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
다섯 번.
골목 어귀에서 까진 뒤꿈치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던 은주가 중얼거렸다. 새 구두를 신고 내려오는 바람에 발이 욱신거리던 참이었다. 노인을 다섯 번만 만나 달라는 책임자 박의 은근한 부탁이 있었다.
로비를 오갈 때마다 마뜩잖은 눈길을 보내던 박이 싱글거리며 안내데스크로 다가올 때부터 수상한 기미가 엿보였다. 그가 날마다 로비를 오가며 자신을 자르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속으로 가만히 계산을 맞춰본다는 것, 박의 기분에 의해 2개월에서 6개월로,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근무 일수가 조금씩 늘어났다는 것을 은주는 모르지 않았다.
까짓 다섯 번.
그쯤이야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도르르 말린 밴드 껍질을 움켜쥐었다. 그때 상가주택의 벽돌담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적송이 보였고 은주는 홀린 듯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휴대전화의 구글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상가주택 일층에는 ‘소렌토’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와 있었고 노인은 이층에 홀로 거주하는 눈치였다.
먼 길 오셨소. 앉으세요.
다행히 노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건강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적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설 때부터 그녀의 시선을 끌던 나무였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우람한 줄기와 용틀임하듯 구불구불하게 뻗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노인의 집은 이 근방이 아닐까 짐작한 터였다.
소나무가……
작은 소리였는데 노인이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둥치가 크지요? 내 손으로 삼십 년 가까이 키운 거요.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가 차를 가져오자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가 끊겼다. 아주머니가 발을 뗄 때마다 낡은 마룻장이 삐걱거렸고 은주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멀어질 즈음 노인이 불쑥 말했다.
일전에 내게 선물한 가스차단기 말이오. 그걸 받곤 한동안 흐뭇했어요. 가정의 향기랄까, 그런 게 느껴집디다.
은주는 얼굴을 붉힌 채 그 선물은 행복마을 방문고객한테 드리는 답례일 뿐 특별히 마음을 쓴 건 아니라고 해명했다. 선물용품은 대략 정해져 있다. 스페셜 티, 화장품, 목도리, 손지갑. 은주의 선물은 가스를 사용한 후 삼십 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잠기는 가정용 가스차단기였다. 그런 물건은 누구나 오래 고민한 뒤에 사는 것이며 가족이나 정이 두터운 친구가 하는 선물이라고 노인이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한낱 방문고객한테 선물 따위를 하다니……
그녀는 선물을 즐기는 유형이 아니고 친절한 편은 더더욱 아니어서 두 계절이 지난 뒤에도 그 일을 떠올렸고 곰곰이 따져봤으나 자신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에 살짝 미쳤었지, 싶었다.
그런데 그날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은 노인의 눈빛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홀로 구축하고 이룩한 사람의 눈. 노인의 눈을 흘깃거리느라 회사에서 준비해간 서류를 꺼낼 타이밍을 번번이 놓치고 있다는 것도 은주는 방금 깨달았다.
나는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보호자가 없었소. 무엇이든 혼자 익히고 깨우쳐야만 했지. 주로 책을 통해 배웠어요. 교도소에선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생활에 필요한 것은 책에 적혀 있질 않아요. 밥풀이 붙은 공기는 물에 담가둬야 설거지가 편하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오.
홍안의 소년이 교도소에서 삼십 년 가까이 지내다 사회로 나오면 눈뜬장님이 되기 마련이며 일반인에게는 손쉬운 생활의 요령을 따라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노인은 그 곤경에 관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를 괴롭힌 것은 크고 중요한 문제들이 아니었소. 사소한 일을 처리하지 못해 절절매곤 했어요. 그런 걸 물어볼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셔츠는 셔츠끼리 양말은 양말끼리 분리해 서랍에 넣어야 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으니 말해 뭐하겠소. 가정집의 초대를 단 한 번이라도 받았으면 내가 이런 맹탕이 되지는 않았을 거요.
그것은 불빛이 없는 깜깜한 산길을 홀로 헤치며 나아가는 길이라고, 버둥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적에 발목을 적시던 진창에 관해서라면 은주도 얼마간 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아홉 살 때부터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를 돌보았고 그 나이에 벌써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엄마를 무시하는 동네 어른들과 맞장을 뜨며 열 번째 생일을 맞은 아이였다.
은주가 어렸을 때 콩나물과 두부를 사러 마트에 가면 여주인은 거스름돈을 내주며 말하곤 했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천사 같으냐고. 마트 여주인이 가리키는 천사는 엄마였다. 그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여주인에게 그녀는 때때로 소리치고 싶었고 실제로 외친 적도 있었다.
천사는 모성애가 없어요!
모든 엄마에게 모성이 깃들지 않는다는 것, 모성이 결여된 사람한테 그걸 요구하면 또 다른 폭력이 된다는 것, 모성을 발현할 처지가 안 되는 엄마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요즘에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성이 결여된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 엄마라는 게 괴롭고 지금도 견디기 힘들었다.
청소년기로 접어든 은주의 소원은 기본양념을 갖춘 집에서 보란 듯이 사는 거였다. 떡볶이가 생각나면 떡만 한 봉지 사서 부엌으로 달려가면 당장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집. 은주네 싱크대 선반에는 고춧가루가 있으면 소금과 젓갈이 없고, 마늘이 있나 싶으면 식용유와 양조간장이 보이지 않았다.
떡볶이를 하려고 프라이팬을 꺼내다가 어머, 하며 고추장을 사러 나가고 또 어머, 탄식하며 대파를 사러 나가곤 하다가 끝내 어묵이 빠진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런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 인생이 저절로 삭막해진다. 중요한 핵심을 빠뜨린 채 순간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유일한 보호자가 어머, 라는 탄식조의 감탄사를 연발할수록 어린 피보호자는 자꾸만 자기 무장을 하게 되니까.
절대적 빈곤이 이유라면 개선될 여지가 있겠으나 은주네는 그 정도로 궁핍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양념, 그깟 양념 몇 가지를 사지 못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깟 양념 따위가 사람을 한 데로 내몰아 떨게 한다. 그깟 양념은 파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입고 있던 예복에서 떨어져 나간 앞 단추 같은 것이었다. 노인의 말처럼 사람을 절절매게 만드는 것은 크고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게 또 떨어졌지 뭐니!
엄마는 늘 떨어졌다고 표현했다. 떨어졌다는 것은 원래 있던 것이 없을 때, 그걸 채워 넣을 용의가 있을 때 하는 말이다. 엄마는 양념을 채울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배추를 사러 갔다가 그 돈으로 분홍장미 한 다발을 사 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 배추를 까먹었지 뭐니?
까먹은 게 아니다. 엄마의 안중에 배추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꽃길을 걸으면 다른 누군가는 이슬에 젖은 밭둑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법칙이다. 한사코 꽃길을 고집한 엄마는 내내 달콤한 장미 향을 풍겼고 일찍부터 배추가 심긴 밭둑길을 걸었던 은주의 몸에서는 엷은 거름 내가 났다.
세상의 모든 천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조석으로 쌀쌀한 날씨였다. 혹여 노인이 감기에 걸릴세라 은주가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유리창의 절반가량이 적송에 막힌 탓에 한 손으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를 밖으로 밀어내며 조심스레 문을 닫아야 했다. 그래야 가지가 꺾이지 않는다.
나무의 기세가 대단하네요.
노인의 눈길이 그녀를 따라왔다.
저 나무를 보고 있으면 내가 숨어있던 비트가 떠오릅니다. 비트의 폭이 이 정도나 됐을까……
노인이 무릎 위로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완만하게 움직이는 노인의 손을 유심히 쳐다봤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을 뿐 거칠지는 않았다.
비트를 위장하려면 나뭇가지가 많이 필요했거든요.
그가 숨어있던 비밀 아지트는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았고 입구가 소나무 가지로 은폐되어 있었다. 비트를 벗어나지 못한지 수십 일째였다. 비와 안개와 추위를 무릅쓴 채 낮이면 시체처럼 누워 있었고, 밤이 되면 부스스 일어나 인근 소나무 가지를 낫으로 자르는 것이 소년병의 일이었다.
조심조심, 가만가만…… 내가 비트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소. 산속의 적막을 깨면 모두가 위험해졌거든.
대법원은 비트에서 발각된 소년병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재판장에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고 싶었으나 살벌한 법정 분위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소년병의 프로필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신문애독자들은 행간을 읽을 줄 알았다. 신문의 논지와 달리 소년병의 앳된 얼굴과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며 애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20년 형은 좀 과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다들 사로잡혔다. 소년병은 한때의 뉴스거리가 되었으나 생명이 파리 목숨처럼 가벼워진 전쟁 통에 어쨌든 살아남았던 것이다.
감방에 갇힌 소년은 가위에 자주 눌렸다. 몸이 압착기에 짓눌린 끝에, 툭 터져버리는 악몽을 꾸곤 했다.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물을 보았다며 노인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가 아니고요?
수분이었소. 아주 맑은 것이……
노인의 이야기에는 부조리한 전쟁의 진실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다. 침묵의 산등성이를 날아오르는 고독한 새 한 마리에 관한 말뿐이어서 은주는 전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가위에 눌리는 것은 강렬한 전쟁의 공포와 맹목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좁은 공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트와 소년교도소, 그리고 일반교도소에서 청춘을 보냈으니까. 당시 그가 머무르던 감방 역시 팔을 겨우 뻗을 정도로 비좁았다.
지리산 비트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줄 알았소.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밤이면 또 비트에 갇히는 꿈을 꾸었으니까. 나는 겹겹이 갇혔고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소.
소년병은 전쟁의 전모를 알지 못했다. 어린 하급자에게는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다. 대원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의지해 전쟁의 규모와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그는 사회 안전법으로 다시 구금되었다가 27년 만에 출소한다. 장년이 된 그는 우연한 기회에 솔향기를 맡게 되었는데 그날 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침실 가까이에 적송을 심었던 것이다.
비트에서 늘 맡던 솔향기가 일상을 유지할 힘을 주었으니, 나를 감방으로 인도했던 저 소나무가 지금은 날 보호하는 형국이니 세상일이라는 게 알면 알수록 참으로 우습지 뭐요.
노인이 입을 실룩이며 웃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불에 타버린 아버지의 아무르 양복점, 이 집이 남아있어서 내가 여태 견딘 거요. 시간을 벗어난 곳에 우뚝 멈춰선 채 말이오. 도심에 위치한 이층짜리 상가주택이라 일하지 않아도 살아집디다.
노인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열기에 휩싸인 것 같았고, 은주는 서류를 내보일 적당한 틈을 기다리며 식은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노인의 눈길을 의식한 그녀가 얼른 탁자 밑으로 손을 숨겼다.
손은 인간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버거킹, 맥도날드, 옷가게…… 일찍부터 시작된 자신의 알바인생이 부끄럽지 않았다. 잦은 이직이 유일한 단점이라며 동료 몇몇이 지적할 적에도 그녀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장단점으로 논할 문제가 아니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랬는데, 노인한테 그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 책임자 박이 선심 쓰듯 말했다.
마침 좋은 기회네요. 안 그래도 서은주 씨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던 참인데……
안내데스크 앞에 서 있던 은주는 8초가량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왜 또 이러나……
박의 직함은 일개 사무장에 불과했으나 행복마을 시니어타운과 실버타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행복마을 대표인 누나를 둔 덕분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박을 직원 대부분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책임자 박’은 그가 없는 장소에서 그에 관해 쑥덕거릴 때 직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그의 별칭이었다.
박은 VIP 고객이 은주를 직접 지목했다며 대전에 내려가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행복마을에 큰 재원을 마련해주실 분이니 부디 실수하지 말아 달라는 꼬인 투의 당부와 함께 고객의 사인을 받을 때 곧 VIP룸을 신축할 계획이라는 말도 곁들이라고 했다.
갑자기 친한 척을 왜 할까 싶었는데 박이 아쉬운 게 있었다.
정규직이 되면 지금 받는 보수에 사십오만 원을 올려 받는다. 은주는 그 돈 때문에 정규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십오 만원은 큰돈이지만 엄마에게는 그저 봄 구두 한 켤레에 불과할 것이다. 월급이 오르면 엄마는 천진한 얼굴로 산책길에 파스텔 톤의 구두를 샀다고 통고해올 것이었다. 구두를 사게 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하늘이 맑아서, 바람이 좋아서……
울적한 기분에 샀다고 하면 그녀도 얼추 수긍했을 것이다. 천사는 우울감을 몰랐고 삶에 대한 흥미를 결코 상실한 적이 없다. 양념 구색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슬리퍼를 색깔별로 구비했다. 꼭 필요한 운동화나 등산화가 아니라 슬리퍼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
친구 집을 방문하면 은주는 그 집 현관을 주의 깊게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현관에 슬리퍼가 널려있거나 수북이 몰려 있으면 그 친구한테 돈을 꿔주지 않았고 주말에 영화를 같이 보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규직이 되어 월급이 오른다 해도 은주에게는 무용한 돈이었다. 서류 봉투를 선선히 챙기고 대전행 기차에 오른 것은 박의 정규직 제안 때문이 아니다. 모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믿겠지만 적어도 은주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의 자유로움을 모른다고 생각했고 한 직장에 오래 묶이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할 때까지는 잘리지 않고 행복마을 비정규직원으로 오래 근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집 구경을 하시겠소?
돌연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은주는 노인을 따라 아래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흰 와이셔츠에 긴 검정 앞치마를 두른 남자직원 두엇이 레스토랑 앞길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파라솔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직원이 내려오셨어요, 라며 노인을 반겼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서둘러 담배를 끄고 돌아선 직원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아주 한가하다며 와하하 웃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놓인 레스토랑 입구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큰 유리벽을 통해 바깥뜰에 심긴 적송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 이후 고급 한정식집과 여러 개의 카페가 이곳을 거쳐 갔지요. 그건 저 적송이 가진 아우라 때문인 듯하오.
흰 식탁보로 덮인 탁자를 지나자 복층으로 연결된 유리 계단이 있었다. 매장 한가운데 설치된 유리 계단이어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서가던 노인이 유리 계단의 난간을 짚더니 나머지 손으로 반원을 크게 그렸다.
아무르 양복점 재단실이 아마 이쯤일 거요.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여기에 쓰러져 계셨소.
이어 노인은 열린 주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내부가 반쯤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직원이 안으로 들어오는 노인과 은주를 보고는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이곳이 우리 살림집 자리인데 지금은 식당 주방으로 바뀌었지요. 저기 영업용 냉장고 보이지요?
노인은 조리대 옆에 나란히 붙은 두 대의 대형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곳에서 불길에 휩싸인 어머니를 보았소. 불붙은 기둥이 쓰러지며 내 앞을 막았고 숨통을 조이는 연기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를 불 속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왔소. 훗날 감방에서 그리고 이 집에서 천천히 늙어가면서 그 장면을 수백 번은 떠올렸을 거요. 분명히 시간이 있었어요. 아무리 어렸대도 어머니를 구할 시간이……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개수대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섞이자 원래 하나의 소리인 듯 느껴졌다. 주방 직원이 행주로 조리대를 훔치는 사이에 그녀는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바깥뜰의 적송 아래 서 있으려니 레스토랑의 각종 조명등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큰 유리벽을 통해 흘러나왔다. 은주는 유리벽에 이마를 가져다 댄 채 포크와 나이프가 단정하게 세팅된 탁자들과 유리 계단이 있는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공간이동을 한 듯 비현실적인 느낌에 휩싸인 채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기왕 나왔으니 저기 큰길까지만 걷지요.
노인이 그녀를 재촉했다. 노인과 뒷문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두 블록쯤 걷자 곧장 대전역 앞 팔차선 도로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노인이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최신 모델이었던 소련제 T-34 전차가 이 길로 불을 뿜으며 지나갔소. 아무르 양복점을 비롯한 대전 도심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어요. 나는 창졸간에 고아가 되어 피난민을 따라 남쪽인 영동으로 내려갔지요.
소음이 가득한 사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은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찾으셨나요?
지난달에 영동을 갔었소. 노근리 쌍굴 옆에 무슨 기념관 같은 게 들어서 있습디다. 관광객 서넛이 핫도그를 먹으며 진열된 전시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내 기분이 묘했어요. 나는…… 나는, 말이오. 그 핫도그와 도저히 화해할 수가 없습디다.
딴말을 계속하던 노인이 별안간 갑시다, 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화난 사람처럼 오던 길로 먼저 되짚어 내려갔다. 그녀는 노인을 뒤따라가면서 사람은 뒤통수로도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테면 이런 말들.
나쁜 시간의 흐름 속에 내가 있었고 하필이면 그곳이 노근리 쌍굴이었을 뿐……, 그때 그곳을 지날 수밖에 없었던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노인의 식탁에 두 종류의 파스타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일층 레스토랑에서 갓 배달된 요리인 듯했다. 집주인이라는 핑계로 가끔 이런 호강을 한다며 노인이 어느 것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은주가 봉골레 파스타 앞에 앉자 노인은 쉬림프 로제 파스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이른 저녁으로 파스타를 먹게 될 줄이야……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노인이 말했다.
이전에는 우리가 커리를 먹었지요?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돌려 감던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노인의 ‘커리’라는 발음 때문에 웃은 게 아니라 주방보조 김 여사의 농담이 생각나서였다. 노인이 행복마을을 방문한 날, 그들은 구내식당에서 카레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배식대 입구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주방보조 김 여사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빨갱이셨고만요, 라며 노인에게 농담을 했었다.
집밥도 좋지만 이런 게 한 번씩 당길 때가 있소. 그런 날은 식은 감자로 점심을 대신하기도 하고요.
‘식은 감자’가 무얼 의미하는지 은주는 알고 있었다. 노인이 출연한 방송을 회사에서 보았다고 그녀가 고백했다. 그것은 이미 이쪽에서 노인의 신상을, 노인이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랬소?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인영을 찾는 데 보탬이 될까 하여 방송에도 나갔는데…… 와이파이 속도가 빛처럼 빠른 나라에서…… 여직 소식이…… 와인 한잔하시겠소?
노인은 새우를 찍은 포크를 파스타 접시 테두리에 걸쳐놓은 뒤 은주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인영을 생각하면 그런 게 떠오릅니다. 막 문을 연 빵집에서 맡게 되는 첫 훈김이랄까, 봄날 황톳길에 피어오르는 불투명한 아지랑이랄까……
입술을 휴지로 꼼꼼히 훔친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우주가 여러 개의 우주 가운데 하나라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영화에서 봤던 평행우주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세운 가설 중 하나겠지만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우주에 분신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그 주장에 어쩐지 나는 기대고 싶어요.
노인이 고개를 쑥 빼고 은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양자 중력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고유의 시간성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티븐 호킹이 말했어요. 우주의 생애를 가리키는 거대한 우주 시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우주의 어떤 공간에 나이를 먹지 않는 인영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째깍째깍 흐르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시간, 조건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달라지는 이 시간이 애초에 없는 것이라면 말이오.
오래된 상처는 음식을 먹으며 회고할 수도 있다.
노근리 굴속에서 살아남은 열네 살짜리 고아 소년이 서인영 모녀를 따라 들어간 영동군 화전민 마을이랄지, 전쟁 통에 허기를 면하려고 나이를 속여 지리산에 입산하던 일이랄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행한 수많은 일에 대하여. 쉬림프 로제 파스타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말이다.
인영이 아니라면 누가, 전쟁의 와중에 적군이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두 번씩이나 바뀐 내 삶을 증명해주겠소?
노인은 포크와 나이프를 은주보다 능숙하게 사용했다. 얼굴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었으나 접시에 남은 양송이버섯과 올리브 한 알까지 알뜰하게 긁어먹는 것을 보면 치아와 위장의 상태는 아직 멀쩡했다. 노인의 행복마을 입주 시기는 박의 생각보다 한참 미뤄질 것이다. 큰 재원이 입금되는 날짜 역시 늦어질 거라고 그녀는 미루어 짐작했다.
골목 입구에서 노인과 작별한 은주는 수키와가 겹겹이 포개진 나지막한 벽돌담을 따라 걸었다. 벽돌담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녀는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 세 개를 주웠다. 낙엽의 중심에 긴 맥이 있고 그 맥을 따라 그물 모양의 작은 맥이 촘촘히 퍼져 있다. 잎맥은 사계를 충실히 살아낸 낙엽의 지문 같기도 하고 살을 발라 먹은 생선 가시 같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물 모양의 줄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 벌레 먹은 것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혀있다면 서은주씨는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불현듯 노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노인이 직접 은주를 지목한 것은 그녀의 눈에서 상실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인을 단번에 읽어버린 것처럼. 삶의 연결성이 없는 사람들, 잎맥 같은 가느다란 길마저 뚝뚝 끊기는 사람의 눈 속에는 숨은 공간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빛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 이삿짐을 하루 먼저 빼버린 방 같은 그런 공간이. 오직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만 그걸 알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뜬금없이 가스차단기 같은 걸 선물이라며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은주는 회사에서 준비한 서류에 노인의 사인을 받지 않았다. 헛물켰다며 책임자 박이 그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초조하지 않았다. 노인을 만날 기회가 아직 네 번이나 남아 있다는 든든함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진 게 아니다. 은주는 자신의 내부에 변화라고 부를만한 노글노글한 기운이 넓게 포진해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저녁의 기운에 에워싸인 것도. 이내의 시간. 그녀는 골목 끝머리쯤에서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봤다. 검푸른 어둠이 몰려오는 이런 길을 언젠가 꼭 한 번 걸은 적 있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골목 어귀에서 까진 뒤꿈치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던 은주가 중얼거렸다. 새 구두를 신고 내려오는 바람에 발이 욱신거리던 참이었다. 노인을 다섯 번만 만나 달라는 책임자 박의 은근한 부탁이 있었다.
로비를 오갈 때마다 마뜩잖은 눈길을 보내던 박이 싱글거리며 안내데스크로 다가올 때부터 수상한 기미가 엿보였다. 그가 날마다 로비를 오가며 자신을 자르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속으로 가만히 계산을 맞춰본다는 것, 박의 기분에 의해 2개월에서 6개월로,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근무 일수가 조금씩 늘어났다는 것을 은주는 모르지 않았다.
까짓 다섯 번.
그쯤이야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도르르 말린 밴드 껍질을 움켜쥐었다. 그때 상가주택의 벽돌담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적송이 보였고 은주는 홀린 듯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휴대전화의 구글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상가주택 일층에는 ‘소렌토’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와 있었고 노인은 이층에 홀로 거주하는 눈치였다.
먼 길 오셨소. 앉으세요.
다행히 노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건강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적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설 때부터 그녀의 시선을 끌던 나무였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우람한 줄기와 용틀임하듯 구불구불하게 뻗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노인의 집은 이 근방이 아닐까 짐작한 터였다.
소나무가……
작은 소리였는데 노인이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둥치가 크지요? 내 손으로 삼십 년 가까이 키운 거요.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가 차를 가져오자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가 끊겼다. 아주머니가 발을 뗄 때마다 낡은 마룻장이 삐걱거렸고 은주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멀어질 즈음 노인이 불쑥 말했다.
일전에 내게 선물한 가스차단기 말이오. 그걸 받곤 한동안 흐뭇했어요. 가정의 향기랄까, 그런 게 느껴집디다.
은주는 얼굴을 붉힌 채 그 선물은 행복마을 방문고객한테 드리는 답례일 뿐 특별히 마음을 쓴 건 아니라고 해명했다. 선물용품은 대략 정해져 있다. 스페셜 티, 화장품, 목도리, 손지갑. 은주의 선물은 가스를 사용한 후 삼십 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잠기는 가정용 가스차단기였다. 그런 물건은 누구나 오래 고민한 뒤에 사는 것이며 가족이나 정이 두터운 친구가 하는 선물이라고 노인이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한낱 방문고객한테 선물 따위를 하다니……
그녀는 선물을 즐기는 유형이 아니고 친절한 편은 더더욱 아니어서 두 계절이 지난 뒤에도 그 일을 떠올렸고 곰곰이 따져봤으나 자신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에 살짝 미쳤었지, 싶었다.
그런데 그날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은 노인의 눈빛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홀로 구축하고 이룩한 사람의 눈. 노인의 눈을 흘깃거리느라 회사에서 준비해간 서류를 꺼낼 타이밍을 번번이 놓치고 있다는 것도 은주는 방금 깨달았다.
나는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보호자가 없었소. 무엇이든 혼자 익히고 깨우쳐야만 했지. 주로 책을 통해 배웠어요. 교도소에선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생활에 필요한 것은 책에 적혀 있질 않아요. 밥풀이 붙은 공기는 물에 담가둬야 설거지가 편하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오.
홍안의 소년이 교도소에서 삼십 년 가까이 지내다 사회로 나오면 눈뜬장님이 되기 마련이며 일반인에게는 손쉬운 생활의 요령을 따라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노인은 그 곤경에 관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를 괴롭힌 것은 크고 중요한 문제들이 아니었소. 사소한 일을 처리하지 못해 절절매곤 했어요. 그런 걸 물어볼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셔츠는 셔츠끼리 양말은 양말끼리 분리해 서랍에 넣어야 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으니 말해 뭐하겠소. 가정집의 초대를 단 한 번이라도 받았으면 내가 이런 맹탕이 되지는 않았을 거요.
그것은 불빛이 없는 깜깜한 산길을 홀로 헤치며 나아가는 길이라고, 버둥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적에 발목을 적시던 진창에 관해서라면 은주도 얼마간 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아홉 살 때부터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를 돌보았고 그 나이에 벌써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엄마를 무시하는 동네 어른들과 맞장을 뜨며 열 번째 생일을 맞은 아이였다.
은주가 어렸을 때 콩나물과 두부를 사러 마트에 가면 여주인은 거스름돈을 내주며 말하곤 했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천사 같으냐고. 마트 여주인이 가리키는 천사는 엄마였다. 그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여주인에게 그녀는 때때로 소리치고 싶었고 실제로 외친 적도 있었다.
천사는 모성애가 없어요!
모든 엄마에게 모성이 깃들지 않는다는 것, 모성이 결여된 사람한테 그걸 요구하면 또 다른 폭력이 된다는 것, 모성을 발현할 처지가 안 되는 엄마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요즘에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성이 결여된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 엄마라는 게 괴롭고 지금도 견디기 힘들었다.
청소년기로 접어든 은주의 소원은 기본양념을 갖춘 집에서 보란 듯이 사는 거였다. 떡볶이가 생각나면 떡만 한 봉지 사서 부엌으로 달려가면 당장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집. 은주네 싱크대 선반에는 고춧가루가 있으면 소금과 젓갈이 없고, 마늘이 있나 싶으면 식용유와 양조간장이 보이지 않았다.
떡볶이를 하려고 프라이팬을 꺼내다가 어머, 하며 고추장을 사러 나가고 또 어머, 탄식하며 대파를 사러 나가곤 하다가 끝내 어묵이 빠진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런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 인생이 저절로 삭막해진다. 중요한 핵심을 빠뜨린 채 순간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유일한 보호자가 어머, 라는 탄식조의 감탄사를 연발할수록 어린 피보호자는 자꾸만 자기 무장을 하게 되니까.
절대적 빈곤이 이유라면 개선될 여지가 있겠으나 은주네는 그 정도로 궁핍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양념, 그깟 양념 몇 가지를 사지 못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깟 양념 따위가 사람을 한 데로 내몰아 떨게 한다. 그깟 양념은 파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입고 있던 예복에서 떨어져 나간 앞 단추 같은 것이었다. 노인의 말처럼 사람을 절절매게 만드는 것은 크고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게 또 떨어졌지 뭐니!
엄마는 늘 떨어졌다고 표현했다. 떨어졌다는 것은 원래 있던 것이 없을 때, 그걸 채워 넣을 용의가 있을 때 하는 말이다. 엄마는 양념을 채울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배추를 사러 갔다가 그 돈으로 분홍장미 한 다발을 사 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 배추를 까먹었지 뭐니?
까먹은 게 아니다. 엄마의 안중에 배추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꽃길을 걸으면 다른 누군가는 이슬에 젖은 밭둑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법칙이다. 한사코 꽃길을 고집한 엄마는 내내 달콤한 장미 향을 풍겼고 일찍부터 배추가 심긴 밭둑길을 걸었던 은주의 몸에서는 엷은 거름 내가 났다.
세상의 모든 천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조석으로 쌀쌀한 날씨였다. 혹여 노인이 감기에 걸릴세라 은주가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유리창의 절반가량이 적송에 막힌 탓에 한 손으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를 밖으로 밀어내며 조심스레 문을 닫아야 했다. 그래야 가지가 꺾이지 않는다.
나무의 기세가 대단하네요.
노인의 눈길이 그녀를 따라왔다.
저 나무를 보고 있으면 내가 숨어있던 비트가 떠오릅니다. 비트의 폭이 이 정도나 됐을까……
노인이 무릎 위로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완만하게 움직이는 노인의 손을 유심히 쳐다봤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을 뿐 거칠지는 않았다.
비트를 위장하려면 나뭇가지가 많이 필요했거든요.
그가 숨어있던 비밀 아지트는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았고 입구가 소나무 가지로 은폐되어 있었다. 비트를 벗어나지 못한지 수십 일째였다. 비와 안개와 추위를 무릅쓴 채 낮이면 시체처럼 누워 있었고, 밤이 되면 부스스 일어나 인근 소나무 가지를 낫으로 자르는 것이 소년병의 일이었다.
조심조심, 가만가만…… 내가 비트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소. 산속의 적막을 깨면 모두가 위험해졌거든.
대법원은 비트에서 발각된 소년병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재판장에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고 싶었으나 살벌한 법정 분위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소년병의 프로필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신문애독자들은 행간을 읽을 줄 알았다. 신문의 논지와 달리 소년병의 앳된 얼굴과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며 애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20년 형은 좀 과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다들 사로잡혔다. 소년병은 한때의 뉴스거리가 되었으나 생명이 파리 목숨처럼 가벼워진 전쟁 통에 어쨌든 살아남았던 것이다.
감방에 갇힌 소년은 가위에 자주 눌렸다. 몸이 압착기에 짓눌린 끝에, 툭 터져버리는 악몽을 꾸곤 했다.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물을 보았다며 노인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가 아니고요?
수분이었소. 아주 맑은 것이……
노인의 이야기에는 부조리한 전쟁의 진실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다. 침묵의 산등성이를 날아오르는 고독한 새 한 마리에 관한 말뿐이어서 은주는 전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가위에 눌리는 것은 강렬한 전쟁의 공포와 맹목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좁은 공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트와 소년교도소, 그리고 일반교도소에서 청춘을 보냈으니까. 당시 그가 머무르던 감방 역시 팔을 겨우 뻗을 정도로 비좁았다.
지리산 비트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줄 알았소.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밤이면 또 비트에 갇히는 꿈을 꾸었으니까. 나는 겹겹이 갇혔고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소.
소년병은 전쟁의 전모를 알지 못했다. 어린 하급자에게는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다. 대원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의지해 전쟁의 규모와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그는 사회 안전법으로 다시 구금되었다가 27년 만에 출소한다. 장년이 된 그는 우연한 기회에 솔향기를 맡게 되었는데 그날 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침실 가까이에 적송을 심었던 것이다.
비트에서 늘 맡던 솔향기가 일상을 유지할 힘을 주었으니, 나를 감방으로 인도했던 저 소나무가 지금은 날 보호하는 형국이니 세상일이라는 게 알면 알수록 참으로 우습지 뭐요.
노인이 입을 실룩이며 웃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불에 타버린 아버지의 아무르 양복점, 이 집이 남아있어서 내가 여태 견딘 거요. 시간을 벗어난 곳에 우뚝 멈춰선 채 말이오. 도심에 위치한 이층짜리 상가주택이라 일하지 않아도 살아집디다.
노인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열기에 휩싸인 것 같았고, 은주는 서류를 내보일 적당한 틈을 기다리며 식은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노인의 눈길을 의식한 그녀가 얼른 탁자 밑으로 손을 숨겼다.
손은 인간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버거킹, 맥도날드, 옷가게…… 일찍부터 시작된 자신의 알바인생이 부끄럽지 않았다. 잦은 이직이 유일한 단점이라며 동료 몇몇이 지적할 적에도 그녀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장단점으로 논할 문제가 아니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랬는데, 노인한테 그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 책임자 박이 선심 쓰듯 말했다.
마침 좋은 기회네요. 안 그래도 서은주 씨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던 참인데……
안내데스크 앞에 서 있던 은주는 8초가량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왜 또 이러나……
박의 직함은 일개 사무장에 불과했으나 행복마을 시니어타운과 실버타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행복마을 대표인 누나를 둔 덕분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박을 직원 대부분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책임자 박’은 그가 없는 장소에서 그에 관해 쑥덕거릴 때 직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그의 별칭이었다.
박은 VIP 고객이 은주를 직접 지목했다며 대전에 내려가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행복마을에 큰 재원을 마련해주실 분이니 부디 실수하지 말아 달라는 꼬인 투의 당부와 함께 고객의 사인을 받을 때 곧 VIP룸을 신축할 계획이라는 말도 곁들이라고 했다.
갑자기 친한 척을 왜 할까 싶었는데 박이 아쉬운 게 있었다.
정규직이 되면 지금 받는 보수에 사십오만 원을 올려 받는다. 은주는 그 돈 때문에 정규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십오 만원은 큰돈이지만 엄마에게는 그저 봄 구두 한 켤레에 불과할 것이다. 월급이 오르면 엄마는 천진한 얼굴로 산책길에 파스텔 톤의 구두를 샀다고 통고해올 것이었다. 구두를 사게 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하늘이 맑아서, 바람이 좋아서……
울적한 기분에 샀다고 하면 그녀도 얼추 수긍했을 것이다. 천사는 우울감을 몰랐고 삶에 대한 흥미를 결코 상실한 적이 없다. 양념 구색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슬리퍼를 색깔별로 구비했다. 꼭 필요한 운동화나 등산화가 아니라 슬리퍼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
친구 집을 방문하면 은주는 그 집 현관을 주의 깊게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현관에 슬리퍼가 널려있거나 수북이 몰려 있으면 그 친구한테 돈을 꿔주지 않았고 주말에 영화를 같이 보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규직이 되어 월급이 오른다 해도 은주에게는 무용한 돈이었다. 서류 봉투를 선선히 챙기고 대전행 기차에 오른 것은 박의 정규직 제안 때문이 아니다. 모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믿겠지만 적어도 은주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의 자유로움을 모른다고 생각했고 한 직장에 오래 묶이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할 때까지는 잘리지 않고 행복마을 비정규직원으로 오래 근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집 구경을 하시겠소?
돌연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은주는 노인을 따라 아래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흰 와이셔츠에 긴 검정 앞치마를 두른 남자직원 두엇이 레스토랑 앞길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파라솔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직원이 내려오셨어요, 라며 노인을 반겼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서둘러 담배를 끄고 돌아선 직원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아주 한가하다며 와하하 웃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놓인 레스토랑 입구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큰 유리벽을 통해 바깥뜰에 심긴 적송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 이후 고급 한정식집과 여러 개의 카페가 이곳을 거쳐 갔지요. 그건 저 적송이 가진 아우라 때문인 듯하오.
흰 식탁보로 덮인 탁자를 지나자 복층으로 연결된 유리 계단이 있었다. 매장 한가운데 설치된 유리 계단이어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서가던 노인이 유리 계단의 난간을 짚더니 나머지 손으로 반원을 크게 그렸다.
아무르 양복점 재단실이 아마 이쯤일 거요.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여기에 쓰러져 계셨소.
이어 노인은 열린 주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내부가 반쯤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직원이 안으로 들어오는 노인과 은주를 보고는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이곳이 우리 살림집 자리인데 지금은 식당 주방으로 바뀌었지요. 저기 영업용 냉장고 보이지요?
노인은 조리대 옆에 나란히 붙은 두 대의 대형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곳에서 불길에 휩싸인 어머니를 보았소. 불붙은 기둥이 쓰러지며 내 앞을 막았고 숨통을 조이는 연기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를 불 속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왔소. 훗날 감방에서 그리고 이 집에서 천천히 늙어가면서 그 장면을 수백 번은 떠올렸을 거요. 분명히 시간이 있었어요. 아무리 어렸대도 어머니를 구할 시간이……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개수대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섞이자 원래 하나의 소리인 듯 느껴졌다. 주방 직원이 행주로 조리대를 훔치는 사이에 그녀는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바깥뜰의 적송 아래 서 있으려니 레스토랑의 각종 조명등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큰 유리벽을 통해 흘러나왔다. 은주는 유리벽에 이마를 가져다 댄 채 포크와 나이프가 단정하게 세팅된 탁자들과 유리 계단이 있는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공간이동을 한 듯 비현실적인 느낌에 휩싸인 채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기왕 나왔으니 저기 큰길까지만 걷지요.
노인이 그녀를 재촉했다. 노인과 뒷문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두 블록쯤 걷자 곧장 대전역 앞 팔차선 도로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노인이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최신 모델이었던 소련제 T-34 전차가 이 길로 불을 뿜으며 지나갔소. 아무르 양복점을 비롯한 대전 도심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어요. 나는 창졸간에 고아가 되어 피난민을 따라 남쪽인 영동으로 내려갔지요.
소음이 가득한 사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은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찾으셨나요?
지난달에 영동을 갔었소. 노근리 쌍굴 옆에 무슨 기념관 같은 게 들어서 있습디다. 관광객 서넛이 핫도그를 먹으며 진열된 전시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내 기분이 묘했어요. 나는…… 나는, 말이오. 그 핫도그와 도저히 화해할 수가 없습디다.
딴말을 계속하던 노인이 별안간 갑시다, 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화난 사람처럼 오던 길로 먼저 되짚어 내려갔다. 그녀는 노인을 뒤따라가면서 사람은 뒤통수로도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테면 이런 말들.
나쁜 시간의 흐름 속에 내가 있었고 하필이면 그곳이 노근리 쌍굴이었을 뿐……, 그때 그곳을 지날 수밖에 없었던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노인의 식탁에 두 종류의 파스타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일층 레스토랑에서 갓 배달된 요리인 듯했다. 집주인이라는 핑계로 가끔 이런 호강을 한다며 노인이 어느 것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은주가 봉골레 파스타 앞에 앉자 노인은 쉬림프 로제 파스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이른 저녁으로 파스타를 먹게 될 줄이야……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노인이 말했다.
이전에는 우리가 커리를 먹었지요?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돌려 감던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노인의 ‘커리’라는 발음 때문에 웃은 게 아니라 주방보조 김 여사의 농담이 생각나서였다. 노인이 행복마을을 방문한 날, 그들은 구내식당에서 카레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배식대 입구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주방보조 김 여사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빨갱이셨고만요, 라며 노인에게 농담을 했었다.
집밥도 좋지만 이런 게 한 번씩 당길 때가 있소. 그런 날은 식은 감자로 점심을 대신하기도 하고요.
‘식은 감자’가 무얼 의미하는지 은주는 알고 있었다. 노인이 출연한 방송을 회사에서 보았다고 그녀가 고백했다. 그것은 이미 이쪽에서 노인의 신상을, 노인이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랬소?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인영을 찾는 데 보탬이 될까 하여 방송에도 나갔는데…… 와이파이 속도가 빛처럼 빠른 나라에서…… 여직 소식이…… 와인 한잔하시겠소?
노인은 새우를 찍은 포크를 파스타 접시 테두리에 걸쳐놓은 뒤 은주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인영을 생각하면 그런 게 떠오릅니다. 막 문을 연 빵집에서 맡게 되는 첫 훈김이랄까, 봄날 황톳길에 피어오르는 불투명한 아지랑이랄까……
입술을 휴지로 꼼꼼히 훔친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우주가 여러 개의 우주 가운데 하나라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영화에서 봤던 평행우주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세운 가설 중 하나겠지만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우주에 분신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그 주장에 어쩐지 나는 기대고 싶어요.
노인이 고개를 쑥 빼고 은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양자 중력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고유의 시간성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티븐 호킹이 말했어요. 우주의 생애를 가리키는 거대한 우주 시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우주의 어떤 공간에 나이를 먹지 않는 인영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째깍째깍 흐르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시간, 조건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달라지는 이 시간이 애초에 없는 것이라면 말이오.
오래된 상처는 음식을 먹으며 회고할 수도 있다.
노근리 굴속에서 살아남은 열네 살짜리 고아 소년이 서인영 모녀를 따라 들어간 영동군 화전민 마을이랄지, 전쟁 통에 허기를 면하려고 나이를 속여 지리산에 입산하던 일이랄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행한 수많은 일에 대하여. 쉬림프 로제 파스타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말이다.
인영이 아니라면 누가, 전쟁의 와중에 적군이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두 번씩이나 바뀐 내 삶을 증명해주겠소?
노인은 포크와 나이프를 은주보다 능숙하게 사용했다. 얼굴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었으나 접시에 남은 양송이버섯과 올리브 한 알까지 알뜰하게 긁어먹는 것을 보면 치아와 위장의 상태는 아직 멀쩡했다. 노인의 행복마을 입주 시기는 박의 생각보다 한참 미뤄질 것이다. 큰 재원이 입금되는 날짜 역시 늦어질 거라고 그녀는 미루어 짐작했다.
골목 입구에서 노인과 작별한 은주는 수키와가 겹겹이 포개진 나지막한 벽돌담을 따라 걸었다. 벽돌담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녀는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 세 개를 주웠다. 낙엽의 중심에 긴 맥이 있고 그 맥을 따라 그물 모양의 작은 맥이 촘촘히 퍼져 있다. 잎맥은 사계를 충실히 살아낸 낙엽의 지문 같기도 하고 살을 발라 먹은 생선 가시 같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물 모양의 줄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 벌레 먹은 것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혀있다면 서은주씨는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불현듯 노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노인이 직접 은주를 지목한 것은 그녀의 눈에서 상실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인을 단번에 읽어버린 것처럼. 삶의 연결성이 없는 사람들, 잎맥 같은 가느다란 길마저 뚝뚝 끊기는 사람의 눈 속에는 숨은 공간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빛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 이삿짐을 하루 먼저 빼버린 방 같은 그런 공간이. 오직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만 그걸 알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뜬금없이 가스차단기 같은 걸 선물이라며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은주는 회사에서 준비한 서류에 노인의 사인을 받지 않았다. 헛물켰다며 책임자 박이 그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초조하지 않았다. 노인을 만날 기회가 아직 네 번이나 남아 있다는 든든함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진 게 아니다. 은주는 자신의 내부에 변화라고 부를만한 노글노글한 기운이 넓게 포진해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저녁의 기운에 에워싸인 것도. 이내의 시간. 그녀는 골목 끝머리쯤에서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봤다. 검푸른 어둠이 몰려오는 이런 길을 언젠가 꼭 한 번 걸은 적 있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이현수
이 소설은 단편 「노근리의 빛과 우울」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근작으로는 장편 『사라진 요일』과 산문집 『아는 사람만 끼리끼리 먹는』이 있습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