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경님께서 제보하신 일기


   졸업 엠티 때 대천. **언니랑 **이랑 새벽에 먼저 나와 새벽 바다를 봤는데 밤에 봤던 바다랑 완전히 달랐다. 그땐 썰물이고. 새벽엔 밀물이었나. 새벽이 썰물이었다! 아니 우리가 술을 마시는 동안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나. 과학 지식이 없으니 원. 근데 언니랑 나랑 처음 바다를 보고 느낀 게 새롭다였다. 그리고 무섭다였다. 몰래 빠져나가던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그것들이 너무 악착같은 파도를 쳐서. 또다른 느낌은 멀어지는 게 너무 멀어져서. 밤에 봤을 때보다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데 소리가 커서. 안개가 껴서. 푸른 게 보여서. 밤엔 캄캄했는데. 좀 무서웠고 불꽃놀이도 사실 겁에 질린 채로 한 것 같다. 즐겁긴 했다. 불꽃이 하늘로 향하는 게 아니라 바닷바람 때문에 옆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쓸려가듯. 불꽃이 몇 발이 들었는지 확인을 안 해서. 불꽃이 터지는 동안. 언제까지 터질까, 얼마나 더 남았지 하고 생각했다. 다 터졌는데도. 언니는 땅에 세 번이나 묻었다. 쑤셔박았다. 불꽃과 불꽃 사이의 간극도 기억난다. 소리가 좋다.


   「해수욕장」


   그날 점심에 민경은 범의 오래된 침대 위에서 눈을 떴고, 그와 이별하기로 마음먹었다. 경비 교대 근무를 마치고 이제 막 돌아온 범을 데리고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혼자 걷는 아이의 발끝을 좇다가 롯데리아로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다른 햄버거 세트를 시킨 후 그들이 만난 날을 세어보았다. 벌써 5년이구나, 우리. 범이 말했다. 민경은 주머니에 있는 현금을 전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범은 동전만 쓸어모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대로 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직원이 물었다. 범은 포스 앞에 세워진 불우이웃 모금함에 동전을 넣고, 직장인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민경은 ATM기에서 현금서비스 30만원을 받아왔다. 한참 후 롯데리아를 나온 그들은 충남 대천으로 향하는 표를 샀다. 한파경보가 내린 평일 낮에 해수욕장까지 향하는 승객은 그들 둘뿐이었다.
   해가 진 지 한참 뒤에야 버스는 보령종합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산한 로비를 나서자 누군가 소리쳤다. 어이, 여기! 길 건너편에 회색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한 남자가 클랙슨을 울렸다. 반쯤 열린 창으로 건너오라는 손짓이 보였다. 전화로 예약한 펜션에서 보낸 기사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횡단보도는 없었다. 그들은 몇 대의 차를 보낸 뒤에야 무단횡단을 할 수 있었다. 봉고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짐은? 범이 말끝을 흐렸다. 급하게 온 거라서…… 기사는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학생들, 여기서 놀다만 가.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그들이 예약한 펜션은 터미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펜션촌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대천해수욕장이라고 했다. 기사는 5층짜리 건물 앞에 그들을 내려주곤 어딘가로 급하게 떠났다. 그들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이 시트지가 붙은 접수대를 두드리는 동안, 민경은 작게 난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인이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고 누워 있었다. 서랍 위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북극 환경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촬영감독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으로, 가죽이 바짝 달라붙은 북극곰의 갈비뼈가 클로즈업됐다. 해설자가 영상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예약했어요? 주인이 노란 장판을 짚고 일어났다. 범이 창구로 돈을 밀어넣었다. 주인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3만원을 더 요구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추가 요금이 붙는다고 했다. 아까 전화했을 땐 그런 말 없었잖아요. 범이 말했다. 주인은 유리창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가리켰다. 〈상황에 따라 추가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상황이라뇨? 민경이 물었다. 묻긴 뭘 또 물어. 주인이 말했다. 주먹 쥔 범의 두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민경은 접수대와 범 사이를 비집고 서며 지갑을 열었다.
   그들은 주인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주인은 302호의 문을 열고 거실 조명을 켠 뒤 나무토막 달린 열쇠를 범에게 건넸다. 범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일러를 켰다. 민경은 현관에 서서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렸다. 펜션 이름과 302호를 매직으로 여러 번 덧대어 쓴 그것은 손톱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눅눅했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리된 부엌도 없이 방 하나가 전부였다. 흰 레이스 커튼은 그렇다 쳐도, 등이 한껏 튀어나온 구식 텔레비전이나 초록 바탕에 장미꽃이 무작위로 프린트된 벽지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민경이 상상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이건 아닌데, 정말이지 이건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렸다. 범은 방바닥에 두 발을 비벼댔다. 그래도 금방 뜨끈해지네. 민경은 범의 운동화 두 짝을 모아 정리한 뒤 장판 위에 올라섰다.
   민경이 샤워할 동안, 범은 이불을 깔았다. 범이 샤워할 동안, 민경은 편의점에 컵라면을 사왔다. 그들은 동물농장 재방송을 틀어놓고 물을 끓였다. 시골에 사는 한 할머니가 동네 개에게 쫓기던 고양이를 구해줬는데, 그날 이후 고양이가 매일같이 할머니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사연이었다. 할머니는 다듬던 쑥을 고양이에게 던지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성을 내고 있었다. 시무룩한 고양이의 표정과 할머니의 화난 얼굴이 번갈아 화면에 비쳤다. 거친 화질로 보아 아주 오래전에 방영된 것 같았다. 죽었을 것 같아. 민경이 중얼거렸다. 할머니랑 고양이 전부 다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 같아. 민경과 범은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건졌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밤이 다 되어서야 그들은 펜션을 나왔다. 파도 소리가 커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큰 사거리가 나왔다. 좌측으로 조개구이집들이 셔터를 내린 채 죽 늘어져 있었고 우측으로 큰 슈퍼마켓이 하나만 있었다. 그러나 차는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거리에는 신호등의 주황 불빛만이 깜박이고 있었다. 춥고 고요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 속 범법자가 된 것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아스팔트길은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이어졌다. 민경과 범은 한 계단씩 떨어져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시선 닿는 곳은 모두 캄캄했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밤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 가로등의 불빛도 모래사장을 몇 걸음 밟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바다에서부터 밀려온 찬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민경은 재킷의 깃을 세웠다. 금세 얼어버린 두 볼이 따끔거렸다. 범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두 팔로 두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편의점 간판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취하자며! 계단을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범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그 뒤를 뒤따랐다.
   창고 문을 열고 나온 아르바이트는 말없이 계산대 쪽으로 갔다. 그들은 흩어져 술과 안주를 골랐다. 민경은 과자 진열대 앞에 서서 아르바이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르바이트는 담배를 진열 중이었다. 편의점 로고가 적힌 조끼 사이로 넥타이와 흰 남방이 보였다. 이 시간에 이런 일을 하기엔 아르바이트가 너무 어리지 않나, 생각했다. 민경은 계산대에 과자 봉지 몇 개를 내려놓으며 머릿속으로 고등학생의 범을 그려보았다. 삼천육백원이요. 바코드를 찍은 아르바이트가 말했다. 잠깐만! 냉장고 앞에 서 있던 범이 소리치며 맥주 피처를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그들은 간이테이블이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양파링과 새우깡을 펼쳐놓고 종이컵에 소주와 맥주를 따랐다. 뭐라도 보여야 말이지. 민경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과자부스러기가 묻은 엄지를 빨던 범도 고개를 돌렸다.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 안 형광등과 냉장고의 조명이 너무 밝았다. 그들은 창에 반사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술을 마시고 과자를 씹어 넘겼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사랑과 이별의 노래가 이어달리기하듯 번갈아 재생되고 있었다. 어때? 범이 물었다. 그냥 술맛이야. 민경이 맨 팔뚝에 눈을 비비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범은 민경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대더니 계산대로 가 과일향이 첨가된 풍선껌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아르바이트에게 건넨 후, 제자리로 돌아와 포장지를 뜯었다. 껌 하나를 둘둘 말아 민경의 입에 넣었다. 다시 마셔봐. 민경은 껌을 씹으며 종이컵에 담긴 맥주를 원샷했다. 너무 달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맛있다, 범아. 진짜 맛있어.
   어느새 편의점 안에 흐르던 배경음이 끊기고, 아르바이트가 바닥을 쓸고 있었다. 지금 몇 시예요? 민경이 물었다. 아르바이트가 그들 근처로 걸어왔다.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그들을 향해 화면을 내밀었다. 12시 38분이었다. 근데 오늘 1시까지밖에 안 하거든요. 아르바이트가 테이블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 24시간이 아니구나. 컵을 물어뜯다 말고 범이 말했다. 손님 없으면 닫아요, 원래. 아르바이트는 빈손을 테이블 위에 얹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뱉은 말에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도구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꿀물 하나씩을 손에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아스팔트 계단에 나란히 앉아 해수욕장과 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미니 온장고에서 오래 데워진 탓에 꿀물은 뜨거웠다. 민경은 왼손과 오른손에 번갈아 쥐고, 범은 맨다리에 굴렸다. 그렇게 작은 뜨거운 병으로 한껏 날이 선 바람에 맞섰다. 우리…… 이제 어쩌지? 민경이 물었다. 범은 말이 없었다. 민경은 범의 입이 벌어지며 흰 입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1년 전의 그날처럼.
   그날 그들은 부동산 중개업자의 구형 마티즈에 올라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 건물에서 저 집 지하로 옮겨다녔다. 히터를 틀지 않은 차 안은 밖보다 더 추웠다. 그 겨울의 한기를 죄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집은 시장 입구의 상가 4층이었다. 한때 인력사무소로 쓰였던 사무실을 개조해 만든 방이었다. 민경의 직장과는 꽤 멀었지만, 중개업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그들을 타일렀다. 그 돈이면 여기가 딱이에요. 잘만 하면 더 깎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젠 정말 없어, 정말. 중개업자와 집주인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범은 상가 화장실을 살펴본 뒤 방으로 돌아왔다. 민경은 창가에 서서 반대편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층에 자리한 과일가게 주인이 빈 박스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도 연탄난로 두고 고구마 구워먹자. 구멍 난 방충망에 손가락을 넣었다 빼며 민경이 말했다. 보리차도 끓여먹고. 민경의 말을 이어받은 범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빈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며칠 뒤 월세 계약의 확답을 받기 위해 걸려온 중개업자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내일을 기대했던 날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연기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때였다. 먼 곳에서 나타난 하얀 불빛이 위쪽을 향해 솟아올랐다.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터지며 별 모양의 빛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저기 봐. 범이 따뜻해진 손을 민경의 등에 얹으며 말했다. 폭죽은 가장 높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점점 더 낮고 바다 가까운 곳에서 터졌다. 첫 번째 폭죽이 끝나고 곧이어 두 번째 폭죽에 불이 붙었다. 박수 소리와 함께 단말마 같은 환호가 뒤를 이었다. 민경은 미지근해진 꿀물의 뚜껑을 열고 한 입 크게 마셨다. 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민경은 입가로 흘러내린 꿀물을 소매로 닦았다. 지금 가면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는 불꽃을 향해 걸어갔다. 모래가 움푹 파인 곳을 밟고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더니 속력을 높여 뛰기 시작했다. 투명한 끈이 자신의 몸을 계단에 묶어놓은 것처럼 민경은 어쩌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범의 뒤로 모래가 흩날렸다. 민경은 두 눈으로 범의 발걸음을 뒤쫓았지만, 곧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가노트_이문경


   이민경님은 졸업을 앞두고 떠난 친구들과의 졸업 엠티의 기억이 담긴 일기를 전해주었다. 밤바다의 밀물과 새벽 바다의 썰물. 해변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파도의 움직임, 캄캄한 해수욕장에서의 불꽃놀이…… 이민경님의 섬세한 기록 덕분에 친구들과 함께 해변을 걷고 불꽃놀이 하는 장면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다. 그날 이민경님과 친구들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서로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묘한 흥분과 쓸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악착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볼 때처럼 두렵기도 하고, 해변의 캄캄한 밤을 걸을 때처럼 조금은 막막했을지도. 이를 모티브 삼아 「해수욕장」을 써보았다. 이 소설은, 억지로라도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해서, 잠깐이나마 이별을 유예하고 싶어서 저 멀리 대천해수욕장으로 떠난 ‘민경’과 ‘범’의 이별 여행 이야기다. 졸업 엠티를 떠난 이민경님과 친구들의 마음이 「해수욕장」에도 담기길 바란다.



월과월과월

매주 월요일(月)에 모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越), 문장(문장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우리말 ‘월’)을 쓴다는 목표 아래 모인 창작 동인이다. 만화 시나리오 작가 강아는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앞에선 조금 상기되는 편이다. 대학원생 박몽은 동경에 거주중이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 단 한 해도 학교를 쉰 적 없는 학교 덕후다. 생활체육인 이문경은 책을 만들며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