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여자가 살인마를 피해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있을 때였다. 놀란 선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도 여자는 여전히 칼을 든 채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내가 갈게.”
선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선혜가 영화의 내용을 빌려 농담을 던졌다.
“얼른 와. 혼자 남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잖아.”
선혜가 연극적으로 팔을 문질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딘지 김이 샌 표정이었다. 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밴 땀을 문지르며 시계를 보자 아홉 시 십 분 전이었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관리인에 대한 분노는 꺼진 지 오래였지만 선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대화로 풀 수 있는 일은 대화로 푸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반투명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실루엣은 작았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문밖에 서 있는 건 관리인이 아닌 젊은 여자였다. 우산 아래로 검은 뿌리가 드러난 지저분한 염색모와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 보였다. 선호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쉰 다음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건 에어컨이 고장 난 펜션에서 땀에 절어있을 때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선호가 젠틀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그러나 여자는 비에 젖은 채 생쥐처럼 떨 뿐 말이 없었다. 거실에선 신경질적인 현악기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줄이라고 할까 하다가 대신 배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그제야 여자가 쥐어짜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옆 펜션 사람인데요. 전기가 나가서요.”
“아아.” 선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가볍게 닦았다. 비슷한 처지네. 그는 약간의 동정을 갖고 가볍게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 우산을 접으며 다가오자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밀려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캐빈에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멀어서요.”
“그렇군요.”
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마약 냄새를 풍기는 여자는 묘하게 산만했다. 그는 젖은 머리를 털면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다가 선호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을 알아본 눈빛이라 선호는 웃으며 가볍게 뺨을 만졌다. 지금은 조명도 없고 화장도 지운 채였다. 본판이 어딜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실물이 별로더라, 하는 얘기가 나오면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 나온 건 닉네임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이름이었다.
“저, 선호 아니니?”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여자가 밀어붙였다.
“맞지? 너 선호구나.”
여자가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나. 여름이야. 우리 같은 중학교 다녔는데 기억 안 나?”
“아아. 잘 지냈어?”
선호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었다. 자기를 여름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눈을 빛내며 선호의 팔을 더듬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선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한편으론 경계했다. 어릴 때 선호는 왜소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특히 여자애 앞에서 더 그랬기에 늘 그들에게 휩쓸렸고 그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없었고 상처는 언젠가 아물었다. 문득 발이 축축해서 보니 여름에게서 떨어진 물이 고여있었다. 선호는 코르크 신발을 세워둔 뒤 여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일단 안으로 가자.”
현관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혜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선호는 선혜가 묻기도 전에 여름이 중학교 동창이고, 옆 펜션에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거진 십 년 만에 본 거야.” 선호가 변명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덧붙였지만, 선혜는 이미 여름에 대한 판단을 마친 뒤였다. 다행히 그건 동정 섞인 호감이었다. 선혜가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여름은 TV 만화의 캐릭터처럼 허둥대더니 가볍게 입을 벌렸다. “우와.” 그 솔직한 반응에 선혜가 가볍게 웃었다. 선호는 매번 그렇듯 뿌듯함에 등이 곧추서는 걸 느꼈다. 선혜가 흐트러짐 없이 차분한 머리칼을 넘기더니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더워서 어떡하죠. 에어컨이 고장 나서.”
하룻밤 묵어가는 펜션을 궁전처럼 보이게 하는 우아한 태도였다. 선호가 덧붙였다. “안 그래도 우리도 관리인을 기다리고 있었어. 전화는 해봤어?”
넋을 놓고 있던 여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 혹시 모르니까.”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만 들릴 뿐 관리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깜빡 잠이라도 든 걸까? 아님 술에 취한 걸까? 낮에 본 남자를 떠올리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선호는 빠르게 통화를 포기한 뒤 불이 나갈 때의 정황을 물었다. 여름은 당황했던 탓인지 좀 허둥대며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 같았다. 위치만 알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선혜 앞에서 여름을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일단 쉬었다 가시라고 해.” 선혜가 선호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이따 비 좀 잦아들면 같이 가.”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관리인 무책임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괜히 여기로 왔나 봐.” 어젯밤 갑자기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한 게 선혜 자신이란 걸 잊은 듯한 말투였다. 선호는 늘 그랬듯 먼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러자 선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됐어. 어차피 내일이면 갈 텐데.” 관용을 보인 선혜가 여름을 향해 돌아섰다. “여름씨? 기다리세요. 이따 선호가 모셔다드린대요.”
말은 안 해도 선혜는 여름의 방문에 조금 들뜬 눈치였다. 그는 선호의 만류에도 직접 참외를 깎아 내오며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했다. 그의 안주인 놀이에 맞춰 선호도 참외 한 조각을 집었다. 오는 길에 국도변의 트럭에서 산 참외는 영 맹탕이었다. 선호는 쓴맛 나는 참외를 뱉지 못해 삼켰지만, 여름은 토끼처럼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선혜가 궁금한 게 많지만 인내심 또한 풍부한 보호사처럼 살폈다. 둘은 호감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소년 소녀처럼 미소를 띤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여름이었다. (선호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선혜 앞에선 누구나 자진해서 광대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선혜가 카메라를 들었다. “아, 이거요. 유튜브 하거든요. 그냥 브이로그요.”
“그랬구나. 어쩐지, 선혜씨 뭔가 낯이 익었어요. ×× 닮아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여름이 인기 있는 배우의 이름을 대자 선혜가 웃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유튜브는 제가 아니라 선호가 하는 거예요. 꽤 유명한데. 혹시 모르세요?”
선혜가 채널명을 말했지만 여름은 얼굴을 붉혔다.
“제가 유튜브는 잘 안 봐서……” 서서히 풀리던 대화가 막힐까 봐 두려웠는지 여름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선혜씨도 나오시나요. 커플 브이로그, 이런 게 인기라던데.”
이번엔 선혜가 얼굴을 붉혔다. 선호는 선혜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걸 알아채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에어컨 앞에 섰다. 몇 달째 선혜는 유튜브를 같이 찍자는 선호의 제안에 대답을 않고 있었다. 그는 얼굴 공개가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그렇다기엔 SNS를 너무 많이 했다. 선호는 자신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당장 선혜의 친구 그 누구도 선호를 알지 못했다. 자기야, 나는 원래 그런 걸. 선혜가 달래듯 말했지만 선호는 이따금 궁금했다. 예전에 만났던 연인들과도 이랬을까? 선호와 달리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그 남자들하고도?
등 뒤에서 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요.”
늘 듣던 것과 똑같은 변명이었다. 그러나 여름은 나중이 언제냐고 구질구질하게 묻지 않고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면 좋겠어요. 선혜씨는 피부도 깨끗하시고 워낙 미인이라서, 자기 채널 만들어도 잘 될 것 같아요.”
대화가 부드럽게 넘어간 것 때문인지 아니면 초면에 감탄을 숨기지 않는 여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혜는 갑자기 여름도 미인이라며 추켜세웠다. 누가 봐도 마음에 없는 칭찬 품앗이에 선호는 갑자기 역한 감정을 느꼈다. 선혜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름에 대해서였다. 그는 작동하지 않는 리모컨을 만지작대며 진창 같은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휘저었다. 세상엔 미인들의 빛을 한 조각 나눠 갖기 위해 시녀가 되길 자처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 중에 그런 애는 없었다. 그런데 여름은 익숙한 듯 기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사탕발림을 했다. 자라면서 성격이 바뀐 걸까?
선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는 소리만 요란할 뿐 미적지근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에어컨 앞을 떠나 거실 테이블 위의 빈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냥 담가만 둬. 선혜는 소리쳤지만, 선호가 물을 트는 걸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이제 초면인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속살거리고 있었다. 둘의 얘기는 선호의 중학 시절로 넘어갔다. 여름은 같은 반이었을 뿐 선호의 과거를 잘 알진 못했다. 선혜는 그러나, 때론 아무 접점도 없는 타인의 평가가 가장 정확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선호는 부러 큰 소리를 내며 그릇을 씻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했지만 여름은 선호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고 말했다. 착하고, 말이 없던 아이.
“그리고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여름이 덧붙였다. “그때는 좀 센 척하는 애들이 인기가 많잖아요. 그래서 대놓고 막, 그런 일은 없었어도 대부분 선호를 좋아했어요. 잘생겼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선혜가 킥킥댔다. “근데 자기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거 있죠.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데.”
“알 거예요. 공개 고백도 받았는데요.”
“선호야!”
선혜가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공개 고백이래. 진짜야?”
선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냥 으응, 하고 대꾸만 하고 말았다. 구운 고기가 담겼던 접시는 기름때가 굳어 끈적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세제를 쏟아붓고 거품 속에 맨손을 집어넣었다. 문득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여드름. 하지만 오래전 일이었다.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없었다.
아. 선호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을 꺼내 보니 물에 담가둔 과도에 찔렸는지 검지손가락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선호는 힐끔 거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선혜는 여전히 여름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이쪽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선호가 물로 피를 씻고 휴지로 상처를 감았다. 그는 고무장갑을 낀 채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소리를 뚫고 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선호가 원래 키가 작았는데 방학 지나고 갑자기 쑥 컸거든요. 그전에도 괜찮긴 했어도 꽤 멋있어져서, 다들 말은 안 해도 눈치를 보고 있는데 어떤 애가 딱 선호한테 고백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둘이 사귀었어요?”
여름이 힐끔 부엌 쪽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서 긍정의 의미를 읽었는지 선혜가 꺄르르 웃었다.
“다른 애들이 샘 부리지 않았어요?”
“잘 모르겠어요.”
여름이 말을 얼버무렸다. 선혜는 아직 조금 흥분한 투를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일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쟤는 학교 다닐 때 얘긴 잘 안 하거든요.”
“선혜야.”
선호가 선혜의 말을 툭 자르며 부엌에서 나왔다. “설거지 다 했어.” “어, 고마워.” 기름을 닦기 위해 뜨거운 물을 쓴 탓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휴지의 끝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선혜는 알아채지 못했다. 선호는 창가로 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그칠 기미가 없었다. 선호는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가는 게 좋겠어. 새벽까지 쏟아질 것 같아.”
그러자 선혜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지금? 어차피 우리도 놀러 온 건데 그냥 셋이 같이 보내면 안 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아니지. 선호는 속으로 대꾸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여름의 얼굴에 묻은 묘한 기대와 들뜸을 보자 속이 니글거렸다. 그가 선호에게 불리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 불리한 말 따위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고 걸리는 건 없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온 손님 중 반가운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여름이도 가서 자는 게 편할 거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선호는 문득 스스로가 꺼낸 말에 감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누가 기다릴 거야. 미안. 우리가 너무 오래 잡았다.”
그러자 여름이 민망한 듯 말을 흐렸다. “아냐. 없어.”
“응?”
“원래는 남자친구랑 오기로 했는데…… 좀 일이 있었거든.”
선혜가 가볍게 선호를 노려보았다. 괜한 얘기를 해서 사람을 들쑤셔 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머쓱하게 서 있는 선호를 밀치곤 여름의 어깨를 감쌌다. “저, 여름씨. 좀 덥긴 해도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니까요.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관리인한테 말하든지 그래요.”
“그럼 저야 좋긴 한데……”
여름이 말을 흐렸다. 순간 선호는 번개가 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뒤이어 따라와야 할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호가 창가로 다가갔다. 빗속에서도 여름의 펜션에 들어온 불이 보였다.
“아.” 여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가야겠네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뭘요.” 선혜 역시 갑자기 중학생에서 어른으로 되돌아온 듯 어색하게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 “선호한테 바래다 드리라고 할게요. 우산 있지?”
“응.”
선호가 안심하는 티를 내지 않으며 발코니 창을 열고 손을 뻗었다. “비도 좀 약해진 거 같아.”
그 순간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선호를 밀고 들어왔다.
안경 쓴 남자가 에어컨 앞에 서서 리모컨을 만졌다. 그 작은 도구가 박물관의 소장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웠다. 아마 뒷주머니에 꽂힌 총을 다룰 때도 비슷할 듯했다. 키가 큰 남자와 얼굴이 노란 남자는 소파에 앉은 채로 시행착오 끝에 껍질을 벗긴 망고를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안경을 썼고, 한 사람은 키가 컸고, 한 사람은 얼굴이 노랗다는 것만 제외하곤 세 사람은 쌍둥이처럼 비슷했고, 모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키가 큰 남자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셋을 보고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알 수 없게 말했다. “셋이라니. 무슨 관계지?” 그러나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고 망고 씨를 내려놓더니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담배가 젖었는지 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좀 걸린 남자가 연기와 가벼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금방 갈 테니 걱정 말아요.” 얼굴이 노란 남자는 생햄과 치즈를 주먹 크기로 뭉쳐 우물대기 시작했다. 안경 쓴 남자는 저 혼자 시원한 바람이라도 맞는 듯 고개를 치켜든 채 에어컨 앞에 서 있었다. 선호는 선혜의 숨이 조금 거칠어진 걸 느꼈다. 지금일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키 큰 남자가 가볍게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선호의 입에서 안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옆에 앉은 선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키 큰 남자가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예쁜 아가씨. 울지 말아요. 그냥 좀 쉬다 가는 거니까요. 우리가 막 누굴 강간한다든지 그럴 마음도 없어요. 봐요.”
남자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어컨 앞에 서 있던 안경 쓴 남자의 바지를 내렸다. 선혜가 꿱 비명을 질렀다. 선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감은 눈꺼풀 안으로 아무것도 없이 훼손된 앞이 어른거렸다. 안경 쓴 남자가 태연하게 바지를 올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에어컨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란 선혜의 울음은 더 격해졌다.
“이러라고 그런 게 아닌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곤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뭐 재밌는 거 없나.”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리를 숙여 거실 테이블 위의 카메라를 들었다. “아! 이거 봐요.” 남자가 화면을 선혜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수영장에 비키니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던 선혜의 사진이 있었다. “잘 나왔다. 이런 거 보면 기분 좋지 않아요?”
그러나 선혜는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선혜를 무시한 채 이것저것 버튼을 눌렀다. 동영상을 재생했는지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걸 듣자 선호의 머릿속엔 몇 시간 전 선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수영장의 일렁이는 물을 찍는데 선베드에 누워있던 선혜가 몸을 일으켰다. “있잖아, 가뭄 나면 짐승들이 여기 와서 물을 마실까?” “글쎄.” 선호가 멀리 보이는 방공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탈영병이나 탈북자가 올 순 있겠지.” “그건 싫어. 난 곰이 좋아.” “여긴 미국이 아니야.” “그렇다고 옛날도 아니야.” “진짜야. 지금도 탈영병 있어. 탈북자도 있고.” 선호는 이를 앙다문 채 욕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런 얘기를 왜 한 걸까?
한참을 아무 말 없던 남자가 카메라를 내려두며 소파에 앉았다.
“이런 걸 다 찍네.”
“요즘 유튜브가 인기라잖아요.” 안경 쓴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키 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참. 그게 연예인 같은 거라며?”
“신흥귀족이래요.”
그가 눈썹을 가볍게 올리고 여름을 돌아보았다. “근데 이쪽 분 사진은 없네. 사진 찍기 싫어하나 보죠?”
그 순간 여름이 둑이 터진 듯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치즈를 떼어낸 피자처럼 빨개졌다. “이럴 수가. 이젠 이분도 우네.” 그가 자신도 울 것처럼 얼굴을 구기더니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여름은 우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가 일어나 여름의 젖은 얼굴을 매만졌다. 여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한 번 더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제야 여름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여름이요.”
“예쁜 이름이네. 여름씨. 야, 이거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지 안 울까.” 남자가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더니 말했다.
“그래.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치?”
“……”
“나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지만, 그럼 뭐,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요. 다들 그렇게 사랑하는 걸 하나씩 만드는 게 좋아요. 그래야지 사는 맛이 있지.”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청순하고 인기 많은 애가 있었어요. 말수가 적고, 피부가 희어서 말은 안 해도 모두 좋아하는 애였어요. 어떤 앤지 알 것 같아요?”
알 것 같냐고요, 하고 남자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는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내가 그 애한테 고백을 했어요. 난 고아인데다, 뚱뚱하고, 눈치도 없어서 말하자면 왕따를 당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애가 남자애들 사이에서 아무도 밟지 않기로 한, 밤사이 쌓인 흰 눈 같은 존재란 걸 몰랐던 거죠. 그래서 그날 방과 후에 애들한테 실컷 맞았어요. 그 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곤죽이 된 나를 보곤 그냥 가더군요.”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순식간에 그 애가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그 앤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며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그냥 그 애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 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요.”
선호가 짧은 탄식을 뱉었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손에 쥐고 쥐어짜는 것 같았다. 여름. 여드름. 순간 불이 붙은 것처럼 무언가 타올랐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네 짓이지.”
그 말에 여름이 선호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젖은 두 뺨은 매끈했지만, 선호의 눈에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토사물처럼 더덕더덕 붙은 여드름이 보였다. 어느 무리에도 끼지 않고, 존재감도 없던 아이. 친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선호를 자신과 같은 취급해서 어느 날 교실 한 가운데서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만든 아이.
그게 여름이었다.
“미친년.” 선호가 감탄과 흥분이 뒤섞인 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여기까지 혼자 왔다는 것도 웃기고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는 것도 웃기고. 너지? 네가 이 사람들 다 데려왔지? 왜 그러는데. 어? 옛날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옛날 일이라뇨?” 키 큰 남자가 물었다.
“모르는 척 하지 마.” 선호가 여전히 여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 미쳤냐? 고작 그걸로 이 사단을 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한 건데.” 키 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 하여튼 흥분하지 말아요. 흥분해서 좋을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잠깐 쉬고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선호가 외쳤다. “야 이 씨발년아.” 그 소리에 햇반을 입에 욱여넣던 얼굴이 노란 남자가 몸을 떨었다. 키가 큰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하세요.” 그러나 흥분한 선호는 여름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발 너……”
그리고 순간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바닥에 누워있었다. 침이 흘렀는지 입가가 축축했다. 닦고 보니 붉었다. 선혜는 이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여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비는 세상이 무너질 듯 내리고 있었다. 선호가 문득 강렬한 추위를 느끼고 몸을 웅크리자 키 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코드를 빼 놓았더라구요. 작동이 안 되면 콘센트부터 확인하는 게 좋아요.”
이제 얼굴이 노란 남자는 크림빵을 반으로 찢어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안경 쓴 남자는 소파에 앉아 카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선호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묻어있었다. 키 큰 남자가 어딘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추녀가 좋아하는 남자라니. 그것도 족쇄일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내 가치도 같이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거죠. 사랑받는 게 축복이라지만 모든 경우가 다 그렇진 않네요. 정말 세상에 쉬운 건 없어요.”
“……”
“그렇지만 괴로운 건 여름씨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옛날 일인데. 이렇게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난 할 만큼 했어.”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선호가 숨을 헐떡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나도, 나도 괴로웠다고.”
여름이 소리를 질렀다. “불쌍한 척 하지 마! 괴롭힘당한 건 난데 니가 하긴 뭘 해! 그냥 좋은 사람인 척만 했지!”
선호는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그럼 내가 뭘 더해……? 너랑 사귀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야?
키 큰 남자가 여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여름씨 마음, 내가 아니까…… 키 큰 남자가 여름을 반쯤 끌어안은 채 발을 뗐다. 여름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큰 소리가 났다. 돌아나온 건 키 큰 남자뿐이었다. 그의 옷에 피가 묻은 걸 보고 선혜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냈다. 키 큰 남자가 피로한 얼굴을 문지르더니 가볍게 웃었다.
“이걸로 한 사람값은 치렀어요.”
“……”
“숙박비요. 이제 여름씨는 누가 봐도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되었잖아요.”
그때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뒤 모두 선혜가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뭐라구요?” 남자가 몸을 낮췄다. 그러자 선혜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가 입을 벌리자 끈적한 침이 턱으로 미끄러졌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애써 실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했다.
“미안해.”
“…….”
“미안해. 철우야.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자 키 큰 남자는 한동안 선혜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철우가 누구죠?”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진 선혜가 뒤로 쓰러졌다. “기절했네.” 남자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곤란한 듯이 말했다.
“사는 건 말이에요. 비슷한 일의 연속인 것 같아요. 다 자기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려고 해도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해놨던 일이라구요. 우리는 그냥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할 뿐이에요. 때론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되면서.”
남자가 손가락을 퉁겼다.
“우리 아빠는요, 진짜 좋은 사람이었어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우리 아빠가 딱 그런 사람이었어요. 우리집은 시장에서 고기를 팔았는데, 그렇게 장사를 오래 하면서도 머리 검은 사람치고 우리 아빠를 두고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아빠도 그걸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어요. 암만 애들이 백정자식이라고 놀려도, 내게도 그랬고요.”
남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새벽에 아빠를 따라 축산시장엘 간 적이 있어요. 아빠가 고기를 다 떼고 나면, 선짓국을 사줬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거든요. 어쨌든 그날도 아빠랑 라디오를 들으면서, 조수석에 앉아 다리를 덜렁대며 국도를 달리는데 갑자기 맞은 편에서 보여선 안 될 빛이 보이는 거예요. 졸음운전에 미끄러진 트럭이었죠.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그러나 찰나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내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오갔어요. 일단 떠오른 건 아버지가 죽겠구나, 라는 거였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인 나를 위해서! 그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을 셈이었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아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어요. 그러나 문득 눈이 마주친 아버지의 얼굴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어요. 아니, 오해 말아요.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는 드디어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힘껏 몸을 던져 핸들을 틀었고, 얼마 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살아남은 건 나뿐이라는 걸 알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쟤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고 수군댔어요. 그걸 듣자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지요. 내가 우리 아빠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거예요.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 일이 있고 나는 나의 몫을 알았어요.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게 나의 일이었어요. 가끔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의젓하게 참아야겠지요.”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눈물을 삼켰다.
“머물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에게도 진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그가 선호의 손에 칼을 쥐여주었다. “당신은 지금 영화 안에 있어요. 출연진의 반은 좋은 사람이고 반은 나쁜 사람이겠지요. 이게 핸들이라면 당신은 오른쪽으로 틀겠어요? 왼쪽으로 틀겠어요?”
*
키 큰 남자가 칼을 닦아 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명의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셋. 살아남은 사람도 셋. 그때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던 얼굴이 노란 남자가 배를 붙잡았다.
“나 똥 마려.”
어울리지 않게 어린애 같은 목소리였다. 안경 쓴 남자가 열린 발코니 창으로 손을 뻗더니 말했다. “얼른 싸고 가자. 비가 그쳤어.” 얼굴이 노란 남자가 주춤주춤 젖은 바지를 내리더니 쪼그려 앉았다. 두 사람은 그가 볼 일을 다 볼 때까지 다정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하늘의 비구름이 희게 보였고 공기에선 짙은 풀냄새가 났다.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걸음을 뗐다. 얼굴이 노란 남자가 옷소매에 참외를 문지르더니 한 입 베어물고 뱉었다. 우웩. 맛없어.
“내가 갈게.”
선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선혜가 영화의 내용을 빌려 농담을 던졌다.
“얼른 와. 혼자 남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잖아.”
선혜가 연극적으로 팔을 문질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딘지 김이 샌 표정이었다. 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밴 땀을 문지르며 시계를 보자 아홉 시 십 분 전이었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관리인에 대한 분노는 꺼진 지 오래였지만 선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대화로 풀 수 있는 일은 대화로 푸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반투명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실루엣은 작았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문밖에 서 있는 건 관리인이 아닌 젊은 여자였다. 우산 아래로 검은 뿌리가 드러난 지저분한 염색모와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 보였다. 선호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쉰 다음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건 에어컨이 고장 난 펜션에서 땀에 절어있을 때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선호가 젠틀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그러나 여자는 비에 젖은 채 생쥐처럼 떨 뿐 말이 없었다. 거실에선 신경질적인 현악기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줄이라고 할까 하다가 대신 배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그제야 여자가 쥐어짜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옆 펜션 사람인데요. 전기가 나가서요.”
“아아.” 선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가볍게 닦았다. 비슷한 처지네. 그는 약간의 동정을 갖고 가볍게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 우산을 접으며 다가오자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밀려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캐빈에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멀어서요.”
“그렇군요.”
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마약 냄새를 풍기는 여자는 묘하게 산만했다. 그는 젖은 머리를 털면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다가 선호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을 알아본 눈빛이라 선호는 웃으며 가볍게 뺨을 만졌다. 지금은 조명도 없고 화장도 지운 채였다. 본판이 어딜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실물이 별로더라, 하는 얘기가 나오면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 나온 건 닉네임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이름이었다.
“저, 선호 아니니?”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여자가 밀어붙였다.
“맞지? 너 선호구나.”
여자가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나. 여름이야. 우리 같은 중학교 다녔는데 기억 안 나?”
“아아. 잘 지냈어?”
선호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었다. 자기를 여름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눈을 빛내며 선호의 팔을 더듬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선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한편으론 경계했다. 어릴 때 선호는 왜소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특히 여자애 앞에서 더 그랬기에 늘 그들에게 휩쓸렸고 그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없었고 상처는 언젠가 아물었다. 문득 발이 축축해서 보니 여름에게서 떨어진 물이 고여있었다. 선호는 코르크 신발을 세워둔 뒤 여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일단 안으로 가자.”
현관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혜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선호는 선혜가 묻기도 전에 여름이 중학교 동창이고, 옆 펜션에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거진 십 년 만에 본 거야.” 선호가 변명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덧붙였지만, 선혜는 이미 여름에 대한 판단을 마친 뒤였다. 다행히 그건 동정 섞인 호감이었다. 선혜가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여름은 TV 만화의 캐릭터처럼 허둥대더니 가볍게 입을 벌렸다. “우와.” 그 솔직한 반응에 선혜가 가볍게 웃었다. 선호는 매번 그렇듯 뿌듯함에 등이 곧추서는 걸 느꼈다. 선혜가 흐트러짐 없이 차분한 머리칼을 넘기더니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더워서 어떡하죠. 에어컨이 고장 나서.”
하룻밤 묵어가는 펜션을 궁전처럼 보이게 하는 우아한 태도였다. 선호가 덧붙였다. “안 그래도 우리도 관리인을 기다리고 있었어. 전화는 해봤어?”
넋을 놓고 있던 여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 혹시 모르니까.”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만 들릴 뿐 관리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깜빡 잠이라도 든 걸까? 아님 술에 취한 걸까? 낮에 본 남자를 떠올리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선호는 빠르게 통화를 포기한 뒤 불이 나갈 때의 정황을 물었다. 여름은 당황했던 탓인지 좀 허둥대며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 같았다. 위치만 알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선혜 앞에서 여름을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일단 쉬었다 가시라고 해.” 선혜가 선호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이따 비 좀 잦아들면 같이 가.”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관리인 무책임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괜히 여기로 왔나 봐.” 어젯밤 갑자기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한 게 선혜 자신이란 걸 잊은 듯한 말투였다. 선호는 늘 그랬듯 먼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러자 선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됐어. 어차피 내일이면 갈 텐데.” 관용을 보인 선혜가 여름을 향해 돌아섰다. “여름씨? 기다리세요. 이따 선호가 모셔다드린대요.”
말은 안 해도 선혜는 여름의 방문에 조금 들뜬 눈치였다. 그는 선호의 만류에도 직접 참외를 깎아 내오며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했다. 그의 안주인 놀이에 맞춰 선호도 참외 한 조각을 집었다. 오는 길에 국도변의 트럭에서 산 참외는 영 맹탕이었다. 선호는 쓴맛 나는 참외를 뱉지 못해 삼켰지만, 여름은 토끼처럼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선혜가 궁금한 게 많지만 인내심 또한 풍부한 보호사처럼 살폈다. 둘은 호감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소년 소녀처럼 미소를 띤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여름이었다. (선호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선혜 앞에선 누구나 자진해서 광대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선혜가 카메라를 들었다. “아, 이거요. 유튜브 하거든요. 그냥 브이로그요.”
“그랬구나. 어쩐지, 선혜씨 뭔가 낯이 익었어요. ×× 닮아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여름이 인기 있는 배우의 이름을 대자 선혜가 웃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유튜브는 제가 아니라 선호가 하는 거예요. 꽤 유명한데. 혹시 모르세요?”
선혜가 채널명을 말했지만 여름은 얼굴을 붉혔다.
“제가 유튜브는 잘 안 봐서……” 서서히 풀리던 대화가 막힐까 봐 두려웠는지 여름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선혜씨도 나오시나요. 커플 브이로그, 이런 게 인기라던데.”
이번엔 선혜가 얼굴을 붉혔다. 선호는 선혜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걸 알아채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에어컨 앞에 섰다. 몇 달째 선혜는 유튜브를 같이 찍자는 선호의 제안에 대답을 않고 있었다. 그는 얼굴 공개가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그렇다기엔 SNS를 너무 많이 했다. 선호는 자신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당장 선혜의 친구 그 누구도 선호를 알지 못했다. 자기야, 나는 원래 그런 걸. 선혜가 달래듯 말했지만 선호는 이따금 궁금했다. 예전에 만났던 연인들과도 이랬을까? 선호와 달리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그 남자들하고도?
등 뒤에서 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요.”
늘 듣던 것과 똑같은 변명이었다. 그러나 여름은 나중이 언제냐고 구질구질하게 묻지 않고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면 좋겠어요. 선혜씨는 피부도 깨끗하시고 워낙 미인이라서, 자기 채널 만들어도 잘 될 것 같아요.”
대화가 부드럽게 넘어간 것 때문인지 아니면 초면에 감탄을 숨기지 않는 여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혜는 갑자기 여름도 미인이라며 추켜세웠다. 누가 봐도 마음에 없는 칭찬 품앗이에 선호는 갑자기 역한 감정을 느꼈다. 선혜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름에 대해서였다. 그는 작동하지 않는 리모컨을 만지작대며 진창 같은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휘저었다. 세상엔 미인들의 빛을 한 조각 나눠 갖기 위해 시녀가 되길 자처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 중에 그런 애는 없었다. 그런데 여름은 익숙한 듯 기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사탕발림을 했다. 자라면서 성격이 바뀐 걸까?
선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는 소리만 요란할 뿐 미적지근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에어컨 앞을 떠나 거실 테이블 위의 빈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냥 담가만 둬. 선혜는 소리쳤지만, 선호가 물을 트는 걸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이제 초면인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속살거리고 있었다. 둘의 얘기는 선호의 중학 시절로 넘어갔다. 여름은 같은 반이었을 뿐 선호의 과거를 잘 알진 못했다. 선혜는 그러나, 때론 아무 접점도 없는 타인의 평가가 가장 정확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선호는 부러 큰 소리를 내며 그릇을 씻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했지만 여름은 선호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고 말했다. 착하고, 말이 없던 아이.
“그리고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여름이 덧붙였다. “그때는 좀 센 척하는 애들이 인기가 많잖아요. 그래서 대놓고 막, 그런 일은 없었어도 대부분 선호를 좋아했어요. 잘생겼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선혜가 킥킥댔다. “근데 자기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거 있죠.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데.”
“알 거예요. 공개 고백도 받았는데요.”
“선호야!”
선혜가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공개 고백이래. 진짜야?”
선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냥 으응, 하고 대꾸만 하고 말았다. 구운 고기가 담겼던 접시는 기름때가 굳어 끈적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세제를 쏟아붓고 거품 속에 맨손을 집어넣었다. 문득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여드름. 하지만 오래전 일이었다.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없었다.
아. 선호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을 꺼내 보니 물에 담가둔 과도에 찔렸는지 검지손가락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선호는 힐끔 거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선혜는 여전히 여름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이쪽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선호가 물로 피를 씻고 휴지로 상처를 감았다. 그는 고무장갑을 낀 채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소리를 뚫고 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선호가 원래 키가 작았는데 방학 지나고 갑자기 쑥 컸거든요. 그전에도 괜찮긴 했어도 꽤 멋있어져서, 다들 말은 안 해도 눈치를 보고 있는데 어떤 애가 딱 선호한테 고백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둘이 사귀었어요?”
여름이 힐끔 부엌 쪽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서 긍정의 의미를 읽었는지 선혜가 꺄르르 웃었다.
“다른 애들이 샘 부리지 않았어요?”
“잘 모르겠어요.”
여름이 말을 얼버무렸다. 선혜는 아직 조금 흥분한 투를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일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쟤는 학교 다닐 때 얘긴 잘 안 하거든요.”
“선혜야.”
선호가 선혜의 말을 툭 자르며 부엌에서 나왔다. “설거지 다 했어.” “어, 고마워.” 기름을 닦기 위해 뜨거운 물을 쓴 탓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휴지의 끝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선혜는 알아채지 못했다. 선호는 창가로 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그칠 기미가 없었다. 선호는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가는 게 좋겠어. 새벽까지 쏟아질 것 같아.”
그러자 선혜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지금? 어차피 우리도 놀러 온 건데 그냥 셋이 같이 보내면 안 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아니지. 선호는 속으로 대꾸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여름의 얼굴에 묻은 묘한 기대와 들뜸을 보자 속이 니글거렸다. 그가 선호에게 불리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 불리한 말 따위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고 걸리는 건 없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온 손님 중 반가운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여름이도 가서 자는 게 편할 거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선호는 문득 스스로가 꺼낸 말에 감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누가 기다릴 거야. 미안. 우리가 너무 오래 잡았다.”
그러자 여름이 민망한 듯 말을 흐렸다. “아냐. 없어.”
“응?”
“원래는 남자친구랑 오기로 했는데…… 좀 일이 있었거든.”
선혜가 가볍게 선호를 노려보았다. 괜한 얘기를 해서 사람을 들쑤셔 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머쓱하게 서 있는 선호를 밀치곤 여름의 어깨를 감쌌다. “저, 여름씨. 좀 덥긴 해도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니까요.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관리인한테 말하든지 그래요.”
“그럼 저야 좋긴 한데……”
여름이 말을 흐렸다. 순간 선호는 번개가 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뒤이어 따라와야 할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호가 창가로 다가갔다. 빗속에서도 여름의 펜션에 들어온 불이 보였다.
“아.” 여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가야겠네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뭘요.” 선혜 역시 갑자기 중학생에서 어른으로 되돌아온 듯 어색하게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 “선호한테 바래다 드리라고 할게요. 우산 있지?”
“응.”
선호가 안심하는 티를 내지 않으며 발코니 창을 열고 손을 뻗었다. “비도 좀 약해진 거 같아.”
그 순간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선호를 밀고 들어왔다.
안경 쓴 남자가 에어컨 앞에 서서 리모컨을 만졌다. 그 작은 도구가 박물관의 소장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웠다. 아마 뒷주머니에 꽂힌 총을 다룰 때도 비슷할 듯했다. 키가 큰 남자와 얼굴이 노란 남자는 소파에 앉은 채로 시행착오 끝에 껍질을 벗긴 망고를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안경을 썼고, 한 사람은 키가 컸고, 한 사람은 얼굴이 노랗다는 것만 제외하곤 세 사람은 쌍둥이처럼 비슷했고, 모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키가 큰 남자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셋을 보고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알 수 없게 말했다. “셋이라니. 무슨 관계지?” 그러나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고 망고 씨를 내려놓더니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담배가 젖었는지 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좀 걸린 남자가 연기와 가벼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금방 갈 테니 걱정 말아요.” 얼굴이 노란 남자는 생햄과 치즈를 주먹 크기로 뭉쳐 우물대기 시작했다. 안경 쓴 남자는 저 혼자 시원한 바람이라도 맞는 듯 고개를 치켜든 채 에어컨 앞에 서 있었다. 선호는 선혜의 숨이 조금 거칠어진 걸 느꼈다. 지금일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키 큰 남자가 가볍게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선호의 입에서 안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옆에 앉은 선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키 큰 남자가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예쁜 아가씨. 울지 말아요. 그냥 좀 쉬다 가는 거니까요. 우리가 막 누굴 강간한다든지 그럴 마음도 없어요. 봐요.”
남자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어컨 앞에 서 있던 안경 쓴 남자의 바지를 내렸다. 선혜가 꿱 비명을 질렀다. 선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감은 눈꺼풀 안으로 아무것도 없이 훼손된 앞이 어른거렸다. 안경 쓴 남자가 태연하게 바지를 올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에어컨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란 선혜의 울음은 더 격해졌다.
“이러라고 그런 게 아닌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곤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뭐 재밌는 거 없나.”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리를 숙여 거실 테이블 위의 카메라를 들었다. “아! 이거 봐요.” 남자가 화면을 선혜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수영장에 비키니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던 선혜의 사진이 있었다. “잘 나왔다. 이런 거 보면 기분 좋지 않아요?”
그러나 선혜는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선혜를 무시한 채 이것저것 버튼을 눌렀다. 동영상을 재생했는지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걸 듣자 선호의 머릿속엔 몇 시간 전 선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수영장의 일렁이는 물을 찍는데 선베드에 누워있던 선혜가 몸을 일으켰다. “있잖아, 가뭄 나면 짐승들이 여기 와서 물을 마실까?” “글쎄.” 선호가 멀리 보이는 방공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탈영병이나 탈북자가 올 순 있겠지.” “그건 싫어. 난 곰이 좋아.” “여긴 미국이 아니야.” “그렇다고 옛날도 아니야.” “진짜야. 지금도 탈영병 있어. 탈북자도 있고.” 선호는 이를 앙다문 채 욕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런 얘기를 왜 한 걸까?
한참을 아무 말 없던 남자가 카메라를 내려두며 소파에 앉았다.
“이런 걸 다 찍네.”
“요즘 유튜브가 인기라잖아요.” 안경 쓴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키 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참. 그게 연예인 같은 거라며?”
“신흥귀족이래요.”
그가 눈썹을 가볍게 올리고 여름을 돌아보았다. “근데 이쪽 분 사진은 없네. 사진 찍기 싫어하나 보죠?”
그 순간 여름이 둑이 터진 듯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치즈를 떼어낸 피자처럼 빨개졌다. “이럴 수가. 이젠 이분도 우네.” 그가 자신도 울 것처럼 얼굴을 구기더니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여름은 우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가 일어나 여름의 젖은 얼굴을 매만졌다. 여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한 번 더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제야 여름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여름이요.”
“예쁜 이름이네. 여름씨. 야, 이거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지 안 울까.” 남자가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더니 말했다.
“그래.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치?”
“……”
“나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지만, 그럼 뭐,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요. 다들 그렇게 사랑하는 걸 하나씩 만드는 게 좋아요. 그래야지 사는 맛이 있지.”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청순하고 인기 많은 애가 있었어요. 말수가 적고, 피부가 희어서 말은 안 해도 모두 좋아하는 애였어요. 어떤 앤지 알 것 같아요?”
알 것 같냐고요, 하고 남자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는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내가 그 애한테 고백을 했어요. 난 고아인데다, 뚱뚱하고, 눈치도 없어서 말하자면 왕따를 당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애가 남자애들 사이에서 아무도 밟지 않기로 한, 밤사이 쌓인 흰 눈 같은 존재란 걸 몰랐던 거죠. 그래서 그날 방과 후에 애들한테 실컷 맞았어요. 그 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곤죽이 된 나를 보곤 그냥 가더군요.”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순식간에 그 애가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그 앤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며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그냥 그 애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 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요.”
선호가 짧은 탄식을 뱉었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손에 쥐고 쥐어짜는 것 같았다. 여름. 여드름. 순간 불이 붙은 것처럼 무언가 타올랐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네 짓이지.”
그 말에 여름이 선호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젖은 두 뺨은 매끈했지만, 선호의 눈에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토사물처럼 더덕더덕 붙은 여드름이 보였다. 어느 무리에도 끼지 않고, 존재감도 없던 아이. 친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선호를 자신과 같은 취급해서 어느 날 교실 한 가운데서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만든 아이.
그게 여름이었다.
“미친년.” 선호가 감탄과 흥분이 뒤섞인 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여기까지 혼자 왔다는 것도 웃기고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는 것도 웃기고. 너지? 네가 이 사람들 다 데려왔지? 왜 그러는데. 어? 옛날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옛날 일이라뇨?” 키 큰 남자가 물었다.
“모르는 척 하지 마.” 선호가 여전히 여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 미쳤냐? 고작 그걸로 이 사단을 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한 건데.” 키 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 하여튼 흥분하지 말아요. 흥분해서 좋을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잠깐 쉬고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선호가 외쳤다. “야 이 씨발년아.” 그 소리에 햇반을 입에 욱여넣던 얼굴이 노란 남자가 몸을 떨었다. 키가 큰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하세요.” 그러나 흥분한 선호는 여름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발 너……”
그리고 순간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바닥에 누워있었다. 침이 흘렀는지 입가가 축축했다. 닦고 보니 붉었다. 선혜는 이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여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비는 세상이 무너질 듯 내리고 있었다. 선호가 문득 강렬한 추위를 느끼고 몸을 웅크리자 키 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코드를 빼 놓았더라구요. 작동이 안 되면 콘센트부터 확인하는 게 좋아요.”
이제 얼굴이 노란 남자는 크림빵을 반으로 찢어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안경 쓴 남자는 소파에 앉아 카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선호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묻어있었다. 키 큰 남자가 어딘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추녀가 좋아하는 남자라니. 그것도 족쇄일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내 가치도 같이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거죠. 사랑받는 게 축복이라지만 모든 경우가 다 그렇진 않네요. 정말 세상에 쉬운 건 없어요.”
“……”
“그렇지만 괴로운 건 여름씨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옛날 일인데. 이렇게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난 할 만큼 했어.”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선호가 숨을 헐떡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나도, 나도 괴로웠다고.”
여름이 소리를 질렀다. “불쌍한 척 하지 마! 괴롭힘당한 건 난데 니가 하긴 뭘 해! 그냥 좋은 사람인 척만 했지!”
선호는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그럼 내가 뭘 더해……? 너랑 사귀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야?
키 큰 남자가 여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여름씨 마음, 내가 아니까…… 키 큰 남자가 여름을 반쯤 끌어안은 채 발을 뗐다. 여름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큰 소리가 났다. 돌아나온 건 키 큰 남자뿐이었다. 그의 옷에 피가 묻은 걸 보고 선혜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냈다. 키 큰 남자가 피로한 얼굴을 문지르더니 가볍게 웃었다.
“이걸로 한 사람값은 치렀어요.”
“……”
“숙박비요. 이제 여름씨는 누가 봐도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되었잖아요.”
그때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뒤 모두 선혜가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뭐라구요?” 남자가 몸을 낮췄다. 그러자 선혜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가 입을 벌리자 끈적한 침이 턱으로 미끄러졌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애써 실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했다.
“미안해.”
“…….”
“미안해. 철우야.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자 키 큰 남자는 한동안 선혜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철우가 누구죠?”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진 선혜가 뒤로 쓰러졌다. “기절했네.” 남자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곤란한 듯이 말했다.
“사는 건 말이에요. 비슷한 일의 연속인 것 같아요. 다 자기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려고 해도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해놨던 일이라구요. 우리는 그냥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할 뿐이에요. 때론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되면서.”
남자가 손가락을 퉁겼다.
“우리 아빠는요, 진짜 좋은 사람이었어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우리 아빠가 딱 그런 사람이었어요. 우리집은 시장에서 고기를 팔았는데, 그렇게 장사를 오래 하면서도 머리 검은 사람치고 우리 아빠를 두고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아빠도 그걸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어요. 암만 애들이 백정자식이라고 놀려도, 내게도 그랬고요.”
남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새벽에 아빠를 따라 축산시장엘 간 적이 있어요. 아빠가 고기를 다 떼고 나면, 선짓국을 사줬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거든요. 어쨌든 그날도 아빠랑 라디오를 들으면서, 조수석에 앉아 다리를 덜렁대며 국도를 달리는데 갑자기 맞은 편에서 보여선 안 될 빛이 보이는 거예요. 졸음운전에 미끄러진 트럭이었죠.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그러나 찰나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내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오갔어요. 일단 떠오른 건 아버지가 죽겠구나, 라는 거였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인 나를 위해서! 그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을 셈이었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아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어요. 그러나 문득 눈이 마주친 아버지의 얼굴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어요. 아니, 오해 말아요.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는 드디어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힘껏 몸을 던져 핸들을 틀었고, 얼마 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살아남은 건 나뿐이라는 걸 알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쟤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고 수군댔어요. 그걸 듣자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지요. 내가 우리 아빠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거예요.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 일이 있고 나는 나의 몫을 알았어요.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게 나의 일이었어요. 가끔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의젓하게 참아야겠지요.”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눈물을 삼켰다.
“머물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에게도 진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그가 선호의 손에 칼을 쥐여주었다. “당신은 지금 영화 안에 있어요. 출연진의 반은 좋은 사람이고 반은 나쁜 사람이겠지요. 이게 핸들이라면 당신은 오른쪽으로 틀겠어요? 왼쪽으로 틀겠어요?”
키 큰 남자가 칼을 닦아 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명의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셋. 살아남은 사람도 셋. 그때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던 얼굴이 노란 남자가 배를 붙잡았다.
“나 똥 마려.”
어울리지 않게 어린애 같은 목소리였다. 안경 쓴 남자가 열린 발코니 창으로 손을 뻗더니 말했다. “얼른 싸고 가자. 비가 그쳤어.” 얼굴이 노란 남자가 주춤주춤 젖은 바지를 내리더니 쪼그려 앉았다. 두 사람은 그가 볼 일을 다 볼 때까지 다정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하늘의 비구름이 희게 보였고 공기에선 짙은 풀냄새가 났다.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걸음을 뗐다. 얼굴이 노란 남자가 옷소매에 참외를 문지르더니 한 입 베어물고 뱉었다. 우웩. 맛없어.
이희주
밤에 걷다가 귀신 생각이 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일 무서운 건 역시 현실이네요.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