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히로시마의 하늘을 바로 잇는 항로가 열리기 전에 그곳으로 가는 어려운 경로와 더 어려운 경로가 있었다. 더 어려운 경로는 오사카에서 가능한 모든 육로 편을 골라 타는 것으로 서울과 부산만큼 떨어진 두 도시는 신칸센으로는 한 시간 반, 고속버스로는 여덟 시간이나 소요되었다. 더구나 오사카를 요새처럼 에워싼 황금빛 역사의 교토, 야경 도시의 고베, 사람과 사슴이 교묘하게 상생하는 나라 삼각지대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고 더 멀리 동쪽으로 펼쳐진 열도의 중심과 교차로들의 매혹을 뿌리치고 외떨어진 서쪽 소도시로 눈길을 돌리는 일에는 반골적인 결심마저 필요했다. 그보다 나은 경로는 후쿠오카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사카에 비하면 당일 왕복이 가능한 근교이기도 하거니와 중간에 위치한 가라토 시장에 들르면 살과 단물이 오른 제철 해산물을 값싼 가격에 맛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개 실바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후쿠오카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새로운 방향을 잡기보다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선택했다.
  여기 이곳을 떠나 쉴 수 있는 곳. 막연한 주문에 윤재가 급히 찾은 항공권은 한 시간 반 만에 우리를 가까운 이국땅으로 데려다주었다. 허공에 머물던 시간은 짧은 선잠처럼 지나갔고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리무진 버스의 부드럽게 서고 또 출발하는 완숙한 운행이 서서히 현실감을 되찾아주었다. 몸을 맡긴 단속적인 흔들림과 건조한 히터의 소음, 시야를 가득 채운 아침의 밝음, 긴 고속도로의 깨끗한 잿빛, 겨울임에도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들이 길을 따라 좁고 우거진 군락을 형성한 풍경이 그제야 의식 안으로 밀려들었다. 공항 정류장에서 맞닥뜨렸던 12월 히로시마의 날씨도 떠올랐다. 서울과 비교하면 푸근한 편이었지만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바람이 불면 몹시 추웠고 햇볕은 휴양지처럼 따가웠다. 구름마저도 크고 새하야며 경계가 주변으로 번지지 않아 뜯긴 채로 시간이 멈춰버린 동남아의 구름을 닮았다고 차가운 유리창을 짚으며 말하자 윤재는 내 손을 끌어다 잡았다.
  윤재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내 표정과 호흡이 드러내는 짧은 기미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산 시원한 말차를 내밀며 목이 마른지 묻고 졸리면 자기 어깨에 기대서 자라고 권했다. 내가 모두 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여전히 귀가 아픈지 물었다.
  비행기가 흐린 새벽하늘로 이륙하며 고도를 높일 때 양쪽 귀가 먹먹하게 잠기다가 묵직하게 짓눌리더니 보이지 않는 뭉툭한 막대가 귓속을 쑤시고 헤집고 짓이기기 시작했다. 소리는 멀리 물러났다. 세상을 향해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공간, 안과 밖을 연결하는 작고 구부러진 통로만이 중요해졌다. 오로지 그곳을 채운 팽팽한 압력만이 분명해진 것인데 다행히 비행이 끝나가는 동안 고통은 간헐적으로 바뀌고 이내 잦아드는 듯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은 순간 오른쪽 귓속에서 무언가 펑 하고 터지고 말았다. 이 충격으로 주변 소음이 다시 돌아왔고 막힌 부분이 뚫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후 오른쪽 귀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구불구불 꼬인 입국 수속 대기줄을 따라 걸으며 이런 증상을 말하자 윤재는 침을 모아 꿀꺽 삼키는 방법과 코를 잡고 볼에 바람을 넣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 게 아니라 파열된 살을 메워야 한다고, 그런 아픔이라고 설명하자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 뒤에서 밀치며 달라붙는 입국자들 때문에 무거운 배낭이 흘러내릴 때마다 윤재는 몇 번이고 어깨를 으쓱여 끈을 추켜올렸다.
  다른 방법이 생각났어. 반드시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 방법이야.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조용한 일본 버스 안에서 윤재가 한국말로 속삭였다. 어디선가 들은 그 민간요법이란 귓속으로 천천히 따뜻한 숨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주의할 점은 소리가 되기 전 정체된 입김이 스스로 저쪽으로 건너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불어넣지 않고, 밀어넣지 않기.
  나는 고개를 숙여 입술 모양에 알맞게 귓바퀴를 가로로 눕혔다. 귀와 입이 완전히 접촉하여 사이가 들뜨지 않도록 폐쇄하기 위함이었다. 윤재가 아래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목뒤로 쓸어넘겨주었을 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웃으며 몸을 움츠렸다. 윤재는 아랑곳 않고 집도의처럼 진지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베어 물 듯 한껏 벌린 입으로 내 아픈 귀를 봉했다. 처음엔 빈 곳이 있었지만 곧 밀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윤재는 입속에 과한 풍속이 일지 않도록 혀를 목구멍 쪽으로 둥글게 말아두겠다고 장담했다. 과연 잘 해낸 듯 동굴의 종유석과 석순 사이에서 날 법한 축축하고 비틀린 떨림이 전해졌다. 입을 뗀 후에 윤재는 정확히 삼십 초를 셌다고 말했다.
  어때, 효과가 있어?
  나는 손바닥을 귓바퀴에 붙였다 떼어보았다. 오목한 표면과 구불구불한 표면이 만나자 철썩 달라붙었고 크고 깊은 물소리, 어쩌면 작은 새알 속에 이는 느릿느릿한 소용돌이가 틈새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손을 떼면 무게도 없는 한 줌 공기 덩어리가 되어 삐져나올 뿐이었다. 방금 입김이 닿았던 귀는 손보다 따뜻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윤재는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어쩐 일인지 윤재와 함께한 히로시마 여행을 떠올리면 그 리무진 버스에서의 대화만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의 긴장과 자포자기. 윤재의 입술이 내 귓바퀴를 덮었을 때 온 세상이 윤재의 숨으로 덮인 것 같았다. 윤재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했다면, 갑자기 놀라 비명을 질렀다면, 무심결에 아무 말이라도 꺼냈다면 내 귓속의 얇고 연약한 막은 날카로운 이빨 없이도 찢길 수 있었다. 나는 윤재가 나를 파괴하도록 혹은 그러지 않도록 내버려두었다. 그후 3박 4일을 같이 보냈는데도 윤재는 여행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함께 재건된 거리를 걷고, 일본식 굴튀김과 서양식 브런치를 먹고, 얼음 잔에 든 소추를 마시고, 섬으로 들어가는 페리에 역방향으로 앉아 갈라진 수면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물거품과 빛 조각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손을 잡고, 몸을 기대고, 의미 있는 고적과 유적을 차례로 방문했지만 이제 와 어떤 형태의 대화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윤재는 내 곁에 있었지만 빛에 번진 윤곽과 물에 잠긴 웅얼거림을 남긴 채 나를 빠져나갔다.
  실은 함께 돌아오기로 한 크리스마스 아침에 윤재는 떠나고 나는 그곳에 남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나도 돌아와야 했다.
  여기 이곳. 윤재와 나는 책과 화분이 긴 시간 착실하게 벽의 면면을 집어삼킨 빌라에 함께 살고 있고 좋았던 시절처럼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쳐 바닥에서부터 특별한 맥락 없이 쌓아올린 책 기둥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구석구석 끼워넣고 매달아 걸은 다년생 식물들이 이번 해에도 죽지 않고 나이를 먹도록 하루 두 번 환기하는 것이 우리가 집을 돌보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겨울이면 히로시마에서 내내 둘렀던 짧은 연회색 커플 목도리를 꺼내고, 저녁을 먹은 뒤 서로의 맞은편에 비켜 앉아 글을 쓰는 네모난 탁자 위에는 신사 마을 기념품 가게에서 산 도자기로 빚은 손톱만 한 거북이 네 마리가 항상 나무 접시에 담긴 채 놓여 있으며, 사진첩에는 한 일본인 아이가 선뜻 먼저 다가와 우리 둘을 찍어준 만조를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지만, 또 우리는 가끔 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내가 거기에 남고 윤재를 혼자 보낸 일은 누구도,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호텔 앞에서 공항으로 가는 윤재를 배웅한 뒤 외곽에 있는 더 작은 숙소로 짐을 옮겼다.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산 소금 크림 과자와 위스키 두 병의 무게 균형이 맞지 않아 캐리어는 잘 닦긴 길 위에서도 뒤뚱거렸다. 숙소로 가는 길은 회색, 귤색, 담녹색의 저층 맨션들이 죽 늘어선 한적하지만 무척이나 복잡한 골목이었다. 길눈이 어두운 나로서는 외출한 뒤에 지도를 보지 않고서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특색 있는 화단이나 음료 자판기가 놓인 자리, 드물게 인가에 섞여 있는 몇몇 음식점의 인상을 기억해두려 했지만 한 번 두 번 모퉁이를 돌고 나면 금세 잊어버렸다.
  숙소 건물 1층은 협소한 주차장과 엘리베이터뿐이었고 2층에 로비와 테이블 세 개가 놓인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평소에는 직원이 상주하지 않는지 전화를 걸자 카운터 뒤쪽 문에서 니트와 데님을 편하게 입은 젊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정해진 시간보다 이른 체크인을 도와주며 시종일관 친절하지만 약간 냉정하게 느껴지는 영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가 내 여권을 확인하며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의도인지 몰라 머뭇거렸다. 남자는 이 호텔에서 일한 이 년 동안 한국인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혼또니?
  내가 알고 있는 일본어로 묻자 그가 거짓말처럼 이를 보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침착함을 되찾더니 정말이라고, 물론 한국을 여행한 경험은 있지만 이곳에 서 있는 한국인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는 카드키를 선물처럼 건네며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했다.
  방은 싱글 침대와 캐리어를 펼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벽의 반을 차지한 가로로 긴 창이 놀라웠다. 그림 액자 같은 창틀 너머로 탁 트인 하늘과 키 작은 건물들의 텅 빈 옥상을 볼 수 있었다. 구획을 이루며 빽빽하게 펼쳐진 시가지 끝에는 빛을 빨아들이며 번쩍이는 강물이, 그뒤로는 물에 뜬 얇은 섬 같은 비탈과 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이 훤히 내다보였다.
  사진을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꺼내자 때마침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측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누르면 전화를 끊지 않고 진동을 무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걸려오는 전화나 메시지 알림으로 또다시 진동이 울릴 것이고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방 안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옷장에 걸린 샤워가운을 꺼냈다. 가운은 여러 번 세탁한 듯 솔기가 닳고 결이 지푸라기처럼 깔끄러웠는데 부피는 여전히 숨죽지 않고 두툼해서 휴대폰을 둘둘 감싸자 마치 우는 아기를 안은 것 같았다. 다급하게 주위를 뒤져 원목 콘솔 속에 숨겨진, 아담한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철제 금고를 찾았다. 금고 표면은 차디찼고 여닫는 문의 마감은 위험천만하게 날카로웠다. 손에 든 뭉치를 그 안에 쑤셔박고 나자 소름 끼치는 고요가 찾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짐을 풀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나갈 작정이었지만 조금도 허기를 느낄 수 없었다. 대신 이길 수 없는 피로와 졸음이 밀려왔다.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 부풀어오른 침대로 고꾸라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침구의 안온함 속에서 유리창을 통과해 천장에 드리운 정오의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조그맣게 숨을 내쉬자 이 상태가 얼마나 익숙한지 또 얼마나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지 떠올랐다. 낮이 저녁이 되고, 새벽이 아침이 되던 끝없는 순간을 기억해낸 것이다.
  아직 본가에 살던 어느 날 조짐이 있었다. 부모님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은 직후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조문을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남동생은 방문을 열어둔 채 슈팅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 순간마다 조용하고 절제된 힘으로 키보드를 내리치고 있었다. 여동생과 나는 거실 큰 소파에 데칼코마니처럼 반대로 누워 잠옷 위로 드러난 서로의 발목과 종아리를 겹치고 꼬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발치 너머로 한 번씩 건너보면 여동생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톡을 하기 바빴다. 사실상 나 혼자 보고 있던 프로그램은 여자 댄서들이 안무와 무대를 겨루는 화제의 서바이벌이었고 인기에 걸맞게 세 시간이 넘는 편성으로 화려한 편집점과 광고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으로 눈가를 훔치다 훔치다 내가 너무 오래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댄서들은 이미 보았던 극적인 대형을 이루고 다시 한번 서로의 도발에, 포즈에, 몸짓에, 굳은살이 돼버린 진심에 감탄하고 있었다. 연이어 재방송이 시작된 건데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자들의 몸, 분절, 리듬, 미끄러짐, 이어받기, 돌려주기, 춤을 좋아하는구나, 분하구나, 서로에 대해 잘 아는구나. 여동생이 몸을 비틀었다. 늘 나보다 약간 높은 체온. 동생은 어디선가 들어본 아이돌 그룹 이름을 말했다.
  검색해봐.
  나는 거절했다. 동생은 자기 휴대폰으로 그룹의 연습 영상을 틀었다.
  이 칼군무 좀 봐.
  그러네.
  보라고.
  나는 여자들이 대결을 펼치고 있는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땅에 닿지 않는 발, 손끝보다 긴 동선, 시선, 정지, 잔상, 립 컬러, 흐르는 바짓단, 머리칼의 시차, 관객이 만든 유동적 공간과 조응하기, 무대에 오르면 코어를 고정하기. 언젠가 베개에 눈물샘이 눌려 오래 울었던 기억이 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방에 가서 손을 털며 제자리 뜀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하릴없이 이 방 저 방을 들락거려보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불 꺼진 방 벽 앞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열린 문으로 빛과 소음이 들어왔다. 남동생은 키보드를 계속 내리쳤다. 여동생은 또다른 영상을 재생하며 소리쳤다.
  얘넨 살아남을 거야. 아니, 다 죽일 거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죽은 듯이 조용하게, 마치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 3시가 지나 있었다. 실은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자정 전후로 잠들었으니 잠시 생각을 놓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로 내가 아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 마나 한 연상, 그럼에도 끝없이 반복하게 되는 이제는 친밀하고 지겨워진 상념이었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은 물론 약한 탈수 증세를 보이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침대에서 빠져나와 냉장고에 든 생수 한 병을 들이켰다. 다행히 언제라도 힘을 쥐어짜 몸을 일으키는 방법을 몇 년 전에 터득했는데, 다름 아닌 가위에 자주 눌리는 친구의 요령에서 영감을 얻었다. 친구는 방 열두 개의 모서리에서 모종의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면 자던 중이든 깨어 있는 중이든 어김없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고백했다. 가위에 무지한 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모서리의 기운이 덮치기 전에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그 게임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친구는 발상을 전환해 움직임을 되레 멈추는 전략을 사용했다. 바로 숨을 참는 것이었다.
  일단 숨이 꼴깍 넘어가면 몸은 별수 없거든.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살아 있는 몸에나 붙는 거야.
  한번은 내가 가끔 운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궁금해했다.
  슬픈 거야?
  원랜 아니었는데 이젠 울고 나면 슬퍼.
  음, 그러니까 울게 된 이유가 없다는 거지?
  글쎄, 나도 잘 모르지.
  친구는 이도 저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는 내 눈물바람에 금세 흥미를 잃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절정의 순간 꼭 울음을 터뜨리던 신실한 목회자 애인 일화였다. 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킥킥거렸지만 속으로는 그애가 겁을 먹었다고 판단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으로부터 도망친 거라고. 나를 두고 가버린 거라고. 나도 모르게 도와달라고 손을 뻗었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한 거라고 앙심을 품고 기억해두었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또다시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실 진짜 잊을 수 없었던 건 앙심 같은 것이 아니라 친구의 얼굴이었다. 깜빡이는 눈 어긋나는 호흡 뒤로 빠지는 목과 어깨. 그 두려움. 내가 기억해둔 건 다시는 친구를 두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나의 두려움이었다. 죄와 원한의 도면을 실물에 가깝게 긋다보면 정작 진짜 삶이 이루는 집을 보지도 문을 열지도 그 안에 들어가 쉬지도 못하리라는 오래된 믿음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매 순간 그런 걸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과거로 향하는 생각의 물길을 돌려 앞으로의 일을 헤아려야 했다. 계속 해야 한다니, 계속 가야 한다니, 믿기 어려워 허옇게 질려가면서도 해낼 수 있었다. 8시가 되면 나가서 아침을 먹을 것과 그러기 위해 7시에 씻을 것을 다짐하고 나자 아직 세 시간과 긴 어둠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지나갔다.

귀국 날짜를 정하지 않고 히로시마에 머무는 동안 단순한 생활을 반복할 수 있었다. 아침 장사를 하는 가게에 첫 손님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루 중 유일한 부지런함이었다. 주로 후추를 곁들인 담백한 마제면이나 구운 연어와 밥 같은 가벼운 일식을 찾았는데 어느 가게의 주인이든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날의 첫 놀라움이었다. 배를 채운 뒤에는 원폭 돔을 향해 천천히 산책을 시작했다. 윤재와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일단 그 가시 면류관 같은 무너진 지붕 쪽으로 산책 방향을 잡았다. 폐허가 된 자리에 새로 지어진 계획도시는 뭐든 큼직큼직했고 기이하게 정렬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탐색하고 복귀하는 꿀벌의 무한 궤적처럼 도심만을 집요하게 돌아다닌 덕분에 몇몇 장소는 익숙해졌다. 히로시마 도심은 최초로 인간을 살상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진 폭심지 반경과 일치했다. 15만 명이 넘지 않던 인구는 2차대전 전후 일본 제국의 육해군 근거지가 생기며 군수물자와 관련된 일자리를 쫓아 유입된 이주자들로 한때 42만 명까지 부풀어올랐고 폭격 이후에는 1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재건에 필요한 인력과 새로운 터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며 현재는 12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평화를 기념하는 상징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온 서구권 관광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가장 자주 마주친 건물은 폭격의 충격과 화기에도 파괴되지 않고 남은 옛 스미토모 은행이었다.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튼튼한 콘크리트 외벽에는 폭격 당시 검게 그을렸던 흔적이 남았고 그 흔적은 다시 팔십 년의 긴 햇볕과 해풍에 씻기듯 마모되고 있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일대가 완전히 파괴된 뒤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을 은행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언젠가 결혼한 대학 친구 집들이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스키를 좋아해 신혼여행마저 스코틀랜드로 다녀온 부부를 위해 동기들이 고른 선물은 술잔이었다. 내부에 에베레스트가 솟은 온더록스 잔과 후지산이 솟은 하이볼 잔 세트였는데 그 잔들을 바로 씻어 유리 산이 푹 잠기도록 빨갛고 진한 크렌베리주스를 따라 마셨다. 뇨끼와 피자와 떡볶이까지 먹어치우고 색색의 파운드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레몬, 얼그레이, 꿀밤, 메이플 파운드케이크를 잘게 쪼개서 나누며 함께 달고 향긋한 맛을 봤다. 서로의 안부가 한참 오간 뒤 맞장구만 치고 있던 내게로 이목이 모였다. 요새 왜 이리 얼굴 보기 힘드냐고,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고 으레 하듯 별 뜻 없이 물어왔다. 나는 아마 살짝 웃으며 사양했던 것 같은데 친구들은 내가 뭘 사양하고 있는지 몰라 나를 더 부추겼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힘들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윤재랑은 어때?
  윤재는 밝아. 너무 건강하지.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순하고 허술한 윤재의 면모를 약간 신이 나서 떠들었다. 회사에서 황당한 소문을 듣고 돌아온 날 씩씩거리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기분을 회복한 윤재, 서울에 집과 차를 가진 어른이 되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낙오한 것 같다고 기운 없이 말한 뒤 남의 집 담장 위나 남의 차 바퀴 뒤에서 길고양이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는 윤재, 내가 화를 내면 꽃을 사오는 윤재, 가라면 가는 윤재, 내버려두라면 내버려두는 윤재,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윤재. 윤재는 내가 없어진 뒤에도 제대로 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슬픔에 빠질 거라고 단언하는 순간까지 나는 그저 농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윤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가끔 윤재가 내 앞에서 말할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투명한 막 너머에서 말하는 것 같다고, 나는 이렇게 끝없이 가라앉고 있고 이렇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데 도대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윤재 때문에 숨이 막히고 윤재의 목을 조르고 싶다고 거의 비명에 가까운 분노를 쏟아냈다.
  친구들은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들어주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는 빠르게 오르내리는 내 등을 쓸어주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숨을 고르다가 입을 굳게 닫았다. 호스트인 친구는 충분히 기다린 뒤 큰 그릇 몇 개를 들고 일어났다. 모두가 손을 보태 돕기 시작했다. 크림소스가 묻은 접시, 사용한 냅킨과 작은 과자 포장지, 붉은 과일 찌꺼기가 에베레스트와 후지산을 뒤덮은 잔들을 주방으로 옮기는 동안 물을 끓여 차를 준비했다. 나는 모두가 일어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혼자가 됐음을, 언제나 혼자였음을 느끼며 그 애들과 내가 먹고 어지른 자리가 치워지는 모습, 흔적이 말끔히 닦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곧 내 앞에도 뜨거운 찻잔이 놓였고 손을 대기 전에 누군가 얼음 몇 알을 찻물에 넣어주었다.

스미모토 은행의 석조 벽은 훌륭한 방호물이었지만 종일 볕을 받고 바깥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된 아름다운 창과 유리 천장이 산산조각 나며 내부의 벽과 바닥 그리고 이른 시간에 출근했던 은행원들에게로 날카로운 유리 비가 쏟아졌다. 가장 구석진 그늘에 자리잡았던 말단 여직원 두 명만이 화를 면했는데 한 명은 노년까지 살아남아 인터뷰도 했지만 다른 한 명은 급성 방사선 피폭의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폭탄이 투하된 시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출근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길에서 절명했고 입구 돌계단에서 은행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한 사람은 핵폭발이 발산한 강력한 자외선과 열선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증발해버렸다. 타들어가며 이름도 없이 사라진 그는 등지고 있던 벽면에 사람 그림자 같은 얼룩을 남겼고 그 영원한 인영의 돌은 700미터가량 옮겨져 평화기념관에 전시되었다.
  하루는 오전 시간을 통째로 들여 평화기념관을 천천히 관람했는데 한 미국인이 줄곧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이동했다. 그는 등이 구부정하고 표정이 진지한 젊은 청년으로 커다란 오렌지색 가방을 짊어진 채 진흙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무겁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와 나는 나란히 훼손된 세발자전거 앞에 섰다. 구조 당시 세 살 아이가 자전거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고 결국 숨졌기에 같이 묻었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읽은 직후 이상한 직감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그는 뺨과 콧잔등을 적시며 울고 있었다. 그는 전시실 안에서 오직 나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쏘 쏘리, 쏘 쏘리’ 하고 거듭 속삭였다. 눈앞에서 눈물을 보여 당황스럽게 만든 일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내가 일본인이라는 착각을 전제한 이 모든 거대한 비극에 대한 사과인지 불분명했다. 그 무엇이든 정확하지 않은 사과였고 성공할 수 없는 사과였다. 그가 나에게 사과할 일인지, 과연 사과할 수 있는 일인지. 무엇을 어떻게 따져야 하는지, 정말 그것을 따질 수 있는지. 어떤 문제로 볼 것인지, 왜 문제로 봐야 하는지.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나는 급한 대로 그에게 물티슈를 건넸다. 그는 살갗이 붉게 달아오르도록 무신경하게 얼굴을 닦아냈다. 나는 그의 국적을 물은 뒤 내 국적도 슬쩍 알려줬는데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내심 한국인인 나를 이 평화기념관을 초래한 전쟁의 당사자로 여기고 있었고 미국인인 그 역시 아마 나와 같은 전쟁을 떠올렸을 테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생각이었다.
  다만 나는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며 내가 내내 울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재는 이번 여행이 나에게 휴식과 회복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곁에 있을게. 내가 네 곁에 있을 거야.
  거듭 약속했지만 돌아가야 하는 날이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가. 나 좀 쉬게. 이제 가.
  정작 윤재를 보낸 뒤에는 도무지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 더이상 안간힘을 써 참지 않는데도, 어금니와 관자놀이 사이 어딘가에 항상 울음이 걸려 있는데도 눈물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머나먼 땅으로 떠나와 세발자전거 앞에서 서럽게 울던 미국인은 그저 자기 안의 파열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그도 도망치고 있었을까? 혼자였을까? 결코 알 수 없을 그 마음을 나는 왜 오래도록 떠올리게 된 걸까?

평화기념관을 나오면 푸르른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두 살 때 원폭 방사능에 노출되어 십 년 후 백혈병에 걸린 사사키 사다코의 동상 앞에는 치유를 기원하는 종이학이 가득했다. 기도의 샘, 영원한 불꽃, 평화의 종으로 명명된 장소들에는 어김없이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섭씨 4000도에 달하는 열기 속에서 목말라 죽어갔을 사람들을 추모하는 물이었다. 히로시마현을 흐르는 오타강은 험준한 지형을 지나 평평한 땅에 접어들고 도네강, 미사사강과 합쳐지는 한편 교바시강, 덴마강, 모토야스강으로 나눠지며 히로시마 삼각주를 충분히 적신 뒤 세토 내해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히로시마 어딜 가든 흐르는 물줄기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유속이 잔잔한 물이 보이면 나는 잠시 안도하며 더 걸어갈 힘을 얻었다.
  평화기념공원에는 거리를 두고 쉬는 사람처럼 따로 떨어진 다양한 위령비들이 있었다. 가장 많은 추모객들로 북적이는 대표적인 상징물은 원폭 희생자 위령비였다. 그 추모가 히로시마를 찾는 많은 이들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미 수없이 산책했기 때문에 다소 무심해진 마음으로 위령비 앞을 지나갈 수 있었는데 한번은 여러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돌아봤다. 헐렁한 검정 교복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견학을 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아이들은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으며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는 한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도 있었다. 본래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평화기념공원 바깥에 마련되었던, 큰 거북이 밑을 단단히 받친 이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은 1999년에 이르러서야 공원 안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거기에 약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적혀 있지만 실상은 훨씬 더 많은 한국인이 폭격에 휘말려 즉사하거나 수년에 걸쳐 천천히 죽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의 무려 삼분의 일가량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종전을 위해 일본을 향했던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이 터지고 얼마 후, 광복을 맞은 조국의 기쁨과 동떨어져 적국의 비극을 가까이서 공유했던 이주자들의 상황을 상상하면 극도로 암담해졌다. 거대한 기쁨에 묻힌 작은 슬픔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슬픔을 말하는 게 죄가 되었다면, 복잡한 처지와 마음을 어떤 말로도 담을 수 없었다면,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막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한국인 대부분은 강제징용에 끌려온 노역자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고 신원이 제대로 공개되어 있지 않아 결국 명단이 소실됐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한인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폐기물을 청소하는 일과 시내에 나뒹구는 피폭자의 유체를 수습하여 유가족에게 인도하는 일, 무연고 유체를 화장하는 일에 동원되며 영영 집계되지 않을 수많은 죽음을 맞았다.
  이런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히로짱이었다. 그는 히로시마에 남은 사흘째 되던 날 저녁을 먹었던 오반자이 가게의 옆자리 손님이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번역기로 말을 걸었다. 그는 투박한 참견쟁이 같은 말투로 히로시마 어딜 가보았는지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원폭 돔 앞 강물에서 물고기를 사냥하는 커다란 왜가리가 아주 명물이며 옛 은행 건물에 입점한 빵집이 그렇게 맛있다고 알려주었다. 또 패전 이후 모든 은행이 그 살아남은 건물에 모여 업무를 재개했는데 천장이 뻥 뚫려 있어 맑은 날에는 피크닉처럼 멋진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일했다는 이야기, 시마 병원 600미터 상공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마침 원장은 병원에 없어서 목숨을 구했고 그 자리에 다시 병원을 지어 아직까지 환자를 받고 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기까지 대화가 무척 힘겨웠던지라 그는 자신이 아는 한국인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나를 바꿔주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가게 이름을 묻더니 곧 이곳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가게에 들어선 여자에게 받은 순간적인 인상은 일본인 같다는 것이었다. 큰 키에 어두운 계열 셔츠와 점퍼를 스타일 좋게 걸치고 있었는데 탈색한 머리와 화장까지 꽤 화려해서 일본 연예인 같았다. 여자는 ‘히로짱’ 하고 부르며 주먹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그와 내 사이에 비집고 앉으며 물었다.
  히로짱 타코야끼나 히로짱 규동 먹어봤어요?
  아니요.
  일본에서 음식점 이름으로 아주 흔한 상호예요. 히로짱 스시, 히로짱 오코노미야끼, 심지어 당고집도 있어요.
  히로짱의 본명은 히로시라고 했다. 촌스러움을 넘어 곤조가 느껴지는 이름이라고 여자는 현지의 뉘앙스를 설명해주었다. 히로짱은 오십대로, 여자는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소개를 듣고 보니 놀랍게도 두 사람 다 사십대 후반이었다. 여자는 행동에 막힘이 없고 한눈에 보아도 성미가 급했다. 우선 맥주를 큰 잔으로 주문하더니 내게 한국말로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히로짱이 전하지 못해 애먹던 말을 통역해주었다. 처음에는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지만 이내 익히 들었던 내용이라며 손을 휘휘 젓고 여자가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가 이어지자 히로짱은 휴대폰으로 야구 경기를 틀었다.
  이런 이야기였다. 그는 교토 부촌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말하자면 아득바득 동네에 들러붙어 자랐는데 다니던 고등학교에 재일교포 3세가 있었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아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하도 기이한 소문이 돌아 이름을 알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애의 한국인 할머니가 히로시마 원폭의 생존자이자 전후 처리를 맡은 청소부였는데 피폭으로 인한 합병증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멀쩡한 옷조각이나 솜을 발견하면 따로 빼돌려 남편의 누빔 외투를 지었다. 남편은 세 아들이 클 때까지는 멀쩡했지만 어느 날 온몸의 털이 빠지고 피를 토하다 죽고 만다. 첫째는 외투를 탓하며 어머니를 비난했고, 둘째는 외투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나 셋째는 몰래 그 조각을 모아 상자에 담아두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다시 재일교포 3세인 아들에게 물려주며 사용법을 일러주었는데 일종의 액을 떠넘기는 저주 의식이었다. 누군가의 교복 주머니와 신발 밑창에서 낡은 천조각이 나왔다는 증언이 학창 시절 내내 속출했다. 히로짱은 어린 시절 괴담으로 들었던 히로시마에 자신이 터를 잡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이런 운명을 재미있게 여겼다.
  여자는 히로짱이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전혀 모르는 바보라고 덧붙였다. 나는 윤재를 보낸 이후 처음 듣는 한국말에 좀 멍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히로짱은 이야기가 끝난 줄 모르고 2루와 3루를 채운 경기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마시던 흑맥주잔은 하얀 거품이 말라붙었고 물수건 위에는 속이 빈 완두콩 껍질이 수북했다. 여자는 자신이 십사 년 전,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에 왔다는 말로 운을 띄웠다. 부산에서 친구들과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귀신이 들렸는지 일본어도 모르는 채로 일본행을 결정했고 후쿠오카와 도쿄에서 벌인 사업으로 돈을 꽤 벌어봤지만 왕창 잃어도 봤다고 어떤 차도 사고 어떤 차도 팔아봤다고 파란만장하게 이야기했다. 짧은 대화에서 돈과 성공이라는 단어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는데 나는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여자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는 계속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여기 정착한 지는 팔 년이 넘었어요. 여러 점포를 크게 운영하다가 지금은 접고 아는 사람 가게를 봐주고 있는데 사장이 계속 나한테 가게를 팔고 싶어 했어요. 오늘 그걸 결정하고 온 거예요.
  하기로 했어요?
  그렇죠. 좀 낯설긴 해요. 삐까뻔쩍한 유카와 거리에서 오래 했는데 지금 여기는 가게 규모도 작고 조용한 곳에 있거든요. 번화가에 가봤어요?
  가봤어요. 택시가 이렇게 많은 일본은 처음 봐요.
  그렇긴 하죠.
  시간 단위로 돈을 받는 토크바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기모노를 입은 사람, 여장을 한 사람,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요.
  많아요. 아무래도 유흥가니까. 예전엔 야쿠자들이 관리했어요.
  신기했어요. 회식을 온 것 같은 남녀 회사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같이 들어가서 술을 마시더라고요. 그리고 밤 9시만 되면 손님도 가게 주인도 거리로 나와 택시를 기다리고 배웅하던데요.
  배웅을 꼭 하죠. 그건 중요한 일이에요.
  한국이랑은 달랐어요. 어쩐지 건전하달까.
  근데 난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아 물론 그렇죠.
  오한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고동쳐서 등이 아팠고 익숙한 절망감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사실 짧은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이탈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실컷 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기대감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무슨 일 해요?
  소설 써요.
  소설가는 처음 보는데. 지금도 뭘 쓰고 있어요?
  나는 이제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오래되었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턱을 괴며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웃지 않아도 자꾸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벌어진 치아가 드러났는데 어쩐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여자의 손가락이 광대와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손톱은 하얀 부분이 조금도 올라오지 않은 상태로 바짝 깎여 있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마지막으로 쓰던 소설은 실패했다고 지워야 할 말이 너무 많고 장면의 적정 분배도 사유의 균형도 잃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치우쳤다고 화자와의 거리감도 무너졌다고 다시 쓸 수 없어서 버려야 했다고 말했다.
  어느 누가 이 슬픔에 접속할 수 있겠어요?
  이런 문장으로 끝맺은 뒤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는 어느새 건조해진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서두르지 않고 오가는 손길이 신중하기까지 했다. 정작 손에 땀이 흥건한 사람은 나였다. 다 쓴 수건을 멀리 밀쳐두며 여자가 등뒤의 히로짱을 가리켰다.
  저 사람, 사실 야쿠자였어요. 십 년 전에 나한테 사채 빚을 받으러 다녔죠. 숨겨둔 돈을 가져가려고 내 가슴에 손을 넣은 적도 있어요.
  장난하는 거죠?
  아니에요. 장난 같은 건 없어요. 잘 들어요. 나는 당신이 빚쟁이나 사기꾼인 줄 알았어요. 얘기하는 내내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 뒤집었잖아요. 하지만 소설을 쓴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나는 당신이 날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안 써요, 알겠어요?
  여자는 외투를 벗어 입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살펴보니 감색 셔츠 아래 같은 색 짧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당신을 보려고 일하다 뛰쳐나온 거예요, 알겠어요?
  그건 여자의 말버릇 같았다. 여자는 자신이 맡게 된 요즘 유행하는 한국식 포차에 대해 설명했다. 참이슬과 진로를 팔고 카스를 판다고. 스팸계란말이와 순두부찌개가 잘 나간다고. 아마 먹어보면 맛없어서 화가 날 거라고 장담했다.
  일본인들 입맛에 맞춰서 달고 싱겁거든요. 카운터 자리엔 한국 노래방 기계도 있어요.
  가라오케 아닌가요?
  아니래도요.
  여자는 뒤돌아 히로짱의 팔을 두 번 쳤다. 흡사 세신사의 몸을 뒤집으라는 신호 같았는데 히로짱은 즉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여자가 하는 일본말을 잠자코 들었다. 카운터 위에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있어 다 펴진 모양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족히 여자의 손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나는 속으로 문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슴에 들어간 손. 돈을 움켜쥔 손. 여자가 다시 내게로 돌아앉아 말했다.
  내일 쪽파랑 가래떡이 들어와요. 히로짱이 배달하거든요. 파김치랑 떡국을 할 거예요. 먹고 싶어요?
  여자는 가게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알겠어요?’ 하고 세 번이나 물었다.
  내일부터는 연말이에요. 일본 가게는 다 문을 닫는다고요. 아무것도 몰랐죠?
  나는 그렇다고 전혀 몰랐다고 대답했다. 여자가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신기하게도 그 한국식 포차는 호텔에서 불과 오 분 거리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영세한 출판사나 홍보 회사가 세 들어 있을 법한 조용한 건물 복도로 깊숙이 들어가면 반투명 창마다 분홍 종이에 한글로 쓴 ‘소주/맥주’가 붙어 있었다. 내부 벽에는 노란 갈대발을 걸고 그 위에 메뉴와 병뚜껑을 걸고 홀에는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둔 것이 제법 그럴싸했다. 여자의 이름은 권민화였다. 히로짱이 미나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나도 그대로 따라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나상은 일본말로 ‘여러분’이라는 뜻이어서 여러 사람이 있을 때 ‘미나상’ 하고 부르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미나상은 오후 4시에 여는 가게에 오전 11시부터 나와 재료를 손질했다. 파, 양파, 양배추를 더미로 썰고 그날 내놓을 한국식 겉절이와 다음 날 먹을 츠케모노를 미리 절여둔 뒤 점심을 먹었다. 사케잔에 따른 미지근한 매실차까지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새로 주문한 식재료 박스가 가게 문 앞에 도착했다. 아마포로 싼 생 가래떡과 조청, 얇게 저민 소고기, 다진 돼지고기, 흙이 뚝뚝 떨어지는 당근과 생강, 들깻가루, 커다란 당면 봉지, 모서리가 찌그러진 대용량 옥수수 캔과 마요네즈 캔, 불룩한 감자 한 포대가 순식간에 비좁은 주방 적재적소로 사라졌다. 점심 장사는 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게 늦은 새벽까지 가게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직원이 자정에 퇴근하고 나면 미나상은 혼자 주문을 받고 혼자 손님들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했다.
  처음 저녁을 먹으러 간 날에는 젊은 일본 여자들이 새벽 4시까지 남아 빅뱅, 투애니원, 왁스, 박화요비의 노래를 불렀다. 포차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인들이었지만 일본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마침 그날 남자 유학생 세 명이 여자들 옆에 앉았고 잠시 후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잘생겼어요. 감사합니다. 씨발 새끼 해주세요. 씨발 새끼들아. 여자들이 웃고 이어지는 대화는 일본말. 한동안 남자들은 한 여자의 얼굴과 몸에 박힌 볼드 피어싱에 감탄하고 여자는 머리카락과 옷을 들추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는데 진짜로 피어싱에 관심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마음껏 쳐다보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고 나는 그런 심리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한때 사람들과 나누는 탐색과 긴장에 재미를 느꼈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놀랍기만 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차가 끊기기 전에 먼저 떠났다. 미나상은 카운터에서 혼자 병맥주를 마시고 있던 내게 슬쩍 잡채 한 접시를 가져다주며 떠난 일행 중 한 명이 화장실 앞에서 저 여자의 연락처를 받아 갔다고 눈신호를 주었다.
  나는 이전처럼 히로시마 시내를 산책하다가 정오가 되면 미나상의 가게로 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온종일 한식 안주를 만드는 것에 질린 미나상은 메뉴에도 없는 일식 한 상을 차렸다. 갓 튀긴 덴뿌라, 낫토와 참마, 해초무침, 참치 등살 서너 점을 찬으로 바지락 미소국과 쌀밥을 함께 내놓거나 작은 화로에 백합과 가리비를 구워 연한 레몬 간장을 바른 뒤 내 입에 직접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그 친밀함을 혼란스럽게 되짚었지만 나중에는 미나상의 나무젓가락이 입가로 다가오면 덮어놓고 받아먹었다. 내가 묘하게 엄마 같은 구석이 있다고 놀렸을 때 미나상은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나이 터울이 별로 나지 않는 자매였다. 추운 날이었는지 둘 다 코끝이 빨갰고 서로의 팔짱을 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엄마랑 딸들인 걸 알겠어요.
  이렇게 닮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아기 땐 분명 남편 얼굴만 보였거든요. 남편 누나가 낳은 애들 같았어요. 멀리서 보면 닮은 건지, 먼 훗날 보면 닮은 건지……
  그게 벌써 사 년 전 사진이고 지금 두 딸은 각각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이 원해서 더는 사진을 보내주지 않는다는 미나상의 말은 복잡한 의혹을 떠오르게 했다. 아이들이 품은 뿌리 깊은 원망과 자라면서 점차 냉랭하게 제련된 마음, 배척을 결정한 자매의 남다른 결속…… 아마도 어느 날 미나상의 삶을 뒤흔든 격정 혹은 모든 걸 멈춘 고갈 혹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깨진 결혼과 미나상의 유책 사유에 대한 상상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고 하나같이 뻔한 사연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미나상의 마음을 떠올리면 외길 위에서 길을 잃는 느낌이었다. 미나상은 두 딸을 키우는 전 남편에게 통상적인 양육비를 훨씬 웃도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넉넉한 지원을 해주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을 사주고 싶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내가 준 것들로 가득하게요.
  그야말로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었지만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삶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미나상이 가진 삶의 철학과 태도는 내게 이국의 언어 같아서 듣고도 들은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뿌연 안개 속에 우뚝 멈춰 선 사람, 왔던 길을 하염없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듯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보고 있고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미나상을 짓누르고 있는 묘한 죄책감만은 예민하게 알아챘다. 이끼의 맛, 물고기 냄새, 유황 연기 속을 휘젓는 촉감처럼 은밀한 고통이었다. 은밀하다고 해도 무엇보다 고통은 생생하고 때론 유일한 것으로 남아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우리로 이어 붙였다.
  딸들을 향한 한정적인 이타심은 미나상에게 신비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미나상은 하루 네 시간을 채 자지 않으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더 잘 살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다. 오전에는 사람들을 만나 투자 가치가 있는 정보를 교환하고 때론 누군가의 개업을 도우며 부수입을 톡톡히 번 뒤 가게로 출근했다. 어느 시기에 운영한 가게든 미나상에게 정기적인 휴일의 개념은 아예 없었고 일 년 중 단 이틀, 설과 추석만을 쉬는 날로 여겼다. 그럼에도 미나상은 의욕이 넘쳤고 자신이 미래로 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열정과 허영을 아슬아슬 오가는 미나상의 청산유수 어디에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정은 일절 없었고 심지어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함께 점심을 먹는 동안 미나상은 몇 번이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화구는 항상 미역처럼 뒤엉킨 녹색 냅킨 천을 삶거나 큰 무조각을 넣은 간장이 졸여지고 있었다. 약불에서 물이 잘게 끓는 소리, 수증기에 달그락거리는 냄비 뚜껑, 따뜻하고 달큰한 간장 냄새, 개수대 앞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미풍 속에 미나상은 대부분의 순간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일손이라도 도울라치면 한사코 거절했지만 한 가지 심부름만은 허락해주었다. 주방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면 벽으로 막힌 터무니없이 좁은 텃밭이 있었는데 그 땅에 심긴 조릿대잎을 뜯어오는 일이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산죽이라는 키 작은 대나무이며 겨울이 되어서 잎 가장자리에 하얀 무늬가 생긴 것도 알려주었다.
  봄이 되면 얼룩이 푸르게 말라 경계가 사라져요. 보고 싶으면 그냥 나랑 여기서 살자고요.
  옛 일본 사람들이 살균과 방부를 위해 날생선과 구운 생선 밑에 깔던 방식 그대로, 미나상의 깨끗한 손가락이 질기면서도 광택이 도는 잎사귀 위에 단촛물 밥과 단 계란말이를 올려주었다. 미나상은 그런 순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혼 후에 연고가 없는 부산으로 가서 교복 장사를 시작했어요. 공동구매로 팔아서 브랜드보다 싼 교복이요. 솔직히 잘되진 않았는데 그때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어서 신바람이 났던 것 같아요. 나중엔 유통, 그다음엔 공장, 또 그다음엔 수출입을 하는 컨테이너로 눈이 돌아갔죠. 친구를 참 많이 사귀고 동업도 했는데 한 해를 못 참고 뜬 거예요. 그렇게 후쿠오카에서 이 년, 도쿄에서 사 년이에요. 돈 되는 건 뭐든 했죠. 이제 히로시마는 팔 년. 드디어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느낌이지만 또 내가 떠나게 될지 아니면 어딘가로 떠밀릴지 모르겠어요. 나로부터 계속 멀어지다보니 다시 고국과 가까워졌네요. 하지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보다 좀 아래로, 둥글게 경사면을 그리면서 평생 내가 맴돌던 깊은 중심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미나상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자신이 여기 이곳에 도착한 내막의 지도를 다름 아닌 내 안에 그리고자 했다. 자기 인생의 행로와 파고가 짠 질척이는 그물로 나를 포획하려 들었고,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미 그물코 어딘가에 단단히 사로잡혔다. 미나상이 능청스럽게 ‘나랑 살자고요’ 하고 말하면 귓가에 살자고요, 살자고요, 살자고요, 하는 파도가 밀려왔다. 미나상은 조리를 하다가도 들려줄 이야기가 떠오르면 한 손에 긴 국자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도톰하게 접은 행주 위에 올려둔 채 시선은 먼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오직 나만이 참깨를 가는 검은 돌절구와 물기를 말리기 위해 비스듬히 세워 놓은 나무 도마 사이에서 역광을 받은 미나상의 윤곽이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부서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미나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의도치 않게 속속들이 알게 된 건 히로짱의 삶이었다. 그는 도쿄에서 미나상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들 중 하나로 스쳐 지나갔지만 칠 년 전 히로시마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당시 미나상은 한국에서 가구와 소품을 수입하는 편집숍을 운영하다가 폐업 수순을 밟고 있었다. 가게를 내놓고 남은 물건이라도 헐값에 처분하는 중에 매장으로 인테리어 시공기사들이 찾아왔다. 입구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천장에 세 개의 샹들리에를 설치해야 한다고 우겨서 알아보니 다음 세입자와의 소통 오류였다. 타협안으로 장사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시공을 허락해주었는데 기술자들을 따라와 일을 배우고 있던 인부가 히로짱이었다.
  첫날은 알아보지 못했어요. 유난히 몸집이 크고 굼뜬 남자의 뒷모습을 보긴 했지만 도쿄에 있던 사람이 여기 왔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심지어 난 고생들 하신다고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기까지 했어요. 다음 날 두번째 샹들리에를 달기 위해 그들이 다시 왔을 때 히로짱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어요. 피하지 않더라고요. 날 아예 못 알아보는 눈치였죠. 그렇게 나흘간 내 망해버린 가게에 그 인간이 들락거렸는데 나는 마지막 날까지 꾹 참다가 그가 청동 화분을 구경할 때 페인트를 뿌렸어요. 가게 입구를 새로 칠한 펄화이트였죠. 그의 목, 가슴, 작업복을 벗은 사복 청바지 하며 화병을 쥐고 있던 손과 운동화까지 완전히 엉망이 되었어요. 내가 말했죠. 그거 마음에 들면 가져가든지. 그러니까 히로짱이 내 몸통만 한 청동 화분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어깨에 지더니 가게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가지 뭐예요. 흰 페인트를 피처럼 뚝뚝 흘리면서요. 이 사람 처음부터 날 알아봤던 거예요.
  미나상은 카운터에 앉아 평소처럼 아사히 흑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히로짱에게 일본말로 대화 내용을 빠르게 설명했고 둘은 동시에 웃었다. 나에게 들려준 기나긴 이야기가 짧은 몇 마디 말과 몸짓, 심지어 표정 하나로 전달되는 광경은 늘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처음엔 둘이 나를 놀리는 걸까 싶어 지켜봤지만 오히려 한패를 이룬 건 나와 미나상이었다.
  저 사람은 동생이 셋 있어요. 아주 끔찍하게 아끼죠. 동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가 끝나면 데리러 가고 아프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냅다 등에 업었어요. 진짜예요. 다 큰 애들을 업고 그애들이 벗은 신발을 뒷짐에 쥔 채 시장을, 공원을, 개울이 있는 숲길을 활보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모두 의절했지만요. 부모님 장례가 끝나자마자 동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그게 그가 손을 씻고 전국을 헤매다가 히로시마로 흘러들어온 이유예요.
  그쯤에서 내가 참지 못하고 히로짱을 힐끔 바라보면 언제나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셋이 한자리에 있어도 미나상은 주로 한국말로 나와 대화했고 히로짱은 미나상이 부르기 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처음 외국인인 내게 먼저 말을 붙이던 넉살 좋은 모습과 다르게 히로짱은 꽤나 과묵하고 주변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없는 성격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낮 시간 동안 식료품을 배달하고 해가 지면 맥주를 마시러 미나상 가게에 왔다. 물건을 가져다줄 때 잠시 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인사도 없이 박스만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내가 본 중에 미나상 가게를 거른 적은 하루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방문이 아니라 일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로짱은 주로 가게 구석에서 혼자 야구를 보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미나상이 시키면 일어나 일을 도왔다. 테이블을 옮기거나 꽉 찬 쓰레기봉투를 가져다 버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주 늦은 시간까지 머무는 경우는 없었다.
  집에 가족이 있나요?
  나는 더이상 꺼리지 않고 히로짱에 관한 것을 미나상에게 물었다.
  아니, 새예요. 앵무새가 혼자 있어서 외로울까봐 종종 들어가는 거예요. 히로짱은 한 번도 가정을 이룬 적이 없고 여전히 남은 가족은 동생들뿐이에요.
  히로짱이 없을 때 미나상은 ‘그’나 ‘저 사람’이라고 돌려 말하지 않고 히로짱이라고 불렀다.
  동생들이 하루아침에 집을 비우고 떠나버렸는데 집에는 히로짱과 새장 속 새 한 마리만 남아 있었대요. 둘이 같이 버려진 거죠.
  미나상은 그 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작고 머리가 둥근 초록색 새였다. 구슬 같은 눈은 온통 검고 날개에도 검은 빗살무늬가 있었다.
  저도 어릴 때 새를 키웠어요. 가난한 집의 장판이며 짐이 가득 들어찬 모습이 찍히는 게 싫어서 새 사진을 거의 남기지 못했어요.
  나는 스스로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히로짱도 가난해서 집안을 도우려고 그 일을 했어요. 워낙 단순한 사람이라 이유가 있으니 거리낌도 없었죠. 하지만 원한을 많이 샀고 동생 중 하나가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나봐요. 다들 히로짱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미나상은 어떻게 용서했어요?
  용서라니요?
  미나상은 농담을 할 때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지만 확실히 날카로워졌다.
  용서를 빌 줄 모르는데 어떻게 용서하겠어요. 정말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심지어 사랑하는 동생들 마음조차도요. 소름 끼치게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법만 터득했죠. 자기가 저지른 과오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사랑만 쫓는 인간이에요.
  사랑이라니. 나는 그 이상한 평가가 당황스러웠지만 받아들였다. 히로짱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미나상이 아는 사람이었다.
  히로짱과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온 적도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히로짱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왔는데 표정이 차가운 여자와 함께였다. 늘 앉던 카운터가 아닌 홀에 있는 접이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김이 나는 뜨거운 우동을 앞에 두었다. 그러고는 여자와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는 히로짱이 신기해서 나와 미나상은 틈틈이 훔쳐봤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가게가 좀 정리되자 미나상이 나를 데리고 자리에 합석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신가요?
  내가 물었고 미나상이 통역했다. 여자가 답했다.
  오늘 저녁 먹고 헤어지는 사이.
  짧은 소개팅이 끝나고 여자가 먼저 떠난 다음에 히로짱은 말없이 한국 소주를 마셨다. 미나상은 실패의 요인을 히로짱의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함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히로짱은 자신이 에둘러 눈치를 주는 교토식 화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미나상은 아니라고 넌 그냥 교토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이전에도 실패한 히로짱의 연애사를 떠벌리기 시작했다. 가장 흥미로운 이력은 미나상을 좋아한 것이었다.
  오 년 전인가. 히로짱이 막 물류 일을 시작하고 나는 오키나와식 술집을 히트 쳐 점포를 늘리고 있을 때였을 거예요. 오픈 전에 찾아와 대뜸 셈이 잘못되었다며 대금 봉투를 돌려주더라고요. 내가 열어보길 초조하게 기다리면서요. 난 이미 짐작하고 히로짱이 직접 쓴 편지를 꺼내 읽었어요. 오래된 진지한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죠. 그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어요. 정말 날 놀라게 한 건 그 편지가 죄 일본어였다는 거예요. 내 곁에서 십 년이나 봤지만 아직도 알아듣는 한국어가 욕밖에 없어요.
  하지만 몇 번인가 히로짱과 입 맞춘 적이 있다고, 한 번도 아니고 그렇게 된 순간들이 더러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미나상이 다시 일하러 간 뒤 번역기로 히로짱에게 물었다.
  미나상을 얼마나 좋아했어요?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히로짱은 대답해주었다.
  나 자신보다 더 좋았습니다.
  입을 막고 작게 환호하는 나를 보며 히로짱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카운터가 아닌 테이블에서 미나상 없이 둘이서 술을 마신 것은 오반자이 가게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히로짱의 울상이 웃겼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취한 히로짱이 하는 말을 착각했다.
  카와이? 귀엽다고요?
  히로짱은 잘 가누지도 못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와따시와 코와이, 코와이토데스.
  번역기를 들이대고 해석하자 이런 의미였다. ‘나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히로짱은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다가 미나상이 가게 정리를 마치고 등짝을 탁탁 치자 마법처럼 일어났다. 비틀비틀 휘청이며 스스로 걸어나갔다.
  미나상과 히로짱은 서로의 빈 집을 오가기도 했는데 이불 같은 큰 빨래를 모아 한 사람이 빨래방에 가져가거나 갑자기 비바람이 불 때 창문을 닫아주러 가는 식이었다. 둘 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이 도시에서 서로보다 더 오래된 사이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묘한 순간도 포착하곤 했다. 1월 중 히로시마에 큰 눈이 내렸는데 마치 부산처럼 눈이 쌓이는 경우는 드문 지역이어서 모두가 들떠 있었다. 히로짱은 여느 때처럼 점심 무렵 가게 앞에 배송 박스를 두고 인사도 없이 갔는데 곁에 작은 눈사람이 놓여 있었다. 미나상은 내가 연신 카와이를 외치며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건조한 눈길로 눈사람을 한번 힐끗 보곤 박스만 챙겨 들어가버렸다. 그대로 주방에서 한참 재료를 다듬는 데 몰두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칼을 내려놓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눈사람을 들고 들어왔다. 노여움의 이유는 가게로 드나드는 길을 막아 재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둥글고 차가운 사람의 형상을 개수대에 넣고 물을 틀자 순식간에 녹아 작은 얼음 조각이 되었고 눈이었던 팥 두 알과 손이었던 당근잎만이 수챗구멍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하루는 내가 가게를 봐주었다. 미나상은 은행과 세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두 시간 동안 가게를 비울 예정이었고, 나는 아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인 가게에서 식자재를 받아 안으로 옮기는 일을 부탁받았다. 눈이 내린 뒤라 하늘은 맑고 땅도 다 마른 날이었다. 나는 한낮의 텅 빈 가게에 앉아 이제는 내 책장처럼 눈에 익숙해진 주방 찬장과 조리도구들의 배치를 구경했다. 어느 곳 하나 꼼꼼한 미나상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냉장고 맨 위 칸에는 미나상이 간식으로 먹는 설탕이 뿌려진 새콤한 젤리가 들어 있었다. 내 입에도 맛있는 그 젤리를 하나 뜯어 먹으며 아무도 없는 홀을 천천히 거닐었다. 바닥을 쓸기 위해 접어서 벽에 기대놓은 플라스틱 테이블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찐득거리지 않고 매끈했다. 미나상이 매번 아쿠아향이 나는 세정제를 뿌리고 극세사 천으로 닦기 때문이었다. 문득 가게에 전등을 하나도 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환한 공간에서 햇살이 따뜻하게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떠올려 보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완전히 다르게 살게 될지도 몰라. 번뜩인 예감은 잔잔한 확신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히로짱이 들어왔다.
  미나상와?
  지금 없어요. 나중에 올 거예요.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그럴 리 없는데도 히로짱은 마치 거기 미나상이 있는지 확인하듯 창이 있는 개수대 앞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갤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어딘가 녹아내리고 있는 사람처럼 반응이 느리고 안색은 창백했다. 평소라면 배송을 끝내고 그냥 떠났을 히로짱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이 의아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히로짱은 이내 상황을 납득하고 돌아나갔다. 일을 보고 온 미나상은 히로짱이 무와 부침가루를 빠트렸다고 화를 냈다. 무는 그렇다쳐도 부침가루가 없으면 부침개가 나갈 수 없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작은 봉지에 든 부침가루를 잔뜩 사와야 했다. 히로짱은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히로짱은 11시가 다 되어서 나타났다. 미나상은 히로짱이 들어와 항상 앉던 자리에 앉는 걸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먹던 아사히 흑맥주를 가져다주긴 했다. 히로짱은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만화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음식은 주문하지 않고 흑맥주만 마셔댔다. 미나상도 메뉴를 묻지 않고 날 선 기싸움을 벌였다. 가게는 회식 중인 회사원 열두 명과 젊은 커플이 두 테이블 있었다. 미나상은 손님들을 챙기며 눈길도 주지 않다가 히로짱의 잔이 비면 기가 막히게 새 잔을 가지고 가서 거품이 넘치도록 쾅 내려놓았다.
  보다 못한 내가 히로짱 옆자리로 가서 말을 붙였다. 요즘은 뭘 봐요? 나도 읽어볼까요? 저녁은 먹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번역기를 보여줘도 도통 손에서 만화책을 놓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도 읽던 소설을 꺼냈다. 수십 년간 관계가 변해온 두 여자의 이야기였다. 절대 붙을 수 없을 것 같던 둘은 점차 누구도 끼어들 틈 없는 사이가 되어 철저히 서로를 무너트린다. 한국에선 한동안 책을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사실 사는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옆을 보니 히로짱 목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이죠부? 다이죠부?
  내가 호들갑을 떨자 미심쩍어하는 기색의 미나상이 다가왔고 바로 그때 히로짱이 큰 몸을 수그리고 토하기 시작했다. 시커먼 물이 원목 카운터를 다 뒤덮고도 넘쳐 코너에서부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미나상은 뭐야, 뭐하는 짓이야 소리를 지르며 히로짱의 등을 내리쳤다. 아직도 히로짱은 입을 벌리고 엄청난 양의 흑맥주를 게워내고 있었다. 실컷 쏟아낸 뒤에는 자신을 때리는 미나상을 손을 붙잡았다.
  미나상.
  히로짱이 부르자 가게에 있던 모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이미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사람도, 도리질하며 외면하던 사람도 잠시간 집중했다.
  미나상.
  히로짱은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간신히 ‘호시’라는 이름을 알아들었다. 히로짱의 새가 죽은 것이다.
  미나상.
  미나상이 히로짱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긴 일본어로 미나상이 말하고 히로짱이 말했다. 서로의 말을 가로막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그 소리는 새들의 지저귐 같았고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침입자에게 영역을 표시하는 경고처럼 들렸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도 미나상과 히로짱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둘 다 처음 보는 낯선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내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건 내가 아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들의 결속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동시에 사로잡힌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미나상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품에는 입술이 파랗게 질린 히로짱이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미나상은 실수로 일본말로 말하다가 다시 한국말로 소리쳤다. 서랍에서 바늘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져다주었고 주저하다가 다가가 히로짱의 팔을 주물렀다. 살결은 냉골이었고 손아귀에 잡히는 두터운 살집은 돌덩이가 따로 없었다. 미나상이 불로 달군 바늘로 히로짱의 손가락을 따기 시작하자 손님들은 기겁하며 숨을 삼켰다. 미나상은 아랑곳 않고 피를 볼 때마다 히로짱의 등을 누르고 때리며 피가 잘 돌도록 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를 하나하나 놓지 않고 찔렀다. 검은 토사물 위에서 검은 피를 짜냈다. 나는 히로짱의 신발을 벗기고 다리를 주물렀다. 열 손가락을 다 따자 히로짱이 흐느꼈다. 혈색이 도는 얼굴로 울음과 함께 트림을 내뱉었다.
  이타이. 이타이.
  미나상은 녹초가 된 채 낄낄 웃더니 그제야 발견한 듯 나를 향해 말했다.
  아픈가봐요. 아프다는 뜻이에요.

우다영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중편소설을 썼다. 히로시마, 대림, 마닐라를 배경으로 동아시아 연작을 쓰고 있다.

큰 물결 속에 잔물결이 인다. 고통의 이유이자 사랑의 근거로. 나는 거기 살고 싶어서 손을 담그고 가볍게 끌어보는 사람.

2025/08/06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