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 기획을 기획하다
유튜브 보는 청소년에게 ‘인생 책’ 만들어주기
창비 청소년책이 시도해온 새로운 경향
청소년 책 출판시장은 ‘영어덜트’(Young Adult)라는 개념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부터 이십대 초중반까지 더 넓은 독자층을 겨냥한 책이 만들어지는 지금, 이런 변화를 이끌어온 편집자의 경험을 통해 기획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유튜브 보는 청소년에게 ‘인생 책’ 만들어주기. 가끔 우리 팀의 기획/편집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직접 들려줄 기회가 생길 때면 종종 사용했던 강연 제목이다. 또한 청소년문학을 사랑하고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일해온 편집자로서 품고 있는 진실된 포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청소년 독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강과 권여선의 소설을 술술 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독자에게는 그보다 더 읽기 쉽고 선명하고 재미있는 이른바 ‘만만한’ 책을 읽어 나가는 경험, 스스로 고른 책을 읽어서 실패도 성공도 해보는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읽는 사람’의 탄생은 이런 시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한 역사는 나중에 ‘취향’이라 불린다. (최근에 읽은 『다시, 공부머리 독서법』에서 최승필 저자가 같은 주장을 하는 대목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볼지 말지 판단할 때는 재미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면 우선 1회만 보고 결정하려고 이른바 ‘찍먹’을 해본다. 웹툰이나 웹소설에서는 앞의 몇 화를 보고 결정한다. 방영중인 드라마의 초반부는 요약된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두기도 한다. 긴 호흡의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쉽게 하는 친절일 것이다.
그런 식의 선택지가 종이책 유저들 앞에는 충분치 않게 놓여 있다고 느꼈다. 미래의 독서인이 될 소중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모두 ‘책을 안 읽어도 상관없는 삶’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바로 여기에 청소년출판부 편집자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다고 느꼈다. 십대 청소년이 ‘읽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될 만한 책을 청소년 독자의 손에 쥐여주는 일.
1. 좀 더 짧게. 그런데 어느 정도로?
숏폼 시대의 책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십대의 나 자신을 잠깐 돌이켜보겠다. 나는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싶었고 손편지를 쓰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며 미술관에 다니는 걸 좋아하는 청소년이었지만,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었다. ‘책벌레’라든가 ‘헤비 리더’ 쪽은 전혀 아니었다고 봐야 맞겠다. 그런 내가 청소년 시절 인상 깊게 읽은 몇 권의 책은, 놀랍게도 청소년출판부에 와서 만든 책들과 비슷한 특징이 있다. 좀 얇고, 그림이 있다는 것. 표지가 매력적이라는 것. 이를테면 『좀머 씨 이야기』(열린책들, 1992년 초판 출간) 같은, 일러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책 말이다.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책의 형식 면에서 친절하면서도 세련되게, 부담없이 손에 잡히게끔 노력했다. 소설 샘플러 같은, 골라 읽는 맛.
사실 당시 우리 팀에서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기획을 최초 발의하고 런칭을 주도한 편집자는 따로 있다. 나는 김영선 기획편집자의 곁에서 부서장으로서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기획의 취지가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두고자 하는 것이라니, 너무나도 공감되고, 이런 기획 아래 목소리를 보탤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튼 2017년 ‘소설의 첫 만남’이라는 시리즈를 런칭한 이후 매년 라인업을 이어가면서 우리 팀 모두는 각자의 몫을 나눠 맡았다. 세상에 없던 책이 만들어져서 독자에게로 가닿는 이 과정에는 새삼스럽지만 디자이너와 마케터까지를 포함해야겠는데, 이런 자세한 크레딧을 생략하고 아래에서는 뭉뚱그려 서술하기로 한다.
우리 팀이 ‘얇고 그림이 좀 있는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처음부터 중요하게 생각한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독자를 한정 짓지 않기로 했다. 이 시리즈는 ‘초등학교 6학년’이라든지 ‘중학생’이라든지 하는 연령대에 관한 내용을 책 안에도 싣지 않고 소개에서도 모두 덜어내버렸다. 나이를 특정하면 그 이상의 독자는 집어들기가 머쓱해지기 때문이다. 책과 멀어져 있다가 용기 내어 한번 읽어볼까 마음 먹는 독자를 친절하게 품어 안고 싶었다.
또 한 가지는,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져본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 수업 시간 동안 중간에 끊지 않고 한 권을 다 읽어낼 수 있을 만한 분량인가? 그런 기준으로 선별했더니, 권마다 차이는 있지만 예를 들어 84쪽, 많아야 100쪽 내외의 책이 되었다. 오디오북으로 만들어보았을 때도 이 분량이 매력적임을 재확인했는데, 본문 낭독하는 데 40-50분 정도가 걸렸다. 러닝타임으로서 적절한 볼륨이다. 실제 독서에 훈련이 잘된 사람이 묵독하는 경우에는 30분도 안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만하게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시리즈에 대한 독자 리뷰를 찾아보면, 너무 휘리릭 읽혀서 아쉽다거나 너무 쉽다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아이들 읽으라고 사줬다가 얇고 만만해보여서 같이 읽었다’라는 학부모 리뷰가 정말 좋다.
음반으로 따지면 ‘싱글’에 가까운 책을 여러 권 만들어서 샘플러처럼 ‘찍먹’하게 하고, 그런 다음 이 소설가들의 팬이 되게끔 해보자는 것. 그런 뒤에야 소설집이든 장편소설이든 읽어 나가는 본격 독자가 되게끔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진실을 깨달으며 팔 년 동안 만든 서른 세권의 책이 있다. 최신작 『쿠키 두 개』에 이어 앞으로도 많은 소설가가 참여할 예정이다.
한 가지 더 뿌듯한 점을 말해야겠다. 이 시리즈를 처음 구상할 때는,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시리즈 라인업 안에 포함했다. 놓쳐서는 안 되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제는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를 통해 출간된 『커튼콜』이라는 단편소설이 거꾸로 교과서에 수록되는 반대 경우가 나타났다. 이 책을 만들기 시작할 당시에는 몰랐던, 아름다운 꿈이 현실이 된 기분이다.
2. 좀 더 재미있게. 그런데 어떻게?
영어덜트(YA) 소설이 감당해야 하는 것
얇기만 하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홀린 듯 읽는 경험이 문해력을 높이고 한 권을 다 읽어냈다는 만족감도 주고 다음 책에도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법인데, 그러려면 흡인력 있는 스토리가 필수적이다. 소설Y 시리즈를 출간하던 당시의 우리 팀에는 ‘읽는 재미’라는 것을 알려줘야겠다는 야망이 가득하던 때였다.
청소년기에는 (실제로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입시의 압박이 아이들을 무겁게 짓누른다. 선행학습 때문에 몇 년 치 선행압박을 느껴야 한다. 재미가 없는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점점 없어진다. 그러므로 추천될 만한 이유가 있는 책이라는 점을 증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엄청나게 재미가 있어야 한다. 실은 그 두 전략이 한 권의 책에 동시에 요구되기도 한다.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이라는 이름의 상을 만들기로 하고 2019년에 1회 공모를 시작할 때부터, “빠른 전개” “강한 흡인력” “이야기 본연의 재미를 전파할 작품”을 원한다고 내세웠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종이책 출판 쪽에서는 잘 하지 않던 방식을 시도했다. 작품을 한 줄로 설명하는 로그라인이 있을 것, 등장인물 소개를 첨부할 것, 기승전결을 담은 스토리 트리트먼트를 포함할 것. 응모 분량이 어느 정도 이상이라면 미완결작도 응모 가능하게 열어둘 것.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미완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도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함께 뛰어들어서 작품을 만들어나갈 자신이 있는지, 편집자 스스로 자문해야 할 지점이기도 했다. 자신 있어? 잘 만들 자신? 하지만 이런 조건을 만들어 공모를 제정할 때는 불안했어도, 수상작을 선정하는 과정에 이르자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놓치기 아까운 흥미로운 설정, 비틀린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들,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 이런 작품의 매력에 심사위원 모두가 홀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회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스노볼』은 영하 41도의 혹한기가 닥친 미래사회를 그린다. 선택받은 자만이 ‘스노볼’ 안의 따뜻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이 냉혹한 세계에서, 액터들은 쾌적한 환경을 제공받는 대신 자기 삶을 스물네 시간 카메라에 노출해야 한다. 바깥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 초밤은, 스노볼에 입성하여 최고의 액터 고해리를 대신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처럼 강렬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이 소설은 2020년 국내에서 1권이 출간된 후 2024년에는 펭귄랜덤하우스에서 미국판이 출간되었다. 이 영문판의 담당 편집자가 『메이즈 러너』의 에디터라는 점이 실무자로서는 설레는 지점이다. 최초에 이 상을 공모할 때 『메이즈 러너』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는데 말이다. 영문판 제목으로는 ‘Snowglobe’인 『스노볼』 1권은 뉴욕타임스에서 ‘올해 읽어야 할 열두 권의 영어덜트 도서’에 랭크되었고, 〈오징어게임〉과 〈기생충〉과 〈설국열차〉를 연상케 하는 소설이라는 현지 기사가 이어졌다. 기쁨과 함께 얼떨떨한 보람을 느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스노볼』을 쓴 박소영 작가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은 폴란드어판 출간에 맞추어 바르샤바에 가 있고, 현지 매체들과 인터뷰하고 해외 독자들을 만나는 경험중이라고 한다. 응원하고 또 응원할 따름이다.

『스노볼』 1권 표지
이 책은 2권까지 출간된 듀올로지이니까 전체 스토리 총 932쪽 분량 가운데 최초 응모된 부분은 122쪽 정도다. 얼마나 극초반이었던 것인지, 이 작품에 힘을 싣기로 한 결정을 이제 와 새삼 돌아보니 놀랍다. 이 공모는 2025년부터는 ‘창비 스토리공모’라고 명칭을 바꾸어 특정 장르에 국한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도전적인 모험을 하고 있다. 미완결작 응모 가능이라는 점도 여전하다. 재미난 이야기를 위해서는 여러 리스크를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3. ‘읽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어느 한 순간의 인생 책
책은 영상 매체가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나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차이점을 바라볼 때, 독서가 집중력을 더 요구한다거나 하는 향유방식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은 혹시 출판계의 초조함이 반영된 탓 아닐까? 오히려 영상은 캡처나 포착이 어려운 시간의 예술인 데 비해 책은 영구히 박제하여 내 곁에 둘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데. 베고 누울 수 있다. 원하는 방식으로 밑줄을 칠 수 있다. 자유로이 메모할 수 있다.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가 있다. 내 옆에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집중력 혹은 독해력이라는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보다는, 영상 매체가 위용을 떨치는 시대에 책만 홀로 너무 고립된 길을 걷지 않도록 밸런스를 맞춰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스노볼』을 편집할 때, 앞부분에 등장인물 소개를 넣었다. 인물 관계도까지도 고려했는데, 얽히고설킨 화살표까지 나올 필요는 없어 보였기에 스포일러를 예방할 겸 주요 등장인물 소개 정도로 갈음했지만, 그간 챙겨봐둔 드라마의 홈페이지들과 넷플릭스 소개 화면과 영화 브로슈어들을 두루 참조했었다.
만들고 나서는, 가제본을 읽고 리뷰를 써줄 서평단을 모집하면서 드라마 대본집처럼 보이게끔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배우들이 인증해주는 실제 대본집 사진을 보면 평범한 종이책처럼 생긴 경우들이 종종 발견될 때가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대본집은 이렇게 생겼지’ 싶은 가로로 긴 형태로 제작했었다.
서평단에게 가상 캐스팅을 해보라는 미션을 제시하기도 했다. 재미난 퀘스트 같은 것인데, 모두 비슷한 궤의 답변을 하는 걸 보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머릿속으로 다들 이런 느낌(의 미남!)을 그리면서 읽었다니, 하면서 웃음 짓기도 했다.

『스노볼』 대본집. 가제본을 대본집 형태로 만들어, 소설Y 시리즈 도서들의 드라마 같은 몰입감을 보여준 기획이다.
가끔 편집자들에게 각자의 ‘인생 책’을 물어본다. 그러면 다들 화들짝 놀라거나, 곤란해한다. 어떻게 그 수많은 책 중에서 세 권, 다섯 권 정도만 고를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인생 책’이라는 정의가 대체 뭐냐는 질문부터, 그렇게는 축약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거나, 최근에 읽은 좋았던 책 몇 권 정도로 바꾸어서 대답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다들 ‘헤비 리더’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각각의 리스트가 그때그때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자신만의 인생 책을 꼽아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의 경험이 늘어나면서 몇몇 책은 지워지고, 새로운 목록으로 가뿐히 갱신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만든 책이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평생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읽는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면 그 소임을 다한 것일 테니까.
음, 이렇게만 쓰고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못내 아쉽다. 어른이 된 뒤에 이 책을 만났을 때 기분 좋은 추억이 떠오를 만큼은 인상적이었으면 좋겠다. 어, 맞아! 나 이 책 어렸을 때 읽었는데. 이게 좀 재밌긴 해. 이 정도면 어떨까.
정소영
출판편집자. 출판사 창비에서 내내 일해오는 중이다. 십년 넘게 청소년출판부에 있으면서 『아몬드』 『페인트』 『스노볼』 등을 만들고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런칭에 참여했다. 최근에 만든 것 중에서는 집회용 깃발 ‘계엄 폐간 경력직 창작과비평’ 문구에 애정을 갖고 있다. 2025년부터는 부서를 옮겨 성인 독자를 위한 인문교양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이십대는 청소년기에 포함된다는 믿음으로 동료들과 이런저런 궁리중이다. 『곰돌이가 괜찮다고 그랬어』라는 제목의 반려인형 에세이를 썼다.
2025/05/21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