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언가로부터, 어딘가로부터 대물림되는 죄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 사실에 손쓸 수 없이 내던져져 있다. 문학이 제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이 방기됨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애꿎은 ‘대속’의 상태를 향해 우리를 떠미는 목소리. 서로의 죄를 향해 이어지는 기울어진 움직임 전반은 불완전하게나마 ‘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왔기 때문이다.1) 신해욱의 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봄날의책, 2024)는 기원도 출처도 알 수 없는 속죄의 의무에 속박된 ‘우리’가 언어와 더불어 태어나는 그 원초적 장면을 환기시킨다.

언젠가 말씀이 있었어.

언젠가 우리는 들었는데. 전해야 했는데. 하나는 떠올렸다.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어서. 독을 깼어.

우리가?

응. 우리가.
(…)

하나는 회상에 잠겼다. 등에 말씀을 옮겼던 것 같아. 필사적으로. 상습적으로. 등에서 등으로. 돌고 돌아 요원해질 때까지. 노곤해질 때까지. 식상해질 때까지. 웃음이 터질 때까지. 손쓸 수 없는 훼손에 이를 때까지.

(…)

등이 가려웠다.

지워버리자.

응. 지워버리자.

우리의 입김이 모락모락 눈발에 섞였다.

―「목욕탕의 굴뚝이 있는 풍경」 부분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우리’ 탄생의 첫 장면에서부터 상속자이다. “언젠가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으나 다시 어딘가로 전해져야 하는데, 이 난처한 말의 불연속성 가운데 죄를 상속 받는 ‘우리’가 형체를 갖추는 것이다. 언젠가의 말씀은 내 것이 아니므로 “필사적으로. 상습적으로. 등에서 등으로. 돌고 돌아 요원해질 때까지.” 옮겨 써야만 지속될 수 있다. 위의 장면은 언어와 존재가 맺는 관계, 수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숙고해온 문제의 최초 단계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


2

장-뤽 낭시는 존재와 언어 간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해, ‘에고 숨(ego sum, 나는 존재한다)’에 관한 인류사의 가장 유명한 명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주인으로부터 그의 다른 문장을 추출한다. 낭시가 데카르트의 두번째 『성찰 Méditation』에서 선택해 직접 번역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Je suis, j’existe)라는 이 발언은, 이 발언된 것, 이 진술된 것은 내가 그것을 입 밖에 내고 제안하고 발언하거나 나의 정신 안에서 생각하는 모든 때에 필연적으로 참이다.”2) 원문의 번역이자, 그 자체로 존재-언어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주석이기도 한 이 문장의 함의는 “나의 존재가 사유(나는 생각한다는 사실)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또는 그것과 관계하기 이전에, 더 나아가 관계하기 위해―먼저 언어의 표명(‘나는 존재한다’라는 발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3) 존재가 언어의 표명에 의존한다. 이는 그렇게 탄생하는 ‘나’ 혹은 ‘우리’에 관한 다음의 비밀을 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알고 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가 그들에게 하나의 설화를 들려준다. 모인 이 사람들, 우리는 그들이 집회를 하는 것인지, 떼거리인지, 아니면 부족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형제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모여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설화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4)

낭시 역시 ‘말씀’에 관한 최초의 장면 하나를 불러온다. 언젠가 말씀을 전하는 이가 있었다. 그가 어느 곳으로부터, 어떤 경로로 모두의 앞에 서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기 이곳 사람들은 신해욱의 ‘우리’와는 달리 그가 전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김없이 이해한다. 이는 이미-온전히 알고 있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가 연합하는 모습으로, 다름 아닌 신화의 탄생 장면이다. 어떠한 질문도 의구심도 차단된, 오직 설화의 현시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언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어떤 기다림에 대한, 세계 자체의 기다림에 대한 답으로서 존재하는 언어. 그 “토대와 서약의 신성한 언어”5)와 그것을 둘러싸고 마주 앉은 사람들의 장면은 신화 밖에서 공동체는 탄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두 기원의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신화란 ‘제2의 자연’이란 사실이다. 신화는 허구이며 우리의 환상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사이지만, “그 자신과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자연이 힘들을 생산해내는 같은 과정에 따라 의식에서 생산되며, 그 자연의 힘들을 무대화”6)한다는 점에서, “한 우주를 직접적으로 종결짓는 입의 열림”7), 즉 자연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신화-자연은 문학이 될 수 없다. 절대적인 동일성을 지닌 신화는 그 동일성을 위해 자기 기원을 전유할 수 있다고, 혹은 자기 기원의 비밀을 감출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전적인 자만”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낭시가 보기에 그것은 문학이라기보다, 전체주의적이고 내재적인 원리로 끝내 자기 파멸을 맞는 흔한 ‘공동체’의 논리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공동체는 ‘공동체’에 포섭되지 못한 잔여를 남긴다. 공동체가 개체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발본적 차원에서의 저항 자체이기에 그 가운데 반드시 “트인 밤”(「자율 미행」)이 열리기 때문이다.
  신해욱의 화자가 ‘우리’라는 수상하고도 불완전한 이름으로 지면 위에 생성되었다가도 우리의 귀결된 ‘자연’이 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서 발화와 동시에 현시되는 것은 ‘우리’이다. 이 ‘우리’는 개체들의 집합이나 전체로서가 아니라,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공동의 나타남, 오직 공동으로서만 나타남 그 자체를 내보인다. 신해욱의 “우리”는 “하나”와 또다른 하나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와 ‘우리’만이 있으며, 이 “우리는 어울리지 않”(「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고 “우리는 어리둥절 깨어나”(「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며, 우리는 언제나 “한발이 늦”거나 한발이 “남은”(「슈샤인」) 낙오된 상태로서 만나고 헤어진다. 이런 부조화로 인하여 이들은 스스로를 탄생시킨 최초의 말씀을 기억하거나 전달하는 데 지독하리만큼 무능하다. 이들에게는 목욕탕의 설화부터 ‘레닌’에 관한 영웅서사까지, ‘떡 하나’에 관한 괴담부터 장승의 수수께끼까지 그 무엇이든 내면화될 수 있는 가치나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말씀의 온전한 전달은 영원히 유보되고, 그러한 답보의 상태로서 신해욱의 ‘우리’가 유지된다.

우리는 멀어지고 있다 아홉이랬지

(…)

아홉 개의 잘못을 맞추고
우리는 청산을 해야 하는데
벌판을 벗어나야 하는데

오차는 크다
우리는 방치되어 있다

―「크로마키 스크린」 부분
오차가 커서 방치되고 멀어지는 ‘우리’의 ‘미청산’ 문제는 신해욱 시집의 ‘말씀’을 ‘문학’이라는 목소리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의 미완성은 구전(口傳/舊傳)의 구조적 미결절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계승’ 혹은 ‘계승을 위한 이야기’란 공동체를 위한 신화에 다름없으며, 문학은 신화가 아니라 신화들의 단절 그 사이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이다. 풍문으로 들려오던 문학에 관한 소문을 신해욱은 이제 진실로 만들고자 한다. 신해욱의 ‘우리’는 언어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발생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가 오직 탈-존의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나’는 언어를 따라 나를 벗어나, 나를 바깥에 내어두는 것으로서만 존립이 가능해진다는 비밀 자체를 재현함으로써 존재가 토대로 하는 공동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현시한다.


3

앞서 “같은 설화를 듣고” 생성된 ‘형제들’에게로 잠시 돌아가보자. 이들은 어느새 자기 파멸에 이른 공동체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분주하다. 신화 바깥에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기에, 이들은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야만 한다. 신화 재창조에 앞서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향수가 당위로서 공유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의 ‘형제들’과는 달리, 신해욱의 ‘우리’는 다른 것을 애도한다. 그것은 모든 애도의 사실상 최초의 애도, 토대가 되는 애도, 즉 “어머니에 대한 애도”8)이다. 신해욱의 ‘우리’가 행하는 애도에서는 법으로서의 어머니, 말씀의 주인으로서의 어머니 자체가 아니라 어머니의 결여와의 분리, 체험된 상실의 부재만이 문제가 된다. 각자의 등에 옮겨 쓴 말씀의 흔적은 쓰이자마자 지워버렸으니, 저 습기 가득한 목욕탕에서 상실된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체험되고 각인된 상실의 부재만이 있을 뿐이다. 노스탤지어적 상실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된 딸들, 즉 할머니들의 공동체는 시작되는 것이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아름다운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할머니들

펼치면 넓어지는 것
이야기 속의 벌판은 넓었고

나를 좀 끼워줄래

나를 끼워주는 할머니들

놓친 대목에 헝겊을 덧대며
할머니들 먼 훗날에
나를 숨겨주는 꼬부랑 할머니들

할머니들 쉬지 않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꿰매어
자장자장 벌판을 덮어주는 할머니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전문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의 맞댄 이마 역시 “이야기보따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들 “이야기 속의 벌판은 넓”고, “놓친 대목에 헝겊을 덧대며” “이야기를 꿰매어”볼 수도 있지만, 나를 좀 끼워달라는 나의 부탁을 할머니들이 기꺼이 들어주면서 구멍 난 이야기는 보따리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쉬지 않는 할머니들은 이야기의 “먼 훗날에/ 나를 숨겨주”고, 이때 ‘나’와 ‘할머니들’ 사이에 이상한 단절과 열린 틈이 발생한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뒤를 밟고 있다

뒤를
할머니는 맨발로

밤을 돌아
돌고 돌아
어딨을까 묘연한 밤을

어딨을까
할머니는 할머니를 벗어나

헛도는 것 같아
그러자 나는 두리번거리고 있다

(…)

나가지 마시오
할머니의 지평선을 넘어

그러자 나는 활보를 하고 있다
부자유를 잃고

(…)

짚이는 것이 있다

짚이는 것이 있다 나는 뿌리치고 있다

―「자율 미행」 부분
단절이 발생하는 곳은 가장자리이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뒤를 밟”는 곳. 거기서 “할머니는 할머니를 벗어나”고 이에 ‘나’는 헛돌고 두리번거리지만 그럼에도 “짚이는 것이 있”어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앞과 뒤를, 각자의 이마를 뒤밟는다. 이곳에서 ‘나’와 ‘할머니들’로 지칭되는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접촉하는 동시에 분리되며 그렇게 그들 사이의 가장자리를 유지한다. 가장자리는 “가렵다. 번지고 있다.”(「화생방」) 가려움의 전파로부터 야기되는 정념은 “부자유를 잃”은 ‘우리’가 영원히 “활보를 하”게 만드는 기이한 움직임을 지속하게 한다.
  여기가 바로 ‘자연의 가장자리’라면 그것은 언어의 대타항으로 설정된 자연이 아니라, 제2의 자연인 신화의 가장자리이다. 신해욱의 시는 이 신화의 ‘끝’에서의 접촉이 우리 존재의 한계, 즉 “산 채로 잃은 삶”(「호산나」)의 한계에서 생성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자유를 잃은 ‘우리’의 활보는 “소생실에 누워. 끝에서 끝까지. 우리는 이불을 쓰고. 세라는 대로 열까지.” 세는 모습으로 변주되기 때문이다. 기원으로부터 언제나 멀리 있었던 우리는 신화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 자연의 역사(史)와 죽음(死) 사이를 미행하고 활보한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들의 공동체는 중심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한다. 열을 세기 직전에 남겨진 것, 남겨지는 것이 생산하는 가장자리로 계속해서 향해가는 둔중한 움직임이 신해욱이 말하는 ‘우리’이다. 자기 기원과 자기 파멸을 동시에 구성하는 내재성으로의 완성에 못 미치기를, 그것으로부터 부단히 미끄러지기를 요구하고 호소하는 멈추지 않는 움직임. “자신의 단절 자체를 통해 그 전염을 전달하는, 공동체 자체의 소통”9). 이 단절된 신화를 우리는 신해욱과 더불어 ‘문학’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런데 멈출 수는 없잖아

그런데 멈출 수는 없다는 것

―「투어」 부분

최가은

문학평론가.

문학으로 발생하는 ‘우리’의 희미함을 길게 붙잡고 있다.

2025/06/18
73호

1
“단절 속에서, 또한 단절 자체에 따라 분명히 분절되는 공동체의 어떤 목소리가 있다. 우리는 그 단절의 목소리에 하나의 명칭을 부여했다. 즉 문학(또는 글쓰기, 우리는 여기서 이 두 단어를 서로 부응하는 뜻에 따라 받아들인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명칭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어떠한 명칭도 적합하지 않다. (…) 문학은 연합에도 소통에도 적합하지 않다.”(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151~152쪽. 강조는 인용자.) 이 글은 신해욱의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가 바로 이와 같은 부적합한 의미에서의 ‘문학’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2
박준상, 「정치적 ‘행위’와 공동체―장-뤽 낭시를 중심으로」, 《철학논총》 78권 4호, 새한철학회, 2014, 356쪽에서 재인용. 원어 표기 생략 및 강조는 인용자.
3
같은 글, 같은 쪽.
4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108쪽.
5
같은 책, 110쪽.
6
같은 책, 122쪽.
7
같은 책, 124쪽.
8
피에르루이 포르, 유치정 옮김, 『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 문학과지성사, 2024, 24쪽.
9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