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합(離-合) 가족

2010년대 중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구호에 힘입어 어느 집 할 것 없이 명절 제사상 앞이 곧 투쟁의 광장이 되곤 하던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 또하나의 가족이 상봉했다. 2000년대 이후 광장은 크게 촛불집회와 극우‧보수 집회의 대립 구도로 양분되었는데,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대한민국엄마부대’ 등이 보수 정권을 지지하면서 과격한 시위를 벌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슬로건 아래 ‘대한민국자식연합’이 만들어졌다. “나의 부친과 생각이 비슷”한 어버이연합회 회원들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인 ‘대한민국효녀연합’의 한 회원이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했고, 이에 ‘효자연합’ ‘오빠연합’ ‘누나연합’ 등의 연대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1) 요컨대, 한편에서는 집안의 가족들이 제각기 정치적 주체로 변신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광장으로 나온 정치적 주체들이 (비록 화목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다시금 가족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2017년과 2025년 두 번의 탄핵의 주된 동력이었던 촛불집회는 시민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여전히 광장은 양분되어 있다. 사회 내부의 적대는 세대적 갈등으로 간단하게 치환되면서 ‘어버이 vs. 자식’이라는 가족관계로 표상되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정치적 주체로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 젊은 여성들은 진보 진영에 의해 ‘개딸’로 호명되었다. 이처럼 가족은 위계와 성별 규범을 (재)생산‧(재)학습하는 시초의 장소로서 집단의 정치적 상상력을 강하게 구속하면서, 동시에 집단의 정치적 상상력의 변화에 따라 형상을 부여받는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형식이다. 특히 혁명이 기존의 권력관계를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엔 사람들이 권력의 작동에 대해 집단적으로 상상하는 방식이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상상력에는 부모와 자식,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가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2) 그렇다면 촛불혁명, 페미니즘 리부트, 응원봉 혁명 등 일련의 사건을 통과하며 가족 서사는 어떠한 정치적 감각을 생산/수용했을까. 이 글은 오늘날 광장의 분열과 혁명의 전망을 그리고 있는 가족 서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해석을 검토하여 한국문학장의 정치적 상상력과 문학의 공간을 진단해보고자 한다.3)


2. 매끈한 광장의 서글픈 어버이들: 성혜령의 「대부호」와 성해나의 「스무드」

성혜령의 「대부호」와 성해나의 「스무드」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을 자식에게 소외된 부모(혹은 자식을 잃은 부모)로 재현한다. 먼저, 성혜령의 「대부호」는 엄마(이자숙)의 딸이자 죽은 오빠의 여동생인 ‘나’를 서술자로 하여 전개된다. 오빠는 수능이 끝난 뒤 단기 아르바이트를 나갔다가 냉동창고에 갇혀 죽었다. 그날 공장에 정전이 발생하여 냉동창고의 밀폐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창고 안에는 비상 손잡이가 있었지만, 공장 측은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았고, 공장측은 약소한 벌금형만 받았다. 오빠의 죽음 이후 ‘나’는 내내 엄마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반대로 엄마는 분노와 원망을 눈앞의 딸에게 풀었다. 그러다 아버지까지 죽자 이제 가족이라곤 엄마와 ‘나’만이 남게 된다. ‘나’는 진작에 집을 나가 살았지만, 이제는 외국 기업으로 이직하여 엄마를 완전히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엄마가 넘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나’는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돌보기 위해 당분간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 엄마에 관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엄마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가방에 넣어두고 틈만 나면 집회에 참석했다는 것, 온종일 정치 관련, 특히 선동에 가까운 보수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고, 어느 대형 교회 목사를 개인적으로 후원까지 한다는 사실”(171쪽) 같은 것. 엄마는 극우 유튜버들의 방송을 자주 듣고, 그들처럼 반노동자적, 반이주자적, 반여성적, 반민주적 발언들을 쏟아낸다. 윗집 사는 이웃이 동남아에서 온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온갖 편견과 혐의를 덧씌우고, 심지어 직선제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게 중요하다며 민주주의의 원칙을 부정하는 말도 한다. 엄마는 간혹 자신의 발언이 지나치다는 걸 아는데, 그럴 때면 “너처럼 교육받아서 돈 잘 주는 직장 다니는 사람은 모르는 삶이란 게 있는 법”(177쪽)이라며 상고를 나와 포목점 보조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자신의 계급성으로 원인을 돌린다.
  그러나 엄마가 사회적 소수자, 약자를 혐오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설의 결말부에 가서야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엄마에겐 아들의 죽음에 대해 원망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뭔가 바꾼다고 말하는 사람들, 엄마는 꼴 보기 싫더라. 노동자, 인권,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진짜 싫어. 바꿀 수 있었으면, 우리 현식이가 안 죽어도 됐잖아. 그런 생각 하면 엄마는 살 수가 없어.”(184쪽) 엄마는 아들을 잃은 후, 아들을 죽게 만든 시스템을 개선하는 쪽으로 나아간 게 아니라, 노동자와 소수자, 그리고 그들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전자가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아픔을 통해 제도의 개선이라는 공적‧정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주체라면, 후자는 개인적 슬픔과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사적 주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자숙이 광장에 나가 반대파를 빨갱이라 부르고 노조를 비난한다고 해도 그것은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슬픔에 대한 왜곡된 분풀이일 뿐이다. 이자숙은 계급적‧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상처 입은 엄마로서 광장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태극기 집회 참가자를 ‘자식 잃은 엄마(부모)’로 재현하는 전략은 한국사회에서 타자화된 그들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아니면 정치적 주체를 사적 주체로 재현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성을 소거하는 것일까. 답을 잠시 미루고 성해나의 「스무드」를 경유하자. 성혜령의 「대부호」가 딸의 시점에서 태극기 부대 엄마를 포착하고 있다면, 성해나의 「스무드」는 듀이라는 이방인의 시선에서 태극기 집회를 재현한다. 소설의 서술자 듀이는 한국계 미국인이긴 하나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가 한국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온전한 미국인이 되길 요구한 탓이다. 그런 듀이가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그의 담당 아티스트 제프가 한국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인 ‘스무드(smooth)’는 제프의 신작이자 소설의 주제 의식을 함축하는 메타포다. 제프의 ‘스무드’는 “스테인리스스틸을 미끈하게 세공한 검은색의 구”인데, 듀이는 이를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으며,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는 작품이라 평한다. 제프의 작품에 매료된 다른 사람들처럼 듀이 역시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한다.(71쪽) 이때 ‘스무드’는 듀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금지당한 이후 그 세계를 결코 엿보지 않았으며, “간혹 누군가 (중략) 중국계인지 한국계인지 물으면 대수롭지 않게 미국인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되었다.(81쪽) 또한, 듀이는 입주자만을 위해 갤러리를 운영하는 고급 아파트를 보고 처음엔 “대단히 차별적”(70쪽)이라 여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인의 영어 발음마저 “거슬리는 곳 하나 없이 매끄러”(79쪽)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한다.
  듀이는 근처 고궁을 산책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핸드폰마저 배터리 부족으로 꺼질 위기에 처한다. 마침 그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의외로 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우여곡절 끝에 듀이는 “온몸을 ‘타이극기’로 두르고”(89쪽) 있는 미스터 김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듀이와 미스터 김은 언어 장벽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소통은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듀이는 미스터 김이 자식과 단절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듣는다. 미스터 김은 듀이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고, 이에 듀이는 “아무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 즉 전혀 모르는 자신의 할아버지에 관해서, 한국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게 된다. 미스터 김은 듀이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슬픔에 젖은 순한 눈으로” 듀이에게 위로를 건넨다. “노 프로블롬, 노 프로블롬.”(104쪽)
  듀이는 처음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느끼지만, 집회 참가자들의 환대와 미스터 김과의 정서적 유대를 통해 마침내 “생애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들”고, 끝내는 자신이 “분명 그들과 섞이고 있”음을 느낀다.(109쪽) 이때 중요한 점은 듀이가 느끼는 유대감이 다분히 가족적이라는 것이다. 듀이는 미스터 김의 가족사진에서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97쪽)을 겹쳐보고, 그에게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쩌면 당신과 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104쪽)다고 말한다. 또한, 미스터 김이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라 소개하는 집회 참가자들의 호의와 온정에 고마워하고, 미스터 김의 손길을 “할아버지가 손자를 챙기”는 듯한 “살갑고 다정”한 애정으로 받아들인다.(107쪽) 가족적 온정 속에서 고양된 듀이는 마침내 아버지의 나라를, “아니 우리의 나라를” “아버지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109쪽) 미스터 김에게서 느낀 (유사)부정(父情)은 듀이에게 “우리의 나라”를 만들어주고,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남긴다.
  듀이의 태극기 집회의 경험은 그가 평생 세계를 접해온 ‘스무드’한 방식과 다르지 않다. 듀이는 태극기 집회의 정치적 의미는 알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의 무지와 불통의 상황에 기인한다. 듀이는 집회를 ‘축제’로 알고 있으며, 뜻도 모른 채 집회 참가자들을 ‘열사’라 부른다. 또한, 집회 참가자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국의 링컨 같은 존재”(105쪽)겠거니 넘겨짚는다. “경멸 어린 눈길로 쏘아보는”(89쪽) 행인의 시선을 감지하지만, 끝내 그 눈빛의 의미를 알(려고 하)지 못한다. 요컨대, 듀이가 태극기 집회에서 느낀 유사-가족애는 집회 안팎의 분노와 불안과 결핍을 소거한 채, 무엇도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 무지한 시선에서 얻어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사회 내부의 독자는 시종일관 이방인의 시선을 지닌 서술자에게 쉽사리 동화되지 않을 수 있다.
  소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독자와 서술자 사이의 거리는 “개인의 삶을 조명하면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식의 나른한 온정주의에 빠지도록 두지 않는”4) 방지턱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서술자와 독자의 거리가 「스무드」를 나른한 온정주의로부터 구해주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한국 사회 내부자들과는 무관한 이방인의 이야기일 뿐일까. “듀이의 충만한 표정이 깃든 자리에 남겨진 독자에게” “손쉬운 탈각으로 형성된 ‘매끈한’(smooth) 세계”에 대한 “집요한 이해가 요청”된다면,5) 그것은 무엇일까.
  듀이가 태극기 집회를 경험하는 양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이해(오해)는 언어장벽에 따른 가치중립적 불통이라기보다는 다소 선택적이다. 그는 무지와 오해와 감상적 도취를 바탕으로 태극기 집회를 경험하는 가운데에도 어떤 요소들은 비교적 제대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미스터 김이 평생 대구에서 살았고 미군에게 프라이드치킨을 팔며 영어를 익혔다는 것, 그렇게 키운 자식들은 현재 서울에 살지만 미스터 김은 그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 등이다. 즉, 소설적 장치로 마련된 무지한 이방인의 시선은 태극기 집회 참가자의 정치성은 효과적으로 소거하면서도 안타까운 개인사는 부각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그러한 소거를 대가로 얻어지는 (유사)가족애가 듀이로 하여금 “우리의 나라”를 확인하게 하고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의 희망을 줄 때, “우리의 나라”는 ‘우리의 가족’과 같은 위치에 놓인다. 이는 「대부호」의 딸이 태극기 부대가 된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와의 관계가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호」와 「스무드」 모두 태극기 부대를 슬픈 어버이의 얼굴로 재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적대적인 정치적 주체에서 끌어안아야 할 가족으로 인식하게 한다.
  광장에 나타난 정치적 주체의 정치성을 괄호 치고 그들의 개인사를 부각하여 연민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그들의 고난을 세대론적으로 확장하고 그들을 쇠락한 어버이로 비유하여 마침내 국가를 거대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것, 이와 같은 소거와 비약과 연민을 버무려 광장의 정치적 주체들을 가족관계로 재정립하고, 이를 통해 유대감의 회복을 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관성적인 방법이다. 이는 갈등의 임시적인 봉합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스무드」의 듀이의 시선을 이방인의 것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듀이의 현실 인식이 한국사회의 온정주의적 시선과 닮았다는 것은 그러한 온정주의가 실은 광장을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는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고,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는 외부자적인 태도임을 시사한다.


3. 환금/회수되지 못한 부채감과 1/6의 혁명: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

이번엔 반대쪽 광장으로 가보자.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은 ‘고삼녀(고학력 삼십대 여성)’ 딸이 본 386세대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나’(수민)는 어릴 때부터 모 대학 사학과 ‘민주85’ 학번이었던 부모님과 운동권 동지들의 활약상을 듣고 자랐고, 그래서 노동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들에 알 수 없는 설렘과 아우라를 느꼈다. 그러나 ‘나’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아버지 태수와 정치적 견해가 극도로 갈렸다. 태수는 “요즘 여자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226~227쪽) 태수는 사회 혁명을 꿈꾸었지만, 가족 내 차별적인 성역할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수가 암을 진단받고 ‘나’가 태수를 돌보게 되면서 부녀는 서로의 거리를 좁혀 간다.
  두 사람의 완전한 의기투합이 이루어진 무대는 태수의 장례식장이다. ‘나’와 태수는 태수의 죽음을 계획하며, 지인들에게 전할 말을 준비해둔다. 그것은 예컨대 성식이 형에게 삼십 년 전에 준 삼백만원을 딸(‘나’)에게 갚으라는 것이거나 세탁소를 하는 페친이 그간 보내준 옷들이 가품이었다는 등의 애통하고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훼방’ 놓는 전언이었다. ‘나’는 여자는 상주가 될 수 없다는 성별 규범을 부수고 상주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에서 태수의 목소리를 그럴듯하게 흉내내어 장례식장의 엄숙함을 깨뜨린다. 그리고 마침내 태수의 바람대로 장례식장에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풀어놓음으로써 가족 의례를 그야말로 ‘개판’으로 만든다. 이로써 딸이 닮고 싶었던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238쪽) 아버지 태수, 학생운동 시절 “우리의 적은 제도”(248쪽)라 외치던 동지 태수의 마지막 모습이 완성된다. 그리고 ‘그 개’의 소동은 (가족)제도에 훼방을 놓는 일이 됨으로써 ‘혁명’으로 도약한다.
  특히 「그 개와 혁명」은 “지금의 청년세대가 도모하는 혁명이 직전의 세대와의 관계, 경험하지 못한 또다른 현재와의 연접”6)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비생산적인 세대론적 적대가 만연한 동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과거에 좌초한 혁명의 유산을 어떻게 새롭게 계승‧상속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천착”7)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전승민, 강동호는 공통적으로 웬디 브라운의 ‘좌파적 우울(멜랑콜리)’이라는 진단을 원용하면서, 「그 개와 혁명」에서 과거의 혁명과 이념에 매여있는 좌파의 고착 상태를 넘어설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그 가능성이 전승민에게 ‘사랑’이라면, 강동호에게는 ‘웃음’이다. 전자는 “NL(National Liberation)인 엄마와 PD(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인 아빠가 만나 페미니스트 여성 청년인 수민을 낳고, 페미니스트 장녀는 PD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상주가” 되는 서사를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분열도 사랑 앞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불화를 무화하며 부러진 과거의 척추 마디마디를 잇는 이 사랑은 급진적으로 혁명적”이라 평가한다.8) 한편, 후자는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는 희극적 요소가 “세대적‧젠더적 적대가 와해되는 순간”9)을 만들어내고, 소설의 마지막에 반려견 유자가 일으키는 소동은 “시간과 공간을 전복시키는 바흐친적 카니발레스크”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적 힘과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작은 혁명적 순간에 대한 알레고리”라 해석한다.10)
  이는 「그 개와 혁명」의 주요한 특징―사랑과 웃음―을 정확하게 간취하고 있지만, ‘나’와 태수를 지나치게 정치적인 주체로만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전승민이 요약한 대로 NL인 엄마와 PD인 아버지가 만나 사랑하여 페미니스트 딸을 낳고, 구세대 남성인 아버지와 신세대 여성 딸이 서로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라 할 때, 이는 달리 보면 각기 다른 신념을 지닌 정치적 주체가 정상 가족으로 귀착하는 서사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대학 입학 후 태수와 정치적 견해가 극도로 갈렸던 ‘나’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새삼 깨달은 것도 그가 큰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태수의 병은 운이 나쁘거나 체질이 약해 걸린 질병이라기보다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싫은 일도 버틸 수밖에 없었던 ‘가부장’의 희생의 결과로 해석된다. 따라서 ‘나’와 태수의 의기투합에는 구세대 남성과 신세대 여성의 포용보다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아버지와 딸의 유대감 회복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태수씨는 가까이 있는 나를 두고도 저멀리 있는 요즘 여자들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태수씨 또한 견뎌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딸을 길러내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꾸역꾸역 출퇴근을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였고 술을 먹고 게임을 했다. 그렇게 배가 부르고 불러 복수가 찬 줄도 몰랐다. (227쪽)

위의 두 단락은 태수에 대한 ‘나’의 양가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정치적 주체로서 ‘나’는 386 운동권 출신의 태수를 사랑할 수 없으나, 딸로서 ‘나’는 아버지의 희생에 마음 아파한다.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혁명의 유산을 주고받을 만큼 정치적 주체로서 의기투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바람직한 정치적 주체로서 완전한 의기투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태수에 대한 ‘나’의 양가적 감정을 정치적인 것으로 봉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11) 오히려 「그 개와 혁명」의 빛나는 장면은 가족을 간병하면서 겪는 슬프고도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이다. ‘나’의 가족은 “태수씨를 지독하게 사랑해서 서로를 끔찍하게 미워하기”(226쪽)도 하고, “태수씨가 먹는 것과 싸는 것에 모두 집중하고 즐거워”(234쪽)하기도 한다. 태수의 변을 사진으로 기록해두면서 “내 생전 남의 대변을 사진으로 찍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234쪽)라고 하는 ‘나’의 말에는 슬픔과 웃음이 함께 묻어난다. 온 가족이 함께 병과 싸우는 동안 ‘나’와 태수는 부쩍 가까워지는데, 죽음을 앞둔 태수가 “온갖 것들이 나를 살리는 방식을 죽”이고 있다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두 딸 “너희들이 걱정”(239쪽)된다고 하는 장면은 무척 마음이 아프다. 이들 가족의 서사는 보편적 공감을 얻을 만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아도 된)다.

“형주가……”
  “태수씨요.”
  “그래, 태수씨가…… 나랑 팔당에 간 적이 있어.”
  팔당에 가서 그러더라, 네 엄마가 널 임신했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만해야 될 것 같다고. 성식이 형이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요? 내가 묻자 성식이 형은 조용히 대답했다. 혁명. 그래서 내가 러시아를 혼자 간 거야. 지령을 받고. 태수씨도 지령을 받았어요? 아니지. 걔는 듣자마자 말렸지. 걔는 뼛속까지 PD였어. 아무래도 수령님을 모시는 건 자기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이야. 자기는 식구들 먹여 살려야겠대. 그래서 내가 펄쩍 뛴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다면서 준 게……
  “삼백만원이라고요?”
  “그래.”
  “그래도 줄 건 줘야죠.”
  “그래야겠지?” (228쪽)

태수가 성식에게 자신의 딸에게 돌려주라고 요구한 삼백만원의 연원도 문제적이다. ‘나’는 생전에 태수와 모의했던 대로 성식에게 태수의 말을 전한다. “삼백만원은 꼭 우리 수민이한테 갚아주쇼.”(224쪽) 이에 성식이 전하는 바, 그 돈은 삼십 년 전 태수가 사회 운동을 떠나며 건넨 돈이라고 한다. 당시 태수의 아내는 ‘나’를 임신하고 있었고, 가장이 된 태수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전승민은 태수가 거시적 담론에 매몰된 사회 운동으로부터 “‘집’을 돌보는” 일로의 전환을 혁명이라 해석한다. 거대 정치 운동에서 이탈한 1980년대 태수의 전회는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라는 신세대 페미니즘과 공명하면서 2020년대의 ‘나’(수민)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12) 물론 전승민의 지적처럼 화염병을 던지고 삐라를 뿌리는 행위만이 혁명을 위한 실천은 아닐 것이나, “‘집’을 돌보는” 행위가 “자기만의 혁명”13)으로 해석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그것이 가족을 기본단위로 한 생존주의로 귀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태수는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227쪽)로 여기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먹고사니즘에 대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무수한 소시민적 가장들의 속물성을 비판하면서 유독 운동권 남성이 전향하여 가족을 돌본 일에 대해서만 혁명이라 추켜세울 이유도 없다.
  「그 개와 혁명」에서 ‘나’가 태수로부터 상속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의 표면에 명백하게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삼백만원에 대한 채권(債權)이다. 그런데 이 돈이 생활세계로 떠나는 태수가 성식에게 준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돈은 문자 그대로 태수의 부채감(負債感)과 교환되는 것(부채(감)를 변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삼십 년 후 태수가 새삼 그 돈에 대한 권리를 딸에게 상속한다는 것은 부채감의 시효가 만료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은 두 딸 “너희들이 걱정”이 된 탓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소설이 혁명을 꿈꿨던 구세대 운동가의 부채감을 완전히 환금/회수하지 않고 ‘잔여(잔금)’를 남긴다는 것이다. 성식은 ‘나’에게 이백오십만원만을 돌려주고 나머지 오십만원은 담배 한 개비로 갈음하려고 한다. 그러자 ‘나’는 성식이 형이 되돌려주지 않은 돈/부채감에 대한 대가로 반려견 유자를 장례식장에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과거의 동지 성식이 완전히 회수/환금되지 않은 부채감의 잔여로서 유자를 장례식장에 데려오고, 바로 그 개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따라서 소설의 마지막에 벌어지는 장례식장의 소동은 오롯한 혁명이라기보다는 혁명을 꿈꿨으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활의 세계로 떠났던 젊은 태수의 부채감, 그 부채감 삼백만원 가운데 1/6만큼의 잔여, 그것이 바로 ‘나’와 태수가 만들어낸 가족제도에 대한 ‘훼방’의 크기이다. 혁명 자금으로는 턱없이 미미한 삼백만원, 그 미미함 중에서도 1/6의 잔여. 그러나 갑자기 부양해야 할 가족이 생겨버린 삼십 년 전 태수에게는 어쩌면 가진 것의 전부였을지도 모르는 삼백만원, 그 삼백만원의 1/6의 잔여. 다른 세계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한 채 생활의 중력에 묶여 있는 주체가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줄 수는 없어 1/6의 잔여로서 만들어낸 균열. 그것을 과잉된 의미 부여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목격할 필요가 있다.14)


4. 소진된 혁명과 경직된 상상력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구호와 공명하면서 정치의 영역을 개인의 삶 깊숙한 곳까지 확장‧심화해왔는데, 흥미롭게도 최근 가족소설에서는 거꾸로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잠식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대부호」는 엄마와 ‘나’가 ‘대부호’라는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대부호 게임에서 네 가지 무늬의 같은 숫자를 모두 내면 혁명이 일어나고, 카드의 서열은 뒤집힌다. “그때까지 계속 패스만 하던 엄마가 네 장의 카드를 나란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혁명이다.””(184쪽) ‘나’는 엄마에게 혁명해서 좋으냐고 묻고, 엄마는 좋다고 답한다. 그간 사회의 변화를 두려워했던 엄마가 혁명을 반기는 장면은 엄마의 변화로 여겨질 법하고, 따라서 소설의 결말은 ‘나’와 엄마의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그런데 왜 대부호에서는 서열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서열이 뒤집히는 게 혁명일까. 혁명이 일어나서 달라진 게 “카드도 거꾸로 내야” 하는 것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나도 “대빈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대부호가 되어서 좋은 카드를 받기 위해서”(170쪽) 애써야 한다면, 그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혁명의 의미는 대빈민과 대부호 사이의 불평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빈민에게 대부호가 될 기회를 주는 것이 되어버렸을까. 혁명이 자신에게 부과된 불평등/불이익을 되갚아 줄 누군가를 찾는 일이라면, 이는 원망할 누군가를 찾아 광장으로 나가던 엄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다시 한번 정치적인 것은 사적인 것에 침식된다.
  「그 개와 혁명」의 결말을 장식하는 ‘소동’을 온전한 혁명이 아니라 1/6의 균열로 셈하는 것은 소설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혁명보다 눈앞의 식구에게 매이는 태수, 가장으로서 희생해온 아버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신세대 여성인 ‘나’, 두 사람의 양가적인 감정을 강조하는 것 또한 그들의 사랑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으로든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갈등이야말로 문학이라는 공간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것이며, 거꾸로 그러한 모순적인 상황과 감정의 두께가 문학의 용적을 넓힌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라는 양극단 사이를 무한히 미분하면서 무수한 시도와 실패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그 각각의 시도에 담긴 개별적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문학이다. 그러나 그 무수한 실패를 연민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혁명의 성공과 실패, 그 사이를 넓게 벌리는 문학의 공간을 협소하게 하는 일이자, 혁명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후퇴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장력에 묶여 있는 주체의 삶을 애정과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과 혁명을 상상하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학도 혁명도 누추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지은

201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소셜 클럽』을 썼다. 현재 대학에서 동시대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2026/08/05
80호

1
“미소 시위 ‘효녀연합’이 궁금해!”, 《주간동아》, 2016년 1월 20일. 바로가기
2
린 헌트,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조한욱 옮김, 새물결, 1999, 26쪽. 린 헌트는 프랑스 혁명기 새로운 정체(政體)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을 가족 로망스의 양상을 통해 살펴본다. 국민의 ‘아버지’로 대표되던 국왕을 처형한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무의식의 구조가 필요했는데, 자유, 평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이었던 ‘형제애’는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권력이 형제에게 분배되면서 여성이 다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준다. 린 헌트가 보기에 가족 로망스는 집단의 정치적 상상력에 형상을 부여하고, 또 그러한 상상에 의해 형상을 부여받는 무의식적 구조이다.
3
이 글에서 다루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성혜령, 「대부호」, 《문학들》, 2025년 여름; 성해나, 「스무드」, 『혼모노』, 창비, 2025;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이상의 소설에 대해서는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4
양경언, 해설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345쪽.
5
같은 글, 346~347쪽.
6
전승민, 「사랑의 혁명성-Rebellious Heart」,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다산책방, 2025, 93~94쪽.
7
강동호, 「좌파적 웃음: 동시대 소설에 나타난 유머의 정치에 관하여」, 『현대문학의 연구』 88, 2026, 132쪽.
8
전승민, 같은 글, 96쪽.
9
강동호, 같은 글, 135쪽.
10
같은 글, 136쪽.
11
하혁진은 아버지 세대의 정치적 구호에 비해 딸의 사랑은 작고 사소할 수 있지만,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즉, 이들의 사랑은 온전한 혁명의 완수일 수는 없지만, 그것의 출발점으로서 사랑을 발견한다고 강조한다.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 360쪽.
12
전승민, 같은 글, 101쪽.
13
같은 글, 같은 쪽.
14
같은 맥락에서 소설의 결말을 “태수 씨가 생전에 품었던 과거의 혁명적 비전이 동시대의 성별‧혈연‧종(種)을 넘어서는 새로운 탈규범적 감각으로 유머러스하게 대리보충되는 순간”(강동호, 같은 글, 136쪽)이라거나, “새로운 정치적 주체인 여성 청년과 비인간 동물의 형상이 태어”(전승민, 같은 글, 98쪽)나는 장면이라 평가하는 것 역시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와 태수의 ‘훼방’을 완성하는 존재가 반려견 유자이고 유자의 소동이 소설에 특별한 활력을 주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도축되고 도살되고 멸종되고 실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행성의 무수한 비인간종을 생각할 때, 가장 인간적인 삶의 양식 속에 포섭되어 있는 우리집 “막내”(「그 개와 혁명」, 227쪽) 유자를 통해 인간중심성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