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마녀들의 주방 혹은 실험실에서
1.
그는 성인이었고 완성된 유럽인의 자존감을 갖고 있었으며, 정신적으로는 합리주의자에 지리적으로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정착해서 안정된 삶을 살다가 왔다. 어린아이인 나는 달랐다.1)
아우슈비츠의 여성 생존자 루트 클뤼거가 수용소 경험을 증언한 책에서 프리모 레비에 대해 한 말이다. 그녀는, 엄격하게 정제된 언어로 ‘인간’에 대해 증언하던 레비와 달리, 아우슈비츠에 젠더와 계급과 연령을 도입한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레비를 보편적 인간에서 ‘20세기 중산층 유럽 남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럽 사회에 동화되었던 많은 유대인이 전쟁 이후 유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구성하는 종교적·민족적 전통의 부활 흐름과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우리 유대인은 남자만 카디시, 즉 고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 만약 내가 공식적으로 내 유령들을 애도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아버지의 카디시를 올릴 수 있다면, 이 종교와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2)
그녀는 자신이 지녔던 ‘세계에 대한 위화감’이 이미 아우슈비츠 이전에 존재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해서 모든 감각이 재편되거나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용소의 경험을 증언하면서도, 그녀는 ‘여성’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여자수용소가 남자수용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덜 잔인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자 친위대원들이 남자들보다 덜 잔인했다”(184-185쪽)라든지, 여성 수감자들은 “상상의 케이크를 구우며 버터와 계란과 설탕을 듬뿍 넣어 서로 경쟁하는 것을 즐겼다”(189쪽)라는 식으로. 또한, 수용소에서 동고동락한 어머니에 대해 아무런 윤색 없이 지독한 애증과 경멸을 토로한다. 어머니는 평생 피해망상 속에서 거짓과 위선을 살아왔다고.
동시에 이면의 풍경 역시 생략되지 않는다. 여성 감독관들이 잔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수감자들을 “쓸모 있는 동물들”(187쪽)처럼 대했기 때문이고, 어머니의 피해망상은 “강박신경증 환자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먼저 적응”(163쪽)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구해냈으며, 여성 수감자들의 향수 어린 요리 이야기에는 어쩐지 ‘거북한 것’이 있었다고. 그녀는 묻는다. “예전에 모든 게 그처럼 장밋빛이었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닥칠 수 있었단 말인가?”(189쪽)
그후 미국에 이주하여 ‘정상적인’ 삶을 사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직관과 감정을 레비처럼 정제하고 증류하지 않은 채 호오와 애증을 담아 회상하고 고백하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매 순간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여성’을 삭제해버리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상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유대교의 의식 대신 희망하던 ‘마녀의 주방’과 ‘딸들의 요리법’은 여성 수감자들이 ‘요리법 교환하기’를 즐기던 수용소의 풍경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해묵은 뿌리를 갈려면 현재의 부엌 찬장에서 강판을 꺼내야 한다. 우리 딸들에게는 아버지들이 끓여놓은 수프에 조미료를 친 다음 저을 국자가 필요하다. 마법은 역동적인 사유다. 함께 사유하는 여성 독자들과 어쩌면 몇몇 남성 독자들도 함께 제대로 마법을 부린다면, 우리는 주문들을 요리법처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고, 역사와 옛이야기들의 전언을 서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실 부엌과 거실용 부엌이 허락하는 한 매번 느긋하게 새로 끓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편안한 작업이 될 것 같다고 걱정하진 말기를. 제대로 굴러가는 마녀의 주방에는 창문과 문과 부서지는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현존하는) 맥락들을 찾아내고 (필요하다면) 만들어낼 것이다.3)
후에 독문학자가 되는 클뤼거의 아포리아는 ‘아버지의 언어’를 사용하여 아버지를 공격해야 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시사적이다. 그녀는 독일어와 독문학에 대한 “유보의 감정”을 표명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물려받은 유일하고 실제적인 유산”(253쪽)이라고 인정한다. 아버지의 언어, 클뤼거 식으로 “아버지들이 끓여놓은 수프”의 의미는 다층적이다. 독일어는 그녀에게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언어이자 나치 독일의 폭력적인 언어이면서도, 고향 빈의 언어이자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버티게 해준 아름다운 시문학의 언어였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문학’은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수프’를 새롭게 끓이기 위해 ‘딸들의 요리법’으로 조미료를 넣고 국자를 저어야 하는, 역동적인 과정인 셈이다. 클뤼거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역설까지는 아닐지라도, 글을 쓰는 여성은 반드시 자신의 모국어를 향한 애정과 위화감에 직면한다. 문제는 여전히 이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맥락에 새로 만들어낸 맥락을 어떻게 뒤섞는가. 혹은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가.
2.
그런데 실은, 내게 ‘마녀의 주방’이라는 신비주의적인 비유보다 더 와닿는 비유는 실험실의 비유일 것이다. 나는 학부 시절 ‘이과생’이었는데, 문과와 달리 이과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특정 실험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석학에 관심이 있던 나는 졸업시험 대신 학부 마지막 학기 동안 소규모의 분석실험을 수행하고 졸업논문을 쓰기로 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금이라는 식물에서 특정한 항암물질을 추출하는 일을 했다. 내가 이 실험실 생활에서 당초 예상했던 ‘분석기에서 검출되는 스펙트럼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낄 수만 있었다면 무사히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으련만, 당시 내가 얻은 통찰은 ‘이미 존재함을 확실히 알고 있는 물질 하나’ 추출해내는 일도 이렇게나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작은 식물 뿌리 조각에서 ‘하나의 구조식’으로 이루어진 물질을 추출하는 일이 6개월의 시간으로 가능하지 않다니! 이토록 끝끝내 딸려오는 불순물들의 끈질김이라니!
그에 반해, 유기화학 실험을 선택한 친구는 끊임없이 합성 중이었는데, 6개월은 엄청난 양의 화합물들이 샘솟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합성이 용이하고 분석이 어렵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합성물은 원치 않았던 것이거나, 혹은 그후 이어지는 검증에서 별다른 효능을 찾을 수 없는 물질이었다는 점에서, 친구와 나는 비슷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실제로 분석과 합성은 둘 다 지난하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도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었는데, 예컨대 고추에서 캡사이신을 추출하는 과정이 분석이라면, 인위적으로 캡사이신을 합성해내는 일은 분석과정에서 알게 된 캡사이신의 구조식과 같은 정보에 기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캡사이신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보다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물질로 개량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그 안정성과 효과를 판정하는 분석학적 과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 분석과 합성은 애초 분리될 수 없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연구원들의 실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는 신속히 공유됐다. 나는 종종 온갖 분석과 합성으로 뜨겁고도 고요했던 실험실의 풍경이 그리워지기도 하는데, 내가 클뤼거였다면 ‘마녀의 주방’ 대신 이런 실험실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다닌 학교는 여대였다!)
2020년 ‘지금 비평’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실제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실험실의 풍경이었다. 박민정, 강화길, 김세희, 김혜진, 장류진, 최은영 등의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내게 소설이란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세계(재현 불가능성의 영역까지 포함해서)에 대해 알려주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 즈음, ‘내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들이 내가 경험하거나 목격한 삶에 대해 각종 분석과 합성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참 반갑고도 괴로운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발견의 시기, 어떤 특권을 지닌 시기, 어떤 연루의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에게 공범이 되기를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요구를 건네는 지금의 소설들 앞에서 나의 독법은 어때야 하는지 자문해본다. 정치인들의 조화행렬에 맞서 『김지은입니다』를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을 만큼 적극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글을 요구하고 지지하는 독자들 앞에서, “창문과 문과 부서지는 벽 틈으로” 쉴새 없이 들어오는 바람 앞에서,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것이 부단히 분석하고 합성하고 토론하는 유동적인 실험실은 아닌지 상상해본다.
3.
아마도 이곳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분석과 합성의 결과물들은 대체로 서투르거나, 기존의 화합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또 다른 실험으로 이어질 만큼 새롭고 자극적이며 야심만만하기도 할 것이다. 이 실험실을 둘러싼 특정한 문제의식과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섣불리 이름을 붙이기엔 망설여질 것이다. 아마도 그 이름은, 이 실험실의 열기가 페미니즘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실험실 내외부의 반목과 갈등이 젠더의 정치학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비평’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의 비평’이 이 실험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직감한다. 내가 이 실험실에서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분석과 합성의 과정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정확하게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문학’이라는 무형의 장에 실험실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연상시키는 비유를 동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실험실의 비유로 인해 얻게 되는 오류보다 그 실험실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부하기에 얻는 오류가 더 크다고 믿고 있다. 문학장 안의 실험실이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 경계선을 가지고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한 작가가 반드시 하나의 실험실에 속한다거나, 실험실의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고요한 방에서 깨끗한 책상을 마련한 후 문학성이라는 분광기를 이용해 작품을 해석해낼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나에게 분석과 합성이 이루어지는 실험실과 무관한 장소에서 비평을 한다는 것은, 마치 관측 장소가 변했어도 관측 결과가 일정하길 바라는 고전 물리학의 세계처럼 단조롭게 느껴질 뿐이다. 물론 비평가는 실험실에서도 그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내부자이자 외부자로서, 끊임없이 거리를 조정하고 시점을 전환하는 공범이자 타자로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비평에 아무런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다면, 모든 비평은 타당함을 얻는 동시에 우아하게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4.
프랑코 모레티4)는 페르낭 브로델의 ‘사건, 주기, 장기지속’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틀을 문학사에 도입하면서, 대부분의 비평가는 “사건으로 한정된 영역과 개별적 사례”에 익숙하고, 대부분의 이론가는 그 대척점인 ‘장기지속’, 다시 말해 “거의 변하지 않는 구조의 매우 긴 시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런 관계로, 그 사이 영역인 ‘주기’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5) 그는 서간체 소설, 역사 소설, 고딕 소설, 가정 소설 등 150여 년간 영국에서 유행했던 소설 유형들을 분석한 그래프에서, 특정한 유형이 대체로 25~30년 동안 지속되는 경향을 발견한다. 갈등 속에 변주가 발생하고, 그 변주에 의한 진동이 반복되면서, 어떤 ‘주기의 층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어떤 유형의 소설의 경우, 그 지속기간이 9~12년 정도로 짧기도 한데, 그는 이 이유를 ‘정치’에서 찾으면서 “선명한 이념적 선언들”의 형식의 경우 극적인 사건처럼 독자를 사로잡은 후 빠르게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부연한다.6)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둘러싼 모든 판단 이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모레티는, 이 25~30년의 주기를 해석하기 위해 ‘세대’라는 개념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지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세대가 정치적 상황이나 계급, 젠더 등에 의해 구성된 ‘실제 세대’와 큰 간극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 짧은 주기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특정한 ‘계량적’ 현상에 대해 ‘질적 설명’을 도입하는 것은 실은 “전혀 풀어낼 수 없는 문제를 발견했다”의 다른 말임을 인정한다.7)
그러나 나는, ‘계량적 대상에 대한 질적 설명의 비대칭성’을 잊지만 않는다면, 또 근대소설의 성립과정을 포함한 영국 문학장의 시계와 지금 우리 문학장의 시계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만 한다면, 모레티의 논의는 충분히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들의 그래프 앞에서, 누군가는 더이상 읽히지 않는 80년대 전투적인 소설이나 90년대 후일담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지금의 페미니즘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는 설사 어떤 형식이 ‘정치’에 의해 극적으로 피어올랐다 소수의 정전을 남기거나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해도, 그리고 그 형식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식이라 해도, 서럽거나 염려되지 않는다. 애초, 내가 떠올리는 실험실이 시공에 무관하리라 생각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소설이 ‘소설이 아닌 세계’보다 가치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세대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그렇게 폭넓게 통용되는 개념 속에 어떠한 실재성도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 한 명의 작가가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은 것처럼, 비평가 역시 그의 감각과 동시대 감각이 어긋나지 않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다면, 이 사회에서 내 이야기는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까. 재현함으로써 실현시키는,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실재성을 획득하는 ‘소설의 현상학적 능력’을 떠올려보면, 소설들의 관심이 늘 새로운 세대의 정치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허구적인 것은, 결코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가 단지 비평을 쓴다는 이유로 무중력의 공중에 서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빠지기 쉬운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신앙 같은 것이 아닐까.
5.
그러니 이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괜찮은 사회라면, 아마도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확히 나의 논리에 의해 비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논리대로 내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다음 세대가 나의 유산을 거절하지 않고 상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속이라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지금의 소설들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것과 족보나 연대기를 쓰는 것은 비슷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강화길이나 장류진이나 천희란 등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들은 상속을 감당하고 지분을 계산하고 연루를 검토한다. 상속자들은 더이상 아름답기만 할 수도 없고, 온화하고 비극적인 내면성만 가질 수도 없으며, 사태를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에 신속하고 부지런하다. 이들은 권력 관계 속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갖는 허구성과 무력함을 직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색 가능한 전략들을 검토한다. 박민정이나 한정현 등의 경우에는 보다 메타적인 작업을 선호한다. 마지막 고리까지 맞춰야 완성되는 정교한 사회학적 큐브를 조립하는 방식이나 연구서에 육박하는 맥락적 지식들을 다층적으로 펼쳐내는 지적인 방식을 선보인다. 때론 김혜진처럼 리얼리즘적인 방식을 사용하거나, 김세희나 최은영처럼 감정교육에 육박하는 섬세함으로 관계와 경험 들을 복기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작가마다 특기는 다르지만, 이들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들은 공통적이다. ‘알고 있는 여자’ 혹은 ‘알고자 하는 여자’. 그녀들은 자기기만이나 자기 정당화에 실패한, 그러나 손쉽게 눈물을 흘리며 ‘죄의식의 주체’로 자신을 정립하지 않는, 아주 복잡한 주체들이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끝끝내 거절하는 존재들이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많은 운동이 이중전략을 취하는 것처럼, 지금의 소설들도 이중전략을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마치 정체성 정치의 일환처럼 ‘현실 여성’이기에 겪는 부당함에 저항하고 여성이라는 좌표의 풍경을 전경화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젠더적 관계들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기존 좌표계 자체의 허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좌표계의 허구성을 지렛대 삼아 전략적인 위치 조정을 하고 세세한 명세표를 작성해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소설들은 인식론으로서 젠더를 생략하지 않은 채 분석과 합성의 과정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물론, 작가마다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균형감이 항상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경계선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구태의연한 해설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고, 새로운 세계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유토피아를 선보일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에 대한 눈 밝은 비평의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맥락적·정치적 지식과 연대하며 얻게 된 현상학적 능력, 다시 말해 새로운 인식론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재현을 통한 실재화’ 능력을 손쉽게 괄호 쳐버린 채 개별 작품만 ‘리뷰’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명백히 지금의 소설들은 문학장의 규범성을 포함하여 정의와 진리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재편하는 데 강력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 역시 기존의 정치학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치학을 수립하기 위한 이 실험을 지지한다. 그런 지지자의 마음을 담아 다시, 나의 비평은 어떠해야 하는가.
6.
‘2020년 지금 비평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써보는 글을, 실은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2020년 비평’은커녕, 비평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은 물론이거니와, 2020년 이전의 문학장에서 어떤 비평적 논의들이 오갔는지에 대한 전사조차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덜컥 청탁을 받아들인 것은, 애초 내게 청탁이 온 이유가 신인 비평가인 나에게 대단한 식견과 안목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 때문이었고,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제안에 조금 안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은 안도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연극배우 특유의 발성이나 패션 잡지에서만 소통되는 외국어 혼합체처럼, 분명 비평 문투라는 게 있다는 것, 자유롭게 쓴 다른 비평가의 글을 보면 결코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다른 비평가들의 자유가 다르다는 것쯤은 금세 알게 되니까.)
결국, 이 글은 내 무지를 고백하고 변명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해 글을 쓸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에 진심을 담아 썼다. 몇 해 전, 저명한 화가의 추상화 캠프에 열흘간 참여해본 적이 있었다. 닷새 정도 신나게 색면 추상화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후 일정 동안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둔 색면 추상화를 다시 자르고 찢고 이어붙여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놀랍게도, 그때 나는 자유로웠다.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작업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묶인 속박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작업을 해석하고 배치하며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것, 연대하되 공동체가 아닌 것, 개인도 아니고 집단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중간계’와 같은 것을 느꼈다. 내게 비평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지금의 나의 비평’을 쓰면서 ‘함께 있음’에 참여하는 것, 조금 간지러운 말이지만 그렇게 온기가 있는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그는 성인이었고 완성된 유럽인의 자존감을 갖고 있었으며, 정신적으로는 합리주의자에 지리적으로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정착해서 안정된 삶을 살다가 왔다. 어린아이인 나는 달랐다.1)
아우슈비츠의 여성 생존자 루트 클뤼거가 수용소 경험을 증언한 책에서 프리모 레비에 대해 한 말이다. 그녀는, 엄격하게 정제된 언어로 ‘인간’에 대해 증언하던 레비와 달리, 아우슈비츠에 젠더와 계급과 연령을 도입한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레비를 보편적 인간에서 ‘20세기 중산층 유럽 남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럽 사회에 동화되었던 많은 유대인이 전쟁 이후 유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구성하는 종교적·민족적 전통의 부활 흐름과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우리 유대인은 남자만 카디시, 즉 고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 만약 내가 공식적으로 내 유령들을 애도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아버지의 카디시를 올릴 수 있다면, 이 종교와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2)
그녀는 자신이 지녔던 ‘세계에 대한 위화감’이 이미 아우슈비츠 이전에 존재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해서 모든 감각이 재편되거나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용소의 경험을 증언하면서도, 그녀는 ‘여성’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여자수용소가 남자수용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덜 잔인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자 친위대원들이 남자들보다 덜 잔인했다”(184-185쪽)라든지, 여성 수감자들은 “상상의 케이크를 구우며 버터와 계란과 설탕을 듬뿍 넣어 서로 경쟁하는 것을 즐겼다”(189쪽)라는 식으로. 또한, 수용소에서 동고동락한 어머니에 대해 아무런 윤색 없이 지독한 애증과 경멸을 토로한다. 어머니는 평생 피해망상 속에서 거짓과 위선을 살아왔다고.
동시에 이면의 풍경 역시 생략되지 않는다. 여성 감독관들이 잔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수감자들을 “쓸모 있는 동물들”(187쪽)처럼 대했기 때문이고, 어머니의 피해망상은 “강박신경증 환자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먼저 적응”(163쪽)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구해냈으며, 여성 수감자들의 향수 어린 요리 이야기에는 어쩐지 ‘거북한 것’이 있었다고. 그녀는 묻는다. “예전에 모든 게 그처럼 장밋빛이었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닥칠 수 있었단 말인가?”(189쪽)
그후 미국에 이주하여 ‘정상적인’ 삶을 사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직관과 감정을 레비처럼 정제하고 증류하지 않은 채 호오와 애증을 담아 회상하고 고백하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매 순간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여성’을 삭제해버리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상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유대교의 의식 대신 희망하던 ‘마녀의 주방’과 ‘딸들의 요리법’은 여성 수감자들이 ‘요리법 교환하기’를 즐기던 수용소의 풍경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해묵은 뿌리를 갈려면 현재의 부엌 찬장에서 강판을 꺼내야 한다. 우리 딸들에게는 아버지들이 끓여놓은 수프에 조미료를 친 다음 저을 국자가 필요하다. 마법은 역동적인 사유다. 함께 사유하는 여성 독자들과 어쩌면 몇몇 남성 독자들도 함께 제대로 마법을 부린다면, 우리는 주문들을 요리법처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고, 역사와 옛이야기들의 전언을 서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실 부엌과 거실용 부엌이 허락하는 한 매번 느긋하게 새로 끓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편안한 작업이 될 것 같다고 걱정하진 말기를. 제대로 굴러가는 마녀의 주방에는 창문과 문과 부서지는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현존하는) 맥락들을 찾아내고 (필요하다면) 만들어낼 것이다.3)
후에 독문학자가 되는 클뤼거의 아포리아는 ‘아버지의 언어’를 사용하여 아버지를 공격해야 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시사적이다. 그녀는 독일어와 독문학에 대한 “유보의 감정”을 표명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물려받은 유일하고 실제적인 유산”(253쪽)이라고 인정한다. 아버지의 언어, 클뤼거 식으로 “아버지들이 끓여놓은 수프”의 의미는 다층적이다. 독일어는 그녀에게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언어이자 나치 독일의 폭력적인 언어이면서도, 고향 빈의 언어이자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버티게 해준 아름다운 시문학의 언어였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문학’은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수프’를 새롭게 끓이기 위해 ‘딸들의 요리법’으로 조미료를 넣고 국자를 저어야 하는, 역동적인 과정인 셈이다. 클뤼거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역설까지는 아닐지라도, 글을 쓰는 여성은 반드시 자신의 모국어를 향한 애정과 위화감에 직면한다. 문제는 여전히 이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맥락에 새로 만들어낸 맥락을 어떻게 뒤섞는가. 혹은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가.
2.
그런데 실은, 내게 ‘마녀의 주방’이라는 신비주의적인 비유보다 더 와닿는 비유는 실험실의 비유일 것이다. 나는 학부 시절 ‘이과생’이었는데, 문과와 달리 이과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특정 실험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석학에 관심이 있던 나는 졸업시험 대신 학부 마지막 학기 동안 소규모의 분석실험을 수행하고 졸업논문을 쓰기로 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금이라는 식물에서 특정한 항암물질을 추출하는 일을 했다. 내가 이 실험실 생활에서 당초 예상했던 ‘분석기에서 검출되는 스펙트럼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낄 수만 있었다면 무사히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으련만, 당시 내가 얻은 통찰은 ‘이미 존재함을 확실히 알고 있는 물질 하나’ 추출해내는 일도 이렇게나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작은 식물 뿌리 조각에서 ‘하나의 구조식’으로 이루어진 물질을 추출하는 일이 6개월의 시간으로 가능하지 않다니! 이토록 끝끝내 딸려오는 불순물들의 끈질김이라니!
그에 반해, 유기화학 실험을 선택한 친구는 끊임없이 합성 중이었는데, 6개월은 엄청난 양의 화합물들이 샘솟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합성이 용이하고 분석이 어렵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합성물은 원치 않았던 것이거나, 혹은 그후 이어지는 검증에서 별다른 효능을 찾을 수 없는 물질이었다는 점에서, 친구와 나는 비슷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실제로 분석과 합성은 둘 다 지난하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도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었는데, 예컨대 고추에서 캡사이신을 추출하는 과정이 분석이라면, 인위적으로 캡사이신을 합성해내는 일은 분석과정에서 알게 된 캡사이신의 구조식과 같은 정보에 기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캡사이신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보다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물질로 개량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그 안정성과 효과를 판정하는 분석학적 과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 분석과 합성은 애초 분리될 수 없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연구원들의 실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는 신속히 공유됐다. 나는 종종 온갖 분석과 합성으로 뜨겁고도 고요했던 실험실의 풍경이 그리워지기도 하는데, 내가 클뤼거였다면 ‘마녀의 주방’ 대신 이런 실험실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다닌 학교는 여대였다!)
2020년 ‘지금 비평’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실제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실험실의 풍경이었다. 박민정, 강화길, 김세희, 김혜진, 장류진, 최은영 등의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내게 소설이란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세계(재현 불가능성의 영역까지 포함해서)에 대해 알려주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 즈음, ‘내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들이 내가 경험하거나 목격한 삶에 대해 각종 분석과 합성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참 반갑고도 괴로운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발견의 시기, 어떤 특권을 지닌 시기, 어떤 연루의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에게 공범이 되기를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요구를 건네는 지금의 소설들 앞에서 나의 독법은 어때야 하는지 자문해본다. 정치인들의 조화행렬에 맞서 『김지은입니다』를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을 만큼 적극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글을 요구하고 지지하는 독자들 앞에서, “창문과 문과 부서지는 벽 틈으로” 쉴새 없이 들어오는 바람 앞에서,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것이 부단히 분석하고 합성하고 토론하는 유동적인 실험실은 아닌지 상상해본다.
3.
아마도 이곳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분석과 합성의 결과물들은 대체로 서투르거나, 기존의 화합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또 다른 실험으로 이어질 만큼 새롭고 자극적이며 야심만만하기도 할 것이다. 이 실험실을 둘러싼 특정한 문제의식과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섣불리 이름을 붙이기엔 망설여질 것이다. 아마도 그 이름은, 이 실험실의 열기가 페미니즘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실험실 내외부의 반목과 갈등이 젠더의 정치학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비평’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의 비평’이 이 실험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직감한다. 내가 이 실험실에서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분석과 합성의 과정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정확하게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문학’이라는 무형의 장에 실험실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연상시키는 비유를 동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실험실의 비유로 인해 얻게 되는 오류보다 그 실험실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부하기에 얻는 오류가 더 크다고 믿고 있다. 문학장 안의 실험실이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 경계선을 가지고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한 작가가 반드시 하나의 실험실에 속한다거나, 실험실의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고요한 방에서 깨끗한 책상을 마련한 후 문학성이라는 분광기를 이용해 작품을 해석해낼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나에게 분석과 합성이 이루어지는 실험실과 무관한 장소에서 비평을 한다는 것은, 마치 관측 장소가 변했어도 관측 결과가 일정하길 바라는 고전 물리학의 세계처럼 단조롭게 느껴질 뿐이다. 물론 비평가는 실험실에서도 그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내부자이자 외부자로서, 끊임없이 거리를 조정하고 시점을 전환하는 공범이자 타자로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비평에 아무런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다면, 모든 비평은 타당함을 얻는 동시에 우아하게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4.
프랑코 모레티4)는 페르낭 브로델의 ‘사건, 주기, 장기지속’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틀을 문학사에 도입하면서, 대부분의 비평가는 “사건으로 한정된 영역과 개별적 사례”에 익숙하고, 대부분의 이론가는 그 대척점인 ‘장기지속’, 다시 말해 “거의 변하지 않는 구조의 매우 긴 시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런 관계로, 그 사이 영역인 ‘주기’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5) 그는 서간체 소설, 역사 소설, 고딕 소설, 가정 소설 등 150여 년간 영국에서 유행했던 소설 유형들을 분석한 그래프에서, 특정한 유형이 대체로 25~30년 동안 지속되는 경향을 발견한다. 갈등 속에 변주가 발생하고, 그 변주에 의한 진동이 반복되면서, 어떤 ‘주기의 층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어떤 유형의 소설의 경우, 그 지속기간이 9~12년 정도로 짧기도 한데, 그는 이 이유를 ‘정치’에서 찾으면서 “선명한 이념적 선언들”의 형식의 경우 극적인 사건처럼 독자를 사로잡은 후 빠르게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부연한다.6)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둘러싼 모든 판단 이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모레티는, 이 25~30년의 주기를 해석하기 위해 ‘세대’라는 개념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지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세대가 정치적 상황이나 계급, 젠더 등에 의해 구성된 ‘실제 세대’와 큰 간극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 짧은 주기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특정한 ‘계량적’ 현상에 대해 ‘질적 설명’을 도입하는 것은 실은 “전혀 풀어낼 수 없는 문제를 발견했다”의 다른 말임을 인정한다.7)
그러나 나는, ‘계량적 대상에 대한 질적 설명의 비대칭성’을 잊지만 않는다면, 또 근대소설의 성립과정을 포함한 영국 문학장의 시계와 지금 우리 문학장의 시계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만 한다면, 모레티의 논의는 충분히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들의 그래프 앞에서, 누군가는 더이상 읽히지 않는 80년대 전투적인 소설이나 90년대 후일담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지금의 페미니즘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는 설사 어떤 형식이 ‘정치’에 의해 극적으로 피어올랐다 소수의 정전을 남기거나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해도, 그리고 그 형식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식이라 해도, 서럽거나 염려되지 않는다. 애초, 내가 떠올리는 실험실이 시공에 무관하리라 생각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소설이 ‘소설이 아닌 세계’보다 가치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세대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그렇게 폭넓게 통용되는 개념 속에 어떠한 실재성도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 한 명의 작가가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은 것처럼, 비평가 역시 그의 감각과 동시대 감각이 어긋나지 않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다면, 이 사회에서 내 이야기는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까. 재현함으로써 실현시키는,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실재성을 획득하는 ‘소설의 현상학적 능력’을 떠올려보면, 소설들의 관심이 늘 새로운 세대의 정치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허구적인 것은, 결코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가 단지 비평을 쓴다는 이유로 무중력의 공중에 서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빠지기 쉬운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신앙 같은 것이 아닐까.
5.
그러니 이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괜찮은 사회라면, 아마도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확히 나의 논리에 의해 비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논리대로 내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다음 세대가 나의 유산을 거절하지 않고 상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속이라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지금의 소설들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것과 족보나 연대기를 쓰는 것은 비슷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강화길이나 장류진이나 천희란 등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들은 상속을 감당하고 지분을 계산하고 연루를 검토한다. 상속자들은 더이상 아름답기만 할 수도 없고, 온화하고 비극적인 내면성만 가질 수도 없으며, 사태를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에 신속하고 부지런하다. 이들은 권력 관계 속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갖는 허구성과 무력함을 직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색 가능한 전략들을 검토한다. 박민정이나 한정현 등의 경우에는 보다 메타적인 작업을 선호한다. 마지막 고리까지 맞춰야 완성되는 정교한 사회학적 큐브를 조립하는 방식이나 연구서에 육박하는 맥락적 지식들을 다층적으로 펼쳐내는 지적인 방식을 선보인다. 때론 김혜진처럼 리얼리즘적인 방식을 사용하거나, 김세희나 최은영처럼 감정교육에 육박하는 섬세함으로 관계와 경험 들을 복기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작가마다 특기는 다르지만, 이들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들은 공통적이다. ‘알고 있는 여자’ 혹은 ‘알고자 하는 여자’. 그녀들은 자기기만이나 자기 정당화에 실패한, 그러나 손쉽게 눈물을 흘리며 ‘죄의식의 주체’로 자신을 정립하지 않는, 아주 복잡한 주체들이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끝끝내 거절하는 존재들이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많은 운동이 이중전략을 취하는 것처럼, 지금의 소설들도 이중전략을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마치 정체성 정치의 일환처럼 ‘현실 여성’이기에 겪는 부당함에 저항하고 여성이라는 좌표의 풍경을 전경화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젠더적 관계들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기존 좌표계 자체의 허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좌표계의 허구성을 지렛대 삼아 전략적인 위치 조정을 하고 세세한 명세표를 작성해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소설들은 인식론으로서 젠더를 생략하지 않은 채 분석과 합성의 과정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물론, 작가마다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균형감이 항상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경계선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구태의연한 해설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고, 새로운 세계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유토피아를 선보일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에 대한 눈 밝은 비평의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맥락적·정치적 지식과 연대하며 얻게 된 현상학적 능력, 다시 말해 새로운 인식론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재현을 통한 실재화’ 능력을 손쉽게 괄호 쳐버린 채 개별 작품만 ‘리뷰’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명백히 지금의 소설들은 문학장의 규범성을 포함하여 정의와 진리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재편하는 데 강력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 역시 기존의 정치학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치학을 수립하기 위한 이 실험을 지지한다. 그런 지지자의 마음을 담아 다시, 나의 비평은 어떠해야 하는가.
6.
‘2020년 지금 비평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써보는 글을, 실은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2020년 비평’은커녕, 비평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은 물론이거니와, 2020년 이전의 문학장에서 어떤 비평적 논의들이 오갔는지에 대한 전사조차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덜컥 청탁을 받아들인 것은, 애초 내게 청탁이 온 이유가 신인 비평가인 나에게 대단한 식견과 안목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 때문이었고,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제안에 조금 안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은 안도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연극배우 특유의 발성이나 패션 잡지에서만 소통되는 외국어 혼합체처럼, 분명 비평 문투라는 게 있다는 것, 자유롭게 쓴 다른 비평가의 글을 보면 결코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다른 비평가들의 자유가 다르다는 것쯤은 금세 알게 되니까.)
결국, 이 글은 내 무지를 고백하고 변명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해 글을 쓸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에 진심을 담아 썼다. 몇 해 전, 저명한 화가의 추상화 캠프에 열흘간 참여해본 적이 있었다. 닷새 정도 신나게 색면 추상화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후 일정 동안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둔 색면 추상화를 다시 자르고 찢고 이어붙여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놀랍게도, 그때 나는 자유로웠다.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작업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묶인 속박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작업을 해석하고 배치하며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것, 연대하되 공동체가 아닌 것, 개인도 아니고 집단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중간계’와 같은 것을 느꼈다. 내게 비평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지금의 나의 비평’을 쓰면서 ‘함께 있음’에 참여하는 것, 조금 간지러운 말이지만 그렇게 온기가 있는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이소
한 수학자의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들었습니다. "우주는 기하입니까, 대수입니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수학자는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우주는 대수입니다. 기하는 통계적 현상입니다.” 이 답변이 제 머릿속에서 자꾸 증식합니다. 세계는 추상입니다, 구상은 통계적 현상입니다. 세계는 기표입니다, 기의는 통계적 현상입니다…… 글을 쓰는 내내 저 말들이 떠돌아다닙니다. 저에게 문학은 본질이 아닌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2020/09/29
34호
- 1
- 루트 클뤼거, 최성만 역, 『삶은 계속된다』, 문학동네, 2018, 142쪽.
- 2
- 같은 책, 31쪽.
- 3
- 같은 책, 101쪽.
- 4
- 모레티의 성폭력 문제에 대해 옮긴이의 말에 동의하며 인용한다. “모레티의 이러한 혐의 때문에 번역 출간의 필요성에 관해 긴 논의가 있었고,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간이 결정되었으나 (…) 이 번역 및 출간이 모레티의 과실까지 옹호하거나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멀리서 읽기라는 이론의 큰 틀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학문적 토론은 파편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최근 이렇게 ‘그러므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판단을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렇게 짧은 순간 결정해야 하는 많은 질문들이 때론 복잡하고 때론 불편하지만, 이처럼 새롭게 요구되는 판단의 과정과 단계 들을 생략하지 않고 기록하고 사유해야 한다고 믿으며 모레티의 책을 인용한다.
- 5
- 프랑코 모레티, 이재연 역, 『그래프, 지도, 나무』, 문학동네, 2020, 24쪽.
- 6
- 같은 책, 33쪽.
- 7
- 같은 책, 32,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