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나를 부르는, 나를 일으켜세우는 목소리
‘접촉’을 주제로 광장과 정치와 노동자와 농성장에 관한 원고를 쓰게 됐는데, 정작 원고를 쓰느라 머리를 싸매고 농성장에 가지 않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원고를 못 써서 슬퍼하고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SNS를 뒤적이는 데 썼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린다. 누군가는 불탄 공장 위에, 누군가는 철탑 위에, 누군가는 차도 위에, 그리고 누군가는 그 아래에 있다. 지금도 누가 거기 있는데 나는 내 방이라는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이 자꾸만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나는 점점 파우스트처럼 내 방 안에 고립되어서 ‘나는 이래서 안 돼’ ‘연대 못가서 죄송합니다’ ‘원고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를 허공에 외치고 있다.
그러다 어떻게 원고를 내고 나면 그동안 쌓인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듯이 투쟁문화제나 집회에 간다. 계엄령 이후 한동안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적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집회에 가면 한둘쯤 아는 사람이 있고, 없어도 대충 구석에 끼여서 앉았다. 집회의 좋은 점은 모르는 사람이 와서 앉아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반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 의례를 시작할 때 일어났다가 발언의 중간중간 “투쟁!”하고 호응하고, 아는 노래가 나오면 열심히 따라 부른다. 그렇게 몇 주씩 방구석에서 혼자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자고 외치다가 밖에 나와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서 좋은 말도 듣고 아는 노래도 같이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집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밀린 마음의 빚도 갚은 것 같고 밥값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해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SNS에 사진과 간단한 후기를 올리고 옷을 벗어 빨래통에 던져넣고 편안히 눕는다. 그렇게 내 일상의 안전지대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쏙 돌아오는 것이다.
2. 하청 노동자: 선을 넘을지 말지 결정한 사람들
2022년 여름도 나에게 그런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2022년 6월, 거제시 옥포의 대우조선에서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도크를 점거한 파업을 시작했다. 2016년 조선업 불황이라는 피바람 속에서 조선소 원청은 하청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분담하자고 하며 상여금을 삭감했다. 그렇게 최저시급에 가까운 기본급을 받으며 버텼지만, 이후 조선업에 호황이 돌아와도 하청 노동자들이 분담했던 고통은 그대로였다. 하청 노동자들이 빼앗긴 몫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원청은 하청 노동자는 하청 업체와 교섭하라고 말했고, 하청 업체는 원청으로부터 받는 기성금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율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답했다. 막다른 곳으로 몰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선을 넘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조합에서는 1도크에서 건조중인 블록을 점거하는 투쟁을 결행했다. 용접사 유최안이 가로세로 1미터 정도의 철창에 들어간 채로 철창과 블록을 용접해 철창 농성을 하고, 다른 조합원들은 그 블록 위에서 고공 농성을 한 것이다. 그렇게 블록을 점거하면 도크에서 블록을 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1도크가 멈추면 도크 전체의 공정이 멈추게 된다.
대형 조선소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규모를 감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만 평 부지에서 수만 명이 달라붙어서 손으로 배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 거대한 대공장 전체를 이 사람들 몇 명이 완전히 멈춰버린 것이다. 철창 사이로 나온 마른 손에 들린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는 피켓과 철창 사이로 카메라를 마주 보는 핼쑥한 얼굴의 강렬한 눈빛을 담은 사진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도 그렇게 6월 24일, 7월 2일, 7월 8일, 7월 23일의 거제의 투쟁 집회에 참여했다.
3. 연대자들: 담을 넘을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들
그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였던 날은 7월 2일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였던 것 같다. 6월 24일에는 대우조선 서문 앞을 채울 정도였던 사람들이 이날은 옥포 거리를 뒤덮을 정도로 많이 모였다. 그 자리에는 어느 노동조합 위원장도 오고, 어느 국회의원도 와서 길고 긴 발언을 했고, 수많은 사람이 옥포 수협 앞에서 대우조선까지 행진했다. 나도 여느 때처럼 내가 가져간 깃발을 펄럭이고 아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집회가 끝날 때쯤 오늘도 나는 열심히 연대를 했다고 뿌듯한 마음으로 깃발을 다시 주섬주섬 집어넣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어딘가의 노조원들이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지만 하도 사람이 많아서 주변에 있는 나와 몇 사람 정도나 들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나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집으로 갔을 텐데 그 말이 자꾸 귀에 남았다.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조선소는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본 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할 때나 가족 초청행사가 있을 때 정도뿐이었다. ‘밀고 들어간다’라는 건 생각해보지 못했다.“사람 이래 모잇는데 밀고 들으가야 될 꺼 아이가?”
“뭐고? 이래 끝이가? 밀고 들으가뿌지, 왜?”
“아이씨, 여기서 백날 구호 고함질르봐야 안에 들리긋나? 온 줄도 모르긋다.”
“마, 밀고 들으가자! 쫌!”
생각해보면 2011년에 친구와 함께 영도 한진중공업 1차 희망버스에 참가했을 때도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조선소 담장 밖에서 하는 집회에만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누가 벽에 사다리를 대더니 “우리 안으로 들어갑시다!”라고 외쳤다. 나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안에 들어갔다가 너무 늦게 집에 돌아가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이 간 친구가 당연히 담을 넘어야 하지 않냐는 듯이 나를 보며 “안넘을 꺼가?”라고 물었다. 아마 집회는 이날이 처음이었을 친구가 담을 넘자고 하는데, 전에도 집회에 참석해봤다고 잘난 척을 한 내가 “내일 바빠서……”라고 말하기에는 ‘가오’가 상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담을 넘었고, 새벽 늦게 집에 들어가 다음 날 일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온갖 야단을 맞았지만 나는 ‘가오’를 지켰다.
그날 영도 한진중공업에는 옥포 대우조선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누군가 들어가자고 담에 사다리를 대자 순식간에 넘어버렸던 걸 생각하면, 우리는 대우조선에서도 담을 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백날 구호 고함질르봐야 안에 들리긋나? 온 줄도 모르긋다.”는 말처럼, 조선소는 너무나 넓어서 조선소 바깥에서 만 명이 고함을 질러도 도크에는 그 소리가 바람결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사다리가 없어도 이 많은 사람이 함성을 지르면서 문으로 밀고 들어갔다면 우리는 도크 근처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도크 옆에서 우리가 왔다고 농성하는 사람들의 귀가 터지도록 잘 들리게 소리쳐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 날은 담을 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각자 타고 온 버스를 타고 흩어졌다. 나는 “온 줄도 모르긋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그걸로 되겠어?’라는 소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뿌듯하기만 할 줄 알았던 연대에 무언가 자꾸 균열이 끼어드는 기분이다.
4. 투사와 히어로, 그리고 ‘평범한 사람’
2024년 11월 2일에는 구미 옵티칼 공장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정혜, 소현숙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가 열렸다. 구미는 아사히글라스노조가 오랫동안 투쟁문화제를 해온 곳이라 여러 번 와본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유독 날씨가 좋았고, 친구와 함께 가서 다른 연구자 동료들도 만났다. 불탄 공장 건물 위의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날씨도 좋았고 아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아는 노래도 많이 나왔다. 다 좋은 날이었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는 머릿속에 소음이 들어올 새도 없이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2024년 12월 31일에는 거제 한화오션(대우조선이 매각되어 한화오션이 되었다) 서문에서 해넘이 투쟁문화제가 열렸다. 거기서 2022년 당시 철창 안에 있던 유최안을 만나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대로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피켓을 든 채로 철창 안에 있던 강렬한 사진처럼 ‘투사/히어로’와 같은 이미지였지만, 만나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자 금방 이미지가 바뀌었다. 철창 농성을 하던 때처럼 핼쑥하지도 않고,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지도 않은, 명랑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거제에서 아침마다 쏟아지듯이 출근하는 회색 조선소 출근복을 입은 노동자 중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을 평범한 사람. 이날도 투쟁 문화제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냥 뿌듯하지 못한 채로 생각을 계속 곱씹었다. 자꾸만 머릿속의 소음이 늘어난다. 무언가 놓고 온 것만 같다.
5. 공장의 어둠, 아파트의 불빛
2025년 1월 10일에는 구미 옵티칼 공장에서 텐트마을이 열린다고 해서 다른 친구와 함께 다시 갔다. 불탄 공장 앞마당에 단 하루 동안 마법처럼 마을이 생겨났다. 마을이 생겨난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오고, 그 사람들이 잠을 잘 텐트가 늘어서고, 밥을 짓는 사람들, 밥을 먹으며 북적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용할 화장실을 안내하는 사람들, 집회에 필요한 물건을 나눠주는 사람들, 의료를 담당하는 사람들, 무대를 꾸미고 장식하는 사람들, 공연하는 사람들이 온다는 거다. 즉 텐트마을에서 사람들이 단 1박 2일간 먹고 자고 가게 하기 위해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손이 가는 일과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옹기종기 모인 투쟁문화제나 많이 모여서 하는 집회와는 또 다르게 이건 진짜 축제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들떴다. 떡국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두 가지 맛 떡국 중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자 ‘우리밥차’의 사람들이 둘 다 먹으라며 웃었다. 이날따라 금속노조 조합원 사회자가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게 말도 너무 재미있게 해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발언이 있기 전까지는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그때 공장 맞은편의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백 개의 집에서 저마다 노란 불빛이 반짝였다. 저 불빛 한 점 한 점마다 안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고 쉬는 사람, 또는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 가족들. 매일 출근해서 갈 곳이 있고, 일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 있는 일상.차라리 감옥이라면 형기가 있어서 반년 남았구나, 이제 석 달만 있으면 나가겠구나, 올 설은 가족들이랑 보내겠구나 할 텐데, 하늘 감옥은 그마저도 없이 희망고문만 이어집니다. 한 달이면 되겠지, 석 달이 지났구나, 추석은 집에서 보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채로 일 년이 되었습니다.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1)
그렇지만 이 멋진 텐트 마을이 하루 만에 마법처럼 사라지고, 우리가 모두 다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면 불탄 건물 위에 남은 두 사람은 어떡하지. 내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오늘도 연대를 해서 밥값을 했다며 뿌듯하게 내 일상 속으로 안전하게 돌아간 그 시간에, 두 사람은 밤마다 다시 빈 공장 뜰과 그 너머 맞은편의 반짝이는 아파트의 불빛들을 하염없이 보는 곳에 남겨져야 한다. 이 사람들은 기약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나는 일상으로 너무 쉽게 돌아간다.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그걸로 되겠어?’라던 질문은 ‘이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도 되겠어?’라는 의미였음을 알았다.
6. 최후까지 그곳에 남은 사람들
그때쯤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불타버린 옵티칼 회사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하는 동지들에게 일상 사진을 달라고 해서 받아보았다며 트위터에 올린 것을 보았다. 그분들이 여름쯤에 어딘가에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은 밝고 신나보였다. 사진만 보았으면 고공농성을 1년 넘게 버텨내고 있는 ‘투사’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트위터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한 것도 보았다.당신이 비폭력을 옹호하며 나는 처형자도 희생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주 좋다. (…) 만약 당신이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면, 하루 이틀쯤 감옥에 갇힐 위험이 있다면, 당신은 즉각 손을 빼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최후까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사르트르, 「1961년판 서문」 부분2)
‘바보같이 경력자 분들이라 뭔가 방법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는 말처럼 나 또한 바보같이, 철창 안에 들어가 농성을 하는 사람, 불탄 공장 위에서 농성하는 사람, 고가다리 위에서 농성하는 사람, 철탑 위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은 뭔가 대단하고 다른 사람들일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밝고 신나거나 명랑하고 평범한, 별로 다르지 않고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방법이 없이’ 그 상황 속에서 그렇게 결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때려 엎고 싶어도 사실은 불굴의 투사도 히어로도 아니라서 어쩔 수가 없는 채로, 그래서 더 힘들고 절박하게, 사람들이 파도처럼 닫힌 공장 문을 밀고 들어와서 일만 명의 손으로 철창을 뜯어내주기를, 그래서 눈앞에서 말라죽어가는 동지를 살리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날, 우리는 공장 문을 밀지 않고 흩어져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무언가 놓고 온 것 같다던 것은 그때 공장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내 일상으로 쉽게 돌아갔던 날의 나였고, 그때 철창 안에 있던 사람이고, 아직도 공장 옥상, 고가다리, 철탑 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걸 어쩌지. 나는 무엇을 매번 남겨두었지. 앞으로는 또 무엇을 남겨두게 되어버릴까.오늘 전장연 집회 다녀왔는데 다 전장연이 책임진다고 마음껏 붙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박경석 대표님이 우리는 이런 벌금내는 거 전문이라고 말씀하시길래 바보같이 경력자 분들이라 뭔가 방법이 있나 보다… 하고 기뻐했습니다만…. 교도소에 들어가면 벌금을 하루 5만원 10만원씩 없애준다고 말씀하셔서 모두가 말을 잃고 침묵했습니다.. 찾아보니 전장연도 꽤 최근에 스티커 부착으로 벌금형이 내려진 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8시부터 힘들었을 거라고 김밥도 준비해주셨어요 ㅜㅜ 전장연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후원도 부탁드립니다!3)
‘빨리 탄핵하고 내란수괴는 감옥으로 가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나 문구를 여기저기서 보고 들었다. 그리고 탄핵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 누가 탄핵이 되고 감옥에 간다고 해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로는 그 누구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뿌듯한 마음으로 안전지대로 돌아갔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7. 누구도 남겨지지 않을, 다시 만날 세계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은 나를 계속해서 일으켜세우는 목소리는 단지 농성장으로 나오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자꾸 불어넣는다. 나는 더 나은 연구자가 되고 싶다. 더 좋은 연구를 하고 싶다. 비록 매번 미루다가 실패하고 자기혐오를 하고 마감에 늦고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만, 그래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이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해도 안되는 것을 알지만, 그걸 알고도 할 수 있는 용기”로 인간다운 삶을 얻고자 한 것처럼, 나도 비정규직 연구자로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보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비정규직인 채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책임질 수 있는 원청과 교섭하고, 일한 만큼 받아가지고 좀 적당히 좀 먹고 살자고 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고통이 따라야 됩니까? 이딴 짓거리를 만들어 놓고 이딴 사회에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면 저항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의에 맞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힘을 모아가는 것 그 모은 힘을 바탕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 결정한 것을 동지를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에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최안, ‘전국노동자대회 비정규직 전야제 발언’ 부분4)
혼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면, 좋은 연구로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 동료 연구자들과 힘을 모아가고 싶다. 정규직이 만든 판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연구자들이 이끌어가는 판을 열고 싶다. 그렇게 동료들과 모은 힘을 바탕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서, 우리가 믿는 것이 맞다고 말해주는 믿는 동료를 믿고, 태산을 옮기는 숟가락 같은 연구를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남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우리의 삶도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끌고 나가 ‘다시 만날 세계’에서 만나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진짜 ‘다시 만날 세계’는 결코 단번에 오지 않을, 그리고 누구도 돌아가지 못한 채로 남겨지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신현아
87년 10월 생이라 하필 엄마가 만삭일 때 조선소에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서 파업한다고 월급이 나오지 않아 감자 먹고 버텨서 감자같이 생긴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남자들은 다 크면 조선소에서 일하는 줄로만 알았고 조금 커서는 조선소 동네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멀리는 못 가고 결국 조선소와 지역에 관해서 박사논문을 썼다.
그동안 조선소 지역에 관해 연구하며 주로 중공업-정규직-노동자 가족을 중점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앞으로는 하청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누군가가 ‘별로 한 것도 없구먼, 글은 되게 파토스가 넘치네’라고 말하면 어쩌나 걱정되고 내가 너무 과잉되어 있나 싶어 부끄럽다. 이래도 되나? 되는 건가? 이런 기분일 때 다른 연구자들은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25/08/06
74호
- 1
- 발언은 기억나는 대로 쓴 것이라 정확하지 않다.
- 2
- 장 폴 사르트르, 「1961년판 서문」,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10, 40쪽.
- 3
- 삼삼(@myskmakj)의 X(구 트위터) 게시글, 2025년 1월 3일.
- 4
- 유최안, ‘전국노동자대회 비정규직 전야제 발언’ 부분, 2022년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