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로 커밍아웃을 꼽았다. 시인이나 소설가, 동화작가 등 장르와는 상관없이 장래희망 란에 글 쓰는 직업을 적기 시작할 때부터 그랬다.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했을 시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저 막연히 한 번쯤 겪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지개책갈피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통과했다.
   이제는 꼭 어떤 제도의 승인을 거쳐야만 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창작자가 커밍아웃을 하면 갖게 되는 부담에 대해서도 다소 입체적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퀴어문학 붐’이라기엔, 국내 문단 문학 안에서 ‘당사자 작가’라고 불리는 작가는 아직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퀴어문학 관련 행사에 초청된 ‘당사자 작가’는 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작가님에게 퀴어문학이란 무엇인가요?”

   무지개책갈피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퀴어문학이 정말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저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함께 긴장하게 된다. 퀴어문학이라는 카테고리가 퀴어문학을 좁힐 것이라는 생각은 내겐 너무 멀게 느껴졌고, 나는 퀴어문학의 방향성에 대해 되묻거나 의심한 적도 없었다. 같은 단체에 속한 활동가 분들과도 의견이 다른 부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작년 11월 9일 진행한 퀴어문학 포럼 등 《비유》를 통한 무지개책갈피 활동과 연재는 나에게 의미 있고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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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계에서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퀴어문학’이라고 부르게 된 지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쓰인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퀴어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평론가나 연구자도 늘어났고, 출판계도 한국의 퀴어문학 독자층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가시성을 획득한 다음에는 한 단계 더 내밀한 물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지개책갈피는 그동안 크고 작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퀴어문학의 영역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독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퀴어문학 플랫폼으로써, ‘어떻게 해야 더 좋은 퀴어문학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그렇다면 더 좋은 퀴어문학이란 뭘까? 그 ‘좋다’라는 판단이 기반하고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퀴어문학이고, 퀴어문학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언젠가는 퀴어문학이라는 구분조차 거추장스러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오는 원론적인 물음은 개인의 고민으로 해소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해소하려는 것보다는 공유하려는 목적의 움직임이었지만.)
   퀴어문학을 뛰어넘는 퀴어문학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목소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퀴어하게 읽고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을 구상했다. 그렇게 퀴어 당사자나 특정 집단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되 다양하게 제시되는 의견들을 수집해보자는 결론에 다다랐고, 퀴어문학 포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된 퀴어문학 포럼에서는 다채로운 의견이 오갔다. 먼저 연구자 및 평론가 섹션은 한국문학 장에서 거론되는 퀴어문학에 새롭게 접근하는 시각을 제안하였다. 다음으로 창작자 섹션은 퀴어문학의 당사자성에 관한 이야기를 내밀하게 다룰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세번째 섹션은 영어덜트(아동청소년문학)를 다루는 시간이었는데, 영어덜트 문학 내 퀴어 담론의 필요성을 조명하고 방향성을 제시해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문학과 독자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는, 출판 섹션이 진행되었다. 포럼은 각자의 시선과 방법으로 퀴어문학을 말하고, 또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동시에 《비유》에서 진행된 본 연재 또한 퀴어문학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는 분야의, 보다 다양한 필진을 섭외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한결 폭넓어진 주제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 주제 속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깊이 있는 텍스트를 통해 소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통의 창구를 마련하고 나서 얻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퀴어문학 담론 내 당사자 중심주의에 대해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독자가 얼마나 다양한 퀴어문학을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더 다양한 작가와 장르,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독자의 갈증은 이러한 대화의 장을 통해 표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자리가 앞으로도 마련된다면 퀴어문학의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쪽으로 자리할 것이라는 낙관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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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나에게 퀴어문학이란 무엇일까? 나 또한 창작자면서 퀴어문학 관련 활동가이다. 그런데 그저 습관처럼 퀴어문학, 퀴어문학 부르다보니 그 질문이 낯설게 다가온다. 퀴어문학은 뭐고, 퀴어는 무엇일까. 예술과 창작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퀴어를 어떻게 생각해야 사람들이 덜 소외될까. 퀴어문학의 확장을 얘기할 때 그것이 어떤 예술적 가치를 지니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시작은 다른 곳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소외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퀴어문학을 좋아하면서 비영리단체에서 활동까지 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퀴어문학이 ‘내 이야기’가 스며들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외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하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틀 밖으로 나와야 하니까.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 연재가 진행되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2019년에도 무지개책갈피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창작교실과 세미나를 진행했고, 두번째 출판 프로젝트 마무리와 새로운 팟캐스트 진행에 참여하며 꽤 바쁜 나날을 보냈다. 2019년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여전히 무지개책갈피 활동가이다. 그러면서도 퀴어문학이라는 주제로 무언가를 발언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때로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버벅거리는 글쓰기 습관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책상과 침대는 여느 때와 같이 너저분하며, 심지어 통장 잔고마저도 별로 쌓이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다. 산 하나를 넘었는데, 꽤 높은 산이었던 것 같은데, 당장은 실감나지 않는 듯한 느낌. 다만 확실한 건, 2020년에도 무지개책갈피 회의록은 2주마다 갱신될 것이라는 점이다.

   무지개책갈피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여 퀴어문학에 천착하는 것도 결국 ‘변방의 퀴어 1人’으로서 좀더 잘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권 관련 활동이 그렇듯, 이것이 더이상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고 필요 없어질 날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날이 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무지개책갈피는 앞으로도 퀴어문학과 관련해서 ‘참 이것저것’을 하는 단체로서 기능할 것이다. 지금껏 던져온 질문들의 퀴어함을 향유하면서 말이다. 그 ‘이것저것’이 좀더 재밌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퀴어문학이 더 많은 빛으로 반짝일 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좋겠다.


무지개책갈피(활동가 다홍)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20/02/25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