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큐레이션
편집자의 세 번 읽기
웹진 《비유》 같이 읽기
“외투는 새것일 때부터 아끼고,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하라.” 푸쉬킨의 소설 「대위의 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정신없이 바쁜데 작가의 초고까지 읽어야 할 때면 이 문장부터 떠올린다. 종일 모니터를 보던 눈은 마치 좀비처럼 충혈되어 있고, 어깨는 낡은 옷걸이처럼 구부정하게 늘어져 있으며, 손목은 퉁퉁 분 라면 면발처럼 시원치 않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초고를 마주한 편집자들이라면 알 것이다. 옷은 새것일 때부터 아껴도 결국 낡고 말지만, 원고는 초고일 때부터 정성껏 읽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초고에서 무엇을 알아채느냐가 이후의 모든 작업을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첫 문장을 읽는 태도가 이미 마지막 문장의 운명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편집자는 세 번 읽는 사람이다.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을 적어도 세 번은 읽는다. 물론, 세 번 읽고도 부족하면 네 번, 다섯 번, 열 번을 읽기도 한다. 첫번째는 작가에게 묻기 위해 읽는다. 두번째는 이름을 짓기 위해 읽는다. 세번째는 미지의 독자에게 건네기 위해 읽는다. 세 번의 읽기는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것 같지만, 실은 모두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이 원고가 과연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최근 몇 년간, 웹소설, 웹툰, 드라마 할 것 없이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이야기 구조 중 하나는 ‘회귀물’일 것이다. 실패한 삶, 놓쳐버린 관계, 잘못 내린 선택을 되돌릴 기회를 얻는 인물들에서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확실히 두번째는 첫번째보다 낫다. 편집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회귀자다. 차이가 있다면 편집자에게 허락된 회차는 무한하지 않다는 것. 그마저도 매번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같은 원고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다시 얻은 세 번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원고의 운명이 갈린다.
나는 웹진 《비유》에 실린 여러 소설 중에서 세 편을 골라 세 번씩 읽었다. 최예솔의 「후후」(69호), 박현옥의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79호), 김남숙의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79호). 세 편을 고른 이유는 하나다. 세 소설 모두 이름, 혹은 한마디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첫번째 읽기: 질문하며 읽기
편집자가 원고를 처음 읽으며 하는 일은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답이 꼭 필요한 작업은 아니다. 작가에게 되묻고 싶은 지점을 찾아 밑줄 긋고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장면은 왜 여기에 놓였을까, 어디를 더 들여다봐야 할지 표시하다 보면 낯선 원고는 어느새 나의 책이 된다.
「후후」는 이사하는 날의 이야기다. 주인공 희승 대신 희승의 가장 친한 친구 정서의 전 남자친구 한규가 짐을 옮기고 있다. 희승은 한규가 가져온 화분을 받아들며 속으로 말을 삼킨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남자를 보냈을까. 저 뻔뻔한 얼굴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희승이 반지하로 이사 온 하루를,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이는 손과 미워할 자격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을 같은 자리에 놓아둘 뿐이다. 나는 희승의 이 정확한 다정함과 정확히 화가 난 마음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정확히는 모른 채 창을 닫는다.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지만, 사실 좋은 원고는 대체로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인물에게 마음이 갈 때, 그 원고는 편집자에게 절반쯤 선택된 셈이니까.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의 화자는 회사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을지로에서 건재상을 하다가 지인의 연대보증을 서준 일로 망했고, 망한 뒤에도 소멸시효가 지난 거래처들에 뒤늦게 전화를 걸어 저주를 퍼붓곤 했다. 화자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제때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그 다짐을 그대로 옮겨 인턴 권영오에게 조언한다. 몇 달 뒤, 회식 자리에서 권영오는 짝사랑하던 동료의 불륜을 폭로하며 폭발한다. 인사팀에서는 권영오가 여직원들에게 연달아 고백하고 다니며 말썽을 부렸었다며, 그가 매번 이렇게 변명한다고 전한다. 좋은 걸 좋은 때에 좋다고 말해야 한다고, 후회하기 전에 지금 말한다고. 화자가 아버지의 반면교사로 건넨 말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정확한 말을 조금 늦게 배운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의 화자는 오십대 청소 노동자다. 화자는 함께 청소 일을 하는 필리핀 출신의 어린 동료 카르멜라를 미워하면서도 걱정한다. 쉬는 날도 없이 일감을 다 받아버리는 카르멜라에게 화를 내고, 돈 귀신이라고 뭐라 한다. 하루는 일이 끝난 뒤, 카르멜라가 혼자 먹기엔 과할 만큼 많은 양의 고기를 사들고 화자를 뒤따라온다. 그러고는 헤어지기 직전 아프지 말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그 말에 화자는 말문이 막히고, 카르멜라가 내미는 고기도 손을 내저으며 물린다. 그날 밤 화자는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가슴 어딘가에서 고름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소설은 이 모순을 설명하지 않는다. 왜 화자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이해는 종종 설명보다 먼저 도착한다.
두번째 읽기: 이름 지으며 읽기
어떤 제목이 이 소설을 가장 정확하고도 낯설게 보이게 할까. 두번째 읽기에서 편집자는 인물 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원고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첫번째 읽기가 원고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두번째 읽기는 원고 밖에서 이루어진다.
「후후」의 마지막 장면에는 ‘금전수’라는 이름표가 붙은 화분이 나온다. 한규가 그 화분을 놓고 가면서 남긴 말은, 이 나무를 키우면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희승은 코웃음을 치다가 결국 웃고 만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소설의 제목이 된다. 화분의 이름과 소설의 제목이 나란히 놓인 이 장면에서, 제목은 희승이 자신의 가난과 고단함을 견디는 방식, 그러니까 정색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태도를 보여준다. 제목을 읽고 소설을 읽으면 그저 작고 가벼운 의성어 제목 같지만, 다 읽고 나서 뒤돌아보면 이 웃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내었는지 알게 된다.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아예 문장 하나로 소설을 요약해버린다. 아버지의 뒤늦은 분노, 화자의 뒤늦은 후회, 그리고 마지막 장면까지.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다소 관념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때 그 돈을 받을 걸 그랬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좋은 제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는 세 편 중 가장 이상한 제목처럼 보인다. 소설 내내 ‘카르멜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인물이 이야기 끝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이름이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 축약하면, 카르멜라 R.G 몰리나”라고 말한다. ‘카르멜라’라는 이름 뒤에 이렇게 긴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장면이다. ‘카르멜라’의 삶 뒤에 그만큼 긴 삶이 있었다는 것도.
세번째 읽기: 건네며 읽기
세번째 읽는 편집자의 머릿속은 온통 카피로 가득하다. 서점 매대에 놓인 책을 독자가 집어들게 하려면 어떤 문장이 필요할까. 앞선 두 번의 읽기가 편집자와 원고 사이의 일이었다면, 세번째 읽기는 처음으로 원고 바깥의 존재, 아직 이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독자를 상상하는 일이다.
「후후」는 “미워할 자격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하여”라는 문장으로 소개하고 싶다. 이 한 줄은 희승의 감정을 정확히 요약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읽고 싶게 하는 문턱이 되어줄 것이다.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에는 “우리는 왜 항상 지나고 나서야 할 말을 찾는가”라는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소설이 반복하는 질문을 그대로 독자에게도 건네고 싶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에는 이 한 줄이 적당할 것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이름 전체를 아는 일이다.”
세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는 결국 이 소설들이 품고 있는 하나의 질문을 다른 목소리들로 옮겨 쓴 셈이다. 자격 없이 미워하는 마음, 늦게 도착하는 말, 이름 전체를 아는 일.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늦고, 부족하고, 그럼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고, 표지 문구는 그 사실을 한 줄로 압축하는 작업이다. 물론, 그 한 줄이 결코 원본보다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정답은 없다. 책을 소개하는 문장을 쓰는 일은 편집자의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문장이 너무 정확하면 소설을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주어 독자의 발길을 돌려세운다. 그렇다고 문장이 너무 모호하면 애초에 눈길조차 붙들 수 없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정확함과 모호함의 비율을 가늠하는 감각은 오직 앞선 두 번의 읽기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
편집자의 세 번 읽기는 결국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묻고, 이름 붙이고, 건네는 일. 순서대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얽혀 있다. 질문 없이는 정확한 이름을 지을 수 없고, 이름 없이는 아무것도 건넬 수 없다.
회귀자들에게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무기가 있다. 무엇이 실패였는지 이미 알고 돌아가기 때문에, 두번째는 첫번째보다 낫고, 세번째는 두번째보다 낫다. 편집자에게도 비슷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읽으면서 남겨둔 흔적들일 것이다. 교정지 여백에 적어두었으나 작가에게 건네지 않은 질문들, 확신이 없어 감추어둔 제목들, 쓰고 또 쓰다 한쪽으로 치워둔 표지 문구들. 그래서 세 번의 읽기는 반복이 아니라 누적이다. 매번 같은 원고로 돌아가지만, 그때의 나는 지난 회차의 나보다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 있다.
세 번의 읽기가 끝나면, 나는 대개 부엌으로 가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내린다. 외투는 이미 낡았고, 죽 끓여 먹을 만한 명예 같은 것도 없지만, 원고 하나만큼은 정직하게 읽었다. 그거면 됐다. 다음 원고가 벌써 메일함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뭐 상관없다. 월급 받는 자 중 가장 열심인 회귀자가 되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읽어내면 되니까.
관련 작품 바로가기
최예솔, 「후후」 click
박현옥,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 click
김남숙,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 click
편집자는 세 번 읽는 사람이다.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을 적어도 세 번은 읽는다. 물론, 세 번 읽고도 부족하면 네 번, 다섯 번, 열 번을 읽기도 한다. 첫번째는 작가에게 묻기 위해 읽는다. 두번째는 이름을 짓기 위해 읽는다. 세번째는 미지의 독자에게 건네기 위해 읽는다. 세 번의 읽기는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것 같지만, 실은 모두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이 원고가 과연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최근 몇 년간, 웹소설, 웹툰, 드라마 할 것 없이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이야기 구조 중 하나는 ‘회귀물’일 것이다. 실패한 삶, 놓쳐버린 관계, 잘못 내린 선택을 되돌릴 기회를 얻는 인물들에서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확실히 두번째는 첫번째보다 낫다. 편집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회귀자다. 차이가 있다면 편집자에게 허락된 회차는 무한하지 않다는 것. 그마저도 매번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같은 원고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다시 얻은 세 번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원고의 운명이 갈린다.
나는 웹진 《비유》에 실린 여러 소설 중에서 세 편을 골라 세 번씩 읽었다. 최예솔의 「후후」(69호), 박현옥의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79호), 김남숙의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79호). 세 편을 고른 이유는 하나다. 세 소설 모두 이름, 혹은 한마디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첫번째 읽기: 질문하며 읽기
편집자가 원고를 처음 읽으며 하는 일은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답이 꼭 필요한 작업은 아니다. 작가에게 되묻고 싶은 지점을 찾아 밑줄 긋고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장면은 왜 여기에 놓였을까, 어디를 더 들여다봐야 할지 표시하다 보면 낯선 원고는 어느새 나의 책이 된다.
「후후」는 이사하는 날의 이야기다. 주인공 희승 대신 희승의 가장 친한 친구 정서의 전 남자친구 한규가 짐을 옮기고 있다. 희승은 한규가 가져온 화분을 받아들며 속으로 말을 삼킨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남자를 보냈을까. 저 뻔뻔한 얼굴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희승이 반지하로 이사 온 하루를,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이는 손과 미워할 자격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을 같은 자리에 놓아둘 뿐이다. 나는 희승의 이 정확한 다정함과 정확히 화가 난 마음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정확히는 모른 채 창을 닫는다.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지만, 사실 좋은 원고는 대체로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인물에게 마음이 갈 때, 그 원고는 편집자에게 절반쯤 선택된 셈이니까.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의 화자는 회사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을지로에서 건재상을 하다가 지인의 연대보증을 서준 일로 망했고, 망한 뒤에도 소멸시효가 지난 거래처들에 뒤늦게 전화를 걸어 저주를 퍼붓곤 했다. 화자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제때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그 다짐을 그대로 옮겨 인턴 권영오에게 조언한다. 몇 달 뒤, 회식 자리에서 권영오는 짝사랑하던 동료의 불륜을 폭로하며 폭발한다. 인사팀에서는 권영오가 여직원들에게 연달아 고백하고 다니며 말썽을 부렸었다며, 그가 매번 이렇게 변명한다고 전한다. 좋은 걸 좋은 때에 좋다고 말해야 한다고, 후회하기 전에 지금 말한다고. 화자가 아버지의 반면교사로 건넨 말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정확한 말을 조금 늦게 배운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의 화자는 오십대 청소 노동자다. 화자는 함께 청소 일을 하는 필리핀 출신의 어린 동료 카르멜라를 미워하면서도 걱정한다. 쉬는 날도 없이 일감을 다 받아버리는 카르멜라에게 화를 내고, 돈 귀신이라고 뭐라 한다. 하루는 일이 끝난 뒤, 카르멜라가 혼자 먹기엔 과할 만큼 많은 양의 고기를 사들고 화자를 뒤따라온다. 그러고는 헤어지기 직전 아프지 말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그 말에 화자는 말문이 막히고, 카르멜라가 내미는 고기도 손을 내저으며 물린다. 그날 밤 화자는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가슴 어딘가에서 고름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소설은 이 모순을 설명하지 않는다. 왜 화자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이해는 종종 설명보다 먼저 도착한다.
두번째 읽기: 이름 지으며 읽기
어떤 제목이 이 소설을 가장 정확하고도 낯설게 보이게 할까. 두번째 읽기에서 편집자는 인물 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원고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첫번째 읽기가 원고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두번째 읽기는 원고 밖에서 이루어진다.
「후후」의 마지막 장면에는 ‘금전수’라는 이름표가 붙은 화분이 나온다. 한규가 그 화분을 놓고 가면서 남긴 말은, 이 나무를 키우면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희승은 코웃음을 치다가 결국 웃고 만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소설의 제목이 된다. 화분의 이름과 소설의 제목이 나란히 놓인 이 장면에서, 제목은 희승이 자신의 가난과 고단함을 견디는 방식, 그러니까 정색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태도를 보여준다. 제목을 읽고 소설을 읽으면 그저 작고 가벼운 의성어 제목 같지만, 다 읽고 나서 뒤돌아보면 이 웃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내었는지 알게 된다.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아예 문장 하나로 소설을 요약해버린다. 아버지의 뒤늦은 분노, 화자의 뒤늦은 후회, 그리고 마지막 장면까지.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다소 관념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때 그 돈을 받을 걸 그랬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좋은 제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는 세 편 중 가장 이상한 제목처럼 보인다. 소설 내내 ‘카르멜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인물이 이야기 끝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이름이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 축약하면, 카르멜라 R.G 몰리나”라고 말한다. ‘카르멜라’라는 이름 뒤에 이렇게 긴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장면이다. ‘카르멜라’의 삶 뒤에 그만큼 긴 삶이 있었다는 것도.
세번째 읽기: 건네며 읽기
세번째 읽는 편집자의 머릿속은 온통 카피로 가득하다. 서점 매대에 놓인 책을 독자가 집어들게 하려면 어떤 문장이 필요할까. 앞선 두 번의 읽기가 편집자와 원고 사이의 일이었다면, 세번째 읽기는 처음으로 원고 바깥의 존재, 아직 이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독자를 상상하는 일이다.
「후후」는 “미워할 자격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하여”라는 문장으로 소개하고 싶다. 이 한 줄은 희승의 감정을 정확히 요약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읽고 싶게 하는 문턱이 되어줄 것이다.
「말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한다」에는 “우리는 왜 항상 지나고 나서야 할 말을 찾는가”라는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소설이 반복하는 질문을 그대로 독자에게도 건네고 싶다.
「카르멜라 로사린 가르시아 몰리나」에는 이 한 줄이 적당할 것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이름 전체를 아는 일이다.”
세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는 결국 이 소설들이 품고 있는 하나의 질문을 다른 목소리들로 옮겨 쓴 셈이다. 자격 없이 미워하는 마음, 늦게 도착하는 말, 이름 전체를 아는 일.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늦고, 부족하고, 그럼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고, 표지 문구는 그 사실을 한 줄로 압축하는 작업이다. 물론, 그 한 줄이 결코 원본보다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정답은 없다. 책을 소개하는 문장을 쓰는 일은 편집자의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문장이 너무 정확하면 소설을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주어 독자의 발길을 돌려세운다. 그렇다고 문장이 너무 모호하면 애초에 눈길조차 붙들 수 없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정확함과 모호함의 비율을 가늠하는 감각은 오직 앞선 두 번의 읽기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회귀자들에게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무기가 있다. 무엇이 실패였는지 이미 알고 돌아가기 때문에, 두번째는 첫번째보다 낫고, 세번째는 두번째보다 낫다. 편집자에게도 비슷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읽으면서 남겨둔 흔적들일 것이다. 교정지 여백에 적어두었으나 작가에게 건네지 않은 질문들, 확신이 없어 감추어둔 제목들, 쓰고 또 쓰다 한쪽으로 치워둔 표지 문구들. 그래서 세 번의 읽기는 반복이 아니라 누적이다. 매번 같은 원고로 돌아가지만, 그때의 나는 지난 회차의 나보다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 있다.
세 번의 읽기가 끝나면, 나는 대개 부엌으로 가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내린다. 외투는 이미 낡았고, 죽 끓여 먹을 만한 명예 같은 것도 없지만, 원고 하나만큼은 정직하게 읽었다. 그거면 됐다. 다음 원고가 벌써 메일함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뭐 상관없다. 월급 받는 자 중 가장 열심인 회귀자가 되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읽어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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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섭
2013년 편집자로 출판계에서 일을 시작한 이래로, 한겨레출판과 읻다를 거쳐, 현재 한겨레출판에서 부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라는 나름의 슬로건을 마음에 품은 채, 기피 없고 깊이 없는 편집자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인스타그램 @_chimo85)
202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