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은 서로 다른 장르의 필자가 동일한 주제를 둘러싼 질문들을 각자 풀어나가면서 동시대 문화예술의 지형을 그려보는 지면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른 수역에서(in other waters)’를 주제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밀려나 있는 존재들과 경계를 넘는 소리 경험에 주목합니다.



웹진 비유 · 1 - 전솔비
빗소리가 들린다. 작게 새소리도 들리고 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리에 잠이 깼다. 베란다에 나가니 평소보다 조금 시원한 공기가 느껴지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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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기르는 데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일요일 오전마다 시간을 정해두고 식물을 살피곤 한다. 물을 주거나 창문을 열고 바람 쐬어주는 걸 조금만 바빠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소한 이야기나 장면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정작 물도 바람도 내게 의존하는 작은 생명은 잘 돌보지 못하는 스스로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해왔다. 마음이 동해서 그것을 곁에 두는 일과 그것이 내게 잘 기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마음을 쓰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이번에 기르고 있는 스프링골풀과 나비란은 다행히 반년 넘게 잘 자라고 있다. 나비란은 함께 방글라데시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해줬는데, 비교적 쉬운 수경재배로 유리컵에 넣어서 키우니 벌써 뿌리가 이파리보다 길게 자랐다.
  잎에 꽃이 피는 모습이 나비 같다고 하는 이 식물을 볼 때면 작업에 종종 나비를 등장시키는 그 친구가 생각나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늘 콕스바자르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오른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제노사이드 과정을 겪고 있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인들이 미얀마와 국경을 인접한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피난하며 형성한 대규모 난민 캠프였다. 그 친구처럼 현장에 감춰진 이야기를 잘 보고 듣는 섬세한 목격자가 되고 싶었지만, 거기서 나는 아마 생존 본능 속에서 분투했던 엉성하고 미숙한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현장에서는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하고 여러 번 확인하거나 가만히 머무를 시간도, 체력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내가 그곳을 관찰하는 만큼 그곳의 존재들도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늘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서 바라보고 싶던 얼굴의 배경을 응시하거나, 자세히 응시하고 싶던 표정 아래로 고개를 떨구거나, 말 걸고 대화를 나누고 싶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곤 했다. 그저 그곳에 몸을 두고 있다가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이 여정의 전부였다.
  돌아오고 나서야 몸이 기억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이제야 떠나온 곳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책상 옆 창가에 자리한 나비란은 로힝야 난민 캠프와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친구의 얼굴, 나비, 여름, 더위, 구름, 이야기, 정원 등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바쁜 일상에서 자주 그곳에 대한 기억으로 나를 데려갔다. 어쩌면 어떤 사안에 연대한다고 선언하는 커다란 마음을 먹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그 마음이 결국 사라지지 않도록 잘 돌보는 일이 아닐까. 식물을 기르는 일과 연대하는 마음을 기르는 일은 그래서 어딘가 닮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듯, 조금 더 자라난 뿌리를 확인하듯,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를 응시하듯, 기억이 남긴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작은 행동들을 우리는 매일 찾는다.
  제노사이드, 학살, 난민캠프, 전쟁과 같은 무거운 단어를 마주하는 건 마음에 힘이 들지만, 캠프 안에서 먹었던 망고, 오래된 철조망 사이로 마주친 장난스러운 시선, 발가락을 타고 올라오던 개미, 무너진 천막 옆에 널린 작은 이불과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로 그곳을 떠올리는 건 마음에 힘을 덜 줘도 가능한 일이다. 그때 난민캠프 입구의 구멍가게에서 팔던 작은 바나나의 단맛을 떠올리며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느끼다가, 문득 긴 가족사를 들려주던 한 여성의 잘 꾸며진 천막집 내부를 떠올리고, 증언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 그곳에서 찍어둔 사진과 영상을 다시 찾아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에 힘을 주는 일과 힘을 덜 주는 일, 이 둘의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웹진 비유 · 2 - 전솔비
찌르르 찌르르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섞인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이곳 콕스바자르에서는 흔한 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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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기억의 모습을 사유해온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은 소멸이 반복되는 섬을 배경으로 한다.1)
그곳은 리본, 방울, 에메랄드, 우표, 장미, 모자 등 세계에 존재했던 것들이 언어와 함께 사라지는 장소다. 소멸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이 소설의 세계관은 픽션이지만, 많은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현실의 은유로도 충분히 읽힌다. 소설에서 무언가 사라지는 순간 섬사람들은 공기에서 선명하게 까끌거리는 감각을 느끼지만 어느새 무엇이 사라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이를테면 어느 날 아침 ‘새’라는 단어가 사라진다면, 저녁 즈음 섬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작은 점이 날아다니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무엇일 수 있는지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2) 세계 속에서 영영 사라지는 사건은 가시화된 폭력도 가시화된 저항도 없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연상되는 단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끊겨있다. 하지만 소설가인 ‘나’의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남들과는 달리 기억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의문의 죽음을 맞지만, 이미 소멸한 사물들은 어머니의 지하실 서랍 속에 남몰래 감춰져 보관된다. 소설 속에서 서랍은 망각과 기억의 경계지대로서 이미 사라진 것의 흔적이 아직 세계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남긴다.
  지하실 서랍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물들을 상상하다, 문득 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머리끈을 떠올렸다. 한동안 책상 위에 있었을 텐데 어느 날부터 서랍 안쪽으로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캠프 안에서 생계 지원 프로그램 수업을 듣는 로힝야 여성들이 각자 만든 머리끈을 자랑할 때, 아마 들뜬 표정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여러 개를 샀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선물하고 이제 서랍 속엔 단 한 개만 남아있다. 검은색과 주황색, 빨간색이 섞인 꽃 모양의 장식, 만들고 남은 천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방바닥, 로힝야 여성들의 실내복에 그려진 넝쿨 식물의 아름다운 무늬, 정원에서 마주친 히비스커스꽃, 나무와 풀의 이름과 효능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목소리가 연달아 떠오른다.
  올해 여름 한국도 기록적인 폭염이었지만 2023년 4월의 콕스바자르는 정말 더웠고, 37도가 넘는 한낮의 태양 아래를 걷고 있노라면 눈과 코와 입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그곳에서의 시간을 돌아볼 때마다 더위와 멀미, 배탈과 두통 등 자잘한 질병들을 겪던 몸의 통증이 느껴지고,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던 친구의 발갛게 그을린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녹음기를 켜는 것을 자주 잊어버렸고 내 몸으로 잘 기억하려고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던 순간도 있었는데, 어쩐지 기록하지 않은 소리는 벌써 거의 다 기억 속에서 휘발되어버렸다. 하지만 우연히, 무심결에, 어쩌다,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녹음 버튼을 눌렀던 기록을 살펴보면 늘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한 장면의 흔적들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웹진 비유 · 3 -전솔비
태풍이 지나간 이후 고요해진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오고, 라디오에서 한 남성이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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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난민 캠프로 가는 여정은 계속해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사건의 반복이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로,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바다에서 육지로, 여행객이 북적거리는 관광지에서 시골 마을로, 코끼리가 살던 서식지에서 그 일대를 개간한 소수민족의 마을로, 철조망이 쳐진 난민캠프의 입구에서 그 안쪽으로, 햇볕이 내리쬐는 캠프의 골목길에서 어둡고 좁은 천막 안쪽으로. 하나의 경계에서 다른 경계로 넘어갈 때마다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고 어떤 장소에서는 경계 안쪽으로 쉽게 들어갈 수가 없어 누군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떤 경계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어떤 경계에는 철조망과 두꺼운 벽이 있었으며, 어떤 경계에는 하나의 표지판만 존재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총을 멘 채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조사했고, 누군가는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갓 짠 우유를 내어주기도 했다. 경계를 오갈 때마다 몸과 마음의 긴장도가 낮았다가 높아지길 반복했고, 변화하는 장면들을 잊어버리는 게 아쉬워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기록한 소리를 모아보니 ‘라디오’로 들었던 소리가 많았다. 라디오는 캠프에 가기 전부터 궁금했던 매체였다. 잘 작동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콕스바자르 난민 캠프가 위치한 지역은 워낙 도심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인터넷과 라디오 여건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보안상의 이유로 난민 캠프의 정보와 통신을 제한하거나 통제하고 있기에 캠프에서는 라디오를 듣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가기 전부터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래도 작동되지 않는 잡음을 들어보고 싶었고, 혹시라도 잡히는 소리는 없을지 알고 싶었다. 그저 들리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보다, 정말 들리지 않는지 우리의 귀로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미래가 없이 닫힌 공간으로 이미지화되는 난민 캠프 주변을 흐르는 소리풍경의 모습이 궁금했다. 여정 속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라디오를 켜보며 신호를 찾았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에 흐르는 나프강에서도 켜보고, 난민 캠프의 여성들이 교류하는 정원에서도 켜보고, 캠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 팔을 높이 든 채로 안테나를 길게 뺀 라디오를 켜본 날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로힝야 난민 캠프는 정말 다양한 소리의 레이어가 존재하는 깊고 촘촘한 세계였기에 늘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낮게 깔린 천막촌으로 이루어진 밀도 높은 캠프의 생활풍경은 낮은 곳에서부터 저 먼 곳에 이르기까지 다방향의 존재들을 켜켜이 소리로 쌓았다. 그 사이로 대부분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오래 계속되었지만, 가끔 뭔가 신호 같은 게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미세하게 주파수 너머로 뭔가 들렸던 것인지 혹은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를 라디오에서 들려온 소리라고 착각했던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아마 캠프 주변의 강과 산에서 간혹 잡히던 주파수는 라디오 나프(Radio Naf3)) 99.2 FM였을 것이다. 라디오 나프는 방글라데시의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국으로 난민 캠프 일대와 그 주변인 테크나프 일대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정보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운영되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의료, 위생, 예방접종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일의 시급성으로 실행되었으며, 무엇보다 이 방송국은 NGO 단체들의 지원으로 로힝야 난민의 일상, 문화와 예술, 고민이나 지역 이슈를 방송하며 난민 공동체를 지원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캠프 내에서는 라디오 수신이 어려워 난민들은 웹사이트에서 라이브 방송을 듣거나 녹음된 방송을 이후 휴대폰으로 찾아 듣는 등 접근성 면에서는 여러 제약이 있다. 검열이나 통제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소리 공동체이지만, 그럼에도 난민 캠프의 철조망 바깥에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주파 전파가 캠프 안쪽에 도달한다는 사실은 경계를 넘는다는 행위의 우연성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한다. 들린다고 생각했던 순간, 우리가 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캠프 내부와 주변에서는 라디오의 잡음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캠프에서 퇴근 후 시내로 돌아가는 방글라데시 직원들과 종종 차에서 듣던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들렸고, 우리가 머물렀던 콕스바자르 시내의 관광지 한복판에 위치한 숙소에서는 라디오 너머로 선명하게 뉴스와 광고, 노랫소리들이 들려왔다. 캠프에서 멀어질수록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는 투명해졌다. 하지만 캠프 주변에서 녹음된 잡음 기록 속에는 신호를 찾기 위해 집중해서 귀 기울이던 그때의 풍경이 함께 들어있다. 라디오의 잡음과 함께 주변에서 오가던 사람들의 말소리, 발자국 소리, 바람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캠프에 가까워질수록 무엇이 라디오 안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라디오 바깥의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 소리의 근원지가 다른 다방향의 소리들이 녹음된 소리 파일 안에는 늘 하나 이상의 소리 풍경이 있었다.

웹진 비유 · 4 - 전솔비
캠프14의 일터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방글라데시 직원들과 함께 라디오나 음악을 듣곤 했다. 평온한 음악과 대조적인 경적 소리와 속도감 있게 달리는 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섞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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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감각, 닿을 수 없다는 한계’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연결과 접속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 탐색해왔다. 난민과 비난민 사이의 거리, 디아스포라와 국경 사이의 거리, 집과 피난처 사이의 거리, 기억과 기록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함께’라는 현실의 조건으로 사유될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은 당시에 우리에겐 조금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 ‘난민’이라는 단어를 응시하며 이루어졌다. 그것은 전쟁과 트라우마, 폭력과 죽음의 서사가 반복되는 구체적이고 시의적인 주제였지만 우리는 집을 잃고 뿌리가 뽑히는 상실과 박탈의 감각을 살피며 다른 사안들과 연결되는 추상성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고민은 한국 사회에서 그간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타자로서 난민이 어떻게 재현됐는지와 관련된 작업을 리서치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주민의 경우 노동권과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미술적 발자취가 남겨져 있지만, 난민의 경우 2010년대 중반까지도 주로 청년 난민, 주거 난민, 한국전쟁 난민 등 난민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추상화 혹은 과거화하거나 노숙인과 탈북민을 난민으로 제한해서 호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서 진행중인 난민의 실재에 접근하는 것에는 어딘가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난민이 중요한 연구 주제이자 사회적 의제, 이미지 정치의 화두가 된 건 전국적으로 혐오의 정동이 흘러넘쳤던 2010년대 후반부터이다. 한국에 입국하는 난민의 얼굴이 미디어에 등장하자마자, 한국 사회의 배타적 민족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이슬람포비아가 나타났고 경계심과 혼란스러움, 두려움이라는 부정적 정동이 가장 먼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이미지’에 대항하는 이미지 작업이 가장 먼저 촉구되었다. 난민의 이야기를 왜곡하는 수많은 시선을 비판하며, 난민의 사연과 그들이 고향에서 경험한 서사에 주목하고 현실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 하는 작업이 요청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진짜 난민, 가짜 난민을 가려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미디어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등장한다. 진짜, 난민다움, 난민스러움이라는 단어와 같이 정체성이 무엇다움에 국한되어 실현되는 것에 관한 문제 제기와 착하고 안전한 난민이라는 이미지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과 욕망 또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외에 이주와 난민, 분쟁과 개발의 관계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역학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자리에서 박탈당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질문하며, 상실과 파괴가 반복되는 지구의 역사를 행성적 시각에서 그려가는 시도들이 난민을 이야기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확장해나가는 중이다.
  당시 난민의 삶을 더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작업들을 리서치하던 중, 2012년에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난민 공화국(Refugee Republic)4)’이라는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인터렉티브 다큐멘터리이기도 한 이 웹 작업은 이라크 북쪽 국경의 시리아 난민 캠프인 도미즈 캠프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기록한다. 한국보다 한참 앞서 난민 문제와 혐오의 정동을 마주한 유럽에서 좀 더 있는 그대로의 난민을 재현하기 위해 시도했던 사례였다.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미즈 캠프의 여러 정보, 캠프의 평균 연령, 매일 태어나는 아기의 숫자, 캠프의 경제생활 등을 조사한 수치들이 흘러간다. 이 프로젝트의 메인은 수많은 선으로 이어진 도미즈 캠프의 지도인데, 캠프에서 수집한 영상과 사진, 소리와 드로잉, 텍스트로 캠프의 생활이 구현되어 있다. 길을 잃기 쉬운 방대한 캠프이지만 그 위로 색이 각기 다른 네 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선이 길을 만들어낸다. 이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은 네 개의 길을 따라가며, 캠프에 살아가는 시리아 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내는 다양한 소리를 듣게 된다.
  살아있기에 소리를 내고 있고, 소리를 내는 것이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마치 팀 잉골드가 일상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선’을 탐구하며 생명은 선을 따라 나아간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소리내기와 듣기의 조응을 촉진하는 선이다.5) 난민의 일상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또한 난민캠프에 다녀온 예술가들의 경험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 있었다. 웹사이트에 접속한 방문객이 보고 듣는 것은 먼저 캠프에 다녀간 이들의 기억이 남긴 흔적이며, 뒤따라 걸어갈 이들에게 남겨진 신호였다. 이 프로젝트는 난민 캠프라는 원본을 더 명확하고 더 투명하게 재현하겠다는 불가능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곳에 다녀옴으로써 무언가 이미 달라진 세계를 재현한다. 그것은 바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원형이 지닌 거대한 힘의 흐름 안에 잠재적인 샛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웹진 비유 · 5 - 전솔비
태풍과 함께 거세진 빗줄기 속에서 여성들이 글자를 배우는 소리가 들린다.
[가이드: 소리를 재생한 후 글을 읽어주세요. 가능하면 듣고 있던 소리가 끝난 후 다음 소리를 재생해주세요.]

그렇다면 생명을 기록하는 선이 지도를 이탈하고 경계를 이탈한다면 그 흔적은 어떤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낼까. 그렇게 남아있는 소리들로 지워진 소리들을 재생시키는 커뮤니티가 가능할까. 티모시 모턴은 고대 노르드어 어스(urth)로부터 유래한 ‘기묘한(weird)’이라는 단어 속에서 비틀린, 고리 속에 있는, 운명의 실타래가 감기는, 마술적인, 인과적인 것 등으로 연결되는 의미의 연쇄를 찾아낸다.6) 기억은 생겨나고 사라짐을 필연적으로 반복하며, 기준 없이 우연히 떠오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특정 장면들을 깊숙이 보관한다. 소리를 기록한다는 것은 기묘한 커뮤니티에 입장하는 일과 같다. 필연과 우연 사이의 어두운 통로는 깊은 동굴과도 닮아 있고, 시각이 차단된 동굴의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 할 것은 오로지 소리뿐이다. 캠프의 소리들이 모이고, 캠프를 향한 소리들이 모이는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었던 그곳의 풍경을 상상하면, 물에 잠긴 채로 가라앉아 낡아버린 고장 난 기계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것은 자꾸만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오래된 청취 매체의 오작동을 인간의 기억이 지닌 불완전성과 나란히 놓으며, 연결되는 감각의 우연성을 사유하는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나는 연구자이자 예술가로서 허가받은 방문객으로 캠프 안에 들어가고 다시 나올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안에 남겨져 있다. 그곳에서 내가 체감한 건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보다 오히려 우리는 결코 연결될 수 없다는 감각에 가까웠지만, 연결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나는 연결을 기다리는 감각을 희미하게 감지했다. 내가 캠프에서 작동시키던 라디오는 대체로 잡음만을 들려주었고 그것을 들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무용한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경험은 나에게 연결의 불가능성을 의심하게 하는 어떤 감각을 남겼다. 아마 이 서로 다른 감각들은 계속해서 내 안에서 순환하고 모양을 바꿀 것이다. 다시 듣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것까지 듣게 되는 사건, 기억하지 못한 것이 어느새 그리움이 되어버린 사건, 떠올림의 연속 속에서 결국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는 사건 속에서 기록된 소리는 삭제되거나 지울 수 없는 수많은 소음의 실재 또한 그 자체로 증거한다.
  내가 방글라데시를 떠난 후 며칠 더 그곳에 머물렀던 친구의 녹음 파일 속에는 비가 많이 오는 캠프 안에서 글자를 배우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어있었다. 태풍의 한복판 거세진 빗줄기 속에서 문해교육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다. 대나무로 만든 지붕 위로 물방울이 부딪히는 소리와 지붕을 따라 아래로 흘러 땅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이 소리를 다시 들을 때마다 캠프에 내리는 거센 빗소리가 마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시 듣는 행위는 희미한 주파수를 잡는 행위 같기도 한 것일까. 우리는 늘 들리지 않는 것과 들리는 것을 함께 듣는다. 주파수에 막힌 소리와 주파수를 넘어간 소리가 서로의 경계를 넘는 각자의 자리에서.

웹진 비유 · 6 - 전솔비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지지직대는 라디오 잡음이 짧게 들렸다가 사라진다. 주위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전솔비

정체성과 수행성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그간 해온 협업 기반의 활동들을 예술, 노동, 현장이라는 주제로 엮으며 한국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보는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바로가기

빗소리에는 새소리가 섞여 있고, 새소리에는 라디오 소리가 섞여 있다. 라디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리고, 라디오의 잡음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빗소리와 유사해진다. 소리에는 늘 둘 이상의 장면이 중첩되어 있다. 이 글에 사용된 소리들은 김양우의 라디오, 오로민경의 녹음기의 도움을 받아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서 기록되었다. 

2025/12/17
76호

1
오가와 요코, 『은밀한 결정』,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2021.
2
이 글을 쓰는 동안, 9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이 새만금 신공항 기본계획을 취소한다는 판결이 났다. 새의 가면을 쓰고 무더운 거리를 행진하던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의 참여자들이 판결을 듣고 기뻐하며 울고 있는 장면을 SNS를 통해 보고 있다. 며칠간 새의 모습을 하고 새를 지켜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여름, 연루』(권누리 외, 빠마, 2025) 시집이 도착해서 읽고 있다. 시와 시인들 사이의 편지에는 새의 이름을 목격하고 그들이 떠난 숲을 응시하고 돌아올 집을 상상하는 말들이 가득하다. 새를 기억하는 행위는 어째서 세계를 돌보는 행위와 이렇게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닮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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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팀 잉골드, 『조응』, 김현우 옮김, 가망서사, 2024.
6
티모시 모턴, 『어두운 생태학』,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4,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