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자
‘안녕히 엉키기’를 연습하기
1.
언젠가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깨물고 싶었다. 사과를 하는 일도 사과를 받는 일도 피로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너를 다치게 했다는, 힘들게 했다는, 해를 끼쳤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은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아무래도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면 누군가는 계속해서 미안하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괜찮아야 하기 마련이었다. 고맙다는 말의 사정도 대강 비슷하다. 그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괄호 안에 들어간 깨알 같은 글씨의 약관을 읽을 수 있지만(대강 을이 갑에게 빚을 졌으며 둘 사이에는 채무 관계가 성립했고 얼마만큼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고 쓰여있다고 해두자),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한번 불어난 빚은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모른다. 그렇게 누군가 계속해서 빚을 지고 누군가 계속해서 품을 낸다.
돌봄과 의존이 우리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새삼스러운 말을 다시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와 부대껴야만 하고 서로들 해(害)와 폐(弊)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는 우리 사이에 오가는 사과와 감사가 종종 그러한 해와 폐를 셈하는, 정산되지 않는 부채의 단위나 산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교환이 불균형해보일 때 특히 그렇다. 특정한 신체적 조건 내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이들의 하루를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안하다고, 혹은 고맙다고 말해야만 시작되고 끝나는 이들의 일상을. 고맙다고 하는 당신의 말에서 미안하다는 속뜻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당신이 과연 내게 잘못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잘못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우리가 정말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책임이 어떤 몸들에게만 전가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면,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를 논하고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사실 미안한 게 죽기보다 싫은 사람. 그러면서도 ‘미안해’와 ‘고마워’를 쌍절곤처럼 휘둘러대는 사람. 어느 날엔가는 그런 스스로의 비겁함에 염증이 나서, 민주주의란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는 커다란 약속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내 상상 속에서 그런 약속이 실현된 세계는 어쩐지 천국처럼 생겼다. 아무런 공격도 일어나지 않고 그 어떤 잘못도 발생하지 않는 그 세계에선 누구도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 평안하고 풍요하며 완전한 나라여. 모두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깃털처럼 가벼운 다리로 걸어다니리. 무해함으로 멸균된 몸 안에는 방부처리된 마음이 디폴트로 내장되어 있으리. 완벽하게 S자를 그리는 척추를 중심으로 하여 늙지도 지치지도 않는 사지가 탄탄히 뻗어나가리. 모두가 생생하고 선명한 감각으로 정보를 자유자재로 처리하고 모자람 없는 말과 글로 유창하게 자신을 드러내리. 경사로도 리프트도 휠체어도 필요 없는 그곳에서는 나선형으로 부드럽게 휜 천국의 계단을 누구나 사뿐히 오르내리리. 그러니까 그곳은 철저히 비장애인들의, 비장애인들에 의한, 비장애인들을 위한 국가. 모든 문제가 사전에 예방되고 모든 사후적인 인삿말이 사어가 되며 어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안녕히 엉키기’ 같은 건 연습하지 않는다.
2.
안무가 손나예가 둥글게 앉은 열댓 명의 사람 속에 우뚝 선다.1) 워크숍의 이틀 차 마지막 프랙티스인 ‘안녕히 엉키기’에 돌입하려는 참이다. 고개를 뒤로 깊숙이 젖히고 천장을 향해 얼굴을 쳐든 그는 어렵사리 침을 삼키며 자신이 준비한 말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된 바 있는 고문의 자세라고 했다.2) 상해를 입히는 동시에 상해를 받는 몸”3), 그러니까 그 자신의 몸으로 고통을 발생시키고 또 받아내는 자의 형상. 무자비하게 젖혀진 목덜미의 통증으로 자주 숨을 고르며, 그는 다음의 질문 속에서 ‘안녕히 엉키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엉키기로 자처한 사람들이 바닥 곳곳에 드러눕자 ‘환경’을 맡은 사람들이 이들을 떠밀어 중앙으로 모으기 시작한다. 안전을 위한 음성 신호인 “아!”와 “스탑!”을 각자 큰 소리로 연습한 뒤의 일이다.4) 조금씩 떠밀리며 굴러온 몸들이 어색하게 서로를 건드린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몸이 점점 모여들어 뭉친다. 그런데 왜인지 몸들은 모이는 것만으로 쉬이 엉켜지지만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파고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은 움찔 놀라며 오그라든다. 혹은, 누군가의 얼굴이나 손에 자신의 발이나 엉덩이가 닿는 것에 당황하거나 몸을 떼어놓는다. 중앙에 있는 몸들은 단단한 알맹이처럼 말린 채 서로 눌릴 따름이고, 가장자리에 있는 몸은 중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손쉽게 떨어지기 일쑤다. 구태여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엉키기의 어려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이사이로 엉거주춤하게 삐져나온 다리가, 누군가의 맥없는 신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이들 중 대부분에게 걷거나 서거나 앉은 모양이 아닌 채로, 골반을 바로 세우고 척추를 기립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와 얽히는 일은 그리 친숙한 경험이 아니다. 나이도 젠더도 삶의 환경도 제각각인 생판 남들이 모르는 겨드랑이를 선뜻 껴안거나 가랑이를 번쩍번쩍 여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일일 테다. 게다가 이 워크숍에는 각자의 다른 특질을 가진, 저마다의 취약성을 가진 신체들이 모여있다. 사람들은 이중 누군가가 눌려오는 무게에 바로 대응할 수 없는 몸을 가졌음을, 자신의 어느 부위가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곧장 알아채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등 아래에서 당신의 목이 심하게 비틀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직의 현상인지, 혹은 나의 무게로 인해 생겨난 비상사태인 것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당신의 좁혀진 미간과 찌푸린 눈은 어쩌면 조금 전 내가 가한 고통에 대한, 사회적 겸양이나 예의범절만으로는 미처 감추어지지 않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 ‘안녕히 엉키기’에는 분명 그 이상으로 곤란한 구석이 있다. 이 활동 안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각자의 몸 안에 깊이 각인시킨 두려움을, 곤란함을, 죄책감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례없는 팬데믹을 지나오는 동안 서로의 몸이 가진 잠재적 유해성을 인식하지 않았는가? 서로를 서로로부터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모두를 보호하기로 하는 ‘거리두기’의 규범이야말로 우리의 생존방식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로 좁은 공간 안에서 눌리고 뭉개지고 조여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었던가? 높은 압력 속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허망하게 더 이상 ‘우리’가 될 수 없게 된 사건은 우리에게 정녕 무엇이었나? 이 연습은 분명 모두에게 새겨져 있는 상실의 기억을 즉각적으로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곤욕스러움을 넘어 얼마쯤 외상적이기까지 하다.
일순간 어디선가 분명한 ’스탑!’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떤 이유에서든 명백하게 안녕하지 않을 때, 엉키기를 중단해야 할 때 내기로 한 음성 신호다. 천천하지만 지체없이 몸들이 풀어헤쳐진다. 첫번째 엉키기 연습이 종료된다.
3.
사람들이 다시 둥글게 둘러앉는다. 진행자인 손나예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더 안전히, 더 무사히 엉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몇 차례의 워크숍에서, 엉키기에 절대적인 규칙이란 없으며 오히려 지난 엉키기에서 얻은 요령을 공유하는 일이 도리어 다음의 엉키기를 손쉽게 망친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엉키기 연습 사이사이에 토의의 장을 연다. 몸들이 만들어내는 특정한 모양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려가는 관계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프랙티스의 목표라고 해본다면, 보다 ‘안녕히 엉킬’ 방법을 찾는 것은 직접 참여하는 이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사람들은 보다 잘 엉킬 수 있게 하기 위한 기술적인 요령을 공유하기도 하고, 이러한 형식으로 타인을 만나는 경험이 주는 느낌이나 감상을 나누기도 한다. 모두가 엉키기를 다르게 경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누군가는 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는 없는 이 숨막히는 접촉이 퍽 힘들고 불편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몸이 포개질 때 생기는 압력이 의외로 편안하여 잠이 든 것 같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더 잘 엉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몸에서 힘을 풀어야 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맨 아래 깔린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힘주어 버텨야 했다고 말한다. 두 차례의 엉키기 연습과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배움과 요령을 얻는다. 더 잘 엉켜보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결심을, 때로는 서로 모순되거나 정 반대라고 할 법한 결심을 내린다.
공유되는 엉키기의 경험과 그에 따라 세공되는 엉키기의 양상은 워크숍마다 다르지만, 매번 비슷하게 도출되는 전제가 있다. ‘안녕히 엉키기’가 곧 ‘안전히 엉키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엉키기를 지속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해야 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서로로 하여금 위험에 빠질 의무, 내지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거나 위험에 빠뜨릴 의무다. 엉키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안쪽의 압력이 풀어지지 않게끔 서로를 당겨야 하고,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몸을 다시금 몸의 더미 속으로 잡아끌거나 자신의 몸을 몸소 사람들 속으로 밀어넣기를 감행한다. 그런 현상을 누군가는 ‘가해’의 느낌으로 회고하고 누군가는 같은 경험에 ‘믿음’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어쨌든 사람들은 안녕에 대한 하나의 역설을 서로에게 심는다. 서로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에게 위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엉켜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안팎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한데 뛰어들기로 한다. 진풍경이 펼쳐진다. 어떤 이의 엉덩이가 다른 이의 머리를 누르고 있고 어딘가에서 낯선 가랑이들이 만나 맞물린다. 누군가의 한쪽 양말은 애진작에 간데없고 누군가의 꽉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된 지 오래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서로를 짓누르고 압박을 가함으로써, 서로를 말 그대로 힘들게 함으로써 곤란에 빠뜨리고 위험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의 몸이 가진 틈새가 점차 벌어지고, 그 안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이 진입해온다. 혹은 누군가의 몸이 끼어들어옴에 따라 다른 이의 몸이 불가피하게 열린다. 사람들은 점차 첫 시도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느리게 엉켜 간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은 세탁기 속 탈수된 빨래처럼 단단히 꼬여있고 점점 더 많이 꼬인다. 나는 이 활동의 이름이 새삼 얼마나 고약한가 생각한다. 야채튀김처럼 엉켜있는 와중에 어디 한번 안녕도 해보라고 제안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서로로 인해 안녕하기가 영 어려운 상황 속으로 모두를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모두들, 안녕한지? 적어도 나는 아니다. 아마 당신도 아닐 성싶다. 내가 방금 온몸으로 당신의 다리를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오늘 이 워크숍에 오는 길을 당신과 동행하며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지체장애가 있어 흔들리는 당신의 걸음을 보조하며 이런 너스레를 떨었었다. “이제부터 ‘감사합니다’ 금지예요. 대신 ‘오냐’라고 하세요.” ‘오냐’라니…… 가당키나 한가? 나는 주둥이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기대야만 하는,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빚을 상환할 수 없는 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았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나로부터 당신을 구하는 일. 그러나 내 몫의 무게를 버텨내기 위해 다른 곳을 짚으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불가피하게 짓눌러야만 한다. 하여간에 모두가 용을 쓰고 있다. 아무래도 프랙티스 이름을 다시 붙여야 할까? 혹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어떨까?
한편으로 뒤집어 말하면, 이 풍경은 정확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돌봄 상태’이기도 하다. 여기 엉킨 이들 가운데 온몸을 완전히 열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다른 몸의 의지와 방향에 귀 기울이지 않은 이는 없다. 의지적으로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이는, 자신의 곁을 내어주기를 마다하는 이는 없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엎어지고 포개지고 널브러졌으며, 아무도 체면을 차리거나 몸을 사리지 않는다. 모두가 서로에게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내어주고, 그만큼 밀려오는 상대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필요할 때 이완하고 필요할 때 힘을 준다. 더 널리, 더 큰 무게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다. 모두들, 안녕한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모두가 평등하게 안녕하지 못한 채로 서로의 안녕을 끊임없이 살피고 염려한다는 것은 알겠다. 우리는 한시적으로나마 집단의 몸이 된다. 결코 우아하고 보드라우며 쾌적한 종류의 것이 아닌 만남 속에서, 거칠고 무거우며 때로 두려운 접촉 속에서, 잠재적이고도 항시적인 위험과 이따금 복기되는 상처 속에서.
아무도 엉키기를 중단하지 않았으므로 안녕에 대한 공동의 탐구는 생각보다 길게 지속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엉키기가 아무런 사인 없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분리되며 몸들이 서로로부터 풀려나왔기 때문이다. 영원히 안 끝나는 줄 알았다고 누군가 농을 던지자 진이 쏙 빠진 사람들이 푸스스 웃는다.
4.
6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린다. 2020년 10월, ‘2020년 연극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이음센터에서 열렸던 ‘장애인의 공연장 내 재난대피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다. 극장 어셔 역할로 출연한 나는 조금 전 불시에 연출된 재난 시뮬레이션 상황에 따라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어설프게 문밖으로 몰아낸 참이다. 그러나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어쩐지 ‘재난 대피’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의 관람경험 속에서 장애인 관람자의 접근과 이동을 어떻게 보다 쾌적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로 흘러간다. 막바지에 마이크를 잡은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한다.
미안의 안과 안녕의 안이 같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미안하기와 안녕하기가 반대말이라는 뜻이다. 안녕하기 위해서는 미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안녕할 수 있는 방안은 애초에 미안할 일을 만들지 않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것 두 가지뿐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만나 엉키기로 한 이상 우리에게 전자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미안해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각자의 안녕하지 않음을 감수하는 동시에 서로의 안녕을 살피는 것. 내밀하거나 민감한 몸의 곳곳을 드러낸 채 무게를 맡기고 통증을 감내하는 것. 우리가 교환하고 있는 무엇을 정산되어야 하는 빚이나 해로움으로, 민폐로 여기지 않는 것. 이러한 엉키기 자체가 우리가 돌봄을 수행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임을 받아들이는 것. 서로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일일이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기로 약속하는 것. 모두가 돌봄받고 모두가 돌봄을 행하는 이 프랙티스 ‘안녕히 엉키기’에 유일하게 변치 않는 전제가 있다면,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자는 이 커다란 약속일지도 모른다.
이 약속이 실현된 이 공동체는 어쩐지 전혀 천국처럼 생기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 누군가 풉 하고 웃은 것은, 모두의 꼴이 공평하게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추가 풀어지고 양말이 벗겨지고 산발머리를 한 자신들을 우스워한다. 서로를 모르고 서로를 구하느라 체면을 구긴 사람들을, 서로를 살피는 일이 불가피하게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는 일임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어쩌면 민주주의란 모두가 모두를 우스워할 수 있을 만큼의 평등한 엉망진창. 나 자신의 안녕만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우리의 안녕이 바로 그 진창에 있다. 끼어버린 허리와 휘어지는 다리 사이에. 경직된 목을 끌어안는 완강한 두 팔 사이에.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열고 열리는, 약하고 궁핍한 이 지상의 몸들에.
언젠가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깨물고 싶었다. 사과를 하는 일도 사과를 받는 일도 피로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너를 다치게 했다는, 힘들게 했다는, 해를 끼쳤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은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아무래도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면 누군가는 계속해서 미안하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괜찮아야 하기 마련이었다. 고맙다는 말의 사정도 대강 비슷하다. 그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괄호 안에 들어간 깨알 같은 글씨의 약관을 읽을 수 있지만(대강 을이 갑에게 빚을 졌으며 둘 사이에는 채무 관계가 성립했고 얼마만큼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고 쓰여있다고 해두자),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한번 불어난 빚은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모른다. 그렇게 누군가 계속해서 빚을 지고 누군가 계속해서 품을 낸다.
돌봄과 의존이 우리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새삼스러운 말을 다시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와 부대껴야만 하고 서로들 해(害)와 폐(弊)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는 우리 사이에 오가는 사과와 감사가 종종 그러한 해와 폐를 셈하는, 정산되지 않는 부채의 단위나 산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교환이 불균형해보일 때 특히 그렇다. 특정한 신체적 조건 내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이들의 하루를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안하다고, 혹은 고맙다고 말해야만 시작되고 끝나는 이들의 일상을. 고맙다고 하는 당신의 말에서 미안하다는 속뜻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당신이 과연 내게 잘못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잘못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우리가 정말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책임이 어떤 몸들에게만 전가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면,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를 논하고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사실 미안한 게 죽기보다 싫은 사람. 그러면서도 ‘미안해’와 ‘고마워’를 쌍절곤처럼 휘둘러대는 사람. 어느 날엔가는 그런 스스로의 비겁함에 염증이 나서, 민주주의란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는 커다란 약속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내 상상 속에서 그런 약속이 실현된 세계는 어쩐지 천국처럼 생겼다. 아무런 공격도 일어나지 않고 그 어떤 잘못도 발생하지 않는 그 세계에선 누구도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 평안하고 풍요하며 완전한 나라여. 모두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깃털처럼 가벼운 다리로 걸어다니리. 무해함으로 멸균된 몸 안에는 방부처리된 마음이 디폴트로 내장되어 있으리. 완벽하게 S자를 그리는 척추를 중심으로 하여 늙지도 지치지도 않는 사지가 탄탄히 뻗어나가리. 모두가 생생하고 선명한 감각으로 정보를 자유자재로 처리하고 모자람 없는 말과 글로 유창하게 자신을 드러내리. 경사로도 리프트도 휠체어도 필요 없는 그곳에서는 나선형으로 부드럽게 휜 천국의 계단을 누구나 사뿐히 오르내리리. 그러니까 그곳은 철저히 비장애인들의, 비장애인들에 의한, 비장애인들을 위한 국가. 모든 문제가 사전에 예방되고 모든 사후적인 인삿말이 사어가 되며 어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안녕히 엉키기’ 같은 건 연습하지 않는다.
2.
안무가 손나예가 둥글게 앉은 열댓 명의 사람 속에 우뚝 선다.1) 워크숍의 이틀 차 마지막 프랙티스인 ‘안녕히 엉키기’에 돌입하려는 참이다. 고개를 뒤로 깊숙이 젖히고 천장을 향해 얼굴을 쳐든 그는 어렵사리 침을 삼키며 자신이 준비한 말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된 바 있는 고문의 자세라고 했다.2) 상해를 입히는 동시에 상해를 받는 몸”3), 그러니까 그 자신의 몸으로 고통을 발생시키고 또 받아내는 자의 형상. 무자비하게 젖혀진 목덜미의 통증으로 자주 숨을 고르며, 그는 다음의 질문 속에서 ‘안녕히 엉키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그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제안하는 것은, “체면을 차릴 수도 없고 차려서도 안 되는” “결정적 순간”을 여기서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다. 점점 더 좁아지는 공간 속에 우리 스스로의 몸을 가두고 그 안에서 서로의 몸을 겹치고 포개어보는 것이다. 이 활동에 ‘안녕히 엉키기’라는 이름을 붙인 그는, 우리가 이 시간 동안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는 동시에 서로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뉜다. 바닥에서 엉킬 사람들과, 그 엉키기를 가능케 할 ‘환경’이 될 사람들이다. 전자의 사람들이 바닥 곳곳에 누우면 후자의 사람들이 그들을 몸으로 밀어 한데 모아주기로 약속한다. 더는 갈 데가 없을 때까지, 서로의 몸 사이의 공간을 밀고 들어가면서 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될 때까지, 서로 엉켜볼 수 있을 때까지.만약에 내가 말로 할 수 없는 그러한 고통의 순간에 놓인다면 혹은 눈앞에서 고통에 처한 타인을 마주하게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체면을 차릴 수도 없고 차려서도 안 되는 상황에서요. 견디거나 포기하는 것 말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해보려는 일과, 그 말을 들어주려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엉키기로 자처한 사람들이 바닥 곳곳에 드러눕자 ‘환경’을 맡은 사람들이 이들을 떠밀어 중앙으로 모으기 시작한다. 안전을 위한 음성 신호인 “아!”와 “스탑!”을 각자 큰 소리로 연습한 뒤의 일이다.4) 조금씩 떠밀리며 굴러온 몸들이 어색하게 서로를 건드린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몸이 점점 모여들어 뭉친다. 그런데 왜인지 몸들은 모이는 것만으로 쉬이 엉켜지지만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파고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은 움찔 놀라며 오그라든다. 혹은, 누군가의 얼굴이나 손에 자신의 발이나 엉덩이가 닿는 것에 당황하거나 몸을 떼어놓는다. 중앙에 있는 몸들은 단단한 알맹이처럼 말린 채 서로 눌릴 따름이고, 가장자리에 있는 몸은 중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손쉽게 떨어지기 일쑤다. 구태여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엉키기의 어려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이사이로 엉거주춤하게 삐져나온 다리가, 누군가의 맥없는 신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이들 중 대부분에게 걷거나 서거나 앉은 모양이 아닌 채로, 골반을 바로 세우고 척추를 기립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와 얽히는 일은 그리 친숙한 경험이 아니다. 나이도 젠더도 삶의 환경도 제각각인 생판 남들이 모르는 겨드랑이를 선뜻 껴안거나 가랑이를 번쩍번쩍 여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일일 테다. 게다가 이 워크숍에는 각자의 다른 특질을 가진, 저마다의 취약성을 가진 신체들이 모여있다. 사람들은 이중 누군가가 눌려오는 무게에 바로 대응할 수 없는 몸을 가졌음을, 자신의 어느 부위가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곧장 알아채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등 아래에서 당신의 목이 심하게 비틀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직의 현상인지, 혹은 나의 무게로 인해 생겨난 비상사태인 것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당신의 좁혀진 미간과 찌푸린 눈은 어쩌면 조금 전 내가 가한 고통에 대한, 사회적 겸양이나 예의범절만으로는 미처 감추어지지 않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 ‘안녕히 엉키기’에는 분명 그 이상으로 곤란한 구석이 있다. 이 활동 안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각자의 몸 안에 깊이 각인시킨 두려움을, 곤란함을, 죄책감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례없는 팬데믹을 지나오는 동안 서로의 몸이 가진 잠재적 유해성을 인식하지 않았는가? 서로를 서로로부터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모두를 보호하기로 하는 ‘거리두기’의 규범이야말로 우리의 생존방식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로 좁은 공간 안에서 눌리고 뭉개지고 조여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었던가? 높은 압력 속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허망하게 더 이상 ‘우리’가 될 수 없게 된 사건은 우리에게 정녕 무엇이었나? 이 연습은 분명 모두에게 새겨져 있는 상실의 기억을 즉각적으로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곤욕스러움을 넘어 얼마쯤 외상적이기까지 하다.
일순간 어디선가 분명한 ’스탑!’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떤 이유에서든 명백하게 안녕하지 않을 때, 엉키기를 중단해야 할 때 내기로 한 음성 신호다. 천천하지만 지체없이 몸들이 풀어헤쳐진다. 첫번째 엉키기 연습이 종료된다.
3.
사람들이 다시 둥글게 둘러앉는다. 진행자인 손나예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더 안전히, 더 무사히 엉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몇 차례의 워크숍에서, 엉키기에 절대적인 규칙이란 없으며 오히려 지난 엉키기에서 얻은 요령을 공유하는 일이 도리어 다음의 엉키기를 손쉽게 망친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엉키기 연습 사이사이에 토의의 장을 연다. 몸들이 만들어내는 특정한 모양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려가는 관계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프랙티스의 목표라고 해본다면, 보다 ‘안녕히 엉킬’ 방법을 찾는 것은 직접 참여하는 이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사람들은 보다 잘 엉킬 수 있게 하기 위한 기술적인 요령을 공유하기도 하고, 이러한 형식으로 타인을 만나는 경험이 주는 느낌이나 감상을 나누기도 한다. 모두가 엉키기를 다르게 경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누군가는 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는 없는 이 숨막히는 접촉이 퍽 힘들고 불편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몸이 포개질 때 생기는 압력이 의외로 편안하여 잠이 든 것 같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더 잘 엉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몸에서 힘을 풀어야 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맨 아래 깔린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힘주어 버텨야 했다고 말한다. 두 차례의 엉키기 연습과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배움과 요령을 얻는다. 더 잘 엉켜보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결심을, 때로는 서로 모순되거나 정 반대라고 할 법한 결심을 내린다.
공유되는 엉키기의 경험과 그에 따라 세공되는 엉키기의 양상은 워크숍마다 다르지만, 매번 비슷하게 도출되는 전제가 있다. ‘안녕히 엉키기’가 곧 ‘안전히 엉키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엉키기를 지속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해야 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서로로 하여금 위험에 빠질 의무, 내지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거나 위험에 빠뜨릴 의무다. 엉키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안쪽의 압력이 풀어지지 않게끔 서로를 당겨야 하고,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몸을 다시금 몸의 더미 속으로 잡아끌거나 자신의 몸을 몸소 사람들 속으로 밀어넣기를 감행한다. 그런 현상을 누군가는 ‘가해’의 느낌으로 회고하고 누군가는 같은 경험에 ‘믿음’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어쨌든 사람들은 안녕에 대한 하나의 역설을 서로에게 심는다. 서로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에게 위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엉켜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안팎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한데 뛰어들기로 한다. 진풍경이 펼쳐진다. 어떤 이의 엉덩이가 다른 이의 머리를 누르고 있고 어딘가에서 낯선 가랑이들이 만나 맞물린다. 누군가의 한쪽 양말은 애진작에 간데없고 누군가의 꽉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된 지 오래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서로를 짓누르고 압박을 가함으로써, 서로를 말 그대로 힘들게 함으로써 곤란에 빠뜨리고 위험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의 몸이 가진 틈새가 점차 벌어지고, 그 안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이 진입해온다. 혹은 누군가의 몸이 끼어들어옴에 따라 다른 이의 몸이 불가피하게 열린다. 사람들은 점차 첫 시도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느리게 엉켜 간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은 세탁기 속 탈수된 빨래처럼 단단히 꼬여있고 점점 더 많이 꼬인다. 나는 이 활동의 이름이 새삼 얼마나 고약한가 생각한다. 야채튀김처럼 엉켜있는 와중에 어디 한번 안녕도 해보라고 제안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서로로 인해 안녕하기가 영 어려운 상황 속으로 모두를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모두들, 안녕한지? 적어도 나는 아니다. 아마 당신도 아닐 성싶다. 내가 방금 온몸으로 당신의 다리를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오늘 이 워크숍에 오는 길을 당신과 동행하며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지체장애가 있어 흔들리는 당신의 걸음을 보조하며 이런 너스레를 떨었었다. “이제부터 ‘감사합니다’ 금지예요. 대신 ‘오냐’라고 하세요.” ‘오냐’라니…… 가당키나 한가? 나는 주둥이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기대야만 하는,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빚을 상환할 수 없는 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았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나로부터 당신을 구하는 일. 그러나 내 몫의 무게를 버텨내기 위해 다른 곳을 짚으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불가피하게 짓눌러야만 한다. 하여간에 모두가 용을 쓰고 있다. 아무래도 프랙티스 이름을 다시 붙여야 할까? 혹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어떨까?
한편으로 뒤집어 말하면, 이 풍경은 정확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돌봄 상태’이기도 하다. 여기 엉킨 이들 가운데 온몸을 완전히 열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다른 몸의 의지와 방향에 귀 기울이지 않은 이는 없다. 의지적으로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이는, 자신의 곁을 내어주기를 마다하는 이는 없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엎어지고 포개지고 널브러졌으며, 아무도 체면을 차리거나 몸을 사리지 않는다. 모두가 서로에게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내어주고, 그만큼 밀려오는 상대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필요할 때 이완하고 필요할 때 힘을 준다. 더 널리, 더 큰 무게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다. 모두들, 안녕한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모두가 평등하게 안녕하지 못한 채로 서로의 안녕을 끊임없이 살피고 염려한다는 것은 알겠다. 우리는 한시적으로나마 집단의 몸이 된다. 결코 우아하고 보드라우며 쾌적한 종류의 것이 아닌 만남 속에서, 거칠고 무거우며 때로 두려운 접촉 속에서, 잠재적이고도 항시적인 위험과 이따금 복기되는 상처 속에서.
아무도 엉키기를 중단하지 않았으므로 안녕에 대한 공동의 탐구는 생각보다 길게 지속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엉키기가 아무런 사인 없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분리되며 몸들이 서로로부터 풀려나왔기 때문이다. 영원히 안 끝나는 줄 알았다고 누군가 농을 던지자 진이 쏙 빠진 사람들이 푸스스 웃는다.
4.
6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린다. 2020년 10월, ‘2020년 연극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이음센터에서 열렸던 ‘장애인의 공연장 내 재난대피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다. 극장 어셔 역할로 출연한 나는 조금 전 불시에 연출된 재난 시뮬레이션 상황에 따라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어설프게 문밖으로 몰아낸 참이다. 그러나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어쩐지 ‘재난 대피’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의 관람경험 속에서 장애인 관람자의 접근과 이동을 어떻게 보다 쾌적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로 흘러간다. 막바지에 마이크를 잡은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한다.
둘러앉은 이 몸들을 바라본다. 전동휠체어에서 내려온 몸, 기울어진 몸, 경직된 몸, 젊은 몸을. 나이먹은 몸, 수술받은 몸, 약한 폐나 신장을 가진 몸, 키가 작은 몸을. 흔들리며 걷는 몸, 흰 지팡이를 쓰는 몸, 눌변인 몸, 멍이 자주 드는 몸을. 무대에 자주 서본 몸, 언제나 객석에만 머무르는 몸, 그 객석에조차 접근할 수 없는 몸, 동시에 시선 받는 데에 한없이 익숙한 몸을. 이 몸들은 이토록 전부 다르게 생겼고, 고유한 방식으로 초라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취약하다. 그 어떤 공통점도 없는 이런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근거가 있다면 조금 전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롭기 위해 딱 그만큼 더 해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점뿐이다. 우아하고 안전한 이웃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우악스러운 타인이 되기를 감수했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하거나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내게 놀라운 위안을 준다.저는 이게 재난 대피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소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그건 우아하기보다 차라리 우악스러운 경험일 거예요. 우리는 우왕좌왕하고, 서로의 동의 없이 둘러업고, 상대의 몸을 침범하거나 폭력을 가하면서라도 살아남아야겠지요. (…) 저의 질문은 어떻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두려움 없이 서로를 향해 몸을 열 것인가, 그리하여 기꺼이 서로를 구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미안의 안과 안녕의 안이 같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미안하기와 안녕하기가 반대말이라는 뜻이다. 안녕하기 위해서는 미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안녕할 수 있는 방안은 애초에 미안할 일을 만들지 않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것 두 가지뿐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만나 엉키기로 한 이상 우리에게 전자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미안해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각자의 안녕하지 않음을 감수하는 동시에 서로의 안녕을 살피는 것. 내밀하거나 민감한 몸의 곳곳을 드러낸 채 무게를 맡기고 통증을 감내하는 것. 우리가 교환하고 있는 무엇을 정산되어야 하는 빚이나 해로움으로, 민폐로 여기지 않는 것. 이러한 엉키기 자체가 우리가 돌봄을 수행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임을 받아들이는 것. 서로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일일이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기로 약속하는 것. 모두가 돌봄받고 모두가 돌봄을 행하는 이 프랙티스 ‘안녕히 엉키기’에 유일하게 변치 않는 전제가 있다면,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자는 이 커다란 약속일지도 모른다.
이 약속이 실현된 이 공동체는 어쩐지 전혀 천국처럼 생기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 누군가 풉 하고 웃은 것은, 모두의 꼴이 공평하게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추가 풀어지고 양말이 벗겨지고 산발머리를 한 자신들을 우스워한다. 서로를 모르고 서로를 구하느라 체면을 구긴 사람들을, 서로를 살피는 일이 불가피하게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는 일임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어쩌면 민주주의란 모두가 모두를 우스워할 수 있을 만큼의 평등한 엉망진창. 나 자신의 안녕만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우리의 안녕이 바로 그 진창에 있다. 끼어버린 허리와 휘어지는 다리 사이에. 경직된 목을 끌어안는 완강한 두 팔 사이에.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열고 열리는, 약하고 궁핍한 이 지상의 몸들에.
*이 글은 다음의 두 글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작성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서로를 구하리」, 『2023년 서울무용센터 하반기 입주예술가 작업 아카이브』, 99-105쪽.
바로가기 「아무도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로 하자: ‘안녕히 엉키기’에 다는 주석」, 2025 ACC 접근성 강화 주제전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 도록 작가노트,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5.
하은빈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을 썼고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우리말로 옮겼다. 불구의 몸, 상한 마음, 잘못한 사람에 관심이 있다.
2025/08/06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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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워크숍 일화는 지난 4년 간 김원영 작가, 손나예 안무가와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움직임-글쓰기 워크숍의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해당 워크숍은 2022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창작 아카데미에서 ‘되기-기억하기-함께 움직이기’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2024년 서울시립미술관(‘나의 손을 너의 등에’), 2025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안녕히 엉키기’)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장애인/비장애인 참여자들이 함께하되 장애 당사자의 주체적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이 워크숍은 다양한 조건과 감각을 지닌 참여자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접근이 용이한 공간을 대관하고 음성해설을 포함하는 등 장애친화적 환경과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주된 활동은 ‘되기’ ‘엉키기’ ‘구르기’의 세 가지 프랙티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밀도 높은 접촉을 동반하는 ‘안녕히 엉키기’ 프랙티스를 다룬다. ‘안녕히 엉키기’는 손나예 안무가가 2023년 서울무용센터 하반기 입주작가 쇼케이스에서 처음 발표한 스코어로, 이후 수정, 변형을 거쳐 이 워크숍의 프랙티스 중 하나로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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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레인 스캐리는 “죄수의 몸을 적극적인 작인으로” 만드는 고문 중 하나로 그리스의 고문 ‘매듭묶기’를 소개한다. 죄수가 머리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계속 침을 삼키게 하는 이 고문은, “몸을 죄수가 느끼는 고통의 실제 원인으로 만듦”으로써 “몸이 몸 자신을 먹어치우게 한다”.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76-77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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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책, 115쪽. “… 이 같은 전투원은 실제 몸이 갖는 근원적인 이원성을 지녀서, 상해를 가하는 동시에 상해를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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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은 언제든 서로의 몸을 풀 수 있음을 합의하고 모두에게 위험을 알리는 음성 신호를 함께 연습한 후, 누구나 누군가에 의해 다칠 수 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엉키기를 수행한다. 하지만 매사가 그렇듯 이러한 예방의 조처가 잠재적인 사고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