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도 높은 장면
받아쓰기
한영현, 편지지에 펜, 18x13cm, 2026
너는 쓴다.
너는 가지런히
너는 쓴다.
안녕,
안녕,
안녕을 비는
작은 말들을
작고 큰 말들
크고 눈부신
크게 환해지는
말, 마음들을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펜을 쥔 손의 새끼손가락
하늘 높이 올리고
하늘 높이 올린 마음을
태양빛 가득 채워진 단어들을
나는 읽는다.
나는 어두워서
숨죽여 읽는다.
나의 어둠이 깜짝 놀라
나의 죽음이 깜짝 놀라
나의 파괴가 깜짝 놀라
이 말은 무엇이냐고
이 쓰기는 무엇이냐고
행복은 기쁨은 사랑은 무엇이냐고
어쩔 줄을 모르고
끈적한 어둠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한영현, 노트에 펜, 21x14cm, 2026
너는 받으라고 한다. 받으라고
하고 받겠다고 한다. 가지라고
하고 갖겠다고 한다. 갖겠고,
가꾸겠다고 한다. 쓰겠다고 한다.
이렇게 쓰겠다고 하고, 너는
쓴다. 이렇게 써야 하니까, 너는
쓴다. 쓰기란 이런 것이니까,
어느 날은 얇고 길게 흘러가던
마음이 어느 날은 좀 더 넓어져
흐르는 것이니까, 그러나 많이는
아니고 조금, ‘조금’이라는 단어만
큼만 넓어져 흐르는 것이 마음
이니까, 쓰기니까, 마음 따라 쓰이
니까, 틀린 마음 없듯이 틀린 쓰기
없으니까, 틀려도 상관없으니까,
어느 날은 틀리고 틀린 말들만
떠오르니까, 틀리고 틀린 마음만
떠오르듯이, 틀리면 지우면 되니까,
지우고 다시 쓰면 되니까, 지우고
다시 쓰는 게 쓰기니까, 지우고
다시 쓰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지운 것도 쓰기니까,
쓰기에 속하니까, 지운 쓰기는
지웠다는 말이니까, 지우고 지웠다는
마음이니까, 지우고 지워야 했던
마음의 떨림이니까,
한영현, 편지지에 펜, 21x15cm, 연도미상
너는 쓰고, 지운다. 다시 너는 쓰고, 지운다. 또다시 너는 쓰고, 지운다. 다시, 다시, 다시. 무언가
한영현, 노트에 펜과 연필, 25x18cm, 2025
6학년 10반 86번
이름: 김효나
1. 말, 해야 할까?
2. 미워.
3. 미우면 밉다고 말해야 할까.
4. 말끝을 흐리면 말이 멀어진단다. 말이 멀리멀리 간단다. 산 넘고, 바다 건너, 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단다. 사막 넘고, 밀림 지나, 네가 상상도 못 하는 곳으로 간단다.
5. 두려움 없이……
6. 말을 멀리 가게 하고 싶어요.
7.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멀어져요.
8. 쓰는 널 바라보며
9. 어디까지 갈까요.
10.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받아쓰는 널 바라보며
한영현, 노트에 연필, 25x18cm, 2025
6학년 10반 46번
이름: 김효나
1. 너는 받아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너는 받아쓴다. 깊은 밤처럼 적막한 방에서, 허공의 한 지점을 골똘히 바라보다 문득, 받아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오직 너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을,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어쩌면 모두가 하는 말을.
2. 그리고 나는 너를 받아쓴다. 역시 아무도 없는 방에서, 너의 말을 받아쓴다. 네가 86번이라면 나는 87번 학생이 되어 받아쓴다. 네가 45번이라면 46번 학생이 되어, 네가 어디로 가든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너의 말을 받아, 쓴다.
3. ‘받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①(다른 사람이 주거나 보내는 것을) 응하여 자기의 것으로 가지거나 자기 책임 아래 두다. ②(공중으로 이동하여 자기에게 오는 물건을) 손으로 잡다. ③(흐르거나 쏟아지거나 하는 것을 그릇 따위에) 담기게 하다. ④(요구, 신청, 질문, 공격, 도전 등을) 응하는 상태가 되다. ⑤(전화나 신호 따위를) 통하게 하거나 자기에게 오게 하다. ⑥(어떤 사람을) 어느 곳에 맞아서 들게 하다. ⑦(외부로부터의 빛, 열, 바람 따위를) 자체에 가진 상태가 되다. ⑧(다른 사람이 가하거나 행하는 행동이나 일을) 당하거나 입다. ⑨(남이 지은 시나 남의 말 등을) 응하여 후렴이나 대응되는 내용으로 뒤를 잇다. ⑩(태어나는 아이를) 출산이 순조롭도록 보살피거나 돕다.
4. 나는 그 모든 ‘받다’를 받는다. ①네가 보내는 말에 응하여 나의 것으로 가지거나 나의 책임 아래 둔다. ②공중으로 이동하는 너의 말을 나의 말로 잡는다. ③흐르거나 쏟아지는 너의 말을 나의 쓰기 안에 담기게 한다. ④너의 인사, 소원, 기원, 행복, 불안, 두려움, 강박 등에 응하는 상태가 된다. ⑤너의 끝없는 신호를 통하게 하거나 나에게 오게 한다. ⑥너를 내 안에 맞아서 들게 한다. ⑦너로부터의 빛, 열, 바람 따위를 가진 상태가 된다. ⑧네가 행하는 쓰기를 입는다. ⑨너의 말에 응하여 대응되는 내용으로 뒤를 잇는다. ⑩태어나는 너의 말을 보살피거나 돕는다.
5. 내가 행하는 ‘받기’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이중 여덟번째이다. 네가 행하는 쓰기를 나는 입는다. 너의 쓰기를 입고, 나는 쓴다. 너의 쓰기를 받고, 나는 쓴다. 너의 쓰기는 정교하게 재단된 옷처럼 내 몸에 꼭 맞는다. 왜인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받아쓰는 너의 행위는 어째서 내 몸에 꼭 맞는가. 깊은 밤처럼 적막한 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모두가 하는 말을 쓰고, 쓰고, 끝없이 쓰는 너의 행위는 어째서 나에게 이토록 꼭 들어맞는가.
6.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인가. 나 또한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긴 시간 받아쓰고 있었기 때문인가. 깊은 밤처럼 적막한 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모두가 하는 말을 쓰고, 쓰고, 끝없이 쓰고 있었기 때문인가.
7. 너는 쓰고, 나는 쓴다.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모두가 하는 말을 쓰고, 쓰고, 하염없이 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모두 아무도 없는 방이다. 너도 아무도 없는 방이고, 나도 아무도 없는 방이다. 아무도 없다. 어쩌면 아무도 없으니까, 우리는 쓰는 걸까. 혹은 모국어가 있으니까. 모국어만 있으니까.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 부모가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유산. 그들이 입안 가득 넣어준 바로 그것. 뱉어도 뱉어도 다시 채워지는 것. 다시 입안이 터지도록 차오르는 것. 어쩌면 그것을 배반하기 위해 쓰는 걸까.
8. 착한 딸이 될 거지만 잔디를 밟고 있어서. 온 힘을 다해 짓밟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아니면 그것을 부둥켜안고 울고 싶어서 쓰는 걸까.
9. 착한 딸이 되었는데 팻말은 꺾여 있어서.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은 어느새 무참히 꺾이고 산산조각 나 있어서.
10. 팻말은 산산조각 나 있고, 잔디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져 있어서 이렇게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쓰는 걸까. 아무도 그러라 하지 않았지만 매일매일, 온 힘을 다해, 온 생을 다해 쓰고 또 쓰는 걸까. 써도 써도 계속 쓰고 싶어지고, 쓰면 쓸수록 더 쓰고 싶어지는 걸까. 아무리 써도 더 쓸 말이 있고, 이제 됐다 싶을 만큼 질리도록 써도 이틀만 지나면 다시 목말라지는 걸까.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걸까. 쓰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리는 걸까. 죽어버리는 대신 쓰자고, 이건 쓰고 죽자고 늘 되뇌게 만드는 걸까. 늘 죽음과 견주게 되는 쓰기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매일 산더미처럼 쓰는 이 말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가.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받아쓰고 받아썼던 이 텍스트는, 우리 공동의 텍스트는 대체 어디로 가는가.
한영현, 노트에 연필, 25x18cm, 2025
지는 하늘에 낭자하게 번진 핏빛 노을 속에서,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나던 해 세상을 떠난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받아쓴다. 받아쓰는 자의 음성을, 침묵과 음성 사이의 그것을 최초로 보여주었던 그녀의 텍스트.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 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1)
결국, 도착하는 곳은 받아쓰는 자들의 근원, 우리 공동의 자궁이다.
김효나, 한영현
소설가. 문화예술기획자.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및 정신장애를 가진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조명하는 일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를 기획했고, 개인 작품으로 『2인용 독백』 『초와 그녀』 등을 썼다. (김효나)
문구점에서 산 편지지나 노트에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글을 쓴다. 행복, 사랑, 기쁨, 감사, 행운 등의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여 단순하지만 마음이 담긴 소박한 문장을 만든다. 창작그룹 밝은방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사랑랜드'(2023), '여기 닿은 노래'(2024) 등 그룹전을 통해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한영현)
2026/06/03
79호
- 1
- 차학경, 『딕테』, 김경년 옮김, 문학사상, 2024,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