돌을 찾아서 나무 밑에 묻으면 돼.”
그때였다. 샘 옆 오른쪽 검은 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콰라라라
냄새도 심하게 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뭔 냄새가 이리 심하노?”
그때 다시 한번 동굴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도망가자.”
우리가 막 뒤로 도는 순간. 동굴 안쪽에서 반짝 빛이 났다.
“저게 생명의 녹색 돌 아니가?”
내가 속삭였다.
“맞아, 저걸 가져와야 해.”
“말도 안 돼. 저걸 가지러 갔다가 다 죽는다.”
해미 누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해가 앞으로 나갔다. 그 뒤를 리리 장군이 뒤따르고 그 뒤를 윤형이가 칼을 든 채 따라갔다.
“야, 윤형아.”
나는 목소리를 낮춰 불렀지만 윤형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갔다.
“미치겠다. 말도 잘 안 하는 기 진짜 쇠고집이다.”
나는 얼른 윤형이를 따라갔다.
크르르르릉
그때 괴물이 움직였다. 냄새는 더 심해졌다. 코가 썩을 것 같았다.
동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괴물의 몸이 차츰 보였다. 괴물은 동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머리가 몇 개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는데 각기 따로 놀았다. 물렁물렁한 몸은 쉴 새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괴물의 몸 한가운데 둥근 녹색 돌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 괴물 몸이 찌익 늘어났다. 그러더니 해미 누나와 자전거를 삼켰다.
“으악. 누나, 누나.”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은 도토리묵 아저씨, 도도해, 그리고 나와 윤형이도 한꺼번에 삼켜 버렸다.
“아휴, 냄새. 여기 괴물 뱃속 맞지?”
리리가 물었다. 도해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해미 누나가 핸드폰을 켰다. 괴물의 뱃속이 그대로 드러났다. 회색과 누런색이 섞여 있는 괴물 뱃속을 보니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따릉따릉 소리가 났다. 도토리묵 아저씨가 해미 누나 자전거 벨을 누른 것이다.
“나, 자전거 태워줄 사람.”
도토리묵 아저씨가 물었다.
“지금 자전거 탈 때가 아니다, 아저씨야.”
리리 말에 가만히 있던 도도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괴물 몸은 한없이 늘어나는 것 같으니까 자전거를 한 번 타보자.”
해미 언니가 도토리묵 아저씨를 태우고 자전거를 달렸다.
“야호!”
아저씨는 좋아서 막 소리를 쳤다. 괴물의 몸이 점점 넓어졌다.
“우리는 줄넘기 할까?”
리리와 도해도 줄넘기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도 놀자.”
나와 윤형이는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듯이 막 놀았다. 잠시 후. 괴물 몸이 막 흔들렸다.
“어어어. 왜 이러지?”
그 순간 우리는 괴물의 몸 한쪽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러다 갑자기 밖으로 튕겨나왔다.
“으악.”
괴물이 어지러워서 토한 것 같았다. 괴물도 놀랬는지 슬금슬금 움직이다 점점 쪼그라들더니 사라졌다. 자전거와 줄넘기와 칼을 검은 뱃속에 두고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우리는 얼른 녹색 생명의 돌을 들고 바람의 언덕 커다란 나무로 달려갔다. 검은 뿌리 밑에 생명의 돌을 넣었다.
푸르르르
나무가 재채기를 하듯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꼬? 시시하다.”
하지만 도해는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잘했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얼른 집에 가자.”
우리는 또 도해와 함께 하늘을 날아 동네로 왔다.
“잘 가라 다들. 너희들에게 작은 선물 하나씩 보낼게.”
도깨비 도도해가 말했다. 몹시 피곤해서 고맙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누나, 내일 또 만나자.”
윤형이 말에 도도해는 씨익 웃었지만 대답은 안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와 아빠가 TV를 보고 있었다. 나와 윤형이를 본 엄마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치료 약이 개발됐대. 윤형아, 엄마 내일 온대. 너희 아빠도 이제 금방 나을 거야.”
나와 윤형이는 서로 마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도해 누나 말이 맞았네?”
이창숙
어떤 동화는 시로 바꾸니 생기가 돌았고 어떤 시는 동화로 바꾸니 고소해졌다. 원래, 시 속에 이야기가 숨어있고 동화 속에 노래가 담겨있으니까. 벌써 늦은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요즘.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겠다고 새롭게 마음먹는다.
2021/09/28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