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은 기어서 와
  풀밭에서 본 뱀처럼
  스르르 천천히 느릿느릿
  구불구불 기어서 와
  어느 저녁은 걸어서 와
  또박또박 길을 읽으면서
  뚜벅뚜벅 걸어서 와
  어느 저녁은 뛰어와
  도로로록, 우산 만난
  빗방울처럼 후드득
  투두둑 뛰어서 와
  어느 저녁은 날아와
  커다란 날개를 펼쳐
  눈앞을 쓱 가렸다가
  그림자들을 섞어놓고
  우리한테 꼭
  이런 말을 하게 해

  아니 벌써 저녁이야!

정준호

20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동시집 『나의 작은 거인에게―블랙 동시 선집 1』(공저)를 냈습니다.

어떤 두려움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하는 것이 바로 환희, 라는 문장을 읽고 싶어질 때면 바슐라르의 책 『공기와 꿈』을 펼쳐본다. 집이 발 앞에 날아오도록 이 아이는 얼마나 뛰어왔을까. 빨갛게 얼굴이 얼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아이 마음에 꼭 드는 어떤 저녁이 도착하길 바란다.

2025/10/15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