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벽의 건물이 있다. ‘안녕하세요’ ‘사고뭉치‘ ’웃음‘ 같은 글자들이 각자의 방에서 쉬거나 머물고 있다.

나는 ‘망치뭉치사고뭉치’입니다. 별명이냐고요? 아뇨. 내 이름입니다. 나 자신이기도 하고요. 나는 글자입니다.
  나는 글자들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온갖 글자들이 있습니다. 사전에 있는 글자도 있고, 사전에 없는 건 물론이고 그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이 쓰지 않는 글자도 있습니다. 잘 쓰이지 않는 글자들은 구석에 콕 박혀 우울한 날들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써줘야만 이곳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우리 글자들의 꿈입니다.
  ‘안녕하세요’나 ‘사랑’처럼 사람들이 많이 쓰는 글자는 이곳에 오자마자 나갑니다.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바로 사라져버립니다. 글자에게 발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떻해’나 ‘몇일’처럼 사람들이 많이 틀리는 글자도 금방 나갑니다. 얼마 전에는 ‘짜증나ㅏㅏㅏㅏㅏ’도 나갔습니다. 누군가 낙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보면 약간의 운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전에 나오는 글자들은 사정이 좋습니다. 누가 그런 글자를 쓸까 싶어도 일단 사전에 있으면 금방 불려갑니다. 인간 세상에는 특별한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도 많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글자 나라의 장기 투숙객입니다.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지요. 망치도, 뭉치도, 사고뭉치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쓰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여자가 내 이름과 비슷한 글자를 적었습니다. 그 모습이 글자 나라에 생중계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글자를 적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모든 영상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이름이 적히는 순간만큼은 눈앞에서 또렷하게 재생되지요.
  내 몸이 붕 떠올랐습니다. 일단 한 글자라도 자신과 똑같은 글자가 적히기 시작하면 공중으로 떠오르게 되거든요.
  나는 여자를 응원했습니다.
  ‘내 이름을 끝까지 적어주세요. 제발.’
  ―망치뭉치사
  여자가 여기까지 적었을 때,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바깥세상이 코앞 아니, 자음 앞까지 온 것 같았지요. 그렇지만 나는 곧 바닥으로 떨어지고, 함께 떠올랐던 ‘망치뭉치사랑해’가 글자 나라를 떠났습니다.
  그 여자는 망치와 뭉치라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만 커졌습니다. 뭐, 이곳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조금 침울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툭 쳤습니다.
  “미, 미안해.”
  ‘보이저1호19770905’입니다.
  “괜찮아.”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애는 어리바리 뒷걸음질치다가 ‘척박척사’와 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글자 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생 같습니다.
  “못 보던 글자군.”
  ‘척박척사’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습니다.
  “안녕. ‘잘난체버섯’이 구석 자리로 가라고 해서 왔어.”
  “자기가 뭔데 가라, 마라야?”
  ‘척박척사’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처럼 뒤에 숫자가 달리면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힘들대.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키라는데 어쩌겠어.”
  ‘보이저1호19770905’가 훌쩍였습니다.
  ‘잘난체버섯’은 다른 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다툼이 생기곤 합니다. ‘잘난체버섯’이 있는 ‘환한 자리’에는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습니다. 청소기에 빨려들어가듯 글자가 세상으로 휘리릭 빨려들어가는 걸 그동안 수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금방 세상 밖으로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출구 쪽에서 얼쩡거렸지요. 하지만 점점 뒤로 밀리고 밀려서 이곳 ‘구석 자리’까지 왔습니다. 구석 자리에는 나 말고도 오랫동안 글자 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무식한 버섯 따위의 말은 신경쓰지 마. 그 녀석은 네 이름이 태양계를 탐사한 우주선이라는 것도 모를걸.”
  모르는 게 없는 ‘척박척사’가 ‘보이저1호19770905’를 위로했습니다.
  “나도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렇고말고. 혹시 알아? 외계인이 네 이름을 적어줄지. 기다려보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외계인을 따라 우주까지라도 갈 거야!”
  ‘보이저1호19770905’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우주라……’
  나는 출구를 바라보며 상상했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무얼 할지요.
  나는 사전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틀린 글자 사전』 『특이한 단어 사전』 아니면 『사전에 안 나오는 글자 사전』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글자 나라 구석 자리 친구들을 모두 불러올 수 있겠지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척박척사’의 외침이 들렸습니다.
  “윤지다!”
  ‘척박척사’의 말에, 구석 자리 글자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듯이 우리는 영상을 봅니다. 우리는 윤지가 나오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윤지 엄마의 눈썹이 구불구불하게 변했습니다. 화났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눈썹부터 찌푸립니다. 수많은 영상을 보면서 알게 되었지요.
  탁! 윤지 엄마가 일기장을 내려놓았습니다.
  “읽어봐.”
  윤지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풀바츨 걸을때 개똥이 있을까바 겁나따.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어떡해!”
  윤지 엄마가 몇 장을 더 넘겼습니다.
  “이건 또 뭐야.”
  ―나에 장례희망은 과학자다.
  “장례는 사람이 죽었을 때 치르는 거잖아. 죽어서 과학자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윤지가 킥킥거렸습니다. 윤지 엄마가 윤지를 노려보았습니다. 윤지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연필을 꽉 쥐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만 “푸하하!” 하고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배윤지! 지금 웃을 때니?”
  윤지 엄마는 화를 냈지만, 윤지 덕분에 글자 나라는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윤지가 일기를 쓸 때마다 글자 여럿이 이곳을 떠났습니다. 특히, ‘풀바츨’이나 ‘100쩜’처럼 절대로 불릴 것 같지 않던 글자들이 떠날 때는 박수까지 나왔습니다. 축제나 다름없었습니다.
  영상을 보던 ‘보이저1호19770905’가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웃자. 크게 한번 웃어보자. 춤, 춤, 춤, 춤을 추자. 노래하자, 손을 잡고. 이건 우리의 이야기야. 온 세상을 누비게 될 거야. 꿈꿀 거야. 그날이 오길.”
  글자들은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었습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글자도 있었습니다. 흥겨운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게 누구지?”
  ‘규범화석’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규범화석’은 구석 자리의 터줏대감입니다. 글자 나라의 어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보이저1호19770905’를 쏘아보며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 녀석이로군. 노래는 금지야. 얌전히 지내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은 무시무시하게 들렸습니다. 모두 슬금슬금 몸을 피했지요. ‘보이저1호19770905’는 ‘규범화석’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해맑게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구석에 박혀서 우울하게만 지내라고? 난 싫어.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노래하자.”
  ‘척박척사’가 ‘보이저1호19770905’의 숫자를 쿡 찌르며 눈치를 줬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규범화석’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즐거워서 노래하는 거지? 남아 있는 우리는 패배자일 뿐이야!”
  글자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습니다.
  ‘보이저1호19770905’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 우리도 이곳을 나가게 될 거야.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규범화석’이 ‘보이저1호19770905’를 위협하며 비웃었습니다.
  “백 년 동안 잠들어 있는 글자도 있다는 걸 몰라서 그래? 헛된 희망은 버리는 게 좋아.”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영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렇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작은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나왔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뭐가 나아지는데?”
  맙소사!
  그 말을 한 건 바로 나였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나는 그저 ‘보이저1호19770905’가 당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글자 나라에 머물던 친구들이 세상으로 나갔어. 우리는 기쁨을 표현한 것뿐이야. 누구도 그걸 막을 순 없어.”
  ‘규범화석’이 눈을 부라렸습니다.
  “애송이들이 뭘 안다고 나서는 거냐. 글자들은 조용히 지내길 원해. 그게 규칙이다.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규범화석’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글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부르는 게 좋았어. 그렇게 신나는 일은 처음이었어.”
  “내가 떠났을 때도 너희들이 이렇게 기뻐하면 좋겠다.”
  글자들이 우리 편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둘 목소리를 높이자 ‘규범화석’은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이랑 말을 섞은 내가 바보지. 잘 들어! 너희들도 영원히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이곳에 남게 될 거야. 그때도 노래 부르며 춤출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규범화석’이 씩씩거리며 돌아갔습니다. 그가 떠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고마워. 날 도와줘서.”
  ‘보이저1호19770905’가 내게 인사했습니다. 나는 쑥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척박척사’가 구석 자리 글자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기디림’ 나가는 거 봤지?”
  “봤고말고.”
  ‘기디림’은 구석 자리를 오래 지킨 친구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나는 ‘기디림’이 떠나던 날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기’ 자가 써지자 ‘기디림’의 몸이 떠올랐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기다림’이나 ‘기대’가 나갈 것으로 생각했지요.
  화면 속 남자는 ‘디’ 옆에 리을을 바짝 붙여 적었습니다. 가끔 획을 뭉뚱그려 적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글자는,
  ―기디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우리는 ‘기디림’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세상으로 나가 그와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우리도 포기해서는 안 돼!”
  ‘척박척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글자들이 자리에서 붕붕 뛰었습니다. 나도 뛰었습니다. ‘보이저1호19770905’의 숫자가 조금 꿈틀거렸습니다.
  뒤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일 거야. 순서는 중요하지 않아.”
  “옳소!”
  글자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오늘따라 환한 자리가 더욱 밝아 보입니다. 세상으로 떠나는 글자들이 많은지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구석 자리 친구들이 한 걸음씩 앞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내 몸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적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나는 영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망치뭉치……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학생이 글자를 적고 있습니다.
  ―……사고뭉
  정말 내 이름을 적는 걸까요?
  어어, 내 몸이 조금씩 움직입니다. 출구, 출구 쪽으로…… 어어어!

김성운

『행운이 구르는 속도』로 제4회 사계절어린이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중1의 세계』(공저)에 참여했습니다.

영원히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남을까봐 마음 졸이던 시간이 제게도 있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2025/06/04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