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반복과 번복, 생성함수로서의 패턴
김건영의 『널』
김건영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행하는 바깥의 다른 텍스트 또는 맥락을 불러오는 가운데 그와 교호하며 또다른 무언가를 태어나도록 하는 언어의 독특한 운행이다. 피보나치수열과 같은 모습으로 『파이』에서부터 그려내고자 했던 움직임이 바로 그와 같은 생성의 알고리듬과 패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단순히 패러디 또는 오마주, 그리고 그러한 것들과 함께 작용하는 언어유희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김건영 시의 운행은 삶을 텍스트로 옮기고 그에 새로운 삶을 부여함으로써 다시 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발현과 함께한다. 따라서 김건영 시의 언어는 바깥을 안에서 반복하고 또 번복한다.
김건영의 시는 바깥의 텍스트들을 가져오면서 그 맥락을 전유하여 우리 삶의 여러 모습을 함께 풍자한다. 이를테면 「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의 제목으로 쓰인 표현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 속 명대사를 비튼 말인 동시에, 부동산 개발 광풍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웃기지 않습니까 내 집값은 오르고 부동산 시장은 안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게 시냐고 묻는 겁니까 그럼 지금 집값은 말이 되냐고 되묻고 싶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사회적 현실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굳은 인식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듯 “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라고 하며 시의 목소리는 부동산 문제로 대표되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모두가 죽음의 레이스만을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수라장(修羅場)과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속한 구조 자체의 문제를 볼 것을 촉구한다.
마찬가지로 시집의 첫번째 장 이름으로 쓰인 문장 가운데 “없는 것을 사고파느라 미래까지 가져갔다”라는 표현 역시 우리 삶의 시간이 오늘날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외(敎外)나 시외(詩外)까지 간다”라는 말은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수행을 통해 시와 그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가운데 현실에 대한 인식의 층위에 대해서까지 그 변화를 추동하는 데로 이어진다. 이렇듯 시집 첫번째 장의 이름으로 쓰인 문장을 통해, 김건영 시의 언어는 자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내부에 고립된 것으로 여겨지던 시로 하여금 자기 바깥으로 넘어가도록 한다. 또한 동시에 자기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불러오기도 한다. 이렇게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던 삶과 예술을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함으로써, 시의 언어에 현실을 개혁할 힘을 불어넣고자 한다.
김건영 시의 언어는 전유하는 대상을 어떤 작품에 등장한 표현이나 그 제목에 한정하지 않는다. 「디지털 미지의 시티」는 그 이름에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디지털미디어시티’라는 현실의 장소마저도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는다. 텍스트 바깥의 현실이라 여겨지던 것이 이렇게 텍스트화함으로써 서로가 겹치는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김건영 시의 언어는 이러한 겹침의 지대에서 그동안 들을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존재를 듣고 보게 된다. 바로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목소리가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소리는 들린다/ 땅속의 귀신이다”. 겹침의 지대에서 이러한 경험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귀신이야말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은 채 중성적인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신의 존재를 노래하는 가운데 김건영 시의 목소리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 같은 모습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음을 본다. 가령 “이번 역은 열차와 승강장이 넓습니다”라는 지하철 안내 음성을 시의 목소리는 “이 번역은 열차와 승강장이 널 씁니다”로 다시 고쳐 듣는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다시 번역하는 과정을 이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미디어시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가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소외시키는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시의 눈은 역설적으로 “이 전철은 사람을 탑니다”라고 하는 움직임을 본다. 이어서 “이 전철은 사람을 태웁니다”라는 문장을, “무서운 사람에게는/ 능동과 피동이 함께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무서운 사람’을 또한 두 가지 의미로 읽게 한 것과 같이, 이중적인 의미로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다, “전철(前轍)을 밟으며/ 우리는 서로 미지의 귀신이 된다”.
이렇게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간을 연료로 삼아 돌아가는 세상의 운행을 깨뜨리고자 한다면, 그 전철로부터 궤도를 이탈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속한 이 세계와 우리의 실존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얽혀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는 금지」에서 시의 목소리는 “삶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라고 물으며, 번제(燔祭)의 희생양과 같은 우리의 ‘지금’에 대해 살핀다. 그이가 전하는 노래 가운데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리는 내부자들을 사랑한다 내 부자들 그래 언젠가 부자가 되고 싶잖아 진실을 기워 거짓말을 만드는 기자들처럼 정의를 정의한다”이다. ‘내부자들’은 우리와 같은 편에 있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인용된 말들 가운데 ‘거짓을 만드는 기자들처럼’이라는 표현이 쓰인 데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 <내부자들>(2015)의 맥락을 환기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는 내부자들을 사랑한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사회적 현실과 삶의 모습을 이루는 어두운 서클에 우리 역시 연루되어 있다. “내 부자들 그래 언젠가 부자가 되고 싶잖아”라는 솔직한 고백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가 약속하는 내일에 우리 역시 기꺼이 몸을 의탁하고 있기도 하다. 「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의 결구에서 “이게 시가 맞냐구요 모두 서울시에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게 더 문제 아닙니까”라는 항변에서 따지는 바와 같이, 이 세계의 질서는 곧 우리 자신의 욕망을 자양분으로 삼아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편리함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미래를 미리 끌어와 불태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집의 첫 장 제목의 표현 가운데 하나인 “없는 것을 사고파느라 미래까지 가져갔다”라는 말을, 우리 삶의 지금이 무엇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또한 폭로하는 표현으로 다시 읽을 수 있겠다. 이렇듯 ‘지금’은 삶 자체를 ‘금지’하는 시간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귀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김건영 시의 목소리는 또한 “귀신이 되면 귀신이 무섭지 않아”(「감나빗」)라고 함으로써 연루된 가운데에서도 그와 같은 구조에 파열을 가져올 어떤 움직임을 고안해낸다.
그리하여 김건영 시의 목소리는 시집의 표제작 「Null」에서 “뛰어넘고 싶다/ 없는 공간에서 없는 널 떠올리면”이라는 말로 노래를 시작한다. 여는 말로 제시된 이러한 표현 가운데 ‘널’은 그 자체로 다층적인 의미를 발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김건영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독특한 움직임을 또한 함축한다. ‘널’은 ‘당신’을 의미하는 ‘너’의 목적격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시의 제목에 쓰인 대로 ‘null’ 즉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자 텅 빈 무엇 또는 공허를 이르기도 한다. 나아가 어떤 효력을 취소하는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null’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을 표상하는 듯하지만, 그 자체가 표현하는 의미들은 기이하게도 문학의 성격이라든가 그 수행과 다르지 않기도 하다. 문학이 그려내는 세계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과 동일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로 옮겨지는 것은 언제나 그 실질적인 측면들을 추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공허한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 실질과 감각적 물질성을 모두 사상한다는 점에서 그 효력을 취소하는 움직임을 이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뛰어넘고 싶다
없는 공간에서 없는 널 떠올리면(문학이)
없음
이 있다 아직 없는 책을
지금 쓰고 있다널, 나를 삼켜도 좋다
이를 위해 살을 찌웠으니
대신 한 사람 덜 먹으렴
널, 다른
이가 없으면 이 몸으로 세상을 덮겠다널
없는 공간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었을까
서류처럼
널
부른다상상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염없이 없는 것이
화염없이 불타 없어질 (문학은)
널
가진 후
내 이름은 도난, 탕진이죠
수준 이하 하루치의 우울
없는 대지와
없는 공간에
도착이 도착하지 않는다머릿속이 비어 있는데
세라도 놓을까
널
음식도 마음도
식기만을 기다린다
Null을 담기 위해
헐벗은 나무를 씻기는
비를
따듯하다 해야 하나
차갑다 해야 하나
질문은
널, 써서 채운다
(문학을)시그
널은 없다
(문학에서)
나를 짚어 줄 손이 없는 밤에
빈 몸이 떨리고 있다
없는 책(責)이 손에 잡힌다없는 말을 손끝으로 한다
귀가 멀어지고 있다―「Null」 전문
그런데 「Null」에서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는 “(문학이)/ 없음/ 이 있다 아직 없는 책을/ 지금 쓰고 있다”고 하며 자신이 수행하는 움직임을 전한다. 문학은 목소리가 전하는 바와 같이 ‘없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에 이어지는 술어로 ‘있다’가 제시된다. 행을 나눔으로써 둘 사이에 건널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연이 자리함을 표현하고 있지만, 또한 조사를 그 떨어진 곳에 걸쳐 둠으로써 분리된 둘 사이를 잇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없음이 또한 있는 것이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사태가 실존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문학의 공간이 빚어내는 이와 같은 독특한 힘을 통해 “아직 없는 책”이라는, 지금 여기에는 부재하지만 도래하게 될 미래의 존재를 불러오는 움직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듯 “(문학이)”라 표현된 바와 같이, 괄호 안에 잠재적인 것으로 자리한, 그리하여 “없음/ 이 있다”이라는 말처럼 ‘없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닌 그 사이에 떨림으로 있는 문학의 실존은 「디지털 미지의 시티」의 ‘귀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하나의 극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기에 문학은 언제나 다르게 읽히고 또 새롭게 움직일 잠재성이기도 하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도래할 무엇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직 없는 책을/ 지금 쓰고 있다”고 노래하는 시의 목소리는 또한 “널, 나를 삼켜도 좋다”고 하며 자기 존재의 무화(無化)를 긍정한다. ‘없음’으로 존재하는 ‘널’ 쓰는 일은 자신을 그에 삼켜지도록 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그 ‘없음’으로 이르게 하는, 그 효력을 취소하는(null)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라져감을 통해서만 나타날 무엇을 불러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거나 글을 쓸 때, 그것이 일정한 형태로 표현되도록 하고 또 그로 하여금 어떤 의미를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선 반드시 스스로를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문장이 마침표가 찍힐 때에, 말하기 역시 그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은 그때에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말하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도정에서는 “도착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음식도 마음도/ 식기만을 기다린다”고 하는 까닭은 그렇게 “Null을 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일은 스스로를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떨리며 그 겹침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움직임을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의 말에서 “이와 같이 나는 귀신 들렸다”라고 하는 까닭은 이처럼, 노래하는 일 자체가 스스로를 없음으로 향하는 있음의 기묘한 중첩 상태에 처하는 일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비단 미학적 효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을 그와 같은 예술적 실험의 움직임과 중첩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빙의(憑依) 상태가 되도록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로써 시를 실험하는 일은 또한 삶을 실험하는 일이 된다. 스스로가 귀신 들렸다고 하며 그 ‘없음’에 이르고자 하며, 또 그러한 ‘널’을 언어에 담는 일은 역설적으로 또한 죽은 것처럼 굳어버린 이 세계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김건영 시의 언어들은 바깥의 텍스트들을 안에서 반복하고 번복한다. 다시 안의 텍스트들을 번복하고 반복함으로써 바깥으로 뻗어나가도록 한다. 굳어 있던 것들이 활력을 얻으며 스스로 차이의 운동을, 생성을 이루어내기 시작한다. 반복과 번복, 이것이 김건영 시의 패턴이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삶을 가능한 무엇으로 바꾸는 힘이다.
김태선
읽고 쓰는 사람. 주로 문학평론을 쓰지만 가끔은 다른 것도 쓴다. 쓰면서 산다.
2025/06/18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