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키 큰 나무들 사이 산책로를 따라 걸어간다. 곳곳에 벤치와 작은 꽃들이 놓여 있다.

4월은 측정의 달, 많은 숫자가 시간 위를 수놓는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치러졌고, 성적을 기다리는 동안 신체검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승주의 중간고사 전교 석차는 최상위, 몸무게는 47킬로그램으로 반에서 세번째로 적었고, 키는 168센티미터로 반에서 다섯번째로 커서, 점 잇기 놀이를 하듯 그 세 개의 점을 이으면 미소 짓는 입이 완성되었다.
  승주가 학기 초 획득한 보다 여러 개의 수치를 이어 정교한 붓질을 더하자 이런 그림이 탄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서 마음껏 뛰노는 토끼, 뭉게구름을 퐁 뚫고 더 높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비행기…… 승주의 숫자들은 울상 짓는 형상은 만들어내는 법이 없었다. 승주는 무표정, 비뚤어진 입, 혹은 끝 모를 구렁텅이로 점 잇기 놀이의 형상이 완성되고 만 다른 친구들의 숫자들을 마른 낙엽 밟듯 가로질러 학년 대표 성적 우수자로서 교내 방송에 나가 상장을 수여받았다.
  학년 대표 성적 우수자는 1등급을 가장 많이 받은 학생으로 정해지는데, 때문에 전 과목 평균 점수로 집계되는 전교 석차 1등과는 다른 학생이 학년 대표 수상자로 선정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승주는 그런 난처함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승주는 압도적 전교 1등을 거머쥐었다.

12과목 총점 1195.5점 ‖ 전체 평균 99.625점 ‖ 1등급 총 12과목

승주는 단상 앞에 서서 상장 내용을 읊는 학년 주임의 목소리를, 과목 이름을 두 글자씩 끊어 읽는 탓에 열두 과목보다 훨씬 많은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것처럼 들리도록 만드는 느릿느릿 평온한 리듬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비좁은 방송실에서는 피사체와 카메라 간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각 반에 송출되는 티브이 화면에는 단상도, 학년 주임도, 옆에서 상장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방송부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승주의 뒷모습만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승주가 뒷짐 진 손으로 주먹을 두 번 쥐었다 펴 보이자 7반 바로 앞줄에서 화면을 바라보던 장범규가 침을 삼켰다. 잼잼 사인을 장범규와 함께 알아챈 친구들 몇이 장범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낄낄거렸다. 장범규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용! 외쳤다.
  장범규는 승주를 좋아했고 승주도 장범규가 좋았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감정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승주는 장범규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고, 저 이는 좀 다르다 싶었던 사람들에게도 의외로 아무것도 없어, 특별함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삼켜지고 말았다. 승주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7반 회장 장범규는 적어도 친구들의 머릿속에 회장이라는 직함(직함은 기억에 남는 데 유리하다)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농구를 좋아한다거나, 가방을 한쪽으로만 멘다거나…… 멋스러운 부분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반 회장과 전교 1등이 사귄다.
  이렇듯 간편하게 요약되는 문장으로 승주와 장범규는 친구들의 기억에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처럼 새겨넣었다. 승주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장범규와의 결합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승주는 혼자 존재하는 것보다 선명해졌고 장범규도 승주를 따라 그렇게 되었다.
  장범규는 피부가 깨끗했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고 급식실에서 교실로 걸어가는 길, 가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장범규를 목격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승주는 그가 뛰어오를 때를 기다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슛을 갈겨! 지금이야!’
  티셔츠가 펄럭이고 그 아래 감춰져 있던 희고 매끈한 배를 처음 목격했던 순간은 떠올릴 때마다 새롭게 생생해진다. 군살 없는 직선적인 배가 주는 산뜻한 감각은 복부를 지나, 골대를 향해 쭉 뻗은 팔을 따라 시원하게 미끄러졌다. 마침내 승주의 시선이 장범규의 손가락 끝을 벗어나 파아란 하늘까지 향했을 때 태양이 반짝. 순간 멍해져 가만히 서 있는 승주에게 장범규는 양팔을 흔들어 보였다. 우우— 썰물처럼 밀려드는 아이들의 야유.
  장범규는 승주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경유하지 않고도 승주를 좋아할까? 승주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어쩌면…… 승주에게도 아직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승주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을까?
  둘은 학교에서는 말을 거의 나누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거나, 적어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가벼운 대화에도 필요 이상으로 신중해졌다. 둘의 대화는 초등학교 저학년 영어 교재에 등장하는 다이얼로그와 같은 완결성, 무한 긍정, 근면 성실함을 갖춘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금세 사그라들고는 했다.

장범규: 승주 오늘 네 머리끈 예쁘다. (Seung-ju, Today your hairband looks pretty.)
승주: 고마워. (Thank you.)

(대화를 마친 둘은 서로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책상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오늘 학습할 표현: ~처럼 보이다. (주어+look+형용사)


승주는 공부 시간을 매일 열세 시간 이상씩 유지했다. 교복 자켓 주머니, 치마 주머니, 배낭 앞주머니, 학교 책상, 독서실 책상, 승주의 방 책상, 여섯 개의 스탑워치가 공부 시간을 엄격히 셈해주었다.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느냐는 질문을 마주할 때면 승주는 두 번의 블러핑 후,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해요? 하하 아녜요. 아니 정말 궁금해서 그래. 그냥 움직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그래도 포기 않고 한 번 더 캐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매일 열세 시간 이상씩 공부해요. 하면 되는 건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는 거죠. 그럼 질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학습 시간을 열세 시간씩 꾸준히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스트레스 관리에 배정할 수 있는 시간은 매일 최대 두 시간. 승주는 여러 가지 취미에 마음을 붙여보려 했으나 대개 실패로 돌아갔다. 산책은 스트레스 해소가 아닌 일시적 진정에 가까웠고, 혼자 할 수 있는 운동 종목(테니스, 검도, 수영)은 경쟁심을 잠재울 수 없어 또다른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낮잠을 자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고 독서는 조바심이 났다. (내가 얘보다 똑똑한 것 같은데 이 사람에게는 왜 벌써 ‘자기 책’이 있는 거야?)
  승주가 마땅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을 수 없어 괴로워할 때 장범규가 말했다.

장범규: 나는 너랑 이야기 나눌 때가 좋던데. (I like talking with you.)
승주: 나도 그래. (So do I.)


둘은 학교 안보다 밖에서 훨씬 많은 것을 나누었다. 학교를 벗어나 단둘이 남는 순간 둘은 보다 연인다워졌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걸어나와 서로를 좀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학교가 일찍 파한 어느 수요일 오후, 장범규는 승주에게 우리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장범규와 승주. 영화를 보다 장범규의 손이, 하늘을 향해 하얀 길을 내던 매끈한 팔이 승주의 어깨를 둘렀고 둘은 바짝 붙어 앉아 서로의 숨결을 느끼다 입을 맞추었다. 장범규는 프렌치 키스를 시도하는 것 같았는데 자꾸만 앞니끼리 부딪쳐 혀를 제대로 받아들이거나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각자의 입안에서 웅크린 채 허리를 못 펴는 혀.
  자세가 이게 맞나? 분위기 조성을 위해 로맨스 영화를 틀어두었던 탓에 화면에서는 몇 번이나 불꽃 튀는 키스 장면이 반복되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 서로 반쯤 껴안은 채인 것, 하체는 약간 떨어트리고 상체를 서로에게 바짝 기울인 것, 다른 게 하나 없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거야? 앞니 부딪침 따위 없는 매끄러운 키스는 왜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거야? 승주는 장범규가 원망스러워지려 했다. 그 원망이 장범규를 지나쳐 결국 자신에게 향했음은 물론이었다.
  각도를 틀어가며 다양한 자세로 진한 키스를 즐기는 주인공들에게 경쟁심이 들어 승주는 결심이라도 한듯 결연하게 혀를 쭉 빼고 장범규의 입안을 휘휘 저어보았다. 목구멍 바로 위 혀뿌리 부근이 뻐근해져왔고 장범규는 놀란 듯 서둘러 입을 뗐다.
  그럼 할 수 없지. 다음 단계로 직행이다.
  승주는 힘이 빠진 척, 장범규의 어깨에 얹어두었던 팔을 허벅지 안쪽으로 툭 떨어트렸다. 의도가 적중한 것인지, 범규 역시 키스는 더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인지, 둘은 키스 따위 건너뛰고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소파에 누우니 굳었던 근육들이 풀어지며 서로를 만지는 손길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옷을 벗고 벗길 때만큼은 드디어 어떤 버벅임도 충돌도 없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아―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개운함.
  승주는 벅찬 숨을 몰아쉬며 장범규네 집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승주는 수, 토, 일 오후 두 시간씩 장범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장범규가 장염에 걸려 학교를 빠진 날에도 승주는 하교 후 #3917 비밀번호를 누르고 장범규 집에 들어가 연두색 소파에 주저앉으며 혼자 있을 때나 낼 법한 걸걸한 한숨을 내쉬었다.

*

무얼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던 두 시간의 휴식은 점차 형식을 갖추어갔다. 장범규와 승주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섹스, 함께 씻고 나온 뒤에는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먹으며 구십 분짜리 영화 한 편을 관람하였다. 발견할 때마다 다이어리에 기록해둔, 러닝타임 구십 분 영화 모음 리스트는 거의 동이 났다. 영화를 보지 않는 날에는 장범규가 부엌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 만두라면이나 라자냐 밀키트, 올리브유와 후추를 뿌린 바닐라아이스크림 따위를 먹으며 같은 반 거슬리는 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면 또다른 두 시간이 필요할 것처럼 시간이 금세 흘렀다. 책상 앞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장범규의 집에 좀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도 있었다. 물론 승주는 그 정도의 욕망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도 강인하여 시간이 다 되면 군인처럼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지만 장범규는 그렇지 못했다. 오 분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오 분만 더. 진짜 오 분만 더. 오 분만. 진짜 이제 진짜 오 분만……
  장범규의 간청에 따라 승주는 오 분 주기로 진자 운동을 하는 메트로놈처럼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내가 자신의 곁에 계속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쁘지 않지만…… 장범규는 내가 오 분마다 어떤 계산들을 하는지 모를 거야. 지금 주머니 속 스톱워치가 멈춘 지 두 시간 오 분째, 십 분째, 십오 분째…… 오늘 가능한 공부 시간은 총 열네 시간, 열세 시간 오십오 분, 열세 시간 오십 분…… 가능한 수면 시간과 내일의 기상 시간은……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장범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투명한 얼굴로 오늘 체력장 당시 우리 반에서 BMI가 가장 높게 나온 친구의 윗몸일으키기 계측을 도왔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바닥에 붙어 있으려고 아무리 온 힘을 엉덩이에 집중시켜도 걔가 일어날 때마다 내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거야. 그애는 한 번 한 번 전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는 속도가 아주 느렸고 나는 아주 천천히, 나 지 금 뜨 고 있 잖 아? 속으로 이렇게 되뇔 시간이 있을 만큼 오래 떠 있을 수 있었어. 단 4회뿐이었지만.
  승주는 두 시간이 지나고도 벌써 삼십오 분째 장범규의 집에 추가 체류 중이었다. 장범규가 반 회장으로서 모두가 망설이던 BMI 최상위 친구의 체력장을 돕겠다고 나선 장면에는 어딘가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그것에는 다른 상념 없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에 대해서만 집중케 하는 힘이 있었다. 승주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건의 당사자가, 그 거대한 무릎을 꼭 붙잡고 있던 범규가 당시의 일을 그려낸 이야기의 생생함에 승주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승주는 장범규가 내온 자두를 씹으며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젖힌 거실창 난간에 기대어 섰다. 잘 익은 자두는 두 입 크게 베어 물자 벌써 까만 씨앗이 드러났다.
  맛있지?
  어느새 장범규가 승주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둘은 자두맛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는 나란히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집 앞을 지나는 사 차선 도로. 한참을 내려다보아도 차들은 채 몇 대 지나가지 않았고 그보다는 인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횡단보도 앞에는 밀짚모자에 흰 모시 셔츠를 입은 노인과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 둘,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다른 한 손에는 갈색의 낡은 가죽 가방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승주는 자두씨를 검은 봉지 안에 넣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한쪽 눈을 감고 잠깐의 조준 시간을 가진 뒤 씨앗을 아래로 던졌다. 7층 장범규의 집에서 낙하를 시작한 자두씨는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며 봉지 안에 안착하는 듯했지만 씨앗이 3층을 지날 때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어 버렸다. 꼭 쥔 주먹만큼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 남자는 보행자 신호보다 앞서 바뀌는 차량 신호등으로 가야 할 때를 미리 알고 발을 먼저 내디뎠고 승주의 자두씨는 노인의 밀짚모자 챙에 적중했다.
  기우뚱 벗겨진 밀짚모자 아래 노인의 반짝이는 민머리. 저물기 직전 작열하는 태양빛을 머금어 그 자체도 하나의 작은 발광체 같았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 그야말로 몸을 벌벌 떨었는데 과거 저지른 과오에 마침내 노한 하늘로부터 심판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 심판이 두려워 죽을 것 같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는 태도로 한편으로는 겸허히, 두 손을 모으고 아이구 아이구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고 말았다.
  승주로서는 난생처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순간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집어먹은 노인을 내려다보며 승주 역시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지만 옆에 서 있던 장범규는 그새 화분들 사이로 몸을 숙인 채 캭캭거리고 있었다. 범규는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활짝 웃는 범규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낯설어 설레기보다는 늙은 아귀처럼 못난 것을 보았을 때 드는 생경함이었다. 이게 오늘 계수 도우미를 했던 경험보다 웃긴 일이란 말이야? 통제불능의 웃음을 다름 아닌 자신이 유발했다는 사실만큼은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승주의 마음속 죄책감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승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로 또하나의 루틴을 획득하였다.
  어떤 일을 이 주 동안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우등생 승주의 팁★) 승주는 하교 후 장범규의 집에 가 영화를 보다 사랑을 한 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남은 찌꺼기나 씨앗 일체로 귀여운 비닐 폭탄을 제조해 집 앞 인도를 오가는 행인들을 겨누었다.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승주의 하교 후 두세 시간(어느새 이렇게 느슨해져 버렸다)은 안정감과 후련함, 적당한 스릴까지 뒤섞인 완벽한 여가였다.

*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주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두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며칠 전 수학 시간, 세 가지 숙제 중 한 가지를 깜빡 잊었다는 것을 수업 시간이 오 분 남짓 남은 때에 깨달은 승주는 교실 뒤쪽 자리에서 정신없이 숙제를 베껴대고 있는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어 숙제가 완성된 교과서 한 부를 건네받았다. 자리로 돌아와 미리 펼쳐둔 자신의 교과서를 내려다보며 친구의 책을 펼치려던 찰나, 승주는 첫번째 문제의 정답 란에 기입해야 할 숫자가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쳤다. 다음 문제도, 그다음 문제도, 결국 친구의 책을 베끼지 않고 숙제 분량을 모두 제힘으로 풀어낸 승주는 친구에게 교과서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네 것을 베끼지 않았다는 말을 건네기에는 어쩐지 유난스러워 보이려나 싶어 최대한 가벼운 몸짓을 해 보였다. 어깨를 으쓱했던가? 그런 비슷한. 친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수학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교과서를 걷어 몇 권을 쭉 훑어보더니 베낀 사람은 단번에 일어나는 게 좋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멍청하지만 착한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승주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앞줄에 앉은 친구들은 승주를 뒤돌아보며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거나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진짜 풀었는걸, 너희가 나를 오해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승주는 몰락한 유원지 가운데 낙하한 듯 외로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속이는 법은 없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반 애들은 차례로 빈 책상 위에 양말을 벗고 올라가 수학 선생이 항상 갖고 다니는 짧고 단단한 막대로 발바닥을 맞았다.
  너 왜 안 일어났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 주인이 승주의 자리로 와 말을 붙였다.
  나 안 베꼈어.
  내 책 가져갔잖아.
  책 펴기도 전에 암산이 되길래 결국 내가 다 풀었어.
  승주의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수업이 곧 시작되었고 다시 찾아온 쉬는 시간, 승주는 그 친구와 팔짱을 끼고 매점에 가 커스터드 크림빵을 사먹었다.
  이번에도 승주는 오직 진실과 떳떳이 마주하기 위해, 십육 년간 지켜온 나만의 명제를 어떤 시련 속에서도 지켜내기 위해, 노은빈이 학교 끝나고 오라고 일러둔 곳으로 홀로 향했다. 5층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참. 장범규와 함께 가면 두려울 것도 없겠지 마음을 다잡고 겨우겨우 등교했던 것인데 장범규는 수업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승주에게는 연락도 없이……

*

어제 오후, 승주는 장범규의 집에서 낙지죽을 시켜먹었다. 저녁을 따로 또 먹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범규는 죽을 세 그릇이나 시켰다. 꼬박꼬박 챙기게 된 승주와의 오후 간식 타임 때문인지 범규의 희고 매끈한 배는 점점 불룩해졌고 요 며칠 범규는 자리에 앉을 때 셔츠가 뱃살에 끼지 않도록 손끝으로 살짝 빼면서 앉는 습관까지 생겨버렸다. 나름대로는 옷매무새를 자연스레 다듬는 척 굴었지만 그게 뱃살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기도 어려웠다. 승주가 이걸 세 그릇이나 시켰어? 물었지만 범규는 듣지 못한 척.
  시뻘건 죽이 그릇마다 넘실거렸다. 범규는 콧등에 땀방울이 잔뜩 맺혔다. 나 간 다음 저녁은 또 저녁대로 먹는 것 아냐? 요즘 왜 이렇게 식욕이 좋아진 거야? 농구도 안 한 지 꽤 되었고…… 범규는 숟가락을 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더이상 못 먹겠다! 배 터지겠다!
  배는 몰라도 셔츠만큼은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팽팽했다. 간신히 버티는 흰 단추들. 차게 굳어가는 낙지죽 반 그릇. 승주는 범규에게 집에 비닐봉지가 있느냐고 물었고 남은 낙지죽을 봉지에 소분해 열세 개의 죽 폭탄을 제조했다.
  투~하!
  낙지죽 폭탄은 지면에 닿자마자 질퍽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반경 3미터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승주와 장범규는 베란다 화분들 사이 재빠르게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방금 뭐였죠? 시바 이게 뭐야. 토사물 아니야? 낯선 이들 사이에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고, 이렇다 할 해답을 얻지 못한 행인들은 찡그린 얼굴로 다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고요를 되찾은 거리에 폭탄의 주홍빛 잔해만이 오점처럼 남아 있었다. 멀끔한 거리의 얼굴에 흉터를 내는 자들로서 승주와 범규는 사이좋게 번갈아 폭탄을 던졌다. 소란과 고요를 오가는 몇 차례의 투하 과정이 지나가고, 폭탄이 서너 개쯤 남았을 때, 길 위에 승주, 범규와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무리가 등장했다.
  누군지 알겠어?
  뒷모습이라 잘 모르겠는데.
  같은 학교 애들은 투하 이벤트의 제1 타깃이었다. 학교에 원인도 정체도 모를 것들을 던지는 자(바로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그 웅성거림 가운데 들어앉아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승주는 잠들기 전 여러 번 상상했다. 외고 대비반 문제집을 펼쳐둔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척 고개를 살짝 숙인 승주가 주위 애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동네 폭탄 전설 알아? 엉? 너는 심지어 당했단 말이야? 길을 걷고 있는데 머리 위로 먹다 만 음식 찌꺼기가 쏟아지는 거야. 뒤나 위에서 습격하기 때문에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없어. 그렇게 역겨운 이야기는 처음이다…… 반복적인 상상은 머릿속에 길을 내 언제부턴가 승주의 취침 전 공상은 상상이라기보다는 어제오늘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제 의지대로 흘러갔다. 그런 승주의 눈앞에, 아니 눈 아래 나타난 사냥감이 무려 여섯 씩이나!
  남자 둘, 여자 넷으로 구성된 무리의 뒷모습에서 승주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키가 무리에서 두번째로 큰 여자애가 메고 있는 배낭이었다. 빨갛고, 금속 버클이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가 많은 가방. 노은빈이었다. 그렇다면 저 애들은 노은빈이 속해 있는 무리가 분명했다. 남자애 둘 중 키가 작은 쪽은 정우승, 큰 쪽은 조현웅, 노은빈 옆 고만고만한 애들은 임주은, 구효진, 양지수였다.
  그애들과 훌쩍 떨어진 높이에서도 승주는 등뒤가 서늘해졌다. 승주가 아파트 7층이라는 높이, 시야를 1차 차단해주는 창문, 테라스 통창을 반쯤 가린 화초 더미 뒤에 숨어 익명의 물리력을 행사하는 쪽이라면 그애들은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앞뒤 재지 않고 주먹부터 갈기는 쪽이었다. 익명의 반대항은 무엇이지. 통성명? 너 이름 뭐냐? 거대한 공포는 곧, 통성명의 물리력자들을 제압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으로 양태를 바꾸었고 끝내 충동이 최종값이 되었다. 승주는 곧장 창을 열고 남은 낙지죽 폭탄들을 모두 던졌다.
  폭탄 둘은 도로 위에 떨어졌지만 마지막 하나만큼은 노은빈의 빨간 백팩에 명중했다. 열두 개의 눈동자는 약속이나 한 듯 위쪽을 올려다보고는(그중 몇 손가락은 벌써 정확히 7층의 장범규 집 창문을 향한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듯 아닌 듯.) 허공에 욕을 갈겼다. 승주는 늘 하던 대로 폭탄을 던지자마자 창을 잽싸게 닫고 화분 뒤에 숨었다. 그런데 왜 노은빈과 아이들이 하나둘씩 이쪽을 가리키고 있는 걸까? 노은빈의 손가락은 1층에서부터 하나씩 올라오더니 정확히 일곱번째에서 멈추었다. 옆을 보니 장범규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장범규는 화분 뒤에 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채 서 있더니 곧 아예 거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곧 현관문 밖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누구냐? 나와봐.
  장범규와 승주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집 안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태어난 이래로 가장 고요한 여섯 시간이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영화를 볼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해가 진 뒤에 불을 켤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장범규가 잠깐 편한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방에 들어갔을 때 쪼륵쪼륵 오줌 누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걸까? 어디에다 싸는 거야…… 장범규는 상기된 얼굴로 거실로 나와 승주에게 너도 편한 옷 줄까? 속삭였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승주는 장범규의 집을 나섰다. 하루 루틴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적은 없었는데. 장범규가 화분 뒤에 숨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오늘 낭비한 시간은 앞으로 일주일 동안 하루 한 시간씩 더 공부하는 것으로 보충하자. 핑계는 없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집을 나서자마자, 승주는 문 뒤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던 셋과 마주쳤다. 셋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승주는 뒤통수와 배를 한 대씩 얻어맞았고 거듭 네가 한 짓이 맞냐는 추궁을 당했지만 끝까지 부인했다.
  나 진짜 아니야……
  뭔 줄 알고 아니래.
  아니라니까……
  아파트 복도는 한 사람을 끝장내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기에 셋은 그쯤 해두기로 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노은빈은 거짓말하지 말고 내일 어디어디로 오라고, 안 오면 죽여버린다고 승주의 뺨을 마지막으로 갈기고는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 셋이 돌아간 뒤에도 장범규는 안쪽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릴까 무서워 오줌도 방에서 싸던 애가 복도의 소란을 듣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승주는 초인종을 누를까 했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승주가 그애들을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그애들 역시 승주를 알고 있었다. 승주 역시 익명성의 그늘 뒤에 숨기에는 너무 독보적인 사람인 탓이었다. 주먹을 꽂기 전 흠칫하는 눈빛들을 승주는 보았다. 학교 티브이에 나와 학년 대표로 성적우수상을 받던 애잖아. 네가 왜……? 하지만 망설임에 앞서 튀어나와버린 주먹. 퍽 퍽 퍽.

*

계단참에는 어제보다 두 명이 불어난, 총 여덟 명이 팔방진을 펼친 듯 한눈에 들어오는 구도로 앉거나 서 있었다. 승주는 크게 세 가지 원칙을 갖고 그들 앞에 섰다. 트레이닝. 트레이닝. 원칙 세 가지를 뇌 속에 완벽히 각인시킨다.
  첫번째, 진실만 말할 것.
  두번째, 어제와 같이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도 결코 물러나지 말 것.
  세번째, 곧 죽겠다 싶은 것이 아니라면 끝까지 버틸 것.
  그애들은 승주가 예상한 대로 전날처럼 바로 주먹을 내리꽂지는 않았고 오히려 승주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승주에게는 열여섯 개의 눈동자가 내리 쏟아지는 대신 때때로 두 개가 깜빡, 네 개가 깜빡 하며 간헐적으로 시선이 꽂혔다.
  장범규는?
  노은빈이 승주를 향해 이렇게 묻자 그제야 아이들이 한 번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학교 안 나왔어.
  노은빈이 왜 그렇게 묻는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순순히 답을 내줄 뿐인 승주였다.
  거기 장범규네 집이잖아. 너네 집도 아닌데 왜 네가 한 게 아니라고 말 안 했어?
  응?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애들이라면 그런 것쯤 하룻밤 사이 알게 될 수도 있는 건가. 어제 흠씬 맞으면서 분명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아니라고 했던 것이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승주의 원칙은 캐러멜처럼 유연했다. 왜 말 안 했느냐는 부드러운 말씨의 질문이 꼭 너를 해칠 의도는 없다는 것처럼 들려 긴장이 누그러지면서도, 그렇게 단숨에 안도를 해버리는 자신이 어쩐지 싫다고, 승주는 생각하며 눈앞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면 위험한 쪽은 장범규일 것이었다. 이 애들은 승주 대신 장범규를 타깃으로 정했다. 왜 승주는 타깃에서 제외해준 걸까? 그 이유는 몰라도 결코 장범규를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장범규는 지금 같은 상황은 꿈에도 모르고 벌벌 떨며 침대에 누워 있겠지.
  얘가 너 예쁘대.
  노은빈이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말했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쥐고,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옥상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며, 노은빈은 왼쪽 남자애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좋니? 물었다. 남자애의 이름을 승주는 이미 알고 있었고…… 부끄럽게 웃는 조현웅이 승주는 정말 싫었다. 못생겼어. 무엇보다 곱슬기가 돌아 두개골이 다른 사람의 세 배 정도는 더 두꺼워 보이도록 만드는 헤어스타일이 치명적이었다. 머리가 불쑥 솟은 초식 공룡 같았다.
  그렇지만 승주도 조현웅처럼 헤헤 웃어버렸다. 그러자 오른쪽 아래 앉아 있던 양주은이 물었다.
  근데 너 장범규랑 사귀지? 어디까지 했어?
  이런…… 계속 헤헤 웃을 수밖에. 승주가 헤헤 웃으니 일곱 명의 아이들도 낄낄 웃고 곧 옥상에서 돌아온 노은빈도 웃음 파도에 합류해 큭큭 웃었다. 웃음이 가득한 계단참! 조현웅은 뭐가 좋다고 계속 웃는 건지. 그런데 웃음을 언제 멈추어야 하나요? 아이들이 멈추지 않는다면 승주도 영영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혹은 멈추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장범규는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이지…… 장범규는 나보다도 키가 작은 정우승과 붙어도 질 것이다…… 농구에도 손을 놓은 요즘이라면 더더욱…… 장범규는 손이 작아 주먹도 작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곧 종이 칠 텐데…… 물리 선생은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준다고…… 얘들아 너희들은 수업 안 듣니? 헤헤.
  그때 노은빈이 말했다.
  빨리 내려가자. 곧 종 칠 듯.
  승주는 여덟 명의 아이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에는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서둘러 교실로 돌아가던 아이들이 무심코 이쪽을 올려다보더니 그 사이 속한 승주를 인지하고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쪽에서 본다면 승주까지 아홉 명의 아이들로 보이겠지.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흘러간 것인지. 승주는 그저 헤헤 웃었을 뿐인데 자신의 원칙들을 저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원칙. 뭐였더라? 진실만을 말하는 것, 그리고……

*

노은빈과 친구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버들치라고 불렀다. 버들치가 맑은 물에만 산다는 점이 멋지다는 이유에서였다. 몇몇은 자신 있게 우리 버들치가― 하며 스스로를 칭했고, 몇몇은 버들치 그것 좀 쓰지 말라고 하면서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날이면 달력에 ‘버들치’라고 썼다.
  버들치의 거점은 곳곳에 있었다. 학교 계단참만 해도 승주가 처음 그들을 만났던 곳 외에 세 군데가 더 있었고, 옥상은 당연히 그들의 것, 오래된 아파트 놀이터 정자, 동네의 경계에 위치한 고등학교 뒷산, 양지수의 집, 엔진이 고장 난 뒤 그저 방치해두고 있다는 정우승네 엄마 차…… 그들은 그곳에서 그저 앉아 있거나 아지트와 아지트 사이를 끝없이 헤엄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승주는 하교 후 장범규네 집에 가는 대신 버들치와 그들의 거점을 쏘다녔다. 버들치에게는 늘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다. 주로 다른 무리들의 아지트 침범, 혹은 사랑 싸움이었다. 임주은과 오래 사귀던 이유찬이 배윤지에게 외투를 빌려주었대. 미친 거 아니야? 승주는 그들 안팎의 방어전에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일단 기다려봐, 따위의 말뿐이었지만 아이들은 끄덕거렸다. 알겠어, 일단 기다려볼게. 그러다보면 문제가 정말 해결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승주를 버들치에 없던 두뇌로서 인정해주는 눈치였다. 승주로서도 그들을 마냥 멍청한 아이들로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 다른 무리들과의 싸움을 두 차례 직접 목격했던 탓이었다. 피하고 꽂는다. 피하고 피하고 꽂는다. 상대가 주춤거릴 때면 한 번 더 꽂는다. 땀과 흙에 물든 교복. 그러나 얼굴만은 가뿐했다.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버들치는 거점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고 이미 인근 가장 좋은 곳들을 점유하고 있었기에 다른 무리들의 것을 빼앗으려 들지도 않았다. 누군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면 혼쭐을 내주기는 했으나 먼저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버들치라는 이름, 어쩌면 정말 잘 지은 것도 같다고 승주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 중 누가 버들치라는 명칭을 알고 있었을까? 1급수에 사는 물고기, 그렇게 검색이라도 한 걸까? 음……
  옥상이나 뒷산 같은 높은 곳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발밑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물고기들이 그 안에서 헤엄치기도 했다. 우리는 시간 위에 있다. 동네는 평평하다. 나는 여기에 있다.
  흘러가는 시간이 이렇게 낱낱이 보이는데, 왜 모든 변화는 갑작스러운 걸까? 인과라는 게 실종된 것처럼. 나조차도 내가 여기에 왜 앉아 있는지를 알 수가 없고. 이게 바로 생존력이라는 걸까? 진화는 어쩌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
  우등생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던 승주는 버들치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승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승주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또다른 무기들이 있었던 덕분에(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현웅의 호의도 큰 몫을 다해 주었고……) 무사히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겪어왔던 바와는 영 딴판인 세계가 자신을 덮쳐올 때, 무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무기를 제때 뽑아들지 못한 사람은 원래 머물던 세계의 기반마저도 한순간에 위태로워지기 일쑤였지만 승주는 달랐다.
  버들치는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은 먹지 않고 매점에서 빵과 젤리 따위를 잔뜩 사다가 운동장 등나무에 부려두고 배를 채웠다. 등나무에서는 농구장이 잘 보였다. 승주가 급식실에서 교실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측면으로 바라보던 시선과는 달리, 등나무에서는 양쪽 코트가 한눈에 균형감 있게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십오 분쯤 지나면 농구장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우르르 등장해 치열한 경기를 벌였다. 버들치는 경기를 훌리건처럼 관람했다. 플레이어라면 등나무 관중석을 의식하지 않기가 어려웠고, 이미 그들 사이 문화가 된 지 오래인 듯 멋진 슛을 성공한 플레이어는 등나무까지 뛰어와 버들치와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테이블 위 간식을 주워 먹고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가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승주도 이름 모를 농구복 인간들과 손뼉을 맞추었다. 버들치 가운데 앉아 젤리며 과자를 주워 먹던 손을 내밀기만 해도 삼점슛의 주인공이 달려와 손바닥을 맞대주었다. 미래의 승주가 성취할 수 있는 무수한 직업들의 목록에 구단주를 넣어보자. 그가 느낄 감각이 바로 이런 걸까? 앞에서는 선수들이 장기 말처럼 널뛰고 있고 그들이 이룬 성취는 곧 내가 이룬 결과물이 된다. 열여섯 승주가 어렴풋이 예상했던 구단주로서의 매일이 제법 정확했던 것은, 승주의 감각이 스포츠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이면도 동시에 투시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승주는 덩크슛, 레이업슛, 플로터, 스카이훅슛, 페이드어웨이, 뱅크슛, 딥쓰리 주인공들과 손을 맞대며 범규를 떠올렸다. 범규도 여기에 있었는데. 범규는 지금 자기 책상에 엎드려 있겠지. 골을 쏘던 양손을 품 안에 꽁꽁 묶어두고서.
  버들치는 당한 일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위험의 싹은 밟고 자르고 뽑아버려야 더 커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버들치는 직업적 주먹의 일상을 정확히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범규의 세계는 겨우 자신의 책상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사거리 괴폭탄 투척 사건의 모든 혐의는 버들치의 위세 아래 범규의 독단적 행동으로 결론지어졌다. 나도 그 폭탄 맞아봤다는 애들이 반마다 서너 명씩 등장해 범규의 몰락을 부추겼다.
  그런데 누구세요? 범규와 나는 너희에게 폭탄을 던진 적이 없는데요. 우리는 폭탄을 맞은 사람들이 위쪽을 올려다보던 그 경멸 섞인 눈길들을 낱낱이 기억하는데요. 거기에 너희들과 같은 범인(凡人)은 없었는데요. 없었던 너희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찾아가 해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해명할 수는 있었겠지만……
  장범규도 고분고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이, 어느 날엔가는 왜 승주에게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이들 모두 일순간 얼어붙었다. 승주는 최우등생인 데다가 버들치이기까지 한걸? 그런 승주가 이런 미치광이 살인미수 범죄에 가담했다고? 현장에서 장범규의 마지막 절규를 목격한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비열한 대화가 퍼져나가려던 때, 노은빈이 장범규의 뒤통수를 갈기며 말했다. 얘는 왜 잡고 늘어져? 승주가 헤어지자고 한 게 그렇게 짜증 나? 승주는 그때까지 장범규에게 헤어지자는 말도 차마 못 했었는데, 노은빈의 선언으로 둘의 관계는 비로소 최후를 맞이했다. 그때부터 장범규가 승주에 대해 하는 말은 모두 차인 것이 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푸념과 중얼거림이 되어버렸고, 아이들은 몰락한 장범규에 대해 떠드는 일로 수개월은 너끈히 보낼 자신이 있어 보였다. 물론 개중에 승주가 진짜 그 짓에 동참했다는 소문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뒷이야기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오히려 승주에게 미스터리함만 더 부여해주었다.

*

―승주, 자?
―이제 누웠어.
―오 다행이다~ 내일 뭐 해?
―이렇게 연락하는 건 처음이네. 그냥 아침 운동하고 독서실 ㅎㅎ
―오 나도 아침에 운동하는 것 좋아하는데 ㅋㅋ
―낮이 되면 너무 더워서!
―아침에 같이 산책할래? 내가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산책?
―응 내가 방해하는 건가?
―아냐, 산책 좋아. 내일 보자!
―내일 ㅇㅋ 잠 못 자겠다 ㅋㅋㅋ


조현웅은 다음 날 아침 9시 10분, 집 앞에 도착했다며 전화를 했다. 조현웅의 연락에 잠을 설친 것은 승주도 마찬가지였다.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인데 웬 아침 산책? 아침 운동은 길어도 한 시간 삼십 분 안에 끝내고 독서실에 가야 하는데, 조현웅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 토요일이니까 조금 늦어지는 것쯤 괜찮다, 괜찮아. 허비할 시간이 길어질지 모르니 어서 잠들어야 해. 지금 바로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정신이 점점 또렷해져 승주는 한 시간 이십팔 분씩이나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승주는 한여름 가벼운 옷차림과는 사뭇 상반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지난해 유난히 지독했던 태풍에 단지 내 가로수 군락이 유실되어 그 빈자리에 키가 작은 묘목들이 열심히 연둣빛 잎사귀를 피워내고 있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 곁에 서서 작은 스포츠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승주를 기다리고 있는 조현웅은 머리통이 평소보다 더욱 길어 보였다. 뭔가를 바른 듯 머리카락이 한데 뭉친 채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바로 옆 묘목의 길게 뻗은 나뭇가지와 머리통 길이가 정확히 같아 거리감이 왜곡된 탓인지 승주는 문득 어지러워져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조현웅 쪽에서도 나름대로 오늘의 산책에 대한 대비를 한 것 같았다. 조현웅은 ‘그 정자’ 쪽으로 걷자고 했다. ‘그 정자’는 고등학교 세 개가 한데 몰려 있는 지구의 가운데 위치한 동산 위를 일컫는 것으로, 도로 쪽에서 동산으로 바로 접어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했지만 고등학교 운동장을 경유하면 훨씬 완만한 산책로를 거닐 수 있었다. 조현웅과 승주가 통과할 고등학교 부지는 승주가 곧 시험을 앞두고 있는 외국어고등학교였다.
  외국어고등학교는 교문이 외국의 어느 고등학교인 듯, 고풍스럽고 거대한 녹색 철문에 독수리상이 조각된 모양이었다. 학교는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와 디귿자 형태로 이웃해 있었고 두 학교가 한 운동장을 쓰도록 되어 있었기에 운동장이 승주네 중학교와 비교하자면 훨씬 넓었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 둘레의 벽돌길에 접어들자 조현웅이 말했다.
  외고 애들은 화장 안 해도 예쁘대.
  그런가…… 승주도 화장이라면 거의 안 하는 편이었다. 스킨, 로션, 선크림을 바르는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근데 너도 그래. 화장 안 해도 엄청 예뻐.
  조현웅은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들떠 보였다. 오늘의 아침 산책 경로는 승주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조현웅 자신을 위한 것 같았다. 뭐랄까, 예비 외고생과 함께 외고 거닐어보기 체험? 승주가 계단참에서 버들치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기분을 조현웅도 만끽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그렇게 붕 떠 있는 조현웅의 뒷모습이 언짢지만은 않았다. 아침 공기가 적당히 시원하기도 했고 또 승주로서도 이 학교를 이토록 천천히, 아무도 없을 때 거닐어보기란 처음이었다.
  같이 가!
  승주는 잰걸음으로 조현웅의 뒤를 쫓았다. 학교 건물과 바로 인접한 길은 벽돌길이 아닌, 잿빛 시멘트 길이었다. 길은 처음의 회색빛을 잃고 분홍, 노랑, 파랑, 알록달록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것에 관해서라면 조현웅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지. 승주도 학원에서 몇 번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괴담인 줄 알았건만……
  회색빛 길을 채도 높은 색깔로 수놓은 재료는 다름 아닌 분필이었다. 운동장과 산책로를 공유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창문 아래로 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분필 따위를 던져서 맞추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고. 개인 대 개인의 원한 때문은 아니고, 독서실 건물을 외고 학생들만 쓸 수 있도록 한 것, 운동장을 함께 쓰는 것, 그마저도 외고 체육대회 때는 한 달 내내 운동장 상당 부분을 비워주어야 하는 것, 정문 디자인의 무게감 차이…… 등에서 비롯된 불만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야 대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 길을 실제로 걸어보니 분필 투척은 왕왕 벌어지는 정도가 아닌 듯했다. 길 전체가 오색찬란했다.
  승주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조현웅은 킥킥대며 이렇게 말했다.
  너도 그거 좋아하잖아. 위에서 뭐 던져서 사람 맞추는 거.
  승주는 조현웅이 7층에서 던진 화분을 정수리에 정통으로 맞은 듯한 강한 충격을 느꼈다. 지금까지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뭘까. 네 약점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경고? 버들치는 장범규에게 그러했듯 언제든지 승주의 세계를 납작하게 짓눌러버릴 수 있다는 힘의 과시? 네 약점을 모른 척해줄 테니 잘 지내보자는 악수? 언제까지고 네 약점을 숨겨주겠다는 사랑 고백? 생각도 눈치도 없는 조현웅의 경솔할 뿐인 망발? 승주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조현웅의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조현웅은 말했다.
  이쪽으로 와.
  조현웅은 정자에 풀썩 걸터앉더니 옆자리를 툭툭 쳤다.
  정자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할 이야기가 영 마땅치 않았다. 그건 조현웅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조현웅은 자꾸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 지금 같이 있어. 의도가 어찌 되었든 조현웅은 승주와 있는 것을 다른 애들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래, 조현웅은 날 좋아한댔다. 노은빈도 그렇게 말했고 지금 단둘이 주말을 보내고 있기도 하고. 시간은 벌써 두 시간 반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조현웅은 전화로 친구들을 부르기까지 한 것인지, 학교 후문으로 나가니 그 앞에 노은빈을 비롯한 애들 여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조현웅과 승주를 보고 우우 야유를 보냈다.
  승주도 가는 거지?
  노은빈이 말했다.
  아직 안 물어봤는데. 승주, 너도 노래방 같이 갈래?
  조현웅이 승주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 그래!
  승주의 백팩은 다른 여섯 명이 맨 가방의 무게를 모두 합한 것보다 묵직했다. 승주는 다음 한 주 동안은 매일 두 시간씩 잠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며 노래방에서 두 곡 반 정도의 노래를 불렀다. 한 곡을 완창하지 못한 것은 갑자기 다른 학교 아이들이 들어와 승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노래를 채 간 탓이었다. 승주는 옆 학교 아이들 다섯 명과 번호를 교환하였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옆 학교 아이들에게는 승주네 버들치와는 다른, 과일 냄새랄까 그런 것이 풍겼다. 조현웅은 그애들에게 승주를 재밌는 애라고 소개했다. 전교 1등이잖아, 조현웅이 말하자 오오― 공부 잘하는 애랑 처음 얘기해본다, 노래방 가득 괴성이며 욕설이 한동안 오갔고 카운터를 보던 주인이 문틈으로 살짝 이 안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승주는 재밌는 애가 된 것이 조금 기쁘기도 했다. 뭐라 소개될지 조마조마하였는데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았다. 조현웅 몰래 다른 애들 몇과 은근한 눈빛을 나누기도 했다.
  그날 밤 그애들 중 하나가 승주에게 오늘 재밌었다, 내일은 뭐 해? 독서실 가? 메시지를 보냈고 승주는 잠시 답장을 망설이다 응, 간단히 답장을 보내두고는 내일은 일찍이 다른 독서실로 짐을 옮겨두어야겠다 다짐하였다. 너무 짧은 답장을 보낸 탓일까 그애로부터 더이상 메시지가 오지는 않았는데, 이 한마디 주고받음이 혹시 조현웅을 화나게 할 수도 있을지…… 승주는 그 생각에 휩쓸려 또 한번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눈을 떠야 했다.

*

7월 마지막 주 목요일, 기말고사가 끝나고 모두 폴폴 흩어져 방학만을 기다릴 때 승주는 재학 중인 중학교 대신 일전에 조현웅과 거닌 적이 있던 외국어고등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외고 입시 당일. 기능성 소재의 반팔 티셔츠와 면 100퍼센트 트레이닝복 바지,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 지나치게 찰 것을 대비한 얇은 보라색 카디건도 잊지 않았다.
  승주가 중점적으로 준비한 부분은 창의력 수학 시험 부문이었다. 이번 기말고사에도 무리없이 전교 1등을 거머쥐고 교내 방송에서 학년 대표로 상장을 수여받은 승주가 내신 점수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고, 입시 시험에 출제될 다른 과목에도 제법 대비가 되어 있었으나, 문제를 읽는 순간 실마리를 잡지 못하면 영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인 창의력 수학 시험이야말로 합격 여부를 좌우할 유일한 변수였다.
  다섯 개의 과목을 치르는 동안 승주는 다음과 같은 루틴을 엄수했다. 답안지를 제출하라는 명이 떨어지면 더이상 꾸물거리지 않기. 가장 먼저 펜을 놓기. 펜을 내려놓자마자 귀마개를 끼고 눈을 감기.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과 말을 섞는 대신 멀리 아무도 없는 유원지를 거니는 상상으로 마음을 연못처럼 잔잔하게 만들기. 그런 와중에도 말을 걸어오는 친구가 있다면 책상에 그대로 엎드려버리기. 방해꾼들은 유원지 연못에 처넣어버리기. 다음 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귀마개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면 귀마개를 뽑고, 연필을 깎아 벼리고, 수정 테이프가 잘 작동하는지 점검하기. 다음 시험에 진심을 담아 임하기.
  나쁘지 않다, 이대로라면.
  5교시를 마치고 승주는 이렇게 생각했다.
  승주는 중학 생활을 보내며 자신이 점한 위치가 만족스러웠다. 뭐랄까…… 우등한 돌연변이라거나, 어느 누구의 입도 금세 다물게 할 법한 융합형 인재랄까.
  그리고 마침내 창의 수학 문제지를 받았을 때, 승주가 1번으로 마주한 문제의 지문은 다음과 같았다.
(가형) 그림은 일곱 개 지구로 나뉜 유원지의 조감도다. 유원지는 다섯 지구의 외곽과 호수로 둘러싸인 이형 지구로 구성되며, 이형 지구로 향하려면 반드시 나룻배를 타야 한다. 유원지에는 서로 다른 나룻배 일곱 척(가~사)이 있다. 각 구역에는 일곱 척 중 하나의 배가 배정되어 있으며, 각각의 배가 어느 구역에 배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래 그림에 등장하는 재범이가 핫도그를 사먹고 오리배를 탄 뒤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퍼레이드를 관람하려 할 때, 일곱 척의 나룻배가 각각 어느 구역에 배치되어 있어야 이동 시간의 총합이 최소가 되는지 정확한 풀이와 함께 답하여라.

어어 유원지다 유원지! 방금 전 쉬는 시간까지 머릿속으로 거닐었던. 승주는 문제를 읽으며 문제에 몰입하는 대신 문제로부터 퐁 퐁 멀어져 나룻배에 탑승했다. 버들치와 유원지를 여행하면 어떤 재미가 있을까. 유원지를 걷다 마주친 다른 학교 애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조현웅은 그럴수록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하고. 이동 시간의 총합이 최소가 되는 것보다는 최대가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더 많은 눈길들이 오갈 테니까. 헤헤.
  승주는 ‘최소’를 ‘최대’로 읽고 그에 대한 완벽한 풀이법과 답을 도출해 냈다. 나룻배를 타고 잔잔한 호수 위를 가로지르듯 다음 문제도, 그다음 문제도 의심 없이 막힘없이 풀어 나갔다. 오 분 남았다는 감독관의 안내가 있기 훨씬 전, 승주는 모든 문제 풀이를 마쳤다. 답변을 OMR 카드에 옮겨 적는 즐거운 시간. 호수 안을 뱅뱅, 호수 안을 뱅뱅, 물결을 부드럽게 가로지르는 승주의 나룻배. 다음 단계로 다음 단계로 매끄럽게 유영하던 승주는 예상보다 빠르게 마지막 장에 도달하였다.
  그렇게 시험이 끝났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승주는 펜 뚜껑을 닫고 두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린 뒤 눈을 감았다. 교실의 다른 응시생들보다 십이 분이나 빠른 속도였다. 문득 자리에 솔솔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고 그와 동시에 가사 없는 멜로디가 떠올라 승주는 시험지를 한 번 더 검토해보는 대신 내내 그 가락을 흥얼거리는 데 시간을 다 썼다. 버들치와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 불렀던 노래 같은데 그의 얼굴만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래된 가요 같기도 하였고 바로 어제 발매된 노래 같기도 하였다.
  음음…… 음음…… 어디로부터 내려온 멜로디일까 이것은. 어디로부터…… 노래의 주인공이 조금씩 또렷해져갈 때 학교 종이 울렸다. 어렴풋한 머릿속 멜로디를 경박한 종소리가 해일처럼 뒤덮었다. 승주는 양손을 머리 뒤로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감독관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정기현

2023년 문학웹진 《LIM》에 단편소설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모여 강을 이루면 그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드넓은 강의 한 조각을 똑 떼어다가 들여다보고 싶었다.

2025/05/21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