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다
라는 문구의 광고가 왜 새벽의 블로그 배너에 등장했는지 정은 알 수 없었다. 정은 마시던 탄산수를 내려놓고 마우스를 고쳐잡았다. 광고에는 꼬리를 먹는 뱀의 그림이 있었다. 기괴했지만 정은 그림에 마음이 갔다. 어렸을 적 잃어버린 반지 같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정은 잠들기 전까지도 꼬리 먹는 뱀을 생각했다.
꼬리 먹는 뱀이 다시 떠오른 건 얼굴만 알던 친척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정은 친척의 부고를 들여다봤다. 문장 너머 숨겨진 정보가, 혹은 시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처럼 정은 부고를 뜯어봤다. 병원과 일시가 적혀 있었고 부고를 보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친척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친척의 냄새나는 손이 기억났다.
발인이 있는 날이었다. 정은 평소처럼 서울 외곽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초여름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챙겨온 소보로와 시원한 토마토주스, 수박과 참외 같은 여름 과일을 먹고 한낮의 우산 아래 누워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는 편안한 잠이었다. 새벽의 잠과는 달리 뒤척임도 없었다. 공원에서 뒹굴거리는 내내 정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잠에서 깬 정은 돗자리를 접기 전에 눈을 감고 합장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왕래 없던 친척의 영면을 빌었다.
“장례식에 오지 않은 이유라도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어머니가 핸드폰 건너편에서 물었지만 정은 별일 없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다고. 주식도 괜찮고, 만나는 사람은 새로 생기지 않았지만, 하던 일도 잘하고 있다고 했다. 비록 그림 의뢰가 없는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혼자라도 작업하고 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 다음주에라도 집에 한번 들러봐. 아빠가 말은 못 해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어.”
정은 알겠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일정은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었다. 현대인은 모두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는 친구의 오래전 문장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정은 아빠가 어떤 병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어떤 병일까. 신경증? 우울증?
정은 집에 가는 길에 민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신병 문장을 SNS에 썼던 친구가 민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통화음이 이어지더니 민경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건너편의 민경은 거친 숨을 내쉬었고 정은 외설스러운 생각이 들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민경은 운동중인데? 하고 답했다. 민경이 사진을 보냈다. 덤벨 사이에서 레깅스를 입고 있는 민경이 정말 거울 안에 있었다. 민경은 일단 전화를 끊고 메신저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숨이 차서 전화하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정은 전화를 끊고 지금까지의 일을 텍스트로 쳐서 보냈다. 혹시 옛날에 현대인의 정신병 어쩌고 한 문장이 기억나는지도 물어보면서. 민경이 답장을 보냈다.
정은 망설이다가 답장했다.
정은 뉴스에 소개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민경의 커리어와 그녀의 현명한 경제관념을 생각했다. 자신과는 다른, 완벽한 인간. 정은 솔직히 민경을 아예 다른 속성의 사람이라 여겼다. 민경은 매일 아침에 운동을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인에게 좋은 주식을 선뜻 추천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경은 그후로 답장이 없었고 삼 일 뒤에나 뜬금없이 답장했다.
그리고 민경이 보내온 손으로 정갈하게 쓴 웹페이지 주소가 하나 있었다.
*
정은 민경의 블로그 주소를 곧바로 입력하지 않았다. 민경이 건네준 주소에는 ‘3ll4’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l’ 모양 글자가 대문자 아이인지 소문자 엘인지에 대한 가능성은 무려 네 가지나 됐다. 글씨체는 예뻤지만, 똑 부러지는 민경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고민하거나 헷갈리라는 의도로 저렇게 했다면 민경과 어울릴지도 몰랐다.
정은 그사이 일러스트 의뢰 세 개와 로고 디자인 두 개를 해치웠다. 오랜만의 의뢰라서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충만했다. 일을 마치고 완성본의 백업까지 완료한 후 정은 다시 공원에 갔다. 오후의 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정은 검은 우산 아래에서 깊은 잠을 잤다. 그러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검토한 결과물들은 쓰레기 같았다. 정은 머리를 쥐어짰다. 마감 열 시간 전부터 어색한 구도와 톤을 수정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원안을 A안으로 보냈다. 클라이언트에게서 답장이 왔다. 클라이언트는 설명이 많은 B안을 싫어했다.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싫어했다. 다행히 맨 처음 작성한 A안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클라이언트는 호와 불호가 명확하다고 하면서 직설적인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단 충동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정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정은 민경의 블로그를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정은 집 근처 천변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보다가 생각했다. 만약 민경의 블로그를 들어간다면 민경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된 후가 아닐까…… 하고. 흔한 전개에 가까울 것 같았다.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흔적을 더듬거리다 마침내 블로그에 들어가는 장면도.
정은 집에 돌아와 자신의 블로그에 그렇게 썼다. 민경이 죽는 일은 없길 바라면서. 좋지 않은 말을 써내려가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오랜 전언도 믿어보기로 하면서.
그때 정은 다시 광고가 생각났다.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뱀도 자신을 먹지는 못한다는 뜻인가.
쓰인 말들이 정말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후 밤나무 가득한 뒷산에 오르거나 우산 아래에 잠들면서도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다는 문장이 정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 정은 손가락을 먹어보고 싶었다. 처음엔 검지였다. 정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검지를 입에 갖다댔다. 시큼하고, 짰다. 하지만 숲에 있는 것 같은 안도감이 차올랐다. 사람 가득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손가락 먹는 경험이 생각났다. 실제로 손을 입에 갖다대면 평온함이 찾아왔다. 정은 손가락을 먹을 때만이라도 사람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그래. 신경 써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내가 편하면 그만인데. 그러다 어느 날은 검지와 중지를 함께 물었고 어느 날은 중지와 약지를 함께 물었다. 하루는 피자 조각을 먹듯 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지지, 지지.”
지하철 좌석 맞은편에 있는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순간 정과 여자아이의 눈이 마주쳤고 때마침 열차는 한강 철교를 달리는 중이었다. 낯선 시선들이 정의 얼굴을 향해 똬리를 틀었다. 정은 무안함에 입안의 손을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시선들은 사라졌지만 맞은편의 여자아이는 호기심에 정을 빤히 쳐다봤다. 강물처럼 반짝이는 어린 눈을 마주하니 정은 궁금해졌다. 저 꼬마 아이는 앞으로 어떤 정신병을 가지게 될지. 아니면 어떤 순간을 맞이하여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될지.
“어, 민경아.”
역에 내리면서 정은 민경에게 전화 걸어보는 연습을 해봤다. 정이 낮잠 자는 공원은 서울 반 바퀴를 돌아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가로질러 갔다면 더 빨랐을 테지만 정은 서울을 도는 과정 자체가 좋았다. 도는 내내 뱀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자신을 조금씩은 먹어치우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민경과 만나지 않은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약속을 잡아볼까 하며 정은 민경과의 메시지를 복기해봤고 정은 마지막으로 보내준 민경의 블로그 주소가 다시 신경 쓰였다. 정은 집에 걸어가는 동안 민경의 화사한 프로필 사진을 보고 벚꽃 담긴 배경 사진을 보다가 3ll4가 포함된 민경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해봤다. 그러나 없는 페이지라고 나왔다. 소문자 엘과 대문자 아이를 조합해서 다른 두 개의 주소를 더 입력해봤다. 여전히 없는 페이지라고 나왔다.
정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하나였고 정은 그것을 입력할지 고민했다. 정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망설였으나 결국 민경의 블로그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쓴 뒤 그것을 민경에게 보냈다.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정의 블로그 주소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민경은 정의 메시지를 한동안 읽지 않았다. 정은 그림을 그리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민경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했지만 며칠 뒤엔 민경에게 주소를 보냈던 일조차 까먹었다. 정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길을 가다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던 후부터. 병원에서 다급하게 정을 찾았다. 정은 전화를 받고 자신의 부고를 받은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정은 전화를 받을 당시 길을 걷고 있었다. 정은 낯선 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가만히 서 있었다. 땀이 흘렀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병원의 위치를 물었고 금방 찾아갈 수 있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던 순간이 도래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끊은 자신이 대견했다. 그런데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정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았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는 사람의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놓을 순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서는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정의 어릴 적 장래 희망은 판사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모래시계 드라마를 태교로 즐겨봤던 것과 가문의 자랑이었던 판사 고모의 존재가 정이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다만 모래시계에는 검사가 등장했고 명망 있던 고모가 불명예 퇴직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정은 택시에서 검지를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오랜만에 본 엄마는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엄마의 정신은 또렷했다. 잠깐 쓰러졌다는 사실만 빼면 충분히 건강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아빠도 보겠거니 했지만 엄마는 아빠가 오기 전이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정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엄마는 병원의 푸른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뇌에 공급되는 혈관이 잠깐 막혀서 쓰러진 거래. 근데 후처리가 좋았대. 행인이 해준 대처가 좋았나봐. 병원에서 천만다행이라고 하더라고. 난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니.”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정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행이네.”
간병인 침대에 앉아서는 엄마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작은 빌라에 살던 시절의 회백색 벽지 이야기나 인형과 로봇이 혼재된 기묘한 장난감 바구니에 대해서도. 하루는 인형의 팔을 빼고 로봇에 붙였다고 엄마에게 잔뜩 혼난 적이 있었다. 인형의 가느다란 팔을 로봇에 억지로 넣은 모양새였는데 그날 저녁 정은 아빠에게 맞았다. 엄마의 말을 듣고 흉측한 장난감 외형을 보더니 정에게 다가와 귀를 올려쳤다. 정은 엄마에게 맞지 않고 아빠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지만 제일 혼란스러운 점은 따로 있었다. 다음날 유리컵을 떨어트려 산산조각 냈을 때 엄마가 부드럽게 안아준 사실이었다. 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렸을 적 감정들은 충분히 희석되었으나 한낮의 우산 아래에서는 옛날 일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땐 그럴 때였어. 널 키운다는 게 여러 가지로 부담도 됐고.”
엄마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엄마는 정의 지금 나이보다도 어렸고 그땐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정은 ‘왜 그렇게 부담이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정은 병원 매점에서 사 온 사과를 깎기 시작했고 엄마가 비타민 음료 뚜껑을 따서 정에게 건넸다. 둘은 한 이불을 덮고 잠깐 잠들었고 나란히 누워 TV도 봤다. 정은 응급실에 갔던 자신을 위해 일주일 넘게 엄마가 옆에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지만 그때를 굳이 상기시키진 않았다. 정이 엄마의 스트레칭을 도와주었고 회진 시간에는 엄마의 궁금한 점을 정이 조리 있게 물어봤다. 의사는 정과 엄마를 번갈아 보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현명한 자식을 두셨다고 하며 의사가 활짝 웃었다. 회진이 끝나고 정규 뉴스를 보다가 스포츠 소식이 시작되자 정은 이제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엄마는, 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밥 잘 챙겨 먹고.”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아빠를 보고 가라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말도, 다음에 또 오라는 말도. 이어지는 잠깐의 포옹. 정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밖을 나왔고 길었던 하루라는 느낌에 정은 택시를 잡았다. 밥 잘 챙겨 먹고. 집에 가는 길에는 엄마가 해준 마지막 말이 계속 서성거렸다. 밥 잘 챙겨 먹고. 엄마에게도 그 말을 할걸, 하는 후회가 남아 정은 집 앞에서 ‘엄마도 잘 챙겨 드세요’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 분도 안 되어서 답장이 왔다. ‘고마워.’ 정은 핸드폰을 보고 화면을 껐다. 정은 이불을 턱끝까지 덮은 채 그날 있었던 일을 조금 오래 생각해봤다.
*
엄마의 당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은 그후로 끼니를 제때 챙겨 먹게 됐다. 배가 불러도 배가 고파도 정시에 챙겨 먹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아침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으며 깨달음이 들었다. 사실 이런 강박도 다 엄마에게서 왔는지도 모른다고. 정은 숟가락을 놓고 시리얼을 노려봤지만 시리얼엔 죄가 없었다. 정은 초코 우유가 된 국물까지 해치우고 그날 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심 스트레칭이 끝나고 보니 새 클라이언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은 정해진 시간에만 업무 메시지를 읽고 싶었지만 이번 클라이언트도 여간 깐깐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정은 공손하게 답장을 보냈다.
정은 핸드폰을 던져놓고 공원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금전수나 호접란, 해피트리 같은 식물에 물을 주고 잎을 닦았다. 계획대로 배양토도 정리하고 영양제도 넣었다. 식물을 키우는 게 감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로 화분을 키우지 않았는데도 선물로 받은 화분들은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정은 화분을 만지작거렸다.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병문안을 와줬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음해봤다. 유민경, 조유림, 서해린.
오후 산책이 끝나니 아빠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정은 태블릿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엄마에게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하는 문자를 보냈다. 정이 알기로 엄마는 퇴원한 지 오래였고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엄마에게 금방 답장이 왔다. ‘별일 없는데?’ 정은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던지고 아빠에게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왜 유별나게 그러는 거지, 하며 정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러다 정은 침대에 널브러진 핸드폰을 가져와 조만간 가겠다고 답장한 뒤 다시 핸드폰을 침대에 던졌다. 작업을 시작했다.
민경에게 연락이 온 건 엄마가 쓰러지고 한 달이 넘게 지난 후였다. “미안, 러닝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어. 전화받을 수 있어?”
때마침 정은 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정은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액정에 뜬 민경의 이름을 보고 나서야 정은 민경에게 블로그 주소를 준 사실이 떠올랐다. 민경은 숨을 헐떡이면서 다른 게 아니라 고민이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그런데 턱끝까지 숨이 찬지 근데 메시지로도 괜찮아? 하고 다시 물었다. 정은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삼십 분 뒤 텍스트로 온 민경의 메시지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었다. 요는 스타트업에서 C 레벨 스카우트를 받았는데 가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정이 알기론 그 정도의 대우는 굉장히 좋아서 고민의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민경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스톡옵션으로 설득하는 거 같은데 진실성도 보이고, 그쪽에서는 자신을 무조건 좋게 보는 거 같아서 부담도 크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내 시간은 완전히 없어지겠지? 그런데 도전하고 싶긴 해. 나이도 나이니까.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면 쓸쓸해지는 거 같다면서 민경은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정은 고민하다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봤지만 막상 보낸 뒤엔 후회가 들었다. 저런 대답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정은 자세를 고쳐 누웠다. 햇빛이 새끼발가락에 내려앉았다. 정은 온기로 미끈해지는 발을 느끼며 ‘내가 널 얼마나 잘 아는데’ 하고 시작한 민경의 옛날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이를테면 연애와 학업, 자존감과 불안에 대해서. 민경은 잠시 스쳐 지나간 문학동아리에서도 인상 깊은 사람이었고 SNS 같은 공개된 곳에도 자신의 마음과 문장을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정은 민경의 문장을 형편없다고 생각했고 우습게도 그런 마음을 직접 써서 지적할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민경이 자신이 쓴 옛글을 다시 보았다고 했는데 정은 진지하게 아니라고 답장했다. 누군가의 글을 형편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라고 하면서. 그러자 민경이 답했다.
정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남아 있는 화가 없는 건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정은 엄마가 쓰러진 이야기를 할까 잠깐 생각했고 실제로 길지 않은 문장을 써봤지만 보내지는 않았다. 민경의 블로그 주소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마침 민경에게서도 메시지는 더 오지 않았다. 정은 핸드폰을 던져두고 햇빛으로 통통해지는 풀을 바라보다 방방 뛰어다니는 진돗개를 구경하다 미끄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꿈에서는 오랜만에 아빠가 나왔다. 아빠와 함께 공원을 돌아다니는 장면. 어떤 기억은 이미지로 남고 분위기로 남지만 아빠와 관련된 기억은 어쩐지 영화처럼 남았다. 매번 감상이 달라지는 영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라기보다는, 몇 번이나 돌려 봐서 대사도 다 알 것 같은 투박하고 재미없는 옛날 영화.
정은 공원 돗자리에서 눈을 번쩍, 하고 떴다.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는데 근처에 있던 강아지 주인이 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에게 말을 건 젊은 여자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정은 여자에게 사라진 강아지를 찾아주겠다고 한 뒤 한동안 유리야, 유리야 어딨니, 하고 하얀 진돗개를 함께 불러줬다. 그렇지만 유리는 나오지 않았고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정은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며 여자에게 인사해야 했다. 공원을 나오는 중에도 여자의 목소리는 커졌고 밤이 다가오는 중에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외침은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정은 걸어가는 길에서도 가방을 꽉 껴안았다. 지하철에 들어가 열차 칸에 앉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정은 집에 가는 내내 엄지를 물고 여러 생각을 해봤다. 이를테면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강아지의 뒷모습 같은 것에 대해. 길어지고 넓어지는 나뭇잎의 그림자들에 대해. 또한 공원을 배회하는 유리의 혼란스럽고 요동치는 시선 같은 것에 대해서도.
오랜만에 슬픔이 쏟아져 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
정이 다음으로 공원을 간 건 열흘 동안 이어진 장마가 끝난 후였다. 내내 참았던 것처럼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서울 남쪽이 침수되고 중부 지방의 몇몇 산지에서는 산사태가 났다. 정은 실종자까지 생겼다는 뉴스를 보고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은 돈이지만 입금했다.
장마 동안 정은 매일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좋아하는 만화에 대한 일러스트 작업도 했고 넓지 않은 집에서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장대비를 뚫고 요가 매트를 사 왔고 폭신폭신한 바닥의 질감이 좋아서 십 분 동안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운동에 관한 영상은 인터넷에 가득했다. 좋은 몸을 가진 사람들. 정은 그런 몸을 가지고 싶었고 성실히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장마가 끝난 뒤의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랬다.
정은 공원에 도착해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걷기 시작했다. 키 큰 단풍나무와 휘어진 소나무, 다 자란 고사리들 사이사이로 무당벌레가 기어다녔다. 정은 길 잃은 강아지가 있나 살펴보고 있었는데 풍선을 든 꼬마가 뛰어가다가 길에서 넘어졌다. 넘어진 아이는 피 흘린 무릎을 잡고 울었다. 정이 달려갔고 노란 티의 꼬마는 서러워졌는지 입을 벌리면서 더 크게 울었다. 다른 쪽에서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왔다. 엄마는 뺏어가듯 꼬마를 챙겼다. 인사를 하라는 엄마의 닦달에 꼬마는 배꼽인사를 했고 엄마도 꼬마를 따라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모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정은 와중에도 손가락에 묻은 피를 먹는 꼬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돗자리를 펴러 가는 길에는 뱀이 있었다. 뱀.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크지 않은 실뱀이 분명히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뱀이었다. 지난 장마로 떠내려온 것일 수도 있었고, 살기 위해 수풀에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정은 무서웠지만 뱀의 사진을 찍고 근처에 적힌 안내 번호로 전화했다. 전화로 공원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거 같았다.
“뱀이요? 공원에 뱀이 있다고요? 진짜요?”
관리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고 정은 약간의 반발심이 들어 네, 있어요. 여기 동측 자전거 대여소 지나가면서 분명히 봤어요, 하고 끊었다. 힘껏 달린 사람처럼 맥박이 물결쳤다. 전화를 끊고 나니 숨겨진 어딘가에 뱀이 있을 것 같아 정은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정은 집에 가지 않았다. 뱀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탁 트인 공간을 찾아 돗자리를 펴고 그곳에 누웠다. 햇빛에 마른 잔디의 감촉이 좋았다. 잠들기 시작하고서는 작은 뱀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뱀이 자신을 먹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다시 아빠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빠가 정의 집에 찾아오는 꿈이었다. 아빠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서 집에 찾아왔는데, 그때처럼 현관을 두들기고 창문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다가 온몸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러나 아빠가 본 것은 귀마개와 안대를 두 겹이나 하고 낮잠을 자는 정의 모습이었다.
꿈에서의 아빠는 앉았다 일어났다가 소파 옆 좁은 공간을 서성이다가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괜찮은 걸 확인했으니 이제 가보겠다고 했다. 나가기 전 아빠는 듀얼 모니터와 태블릿 컴퓨터를 바라보고 네가 이걸로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런 거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정은 한숨을 쉬면서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길고 깊게 잠들고 싶어 좋지 않은 것들을 한꺼번에 삼키는 일은 이제 정말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꿈에서의 아빠는 그때의 아빠처럼 믿지 못하는 듯 화분을 만지작거렸고 결국 선물 받은 화분을 떨어트렸다. 화분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정은 화가 솟구쳤지만, 날카롭게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참을 수 있다는 것. 정은 어쩔 줄 모르는 아빠에게 그냥 가라고 했고 고개를 숙인 아빠는 오피스텔 계단을 내려가 멀리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빠가 자신을 공원에 두고 사라지거나 수없이 때렸던 기억도 점점 참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정은 자신이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걸 꿈에서도 느낀다는 건 분명 달랐다. 정은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았다. 정은 뿌리가 드러난 금전수를 주워 심장 가까이 댔다. 작아지는 아빠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더 작은 것 같다고 느끼며 정은 잠에서 깼다.
공원의 탁 트인 평지에는 꼬마 아이 몇몇이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정은 우산을 접기 전에 소보로빵을 한 입 먹고 오늘의 일을 일기에 쓰고 싶었다. 무슨 내용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해봐도 정은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좋다는 점을 알았다. 정은 블로그에 진지하게 일기를 썼고 공개 모드로 업로드까지 마친 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주위를 둘러봐도 뱀은 없었다. 정은 돗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정의 얼굴을 가렸다. 핸드폰의 알림이 띠링, 하고 울린 게 그때였다.
‘mnkg3114’라는 아이디가 일기에 ‘좋아요’를 남겼다는 알림이었다.
*
집에 가는 길에 정은 민경에게 전화를 해봤다. “어. 민경아, 전화받을 수 있어? 뭐야 근데 블로그는 언제부터 본 거야?”
민경은 웃었다. 웃으면서 당연히 네가 알려준 뒤부터지, 했다. “근데 정아. 알고 있긴 했는데, 정이 너 진짜 글 잘 쓰더라. 왜 이렇게 잘 써?”
민경의 말에 정은 무안하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 정은 이직한 회사는 어떤지 물어봤다. 민경은 바쁘고 정신없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러다 민경이 최근에 갔던 학교 얘기를 했고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 끝에 정은 바쁘지 않으면 한번 보자고도 할 수 있었다.
“우리 못 본 지 거의 일 년이 넘어가잖아.”
민경은 당연히 좋지, 라고 하면서 그럼 다음주? 아무튼 일정을 잡아보자, 꼭이야 꼭, 한 뒤 잠깐 일이 생겼다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은 정은 가만히 누워 있다가 댓글에 있는 민경의 아이디를 클릭해서 블로그에 들어갔다. 블로그에는 수십 개의 책 감상평과 한 달 간격의 목표와 여러 공부 일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정의 흥미를 가장 끈 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으어으어한 일기’라는 카테고리의 글들이었다.
정은 민경의 내밀한 일기를 읽어볼지, 읽어서 민경의 마음을 알아볼지, 집에 가는 길 내내 고민했다. 하지만 정은 일기를 읽는 대신 지하철역을 나와 하늘을 바라봤고 도넛 모양의 특이한 구름을 응시하다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별로 가지도 않았는데도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정아.”
전화기 건너의 아빠는 일을 하는 듯 어수선했다. 오랜만의 전화여서 그런지 아빠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아빠도 갑작스러운 연락이 당황스러운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지, 조금 뚝딱였는데도 반가움이 아예 없지는 않은 사람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냥, 생각나서 한번 전화해봤어요.”
정은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없을 줄 알았으나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정은 병원에서 엄마를 본 이야기를 했고 최근 내린 길고 거대한 장마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민경이라는 친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정의 질문에 아빠는 새로 시작한 택시 일을 말해줬는데 하루는 도통 손님이 없어서 할아버지의 산소로 훌쩍 떠났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다 아빠는 최근에 부고를 전해주었던 칠촌 친척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분이 너를 많이 이뻐하셨다고. 그래서 연락했었다고. 정은 돌아가신 분이 칠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정은 왕래 없는 친척이 일평생 산촌에서 살다 돌아가신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봤다.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근데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노환이지, 벌써 아흔이 넘으셨거든. 네가 왔으면 많이 기뻐하셨을 텐데.”
“뭐, 못생기고 말도 안 듣고. 별로 이뻐할 구석도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고 정은 주위를 둘러봤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폴짝 뛰어올라 정을 바라봤다. 정과 고양이의 눈이 마주쳤다.
“이뻐하는데 이유가 어딨겠니. 아끼고 소중해서겠지.”
정은 순간 아빠가 엄마도 이뻐했는지 궁금해졌으나 둘이 해왔던 수많은 싸움과 다툼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둘에게는 정조차 알지 못할 감정선이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정은 왜 그렇게 싸웠느냐고 질문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아빠는 저도 이뻐했어요?”
“이뻐했지.” 아빠는 덧붙였다. “정말 많이 그랬지.”
정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둘은 어렸을 때 정이 미술학원에 가고 싶었다고 조르는 일화를 얘기하다가, 정이 맨 처음 그린 게 꽃이었는지 해였는지를 얘기하다가, 아빠가 네가 그린 웃는 장미꽃 그림이 보통 애들 그림과는 달랐다면서 분위기가 있었다는 말을 해줬다. 그 길로 학원에 갔어. 학원에서도 좋아했고 너도 무척이나 좋아했어. 그림 그릴 때 네가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그래도 우리가 잘한 게 있다면, 없는 살림에도 너 학원 보낸 건 잘한 일이었을 거야.
정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요즘은 뱀이 자신을 먹는 그림이 자꾸 떠오른다는 얘기를 꺼냈고 아빠는 왜 그럴까, 왜 그렇지, 하면서 생각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통화 시간이 길어져 둘은 다음에 보자는 얘길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정은 집 앞에 도달했고 정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엔 민경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해봤다. 넓은 모니터에 밝은 빛이 반짝였다. 정은 민경의 일기를 읽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는 오래전부터 흩어진 민경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기를 읽을수록 계속 아빠 생각이 났고 정은 아빠가 일기를 써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랬다면 아빠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 더 알 수 있었을까. 아빠가 쓰지 못했던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가 가졌던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면서.
정은 잠들기 전까지 민경의 일기를 찬찬히 읽어냈다.
*
정이 민경과 만나기로 한 건 전화를 하고 이 주 뒤, 공원 옆의 카페에서였다. 민경이 보통 바쁜 게 아니었고 정도 급하지는 않아 천천히 보기로 했다. 그동안에도 민경의 일기는 부지런하게 채워졌다. 아침에 운동을 가고 저녁에 경제 공부를 하는 일기를 읽다보면 정은 민경에게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다.
민경의 일기를 읽다보니 정은 기억나는 것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정은 우연히 민경을 본 적이 있었다.
개나리가 봉오리를 만들고 있던 봄학기였고 아직 민경을 모를 때였다. 골든 리트리버 강아지를 키우는 학교 정문 근처의 카페였다. 정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당시 사랑하는 이를 위해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가만히 서서 숨을 참고 있었다. 숨.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길 한가운데에, 허공을 바라보며, 오프숄더를 입은 민경이 숨을 참고 있었다. 키가 큰 민경이 길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참는 모습은 신비스러웠지만 기괴하다는 묘사도 충분히 어울릴 것 같았다. 정은 그 모습이 신기해 민경을 멀리서 쳐다봤고 그 덕분에 문학동아리에서 민경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게 한 달 뒤였다. 정은 민경에게 아는 체를 했지만 민경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정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숨을 참은 적이 없었느냐는 정의 질문에 민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 적이 절대 없다고 했다. 그후로 정은 민경과 두어 번 동아리에서 조우했고 민경의 남자 애인과 여자 애인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버려 동아리가 뒤집어졌을 때, 그때 다른 이들과 같이 민경과 술자리를 한 게 둘이 함께한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날 민경은 흐느끼다가 울다가 또 고개를 주억거리다 취해서 온갖 이야기를 해줬다. 둘이 어쩌다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되었는지, 어떻게 하다 둘을 동시에 만날 결심을 하게 됐는지, 그러다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는지 말해줬다. 민경은 술을 연거푸 들이켰고 정과 다른 이들은 묵묵히 민경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다 민경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참기 시작했다. 숨을 참으려는 민경이 낯설고 무서워 정이 민경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민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참았다. 그렇게 숨을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붉게 달아오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민경이 결국 파열음과 함께 무너졌다. 무너진 민경이 더욱 무너질까 두려워 정은 민경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정아, 뭐야? 완전 그대로잖아. 아니 더 어려진 거 같은데?”
산산이 조각나는 민경의 그 감정이 옛날 일기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다만 어느새 도착한 민경은 정의 등을 톡톡 두들겼고 정은 오랜만에 만난 민경이 무척이나 반가워서 “아냐, 뭐야 민경아, 네가 진짜 그대로네. 더 이뻐진 거 같아!” 하고 답했다. 말하면서도 옛날 일들이 떠올랐지만 정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는 글 안에 있을 때 진정한 과거가 되어 우리 안에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둘은 카페에 앉아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셨고 나른하게 엉덩이를 빼고 늦여름의 햇살을 즐겼다. 민경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고 민경에게라면 정은 어떤 것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손가락을 씹고 싶은 충동조차 들지 않는 오후. 정은 이제 자신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둘은 아무렇지 않게 회사 일과 결혼과 추억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쩐지 민경도 정의 옛 일기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때마침 민경의 이마 위에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왔고 정은 처음으로 민경의 배려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꼬리 먹는 뱀이 다시 떠오른 건 얼굴만 알던 친척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정은 친척의 부고를 들여다봤다. 문장 너머 숨겨진 정보가, 혹은 시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처럼 정은 부고를 뜯어봤다. 병원과 일시가 적혀 있었고 부고를 보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친척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친척의 냄새나는 손이 기억났다.
발인이 있는 날이었다. 정은 평소처럼 서울 외곽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초여름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챙겨온 소보로와 시원한 토마토주스, 수박과 참외 같은 여름 과일을 먹고 한낮의 우산 아래 누워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는 편안한 잠이었다. 새벽의 잠과는 달리 뒤척임도 없었다. 공원에서 뒹굴거리는 내내 정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잠에서 깬 정은 돗자리를 접기 전에 눈을 감고 합장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왕래 없던 친척의 영면을 빌었다.
“장례식에 오지 않은 이유라도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어머니가 핸드폰 건너편에서 물었지만 정은 별일 없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다고. 주식도 괜찮고, 만나는 사람은 새로 생기지 않았지만, 하던 일도 잘하고 있다고 했다. 비록 그림 의뢰가 없는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혼자라도 작업하고 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 다음주에라도 집에 한번 들러봐. 아빠가 말은 못 해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어.”
정은 알겠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일정은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었다. 현대인은 모두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는 친구의 오래전 문장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정은 아빠가 어떤 병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어떤 병일까. 신경증? 우울증?
정은 집에 가는 길에 민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신병 문장을 SNS에 썼던 친구가 민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통화음이 이어지더니 민경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건너편의 민경은 거친 숨을 내쉬었고 정은 외설스러운 생각이 들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민경은 운동중인데? 하고 답했다. 민경이 사진을 보냈다. 덤벨 사이에서 레깅스를 입고 있는 민경이 정말 거울 안에 있었다. 민경은 일단 전화를 끊고 메신저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숨이 차서 전화하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정은 전화를 끊고 지금까지의 일을 텍스트로 쳐서 보냈다. 혹시 옛날에 현대인의 정신병 어쩌고 한 문장이 기억나는지도 물어보면서. 민경이 답장을 보냈다.
- 아마 너희 부모님도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신 거겠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말이야. 그래서 집에 오라고 한 게 아닐까?
- 그래?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못하는 걸까. 속마음 터놓는 걸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 어쩔 수 없어. 인정해봐, 우리랑 다른 사람들이야. 시대도 문화도 달랐잖아.
- 그런 거 보면 환경이 거의 전부인 것도 같아.
- 근데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우리 회사에도 나이 든 사람들 보면 다들 애처럼 유치해져. 나이 들면 다 비슷해지지 않을까?
- 그런가?
- 그런 거지 뭐.
- 근데 넌 왜 이렇게 잘 알아.
- 나도 사람이잖아.
- 그래?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못하는 걸까. 속마음 터놓는 걸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 어쩔 수 없어. 인정해봐, 우리랑 다른 사람들이야. 시대도 문화도 달랐잖아.
- 그런 거 보면 환경이 거의 전부인 것도 같아.
- 근데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우리 회사에도 나이 든 사람들 보면 다들 애처럼 유치해져. 나이 들면 다 비슷해지지 않을까?
- 그런가?
- 그런 거지 뭐.
- 근데 넌 왜 이렇게 잘 알아.
- 나도 사람이잖아.
정은 망설이다가 답장했다.
- 그럼 너도 정신병이 있어? 상상하기 힘드네.
정은 뉴스에 소개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민경의 커리어와 그녀의 현명한 경제관념을 생각했다. 자신과는 다른, 완벽한 인간. 정은 솔직히 민경을 아예 다른 속성의 사람이라 여겼다. 민경은 매일 아침에 운동을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인에게 좋은 주식을 선뜻 추천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경은 그후로 답장이 없었고 삼 일 뒤에나 뜬금없이 답장했다.
- 나도 있는 거 같은데…… 내 블로그 한번 볼래?
그리고 민경이 보내온 손으로 정갈하게 쓴 웹페이지 주소가 하나 있었다.
정은 그사이 일러스트 의뢰 세 개와 로고 디자인 두 개를 해치웠다. 오랜만의 의뢰라서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충만했다. 일을 마치고 완성본의 백업까지 완료한 후 정은 다시 공원에 갔다. 오후의 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정은 검은 우산 아래에서 깊은 잠을 잤다. 그러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검토한 결과물들은 쓰레기 같았다. 정은 머리를 쥐어짰다. 마감 열 시간 전부터 어색한 구도와 톤을 수정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원안을 A안으로 보냈다. 클라이언트에게서 답장이 왔다. 클라이언트는 설명이 많은 B안을 싫어했다.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싫어했다. 다행히 맨 처음 작성한 A안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클라이언트는 호와 불호가 명확하다고 하면서 직설적인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단 충동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정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정은 민경의 블로그를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정은 집 근처 천변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보다가 생각했다. 만약 민경의 블로그를 들어간다면 민경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된 후가 아닐까…… 하고. 흔한 전개에 가까울 것 같았다.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흔적을 더듬거리다 마침내 블로그에 들어가는 장면도.
민경의 부고가 들려온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정은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민경이라는 친구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자각에 서글퍼졌다. 정은 집에 돌아와 책상에 엎드렸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바로 민경의 블로그 주소였다.
정은 집에 돌아와 자신의 블로그에 그렇게 썼다. 민경이 죽는 일은 없길 바라면서. 좋지 않은 말을 써내려가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오랜 전언도 믿어보기로 하면서.
그때 정은 다시 광고가 생각났다.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뱀도 자신을 먹지는 못한다는 뜻인가.
쓰인 말들이 정말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후 밤나무 가득한 뒷산에 오르거나 우산 아래에 잠들면서도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다는 문장이 정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 정은 손가락을 먹어보고 싶었다. 처음엔 검지였다. 정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검지를 입에 갖다댔다. 시큼하고, 짰다. 하지만 숲에 있는 것 같은 안도감이 차올랐다. 사람 가득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손가락 먹는 경험이 생각났다. 실제로 손을 입에 갖다대면 평온함이 찾아왔다. 정은 손가락을 먹을 때만이라도 사람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그래. 신경 써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내가 편하면 그만인데. 그러다 어느 날은 검지와 중지를 함께 물었고 어느 날은 중지와 약지를 함께 물었다. 하루는 피자 조각을 먹듯 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지지, 지지.”
지하철 좌석 맞은편에 있는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순간 정과 여자아이의 눈이 마주쳤고 때마침 열차는 한강 철교를 달리는 중이었다. 낯선 시선들이 정의 얼굴을 향해 똬리를 틀었다. 정은 무안함에 입안의 손을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시선들은 사라졌지만 맞은편의 여자아이는 호기심에 정을 빤히 쳐다봤다. 강물처럼 반짝이는 어린 눈을 마주하니 정은 궁금해졌다. 저 꼬마 아이는 앞으로 어떤 정신병을 가지게 될지. 아니면 어떤 순간을 맞이하여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될지.
“어, 민경아.”
역에 내리면서 정은 민경에게 전화 걸어보는 연습을 해봤다. 정이 낮잠 자는 공원은 서울 반 바퀴를 돌아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가로질러 갔다면 더 빨랐을 테지만 정은 서울을 도는 과정 자체가 좋았다. 도는 내내 뱀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자신을 조금씩은 먹어치우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민경과 만나지 않은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약속을 잡아볼까 하며 정은 민경과의 메시지를 복기해봤고 정은 마지막으로 보내준 민경의 블로그 주소가 다시 신경 쓰였다. 정은 집에 걸어가는 동안 민경의 화사한 프로필 사진을 보고 벚꽃 담긴 배경 사진을 보다가 3ll4가 포함된 민경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해봤다. 그러나 없는 페이지라고 나왔다. 소문자 엘과 대문자 아이를 조합해서 다른 두 개의 주소를 더 입력해봤다. 여전히 없는 페이지라고 나왔다.
정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하나였고 정은 그것을 입력할지 고민했다. 정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망설였으나 결국 민경의 블로그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쓴 뒤 그것을 민경에게 보냈다.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정의 블로그 주소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민경은 정의 메시지를 한동안 읽지 않았다. 정은 그림을 그리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민경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했지만 며칠 뒤엔 민경에게 주소를 보냈던 일조차 까먹었다. 정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길을 가다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던 후부터. 병원에서 다급하게 정을 찾았다. 정은 전화를 받고 자신의 부고를 받은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정은 전화를 받을 당시 길을 걷고 있었다. 정은 낯선 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가만히 서 있었다. 땀이 흘렀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병원의 위치를 물었고 금방 찾아갈 수 있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던 순간이 도래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끊은 자신이 대견했다. 그런데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정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았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는 사람의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놓을 순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서는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정의 어릴 적 장래 희망은 판사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모래시계 드라마를 태교로 즐겨봤던 것과 가문의 자랑이었던 판사 고모의 존재가 정이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다만 모래시계에는 검사가 등장했고 명망 있던 고모가 불명예 퇴직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정은 택시에서 검지를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오랜만에 본 엄마는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엄마의 정신은 또렷했다. 잠깐 쓰러졌다는 사실만 빼면 충분히 건강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아빠도 보겠거니 했지만 엄마는 아빠가 오기 전이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정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엄마는 병원의 푸른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뇌에 공급되는 혈관이 잠깐 막혀서 쓰러진 거래. 근데 후처리가 좋았대. 행인이 해준 대처가 좋았나봐. 병원에서 천만다행이라고 하더라고. 난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니.”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정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행이네.”
간병인 침대에 앉아서는 엄마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작은 빌라에 살던 시절의 회백색 벽지 이야기나 인형과 로봇이 혼재된 기묘한 장난감 바구니에 대해서도. 하루는 인형의 팔을 빼고 로봇에 붙였다고 엄마에게 잔뜩 혼난 적이 있었다. 인형의 가느다란 팔을 로봇에 억지로 넣은 모양새였는데 그날 저녁 정은 아빠에게 맞았다. 엄마의 말을 듣고 흉측한 장난감 외형을 보더니 정에게 다가와 귀를 올려쳤다. 정은 엄마에게 맞지 않고 아빠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지만 제일 혼란스러운 점은 따로 있었다. 다음날 유리컵을 떨어트려 산산조각 냈을 때 엄마가 부드럽게 안아준 사실이었다. 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렸을 적 감정들은 충분히 희석되었으나 한낮의 우산 아래에서는 옛날 일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땐 그럴 때였어. 널 키운다는 게 여러 가지로 부담도 됐고.”
엄마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엄마는 정의 지금 나이보다도 어렸고 그땐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정은 ‘왜 그렇게 부담이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정은 병원 매점에서 사 온 사과를 깎기 시작했고 엄마가 비타민 음료 뚜껑을 따서 정에게 건넸다. 둘은 한 이불을 덮고 잠깐 잠들었고 나란히 누워 TV도 봤다. 정은 응급실에 갔던 자신을 위해 일주일 넘게 엄마가 옆에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지만 그때를 굳이 상기시키진 않았다. 정이 엄마의 스트레칭을 도와주었고 회진 시간에는 엄마의 궁금한 점을 정이 조리 있게 물어봤다. 의사는 정과 엄마를 번갈아 보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현명한 자식을 두셨다고 하며 의사가 활짝 웃었다. 회진이 끝나고 정규 뉴스를 보다가 스포츠 소식이 시작되자 정은 이제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엄마는, 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밥 잘 챙겨 먹고.”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아빠를 보고 가라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말도, 다음에 또 오라는 말도. 이어지는 잠깐의 포옹. 정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밖을 나왔고 길었던 하루라는 느낌에 정은 택시를 잡았다. 밥 잘 챙겨 먹고. 집에 가는 길에는 엄마가 해준 마지막 말이 계속 서성거렸다. 밥 잘 챙겨 먹고. 엄마에게도 그 말을 할걸, 하는 후회가 남아 정은 집 앞에서 ‘엄마도 잘 챙겨 드세요’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 분도 안 되어서 답장이 왔다. ‘고마워.’ 정은 핸드폰을 보고 화면을 껐다. 정은 이불을 턱끝까지 덮은 채 그날 있었던 일을 조금 오래 생각해봤다.
- 디자이너님 혹시 일정 조율 가능하신가요?
점심 스트레칭이 끝나고 보니 새 클라이언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은 정해진 시간에만 업무 메시지를 읽고 싶었지만 이번 클라이언트도 여간 깐깐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정은 공손하게 답장을 보냈다.
- 네, 얼마든지 가능하죠. 언제까지 해드릴까요?
정은 핸드폰을 던져놓고 공원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금전수나 호접란, 해피트리 같은 식물에 물을 주고 잎을 닦았다. 계획대로 배양토도 정리하고 영양제도 넣었다. 식물을 키우는 게 감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로 화분을 키우지 않았는데도 선물로 받은 화분들은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정은 화분을 만지작거렸다.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병문안을 와줬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음해봤다. 유민경, 조유림, 서해린.
- 정아, 엄마 보러는 언제 올 거냐.
오후 산책이 끝나니 아빠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정은 태블릿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엄마에게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하는 문자를 보냈다. 정이 알기로 엄마는 퇴원한 지 오래였고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엄마에게 금방 답장이 왔다. ‘별일 없는데?’ 정은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던지고 아빠에게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왜 유별나게 그러는 거지, 하며 정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러다 정은 침대에 널브러진 핸드폰을 가져와 조만간 가겠다고 답장한 뒤 다시 핸드폰을 침대에 던졌다. 작업을 시작했다.
민경에게 연락이 온 건 엄마가 쓰러지고 한 달이 넘게 지난 후였다. “미안, 러닝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어. 전화받을 수 있어?”
때마침 정은 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정은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액정에 뜬 민경의 이름을 보고 나서야 정은 민경에게 블로그 주소를 준 사실이 떠올랐다. 민경은 숨을 헐떡이면서 다른 게 아니라 고민이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그런데 턱끝까지 숨이 찬지 근데 메시지로도 괜찮아? 하고 다시 물었다. 정은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삼십 분 뒤 텍스트로 온 민경의 메시지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었다. 요는 스타트업에서 C 레벨 스카우트를 받았는데 가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정이 알기론 그 정도의 대우는 굉장히 좋아서 고민의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 맞아, 좋은 일이지. 근데도 불안해.
민경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스톡옵션으로 설득하는 거 같은데 진실성도 보이고, 그쪽에서는 자신을 무조건 좋게 보는 거 같아서 부담도 크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내 시간은 완전히 없어지겠지? 그런데 도전하고 싶긴 해. 나이도 나이니까.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면 쓸쓸해지는 거 같다면서 민경은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정은 고민하다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봤지만 막상 보낸 뒤엔 후회가 들었다. 저런 대답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 ㅋㅋ 너 공원이구나. 자고 있던 거지?
- 뭐야 어떻게 알았어.
- 저 말도 고민 많이 해서 나온 거고, 그치?
- 뭐야 어떻게 알았어.
- 저 말도 고민 많이 해서 나온 거고, 그치?
정은 자세를 고쳐 누웠다. 햇빛이 새끼발가락에 내려앉았다. 정은 온기로 미끈해지는 발을 느끼며 ‘내가 널 얼마나 잘 아는데’ 하고 시작한 민경의 옛날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이를테면 연애와 학업, 자존감과 불안에 대해서. 민경은 잠시 스쳐 지나간 문학동아리에서도 인상 깊은 사람이었고 SNS 같은 공개된 곳에도 자신의 마음과 문장을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정은 민경의 문장을 형편없다고 생각했고 우습게도 그런 마음을 직접 써서 지적할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 근데 진짜 형편없긴 했어.
민경이 자신이 쓴 옛글을 다시 보았다고 했는데 정은 진지하게 아니라고 답장했다. 누군가의 글을 형편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라고 하면서. 그러자 민경이 답했다.
- 뜬금없긴 했어. 근데 그거 덕분에 더 친해질 수도 있었던 거지.
- 모르겠어. 그땐 왜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걸까?
- 별로 화나 보이진 않았었는데? 혹시 지금도 그래?
- 모르겠어. 그땐 왜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걸까?
- 별로 화나 보이진 않았었는데? 혹시 지금도 그래?
정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남아 있는 화가 없는 건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 응, 전혀 안 그래.
- 그럼 됐지 뭐.
- 그럼 됐지 뭐.
정은 엄마가 쓰러진 이야기를 할까 잠깐 생각했고 실제로 길지 않은 문장을 써봤지만 보내지는 않았다. 민경의 블로그 주소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마침 민경에게서도 메시지는 더 오지 않았다. 정은 핸드폰을 던져두고 햇빛으로 통통해지는 풀을 바라보다 방방 뛰어다니는 진돗개를 구경하다 미끄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꿈에서는 오랜만에 아빠가 나왔다. 아빠와 함께 공원을 돌아다니는 장면. 어떤 기억은 이미지로 남고 분위기로 남지만 아빠와 관련된 기억은 어쩐지 영화처럼 남았다. 매번 감상이 달라지는 영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라기보다는, 몇 번이나 돌려 봐서 대사도 다 알 것 같은 투박하고 재미없는 옛날 영화.
정은 공원 돗자리에서 눈을 번쩍, 하고 떴다.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는데 근처에 있던 강아지 주인이 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에게 말을 건 젊은 여자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정은 여자에게 사라진 강아지를 찾아주겠다고 한 뒤 한동안 유리야, 유리야 어딨니, 하고 하얀 진돗개를 함께 불러줬다. 그렇지만 유리는 나오지 않았고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정은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며 여자에게 인사해야 했다. 공원을 나오는 중에도 여자의 목소리는 커졌고 밤이 다가오는 중에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외침은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정은 걸어가는 길에서도 가방을 꽉 껴안았다. 지하철에 들어가 열차 칸에 앉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정은 집에 가는 내내 엄지를 물고 여러 생각을 해봤다. 이를테면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강아지의 뒷모습 같은 것에 대해. 길어지고 넓어지는 나뭇잎의 그림자들에 대해. 또한 공원을 배회하는 유리의 혼란스럽고 요동치는 시선 같은 것에 대해서도.
오랜만에 슬픔이 쏟아져 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서울 남쪽이 침수되고 중부 지방의 몇몇 산지에서는 산사태가 났다. 정은 실종자까지 생겼다는 뉴스를 보고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은 돈이지만 입금했다.
장마 동안 정은 매일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좋아하는 만화에 대한 일러스트 작업도 했고 넓지 않은 집에서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장대비를 뚫고 요가 매트를 사 왔고 폭신폭신한 바닥의 질감이 좋아서 십 분 동안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운동에 관한 영상은 인터넷에 가득했다. 좋은 몸을 가진 사람들. 정은 그런 몸을 가지고 싶었고 성실히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장마가 끝난 뒤의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랬다.
정은 공원에 도착해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걷기 시작했다. 키 큰 단풍나무와 휘어진 소나무, 다 자란 고사리들 사이사이로 무당벌레가 기어다녔다. 정은 길 잃은 강아지가 있나 살펴보고 있었는데 풍선을 든 꼬마가 뛰어가다가 길에서 넘어졌다. 넘어진 아이는 피 흘린 무릎을 잡고 울었다. 정이 달려갔고 노란 티의 꼬마는 서러워졌는지 입을 벌리면서 더 크게 울었다. 다른 쪽에서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왔다. 엄마는 뺏어가듯 꼬마를 챙겼다. 인사를 하라는 엄마의 닦달에 꼬마는 배꼽인사를 했고 엄마도 꼬마를 따라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모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정은 와중에도 손가락에 묻은 피를 먹는 꼬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돗자리를 펴러 가는 길에는 뱀이 있었다. 뱀.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크지 않은 실뱀이 분명히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뱀이었다. 지난 장마로 떠내려온 것일 수도 있었고, 살기 위해 수풀에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정은 무서웠지만 뱀의 사진을 찍고 근처에 적힌 안내 번호로 전화했다. 전화로 공원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거 같았다.
“뱀이요? 공원에 뱀이 있다고요? 진짜요?”
관리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고 정은 약간의 반발심이 들어 네, 있어요. 여기 동측 자전거 대여소 지나가면서 분명히 봤어요, 하고 끊었다. 힘껏 달린 사람처럼 맥박이 물결쳤다. 전화를 끊고 나니 숨겨진 어딘가에 뱀이 있을 것 같아 정은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정은 집에 가지 않았다. 뱀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탁 트인 공간을 찾아 돗자리를 펴고 그곳에 누웠다. 햇빛에 마른 잔디의 감촉이 좋았다. 잠들기 시작하고서는 작은 뱀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뱀이 자신을 먹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다시 아빠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빠가 정의 집에 찾아오는 꿈이었다. 아빠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서 집에 찾아왔는데, 그때처럼 현관을 두들기고 창문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다가 온몸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러나 아빠가 본 것은 귀마개와 안대를 두 겹이나 하고 낮잠을 자는 정의 모습이었다.
꿈에서의 아빠는 앉았다 일어났다가 소파 옆 좁은 공간을 서성이다가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괜찮은 걸 확인했으니 이제 가보겠다고 했다. 나가기 전 아빠는 듀얼 모니터와 태블릿 컴퓨터를 바라보고 네가 이걸로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런 거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정은 한숨을 쉬면서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길고 깊게 잠들고 싶어 좋지 않은 것들을 한꺼번에 삼키는 일은 이제 정말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꿈에서의 아빠는 그때의 아빠처럼 믿지 못하는 듯 화분을 만지작거렸고 결국 선물 받은 화분을 떨어트렸다. 화분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정은 화가 솟구쳤지만, 날카롭게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참을 수 있다는 것. 정은 어쩔 줄 모르는 아빠에게 그냥 가라고 했고 고개를 숙인 아빠는 오피스텔 계단을 내려가 멀리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빠가 자신을 공원에 두고 사라지거나 수없이 때렸던 기억도 점점 참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정은 자신이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걸 꿈에서도 느낀다는 건 분명 달랐다. 정은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았다. 정은 뿌리가 드러난 금전수를 주워 심장 가까이 댔다. 작아지는 아빠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더 작은 것 같다고 느끼며 정은 잠에서 깼다.
공원의 탁 트인 평지에는 꼬마 아이 몇몇이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정은 우산을 접기 전에 소보로빵을 한 입 먹고 오늘의 일을 일기에 쓰고 싶었다. 무슨 내용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해봐도 정은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좋다는 점을 알았다. 정은 블로그에 진지하게 일기를 썼고 공개 모드로 업로드까지 마친 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주위를 둘러봐도 뱀은 없었다. 정은 돗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정의 얼굴을 가렸다. 핸드폰의 알림이 띠링, 하고 울린 게 그때였다.
‘mnkg3114’라는 아이디가 일기에 ‘좋아요’를 남겼다는 알림이었다.
민경은 웃었다. 웃으면서 당연히 네가 알려준 뒤부터지, 했다. “근데 정아. 알고 있긴 했는데, 정이 너 진짜 글 잘 쓰더라. 왜 이렇게 잘 써?”
민경의 말에 정은 무안하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 정은 이직한 회사는 어떤지 물어봤다. 민경은 바쁘고 정신없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러다 민경이 최근에 갔던 학교 얘기를 했고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 끝에 정은 바쁘지 않으면 한번 보자고도 할 수 있었다.
“우리 못 본 지 거의 일 년이 넘어가잖아.”
민경은 당연히 좋지, 라고 하면서 그럼 다음주? 아무튼 일정을 잡아보자, 꼭이야 꼭, 한 뒤 잠깐 일이 생겼다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은 정은 가만히 누워 있다가 댓글에 있는 민경의 아이디를 클릭해서 블로그에 들어갔다. 블로그에는 수십 개의 책 감상평과 한 달 간격의 목표와 여러 공부 일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정의 흥미를 가장 끈 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으어으어한 일기’라는 카테고리의 글들이었다.
정은 민경의 내밀한 일기를 읽어볼지, 읽어서 민경의 마음을 알아볼지, 집에 가는 길 내내 고민했다. 하지만 정은 일기를 읽는 대신 지하철역을 나와 하늘을 바라봤고 도넛 모양의 특이한 구름을 응시하다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별로 가지도 않았는데도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정아.”
전화기 건너의 아빠는 일을 하는 듯 어수선했다. 오랜만의 전화여서 그런지 아빠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아빠도 갑작스러운 연락이 당황스러운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지, 조금 뚝딱였는데도 반가움이 아예 없지는 않은 사람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냥, 생각나서 한번 전화해봤어요.”
정은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없을 줄 알았으나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정은 병원에서 엄마를 본 이야기를 했고 최근 내린 길고 거대한 장마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민경이라는 친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정의 질문에 아빠는 새로 시작한 택시 일을 말해줬는데 하루는 도통 손님이 없어서 할아버지의 산소로 훌쩍 떠났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다 아빠는 최근에 부고를 전해주었던 칠촌 친척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분이 너를 많이 이뻐하셨다고. 그래서 연락했었다고. 정은 돌아가신 분이 칠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정은 왕래 없는 친척이 일평생 산촌에서 살다 돌아가신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봤다.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근데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노환이지, 벌써 아흔이 넘으셨거든. 네가 왔으면 많이 기뻐하셨을 텐데.”
“뭐, 못생기고 말도 안 듣고. 별로 이뻐할 구석도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고 정은 주위를 둘러봤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폴짝 뛰어올라 정을 바라봤다. 정과 고양이의 눈이 마주쳤다.
“이뻐하는데 이유가 어딨겠니. 아끼고 소중해서겠지.”
정은 순간 아빠가 엄마도 이뻐했는지 궁금해졌으나 둘이 해왔던 수많은 싸움과 다툼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둘에게는 정조차 알지 못할 감정선이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정은 왜 그렇게 싸웠느냐고 질문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아빠는 저도 이뻐했어요?”
“이뻐했지.” 아빠는 덧붙였다. “정말 많이 그랬지.”
정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둘은 어렸을 때 정이 미술학원에 가고 싶었다고 조르는 일화를 얘기하다가, 정이 맨 처음 그린 게 꽃이었는지 해였는지를 얘기하다가, 아빠가 네가 그린 웃는 장미꽃 그림이 보통 애들 그림과는 달랐다면서 분위기가 있었다는 말을 해줬다. 그 길로 학원에 갔어. 학원에서도 좋아했고 너도 무척이나 좋아했어. 그림 그릴 때 네가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그래도 우리가 잘한 게 있다면, 없는 살림에도 너 학원 보낸 건 잘한 일이었을 거야.
정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요즘은 뱀이 자신을 먹는 그림이 자꾸 떠오른다는 얘기를 꺼냈고 아빠는 왜 그럴까, 왜 그렇지, 하면서 생각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통화 시간이 길어져 둘은 다음에 보자는 얘길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정은 집 앞에 도달했고 정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엔 민경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해봤다. 넓은 모니터에 밝은 빛이 반짝였다. 정은 민경의 일기를 읽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는 오래전부터 흩어진 민경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기를 읽을수록 계속 아빠 생각이 났고 정은 아빠가 일기를 써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랬다면 아빠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 더 알 수 있었을까. 아빠가 쓰지 못했던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가 가졌던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면서.
정은 잠들기 전까지 민경의 일기를 찬찬히 읽어냈다.
민경의 일기를 읽다보니 정은 기억나는 것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정은 우연히 민경을 본 적이 있었다.
개나리가 봉오리를 만들고 있던 봄학기였고 아직 민경을 모를 때였다. 골든 리트리버 강아지를 키우는 학교 정문 근처의 카페였다. 정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당시 사랑하는 이를 위해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가만히 서서 숨을 참고 있었다. 숨.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길 한가운데에, 허공을 바라보며, 오프숄더를 입은 민경이 숨을 참고 있었다. 키가 큰 민경이 길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참는 모습은 신비스러웠지만 기괴하다는 묘사도 충분히 어울릴 것 같았다. 정은 그 모습이 신기해 민경을 멀리서 쳐다봤고 그 덕분에 문학동아리에서 민경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게 한 달 뒤였다. 정은 민경에게 아는 체를 했지만 민경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정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숨을 참은 적이 없었느냐는 정의 질문에 민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 적이 절대 없다고 했다. 그후로 정은 민경과 두어 번 동아리에서 조우했고 민경의 남자 애인과 여자 애인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버려 동아리가 뒤집어졌을 때, 그때 다른 이들과 같이 민경과 술자리를 한 게 둘이 함께한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날 민경은 흐느끼다가 울다가 또 고개를 주억거리다 취해서 온갖 이야기를 해줬다. 둘이 어쩌다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되었는지, 어떻게 하다 둘을 동시에 만날 결심을 하게 됐는지, 그러다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는지 말해줬다. 민경은 술을 연거푸 들이켰고 정과 다른 이들은 묵묵히 민경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다 민경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참기 시작했다. 숨을 참으려는 민경이 낯설고 무서워 정이 민경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민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참았다. 그렇게 숨을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붉게 달아오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민경이 결국 파열음과 함께 무너졌다. 무너진 민경이 더욱 무너질까 두려워 정은 민경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정아, 뭐야? 완전 그대로잖아. 아니 더 어려진 거 같은데?”
산산이 조각나는 민경의 그 감정이 옛날 일기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다만 어느새 도착한 민경은 정의 등을 톡톡 두들겼고 정은 오랜만에 만난 민경이 무척이나 반가워서 “아냐, 뭐야 민경아, 네가 진짜 그대로네. 더 이뻐진 거 같아!” 하고 답했다. 말하면서도 옛날 일들이 떠올랐지만 정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는 글 안에 있을 때 진정한 과거가 되어 우리 안에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둘은 카페에 앉아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셨고 나른하게 엉덩이를 빼고 늦여름의 햇살을 즐겼다. 민경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고 민경에게라면 정은 어떤 것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손가락을 씹고 싶은 충동조차 들지 않는 오후. 정은 이제 자신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둘은 아무렇지 않게 회사 일과 결혼과 추억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쩐지 민경도 정의 옛 일기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때마침 민경의 이마 위에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왔고 정은 처음으로 민경의 배려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김근희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루빅스 큐브」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뱀은 자신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2026/10/07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