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는 사진가 이강혁과 음악가 애리가 협업합니다. 이강혁은 인천에서 거리에서 마주친 청소년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물과 풍경을, 애리는 ‘보라’들의 이야기를 한데 담습니다.



어두운 밤, 색색깔의 조명이 켜진 대관람차가 돌아간다. 대관람차 앞에는 알 수 없는 구조물의 뒷면이 보인다.
이강혁, 〈마계〉 2018-202?

자동차 안, 검은 옷을 입고 긴 머리 카락의 일부를 붉게 염색한 사람이 앉아 있다. 입술 아래에는 피어싱을 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나영은쟁반옥구슬에게

나영, 보라, 나영, 열다섯, 나영, 보라, 나영.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알아? 친구 어머니가 내 목소리에 대해 한 말이야. 회색 하늘색 집. 푸르른 낮, 누가 제일 예쁘냐? 나냐, 저 아줌마냐? 저 아줌마요, 하면 거실에서 터뜨리는 웃음. 희주 어머님은 나한테 삐졌다고 했어. 하나도 무섭지 않고 용서받을 필요도 없지. 햇볕이 넘어갈 무렵 불을 끄고 어둑해진 집에서 의연하게 숨바꼭질을 해.
  지금까지 그 말을 선물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줄 몰랐어. 새겨둔 말을 너에게 처음으로 하게 돼.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또르르 맑고 선명하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 표정이 변화무쌍해. 우울한 이야기와 감정이 오가지만 활력이 있어. 기운 넘치게 아파. 들었던 말을 너에게 써먹는다고 해서 거짓말은 아니야.

법적으로 성인인 사람들과 법적으로 성인이 아닌 사람인 우리가 모여 성인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네. 법적으로 성인이 아닌 넌 성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지. 삼십대가 되고 지난 몇 년간 멀어지는 나의 십대를 떠올렸어. 그때와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 자주 생각하고 지냈어. 누구든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건 알았어. 고민완료라고 착각했나. 작년, 새해를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땅에 지진이 나 다 흔들렸어. 올해도 그런 걸 보면 날씨와 관련이 있을까? 몇 번이나 죽어도 다시 태어나면 살아야지.

요즘 죽음은 뭐라고 생각해? 가까운 사람을 상실한 후에는 애도의 과정이 있다고 하네. 최근 상담센터에서 가까웠던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 1막이 끝났다는 말을 들었어. 처음은 십년 전이야. 죽음을 겪은 너의 생각이 궁금하다. 외로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예전에 외로움을 즐기기도 했는데 무섭고 부끄러워진 지 오래됐어. 내 부족함 같아서. 부족함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이 그런다고 하면 공감과 함께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성인이 무엇인지 말을 해도 말을 안 해도 부끄러워. 네가 말한 성인은 어떤 뜻이었을까? 나도 성인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 ‘성인’이라는 단어에서 상대적으로 잘 모르거나 어린 사람에게 베푸는 너른 이해심을 기대해왔어. 어른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 있겠다. 성인이 되어보니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비현실적이야. 이루지 못하더라도 비현실에 끌려. 성인이란 제 밥그릇 스스로 챙기며 살아가는 거라는 말은 많이 들었거든. 다른 면을 좀 기대해봤지. 부푼 바람을 그린 걸까. 나도 거의 본 적이 없네. 나 자신을 보면서도 그래. 보다, 보라, 하다 보니 보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 전에 기도와 주문 외우고 갈게.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누군가의 팔 위에 강한 빛이 비춘다. 팔 아래에는 ‘루피’ 캐릭터 핸드폰 케이스를 씌운 핸드폰 뒷면이 놓여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누군가의 오른손을 찍은 사진. 검은색 바지 호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끼워놓았고, 검지에 은색 반지를 끼웠다. 손목과 손등에는 하얀색 밴드를 감고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소원

보라 너는 아직 술맛을 몰라. 보라에게 친구들이 말한다. 소원과 자주 어울리며 놀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본다. 소원의 친구 도리의 어머님은 술상을 마련하고 집을 비웠다. 차라리 집에서 안전하게 마시라고 음식을 차렸다. 주황색 집에서 보라가 한 모금만으로 아프다. 화장실에서 거듭 토하고 탈진한 동안 친구들은 보라가 남긴 술과 집에 있는 다른 술까지 종류별로 거덜낸다.

보라와 소원은 서로를 아낀다. 보라와 소원 둘은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그 도리에 맞게 처음부터 일탈을 일삼지는 않았다. 소원이 어머니한테 강제로 머리카락을 마구 잘렸을 때, 따돌림을 당하고 소문에 휩싸였을 때, 보라가 소원의 옆에 있었을 뿐이다. 보라가 집에서 혼나며 매일 엉엉 울 때, 또래들 사이에서 외로울 때, 소원도 보라의 옆에 있었을 뿐이다.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고등학생 두 명이 어딘가에 앉아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흰 셔츠와 짧은 치마를 입은 학생, 검은색 후드와 짧은 치마를 입은 학생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한 손을 맞잡고 있다. 후드를 입은 학생은 하얀색으로 손톱을 칠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널 만난 다음 날 온몸이 아팠어. 우리, 집에서 사연을 들은 밤에 나는 여기 와서 지내보는 거 어떤지 물어볼까 마음속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을 보다가 양손으로 1초 만에 휘휘 휘저었어. 쇠맛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음으로 사는 해골이 동굴 끝에 살아. 동굴 벽에 붙박이 2D 눈 두 개만이 해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약올리며 어울려주지. 처음 동굴과 해골을 봤을 땐 깜짝 놀랐어. 다시 계속 해골을 살피니 갑자기 찾아온 나 때문에 놀란 것도 같아.
  2D 눈은 도무지 모르겠더라. 아무리 봐도 움직이지 않는 2D 눈이 무서워 수년 동안 정체가 뭘까 고민했어. 관찰자, 자연, 인생, 나, 타인, 친구, 가족, 관계, 공동체, 보는 것, 보이는 것, 함께 있는 느낌, 외로움. 눈에 장식을 붙이니 조금 익숙해졌어. 어차피 맞닥뜨리고 마주쳐야 할 상황이라면 재밌게 놀고 싶어. 꿈에서 만난 머리 긴 귀신과 친구가 되어 꿈엄마에게 함께 헤어 컷도 받았던 것처럼. 해골과도. 2D 눈과도.
  해골보다 어린 너를 만나 당황했어. 나는 너에게서 나를 비춰봐. 너도 나에게서 너를 비춰볼까? 가끔 이런저런 말과 질문을 던지는 너에게 나도 던져. 보라, 라고 외는 요즘이었는데 정말 보게 돼. 나영? 나영!

1초 만에 왔다 간 생각이 전해진 걸까? 열세 살에 내가 처음 쓴 소설 주인공은 천사를 만나. 주인공의 엄마는 천사 이야기를 믿지 못하지만 아이는 편지만 남기고 사라졌어. 밝은 목소리가 들려.

(상큼웃음) 키워주세요
(구원 비상 보상 부상 배상)
(너털웃음) 아니 된다 나 살기 바쁘다고
(동정심 금지. 슬픔 금지. 설렘 금지. 망설임 금지. 공상 금지. 죄책감 금지. 감사 금지)1)


요즘 읽고 있다던 에세이에 따뜻한 말투성이더라. 내가 너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함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에게도 따뜻함을 건네주어 고마워. 너무 어려서 부담되는 걸 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성인이 보여. 널 만나기 전 나는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돌아봐. 나는 스스로 성인 같지 않아. 너한테 잔소리할 것 같다고 말하니까 걱정 말라고 내 잔소리는 다 듣는다는 너에게 어떤 잔소리를 하게 될지.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할지.


보호색

어느 날씨 좋은 밤, 누군가 슈퍼에서 술을 훔쳐와 열린 파티.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술 취한 청소년들의 고성방가를 듣고 주민이 신고한다. 독서실에서 공부한 게 거짓말은 아니지만 다 같이 나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 있었다는 건 집에 말하고 싶지 않다. 보라는 큰 잘못을 했고 끔찍한 벌을 받아 낙인 찍혀 세상은 ‘문제아 보라’ 한다. 소원은 경찰서에서 웃고 있다. 웃는 얼굴 위로 머리에 뿔이 돋는다.
  경찰차를 보고 보라는 도망가려 했지만 다른 길이 없다. 얘는 술 안 마셨어요. 안 마시긴 뭘 안 마셔, 얼굴이 뻘건데. 경찰은 종이컵에 따른 소주 한 잔을 한 모금, 아주 조금 한 모금 마신 보라를 가장 먼저 경찰차 안으로 넣고 다시 현장을 보러 간다. 보라가 문을 열어 도망치려 한다. 도망갈 궁리. 연구는 실패. 경찰차 문은 안에서 안 열린다.
  소원과 달송이 슈퍼로 사라지자 보라와 사귀는 포에가 보라를 두고 둘을 뒤따라 유일한 내리막길로 간다. 보라는 친한 친구가 없는 또래들 사이에 앉아 있다가 등장하는 경찰차를 본다. 소원과 포에와 달송은 오르막길로 오르는 경찰차를 똑똑히 본다. 소원은 순진한 보라를 구해야한다고 고개를 달려 오른다. 포에와 달송은 도망치지 못하고 따라 오른다. 짧은 드라이브로 보라와 소원, 포에와 달송이 경찰서에서 내린다.
  너네 오토바이 훔치고 그러는 애들이지? 돈 뺏고 그러지? 오히려 보라는 학교에서 돈이나 핸드폰을 빼앗긴다. 보라가 울면서 아니에요 저 전교 5등도 하고 그래요 말한다. 소원이 그때 웃으며 신나보였을까 가물가물하다. 경찰이 학교와 연락처를 적고 집에 가라고 한다. 보라가 펜을 들고 요구사항을 쓰려고 한다. 소원이 다가와서 속삭인다. 보라, 다른 거 써!

소원은 무서울 게 없다. 부모도, 선생님도, 선배도, 소문도, 돈을 갈취하려는 사람도. 둘은 명동에 옷을 사러 갈 때마다 자주 찾던 패션 건물을 찾지 못한다. 드디어 건물을 발견해 후다닥 기쁘다. 겨우 몇 살 위처럼 보이는 사람이 다가온다. 야 너네 돈…… 소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소원은 보라의 손을 잡아 데리고 위험을 지나친다. 자주 가던 건물에서 소원은 기가 막히게 도난방지택이 없는 물건을 몇 개씩이나 찾는다. 동네로 돌아오는 지하철은 같이 앉을 자리가 없어 맞은편에 따로 앉는다. 보라가 졸다 일어나면 소원이 앞에 서 있다. 보라가 머리를 옆 아저씨에게 기댈까봐 걱정되니까. 수학여행을 갈 때도 소원은 보라에게 기대서 자라고 어깨를 내어준다.
  보라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고등학교에 지원하여 붙는다. 보라는 여러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취미가 있다. 가장 자주 함께 노는 소원과도 물론 그랬다. 어느 날 소원이 편지로 말했다. 너와 멀어질 것 같아. 벌써 슬퍼.

단발머리를 한 인물이 강한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왼쪽 어깨와 위쪽 팔에 걸쳐 문신을 새겼다. 흰색 민소매 상의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잡고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흑백으로 해양경찰청의 전경을 찍은 사진. 해양경찰청 뒤로 높게 솟은 고층 건물이 보인다. 가장 높은 건물에는 ‘1st WORLD’라고 쓰여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나타샤 리온니, 도형과 수리

언니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요 언니이기 때문이죠 정다운 말 언니 무거운 말 언니 내게도 언니가 있었으면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에서 가장 좋아하는 언니는 니키예요 레즈비언 약쟁이 니키를 연기한 언니 이름은 나타샤 리온이죠 리온니의 연기는 슬퍼도 즐거워요 아파도 당차고요 온니가 실제로 약물로 퇴학당하고 수술까지 했는데 배운건지 배우로도 살 수 있대요 그때부터 리온니는 언니입니다 분단국가 한국이 겪는 대지진 알고보니 온니네도 겪었대요 2차 세계 대전의 끔찍한 돌 속에 하면 된다 빅뱅 드림 펑 노오력의 새싹이 피워 맺은 자유로운 열매들은 생산을 멈춥니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 성인이 되지 않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는 가시나무 들으며 울어요 나를 사느라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캐릭터와 성격은 어딘가에서 옵니다 감옥의 규칙과 구멍 속에서 세금 축낸다는 비방용 수감자가 생활하려 노동합니다 미래의 희망을 보루 삼아 헌신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교정하자 다 치료하면 천국이 올까요 너 지금 이 카페에서 나가자마자 차에 치여 교통사고 당하면 지옥 가는 거야 여기가 지옥이지 친밀한 관계에서 배신당해 고통스러운 얼굴로 경험자아 구축하는 모양새 희망이 없이 절망이 없이 낙을 취하는 죽은 어지러움 만나면 뭐라 할래 붙들고 세상에 인터뷰 강령술과 잠 한 술 두 술, 여기 미스터리 사인이요 길바닥에서 잠들어 지갑 도둑맞기 클럽 탐방 춤 잠옷 입고 분식집 가기 밤골목에서 소변 누기 정신질환과 섹슈얼리티에서 튀어나와! 친구에 대해라고 하지만 비대한 자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에 대해…… 보라는 정말 똑같다 너네도 똑같아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선생님 말씀 오십년이 지나도 똑같다고 해요 어디에선가 유쾌한 모습으로 온니와 도형과 수리와 형편없이 진창 만나 놀 거예요 수학자 온니유

조개 모양의 보석함에 약 세 알이 들어있다. 검은 배경 위, 푸른 색감이 두드러지게 찍혀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어지러운 보라’ 데모를 보내주고 나영아 살아! 오지랖 부렸네. 기억을 헤집었어. 산 바로 옆 학교 종이 땡땡땡이. 계곡, 노래방, 피시방, 공원, 빈집, 공중 화장실, 아지트. 바퀴벌레 때려잡는 손. 체육 수행평가 연습. 야한 영화. 성인 채팅. 변태. 서로 구하기. 부모님이 오시지 않는 밤 빈집 파티. 피아노 치고 노래하기. 공포물. 게임. 커플이 들어간 방은 잠금. 거짓말쟁이 날 울리던 친구가 앞장서 우르르 버스 타고 무한도전보다 먼저 간 폐교 탐험. 술-술수-수학여행. 가정. 학교. 안. 밖. 이런 말 하면 절 싫어할 것 같아요. 보라, 보기 싫어도 보라, 덜컥, 너, 나, 나영을 보라.

왜 법적 성인이 아닌 나이의 사람에게서 무거운 짐을 진 성인을 보게 되면 슬플까? 왜 법적 성인인 나이의 사람으로서 법적 성인인 나이가 아닌 사람 앞에서 성인이 뭔지 잘 몰라도 성인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이면 부끄럽고 당황스러울까?

회색 후드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짧은 머리의 인물을 찍은 사진. 어딘가의 옥상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건너편 건물 벽면에 ‘경찰청’이라고 쓰여 있다. 인물은 무심한 표정으로 후드 앞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이강혁, 〈마계〉 2018-202?


성인식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놓고 가짜 만병통치약 파는 방법에 대하여 안내 말씀드립니다. 우선 저희 회사 신자유주의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훈은 승자독식, 비슷하게는 약육강식입니다. 환상과 공상 등은 효율적인 계획과 관리법으로 바꿔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내 안전요원인 자립 안내요원의 지시에 협조해 주시고, 업무를 방해하거나 임의로 비상구를 조작하는 행위는 보안법에 따라 금지돼 있으며 처벌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희 안내요원들은 여러분께서 편안하게 성장하시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전쟁 트라우마는 3대가 이어진다는 말에 내 위치를 보라.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고 당당히 말해도 더 이상 신파 패륜아가 되지 않는 밀레니얼 바이러스. 부모와 새끼를 모셔야 하는 엑스가 안쓰럽다가 눈알 굴리기. 풍류잡이가 될 줄 알았던 영기는 냉정함을 입은 신령으로 온다. 무슨 말이냐면 보라가 노란 빛 받아 환한 숲을 지난다. 오두막을 열면 나무 탁자 위에 편지 한 장. 따스한 편지는 영기 목소리. 성낸 후 열다섯 보라한 영기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영기는 존재다. 울지도 못하는 보라가 존재가 아닌 채 벽장에서 존재를 찾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영기와 같다. 편지를 읽어보자. 결혼도 출산도 생각 없다는 말은 없다. 말해하고 있었다. 양해하는 거잖아.
  돌아온 돌아이는 정신 차리고 선언한다. 빛나고 아름다운 명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몫입니다. 사전에 사후까지 미래완료 시제로 예언한다. 우열 가린 팔자 치운 음양오행 십계명으로 석가모니 명패 걸고 정성스레 꾸려 하나씩 진 열 제자 두고 반항아를 기다린다.
  이행기는 채무를 이행하여야 할 기한이라는 뜻이 있다. 성인이 되기 위해 채무를 이행한다고 생각하면 사회라는 채권에게 무언가를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연결된다. 빙글빙글 돈 세상. ‘경제 대공황’을 배우고 ‘공황장애’를 몸으로 배운다. 혼란과 공포로 어리둥절할 때 인심이 불안해지면 다른 존재를 이해할 여유가 꽝.
  도구를 사랑하고 사람을 이용해 아무리 자유로워지려고 해도 각인되는 톱니바퀴 프랭키3)할머니랑 페요테 여행이나 가고 싶어요 아니 대충 책임이 무겁다는 걸 잊지 마 “바쁘게 움직이려고 뭐든 했어요……”4) 가까워지는 소음. 멀어지는 침묵. 수많은 나에게 성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묻는다. 이미 성인인가? 성인으로 가는 중인가? 성인이 무엇인가? 질문은 무책임해요. 책임 있는 말을 해주지 않을 거면 어떡할 거야? 엉망으로 망해도 웃어.

분홍색 조명이 두드러지는 한 건물의 외관을 찍은 사진. 건물의 윗부분은 오래된 유럽의 성 모양, 또는 동화 속 성 모양을 본뜬 것처럼 뾰족한 첨탑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작은 깃발들이 꽂혀 있다. 사진 하단에 ‘호’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호텔 건물로 추정된다.
이강혁, 〈마계〉 2018-202?

나영이 해준 이야기들을 써도 된다고 했지? 비겁하게 느껴져 조심스러워. 나영이 어떤 글을 쓸지 궁금해. 부끄럽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만 무기력하면서도 기운차던 열다섯 내가 너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일단 신나게 놀 거야 그리고…… 언제나 가깝지 못하더라도 소중한 순간을 나눈 친구로서 서로의 기억이 되어주길 바라. 진로. 친구. 약. 진짜 괜찮아요. 떠는 몸. 속상함. 빚. 스타일. 너에게 성인이 되고 싶다가 못할까 봐 벌벌 떠는 나는 성인일까? 세상이 학교는 아니지만, 세상이란 학교에 나와서도 살아가자. 만남은 오락가락 같아도 이어지길 바라. 네 말대로 집회에 함께 가자. 내 말대로 카페에 함께 가자는 말은 방문 시 너의 갑작스러운 눈물과 함께 임무 완수. 사전에서 응원의 의미를 찾았어. 노래로도 도와줄 수 있다네. 다행이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자.

애리, 이강혁

2018년 EP [SEEDS]를 발매하고,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신인상과 2019 EBS 헬로루키 with KOCCA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2021)와 『여성X전기X음악』(공저,2023), 『수많은 내가 다른 곳에 살고』(2023)가 있다. 포크, 밴드, 전자음악을 넘나들며 꿈처럼 한계 없는 음악을 펼치는 꿈을 꾼다. (애리)

이강혁은 핸드폰에 카메라가 설치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디지털 카메라와 모니터, 온라인 환경 등을 염두에 두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고유성을 해치지 않고 사진-이미지의 표면을 어떻게 디지털에 가깝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NIGHTGLOW{Prototype}』(2014-2015), 『Snakepool: Down the Rabbit Hole』(2017)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포화되었고, 심각하게 오염된,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동시대를 매우 위태롭게 살아가는 유스-청년들의 정서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초상과 그들이 사는 거주지-도시의 풍경-사물 등을 통해 서사를 그려내는 네오 다큐멘터리 〈마계(가제)〉(2018~202?)를 진행중이다.
바로가기 (이강혁)

사진작가 이강혁과 ‘성인 이행기’라는 주제로 협업하며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로 4개월 동안 어지러웠다. 아직도 어지럽다. 어지러움은 어릴 적부터 좋았다. 아픔에 무뎌지는 성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혼란을 마주할 용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고통은 힘들었다. 힘들지 않고 싶어졌다. 균형을 찾고 싶다. 어지러움과 균형에도 중용이 있나 본다. 다시 너무 아플 땐, 앞으로도 계속 힘들 거라는 생각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애리)

2025/05/21
73호

1
박찬욱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중 주인공 영군이 말하는 칠거지악.
2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3-2019).
3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2015-2022)의 등장인물.
4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