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동이라 어렸을 적부터 혼자 놀 때가 많았어. 직접 만든 놀이 중에서 제일 자주 했던 건 와일드 게임. 말 그대로 와일드하게 노는 거야. 어려운 목표를 정하고 그걸 해내며 자신을 시험하는 놀이였어. 아파트 2층 높이에서 점프하기. 나 홀로 여행하기. 좋아하는 사람 꼬시기. 목표를 어렵게 잡을수록 좋아. 성공하면 뭔가, 그러니까 와일드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거든.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했어. 와일드 게임을 하자! 이렇게 다짐하고 했던 건 아닌데, 돌아보면 혼자 그런 식으로 살아온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

근데 그거 알아? 와일드를 빼앗기면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게 돼. 이상한 짓. 어이없는 짓. 남이 보면 ‘쟤 왜 저래?’ 싶을 만큼 비상식적인 행동들. 심지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거야.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자기를 돌보면서 잘 사는 거 그렇게 힘든 일일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있잖아. 왜 그런 줄 알아? 망가져서 그래. 줏대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거지. 사람이 망가지면 안 하던 짓을 한다.
이상한 짓을 해.

참 자기처럼 쓰네. 읽는 내내 이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기를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글은 솔직하면서 비밀스러웠고, 와일드라는 개념은 추상적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내 낯이 홧홧해지는 건. 뭣도 모르는 애가 뭣도 모르는 걸 쓴 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글은 일기가 아니라 편지라는 것을. ‘쉽게 잘 살고 싶다’가 브런치에서 내려간 후에도 나는 이 글을 종종 꺼내 읽었다. ‘쉽게 잘 살고 싶다’는 총 30여 편 연재되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캡처해 저장해놓은 건 이 글뿐이다. 이채야, 와일드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몇 계절, 이채가 없던 시절, 어쩌면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

호텔보다는 야외에서 하는 결혼식이 편리해서 좋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 있고, 더위에 지칠 하객들을 위해 핑거푸드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루에 예식이 최대 두 팀으로 정해져 있어 이용 시간도 넉넉했다. 봄인데도 볕이 강했다. 나는 청첩장을 구부려 얼굴을 가렸다. 작년 이맘때는 바람이 시원하니 결혼식 하기 딱 좋았는데. 양산을 더 빨리 꺼내놓을걸. 매년 여름이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무리에 꽁무니처럼 붙어 뷔페가 준비된 캐노피 아래로 향했다. 여자들은 줄을 서면서도 끊임없이 떠들며 웃었다. 재은이가 담임 스승의 날 선물로 귀이개랑 새치 염색약 줬잖아. 귀여웠지. 그때는 귀여웠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했어. 꼽 주는 거 같잖아. 되게 떨떠름하게 받으셨어. 해맑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주는데 안 받기도 좀 그랬겠지. 김재은이 그런 식으로 선생님들한테 이상한 선물 많이 했어. 실용적인 걸 주고 싶었대. 진짜로 꼽 주려고 이상한 선물했던 적도 있어. 수능 직전에 다들 스트레스로 반쯤 돌아 가지고 막 나갔지. 까르르. 그랬지. 그랬었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같이 웃었다. 담임이라는 사람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웃으며 접시를 집어 들었다. 현장 스태프는 내게 식권 팔찌의 행방을 물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도 식권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둥글게 휘어진 청첩장을 든 채 땅바닥을 살폈다. 천천히 가방 안을 뒤적이고 서 있자 줄이 밀렸다. 스태프는 내 디올백을 한 번, 청첩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자연스럽게 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버섯볶음, 잡채, 감바스, 멜론 두 조각, 잔치국수, 오렌지주스. 잔치국수를 들고 갈 손이 부족해 청첩장을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웃고 있는 신랑 신부의 허리가 반으로 딱 접혔다. 그늘진 구석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잔디밭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푹신하니 느낌이 좋았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선주님! 통이 큰 청바지에 검은색 반팔 셔츠를 입은 이채가 방긋 웃어 보였다. 어떻게 여기서 보냐는 둥 진부한 너스레를 떨던 이채가 물었다.
  선주님, 어떻게 오셨어요?
  이채님은요?
  신부가 같은 학교 선배예요.
  저는 신랑 쪽 하객이요.
  음식을 들고 있는 손에 부담이 느껴졌다. 접시가 너무 무거운 탓이었다. 잔치국수는 먹고 갈 수 있으려나. 이채는 벌써 두번째 가져다 먹었다며 전복죽을 추천했다. 아는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로연을 알리는 재즈 연주가 시작되었다. 스태프들이 테이블로 샴페인을 날랐다. 축하를 담은 환호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밀려드는 셔터 소리. 이채가 내 등 뒤로 손을 흔들었다. 돌아보자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채야, 와줘서 고마워. 신랑 신부는 이채와 짧게 포옹을 나누고 같이 온 분이냐며 내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랑의 깍듯한 인사. 이채가 나를 신랑 신부에게 친한 언니라고 소개하는 동안 걸린 시간은 삼십 초 남짓. 나는 한 손에 묵직한 접시, 다른 한 손에는 잔치국수를 든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신랑 신부와 스냅 작가가 휘몰아치듯 지나가고 이채가 말했다. 선주님, 아직 팔찌 못 찾으셨네요. 식권 팔찌요. 나도 모르는 사이 잔치국수 국물에 엄지가 반쯤 잠겨 있었지만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아무 결혼식에나 마구잡이로 가는 건 아니었다. 고객 가운데서도 까다로운 걸 넘어 예의를 말아먹은 사람들의 청첩장만 면밀하게 살폈다. 처음에는 어떤 면상인지 보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간 김에 밥도 한끼 얻어먹고 오게 되었다. 이채에게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몇 가지 핑계를 준비해 놓았으나 이채는 결혼식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예전에 선주님이 전세 사기 판치니까 조심하라고 조언해주셨잖아요. 등기부등본 떼오면 봐줄 수도 있다고. 그래서 부탁드리려고요. 파일로 보내주면 답장하겠다는 말에 이채가 가로채듯 말했다. 만나서 이거 말고 다른 얘기도 하고 싶어요. 제가 커피 쏠게요.
  다른 얘기. 나는 이채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걸리는 게 있으니 최대한 상냥하게 굴었다. 전세 사기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 여부뿐만 아니라, 등기부등본 보는 방법도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소유자와 임대인 이름이 같은지 먼저 보세요. 근저당이나 가압류, 경매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요. 위험 요소가 있으면 걸러요. 요새 하도 전세 사기가 화제라서 점점 더 이상한 방식으로 속이더라고요. 불안하면 계약할 때도 연락하라는 말에 이채는 기뻐하며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이것저것 찾아보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 가고 아는 어른도 없고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어쩌고. 말이 빨라진 이채는 기억하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귀찮음이 뿌듯함으로 고개를 조금 틀었다. 선주님, 결혼하셨어요? 장기 연애하시더니. 진짜 시간 빠르다. 반지 너무 예뻐요. 이채의 시선이 나의 웨딩 밴드에 닿아 있었다. 시간은 항상 빨랐다. 한 번도 느렸던 적이 없었다. 그 사람 아니에요. 네? 제 배우자요. 그때 만나던 사람 아니라고.
  경제관념이 없다고 해야 할까. 나는 이자율을 비교해 적금에 들거나 주식 투자를 하는 법 없이 들어오는 돈을 통장에 고스란히 모으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전세 사기 발생 지역을 꿰뚫고, 등기부등본을 보자마자 매물을 파악하게 된 이유는 전세금을 날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사귀어온 전 남친과도 그 탓에 헤어졌다. 같이 살았고 같이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은 돈을 같이 잃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힘이나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힘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이채에게 전세 사기에 관해 같잖은 조언을 건넸던 건 이별하기 직전이거나, 이별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일 것이다. 모아왔던 목돈을 잃은 후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했다. 이채는 거기서 만났다. 둘만의 추억이나 특별한 우정은 없었다. 이십대 초반 여자애의 어리고 어수선하며 밝은 기운이 부담스러웠던 기억. 열심히는 하는데 일머리가 별로 없구나. 요령을 알려주기 귀찮아서 그냥 내가 대신 해버렸던 작은 일화 몇 개뿐.

우리는 종종 만났다. 나는 일상이 지루했고 이채는 내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이채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빠르게 흘렀다. 옛날의 나처럼. 치열하고 빠듯하고 생생하며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 정도 지출이 고정적으로 나가면 신용카드 쓰는 게 좋아요. 나중에 대출받을 때도 유리하고요. 체크카드를 사용하던 이채는 내 말을 듣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이 외에도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사업 몇 개와 심리상담 바우처를 추천해주고 과일을 깎아주었을 때, 나는 이채에게 언니가 되어 있었다. 걸리는 게 있어서 잘해준 건 아니었다. 이채는 똘똘하고 이해가 빨라 가르쳐주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은혜를 갚으려 했다. 어느 날은 인기 팝업스토어에서 온종일 줄을 서 크림빵을 사왔다. 어느 밤에는 편의점 꿀조합 레시피라며 희한한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발송 마감을 앞두고 일에 치여 있을 때는 손수 와서 도왔다. 이채는 손이 빠르고 꼼꼼했다. 드라이플라워나 한지로 작업한 섬세한 작업물도 조심스럽게 잘 다루었다.
  수제 청첩장 제작은 나의 작은 사업이었다. 사업이라는 말만 그럴듯할 뿐 용돈벌이 정도였다. 저렴한 청첩장 업체가 판치는 시대에 유별스럽게 수제 청첩장이라니. 나의 고객층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유난했고 추구하는 바가 확실했다. 예시를 보고 비슷한 디자인을 주문하는 사람은 있어도 아예 똑같이 만들어주길 원하는 고객은 없었다. 저마다의 스토리와 지향하는 분위기에 따라 펠트지, 레이스, 은박 등 재료가 달라졌다. 조악한 공원 결혼식은 자유롭고 소박한 추억으로, 하객이 부족한 결혼식은 프라이빗하고 진정성 넘치는 순간으로, 재혼은 뒤늦게 찾은 진짜 사랑으로 포장되었다. 이것도 언니가 직접 쓰는 거예요? 이채가 낯간지러운 청첩 문구를 읽으며 물었다. 응. 둘만의 추억이나 일화를 내가 청첩장에 들어갈 만큼 짧게 다듬어. 완전 시 같아요. 언니, 브런치 이런 거도 해보지. 그런 거 못 해 긴 글은 못 써. 귀찮구. 근데 너 되게 잘한다. 간간이 알바 할래? 네가 도와줄 수 있을 때만. 이채는 그날 내가 준 수고 비용으로 쥐포와 캔맥주를 사왔다. 로고 디자인을 공부한 적 있다더니 수제 청첩장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벌이가 영 적대도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왔다.
  맥주 캔이 자꾸만 쌓여가서일까, 허물없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날 이채에게 나의 은밀하고 못된 취미를 이야기했다. 남의 결혼식 놀러 가기. 나는 그 행위를 그렇게 불렀다. 야외예식장이 좋아. 사방이 뚫려 있는 데다가 하객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어서 외부인인지 의심도 안 해. 기분 좋은 날이잖아. 다들 예민하게 굴 필요 없는 거야. 너 만날 날도 그래. 식권 없어도 잘 차려입고 청첩장도 들고 있는데 그냥 보내주지. 이채는 깔깔 웃었다. 내가 본 모습 중에 가장 크게 웃었다. 저도 알바할 때 손님이 두고 간 립스틱 훔친 적 있어요. 남긴 음식도 몰래 먹고요. 재밌잖아요. 내 취미와는 결이 좀 다르지 않나 생각했지만 나는 웃고 말았다. 비밀스러운 카드를 슬쩍 내보인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함께 쇼핑하고 전시회에 갔다. 이채의 생일 때는 영어 이름을 각인한 향수를 선물해주었다. 영어 이름도 있었어? 언젠가 외국 여행할 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써본 적은 없어요. 웃겨 정말. 레이첼은 좀 옛날 이름 같다. ‘체엘’ 늘여서 발음하면 우아하고 기품 있잖아요. 웃겨 정말.

*

이채와 레이첼을 번갈아 발음하다보면 묘하게 닮은 울림이 느껴졌다. 이-채, 레-이-첼, 이-채, 레-이-첼. 기품은 도무지 모르겠고. 식상하고 촌스러운 게 귀여운 건데 넌 모르겠지. 자기가 눈치가 빠르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봐서 세상 돌아가는 거 나름 좀 안다고 믿고 있겠지. 나는 스크롤을 내렸다. 이채와 레이첼을 소리 없이 되뇌면서.
  어쩌면 내가 발견해주기를 바란 거 아닐까. 이채가 쓴 글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작은 기억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청첩장에 감성적인 문장 몇 자 적는 걸 보고 다짜고짜 브런치에 글 써보라고 추천했던 것. 향수에 새길 각인으로 브런치에서 쓰는 닉네임을 말했던 것. 이채는 매거진 중 ‘쉽게 잘 살고 싶다’만 구어체로 연재했다. 대상을 정해놓고 쓰는 편지처럼.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물음으로 시작한 첫 문장은 나와 함께 했던 일들로 거침없이 이어졌다. 이채는 내게도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언니, 제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요?
  저랑 되게 친한 친구가 있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다 같이 나왔어요. 최근에 걔랑 되게 오랜만에 만났어요. 근데 둘이 너무 비슷한 거예요. 안 본 세월이 무색할 만큼. 사람이나 사는 거나 참 안 바뀐다, 그런 얘기 하다가 친구가 말해줬어요. 이채의 친구는 연인과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유명 레스토랑에 갔다. 메뉴판에 적힌 설명을 읽어도 어떤 음식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막상 나온 음식은 당황스러울 만큼 양이 적었다. 숟가락이 여러 개 있었는데 어떤 걸 어떨 때 사용해야 할지 헷갈려서 연인과 종업원의 눈치를 보았다. 이채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고 했다. 그런데 겁이 나더라고요. 저도 안 가봤거든요. 나는 며칠 뒤에 이채를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안녕.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그 언니랑 고급 레스토랑 다녀왔어. 코스 메뉴 처음 먹어봤다. 허브랑 소스랑 이것저것 설명해줬는데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아. 부야베스(해산물 수프)라는 걸 처음 먹어봤어. 이것 말고도 신기한 음식 많이 먹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당. (…) 집에 돌아가서 두부 부쳐 먹는데 눈물 나더라. 웃기는 일이잖아. 나는 당장 생활비가 쪼들려서 에어컨도 안 켜고 사는데 레스토랑이라니. 그날 먹은 한 끼 식사 비용이랑 내 3일 치 식사 비용이 같아. 그 언니는 모를 거야. 자기가 뭘 알겠어. 인생이 너무 쉬우니까 지루해하는 사람인데.

이 시발년이?
  나로 추측되는 ‘그 언니’가 글에 등장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절로 욕이 나왔다. 충격적이라기보다는 허탈했고 배신감이 들었다. 잘해줘봤자 아무 소용 없구나. 얼마간 이채의 연락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쉽게 잘 살고 싶다’에는 계속 글이 올라왔다. 일주일에 두 번, 빠르면 이틀에 한 번. 나는 수시로 레이첼의 브런치에 들락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업데이트된 글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래, 인정해야 했다. 재밌어. 유연하게 글을 잘 써서? 진정성이 한껏 드러나서? 내가 등장해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언니’에 대해 읽을 때마다 오묘한 쾌감이 느껴진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언니는 원래 레이첼과 같은 알바생에 불과한 여자였는데, 몇 년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명품 몇 개 가진 게 전부가 아니었어. 친해지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그 여자 특유의 음침함을 벗고 품위를 획득했다는 걸. 그 여자의 고상함에 대해 분석한 게시글 이후 ‘그 여자’는 ‘그 언니’로 지칭되었다. 나는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언행에 여유가 묻어나며, 현실감각이 충만한 그 언니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언니랑 만나고 오면 우울해져. 재수 없는데 부러워. 어떻게 단 몇 년 만에 그런 성취를?
  이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앓아누워 있다가 이제야 좀 나았어. 내일 우리 집에 와.
  브런치를 발견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뭐든지 몰래 하는 게 재밌는 법이니까. 나는 다시 이채와 어울렸다. 전보다 더 진득하고 사소하게. 선물로 들어온 이탈리아 천연비누를 나누어주고, 백화점에서 같이 장을 보고, 와인이랑 먹으라며 치즈를 사주었다. 글 내용과 달리 나는 그다지 돈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이채를 불러서는 일부러 작은 사치를 부렸다. 이전에는 해본 적 없던 취미를 새로 시작하여 함께 즐겼다. 뮤지컬은 두 번씩 봐야 해. 첫번째 공연 때 지나쳤던 디테일이 두 번 보면 눈에 들어오거든. 임장 모임은 가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공부가 많이 돼. 화면으로 보는 거랑 실제로 가서 보는 거랑 완전히 달라. 한국에서는 부동산밖에 답 없어. 미리 물건 보는 눈을 키워야지. 공동 투자도 고려해봐. 이채는 글 쓰는 데 필요한 콘텐츠를 얻고, 나는 더이상 일상이 지루하지 않게 되었다. 이채의 글을 볼 때마다 고양감 비슷한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나는 더이상 남의 결혼식에 놀러 가지 않았다.

아껴놓았던 정장 셋업을 이채에게 주었다. 결혼 전까지 다니던 직장에서 몇 건의 일을 수주받은 적 있었다. 팀장님은 다시 일할 의향은 없는지 은근하게 물어왔다. 출근할 때 힘들었지. 재밌기도 했지. 잠들기 전 충동적으로 구매한 세미 정장이었다. 외주 업무가 완전히 끝나고 직장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남의 결혼식에 놀러 갈 때 종종 그 옷을 꺼내 입었다. 셋업은 이채의 몸에 딱 맞았다. 잠깐 앉아봐. 나는 이채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모아 로우번으로 묶어주었다. 무슨 면접을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채가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내친김에 사놓고 딱 한 번밖에 입지 않은 프라다 원피스도 주었다.
  언니, 원피스는 진짜 괜찮아요.
  가져. 이런 거 하나 필요해. 그럴 때가 와. 정말로.
  큼직한 쇼핑백에 옷들과 천도복숭아를 같이 담아주었다. 이채가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고 있을 때 퇴근한 남편이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은 여느 때보다 피로해 보였다.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기간이라 업무량이 급증한 탓이었다. 이채가 떠나고 현관문이 닫히자 남편은 내게 안겨들었다. 원체 다정하고 애교가 많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니즈가 잘 맞았다. 남편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가정의 따뜻함. 출퇴근할 때 안아주기 같은 거. 그리고 최소한의 살림. 이거만 약속해주면 나머지는 다 자기 뜻대로 할게. 좋아. 내가 원하는 건 시간과 공간. 오케이. 우리는 서로의 니즈를 잘 알았다.
  남편은 신발장에서부터 바지를 벗었다. 오늘은 나 피곤해. 남편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더 피곤해, 그리고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나머지 다 해줬잖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 몸에서 옷가지가 하나씩 거두어졌다. 에어컨 바람이 지나치게 찼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남편의 말에 찝찝함을 느끼고 성욕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내 사업이 있고 품위도 있고 현실감각도 있어. 이타심도 있고 남편도 있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이다. 남편의 애무를 받으며 사업을 생각했다. 뭐든지 포장이 관건이었다. 싸구려 공장 꿀이든 시장에서 대량 판매하는 아몬드든 수제 청첩장이랑 콘셉트 맞추고 예쁘게 의미 부여해서 홍보하면 그럴듯해 보일 것 같았다. 남편은 침만 많이 흘리고 애무 실력이 영 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면접 날 아침에 주고받은 응원의 메시지를 끝으로, 연락은 끊겼다. 면접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채가 걱정되는 동시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솔직히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채는 뭘 배워도 금방 익힌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정말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 왔다. 그 성취와는 별개로 배운 것들과 해온 일들의 궤적은 일관된 방향이 없었다. 쉽게 살고 싶다며. 하고 싶은 것만 좇으면서. 그런데 하고 싶은 게 자꾸 바뀌면 어떡해. 네 말대로 성공하는 데 있어서 방향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데.
  며칠 전 ‘쉽게 잘 살고 싶다’에 그 언니의 남편이 등장했다. 그 언니는 장기연애를 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여의도에서 일하는 펀드매니저와 결혼했다. 레이첼이 보기에 두 사람은 결이 맞지 않았다. 몇 번 식사를 함께한 적 있는데 유머 코드도 삶의 방식도 달랐다는 것이었다. 그 언니는 뼈 있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이 이런 사람과 결혼을? 레이첼은, 이채는 그 언니의 결혼과 남편에 대하여 똑똑한 방향 설정이라고 평했다. 나는 흐흐 웃었다. 건방지고 일리 있고 재밌는 글이었다. 확실히 결은 전 남친이랑 잘 맞았어. 하지만 내가 선택한 건 니즈였다. 내가 원하는 건 공간과 시간. 여기에 유머 코드와 성적 취향, 엠비티아이 상성까지 따져대는 건 수지에 맞지 않았다.
  이채는 욕심이 많은 것에 비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일 잘한다는 말을 듣길 바라면서 일을 최대한 안 하고 싶어 했다. 일을 해야 그다음에 잘한다는 말을 들을 텐데. 아니면 최소한으로 일하되 칭찬을 바라지 말든가. 그래서 이채는 이일 저일 다 하고, 이것저것 찍어 먹고 그러다가 나 같은 것도 찍어 먹게 되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며 평소에 하지 못하는 비싼 것들을 누리니까 기뻐했다. 나와 만나고 나면 평소에는 느끼지 않던 감정이 따라와 싱숭생숭해했다. 우울해져. 재수 없는데 부러워, 같은 감정. 니즈와 방향 설정은 말장난에 불과할 뿐 그게 그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채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느껴져 불쾌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달래기 위해 아껴두었던 히비키 21년 산을 땄다. 지금까지 함께 누린 것들의 가격을 일일이 다 알려주었다면 이채가 자기 니즈를 들여다보고 인생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

한여름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무더위 탓에 야외 외식을 피하고, 공장형 예식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업체에서 제공하는 템플릿 그대로의 청첩장을 쓰니까. 나는 식탁 앞에 멀거니 앉아 있다가 옷을 벗었다. 곧바로 욕조에 들어가 반신욕을 하고 있던 남편 위에 앉았다. 한바탕 물이 넘쳤다. 남편은 당황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웬일이야. 침대 아니면 싫어하잖아. 나는 대답 없이 그대로 누웠다. 물 위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물속에 몸을 푹 담근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잠겨 있었다. 이채와 연락이 끊긴 지 한 계절이 지나갔다. 브런치 연재도 멈추었다. 면접에 붙었나. 세미 정장을 입고 바삐 움직이는 이채의 모습이 그려졌다. 집중할 때면 입술을 꾹 다무는 습관이 있다는 걸 이채는 알까. 어쩌면 꼭 취업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니즈를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잘 살겠지. 약삭빠른 구석이 있는 애니까. 사업을 확장하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원래부터 돈도 얼마 안 되는 조잡한 일이었다. 의욕은 발생할 때와 달리 점잖게 사그라들었다. 여보, 우리 아기 가질까? 남편은 내게 원하는 대로 하라며 몸을 여기저기 주물렀다. 나는 욕조에서 나왔다. 역시 욕실에서는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수건으로 대강 물기만 닦고 침대에 엎드렸다. 누운 채로 각종 SNS와 쇼핑몰을 훑었다. 대학교 동창 단톡방에 쌓여 있는 메시지도 읽었다. 원래 다들 이렇게 재미없게 사는 건가. 시시해.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다들 자기들의 괴로움과 조언 등 가벼운 질타 섞인 답장들을 보내왔다. 취미를 하나 가지라는 추천이 가장 많았다. 악기 연주, 운동, 베이킹 등등. 습관처럼 들어간 브런치에 레이첼을 입력했다. 만약 이채가 새로 글을 쓴다면 ‘초보 직장인 일기’ 따위일 줄 알았는데, 드디어 업데이트된 글은 여전히 연재중인 ‘쉽게 잘 살고 싶다’였다.

쉽게 잘 살고 싶다 32화
와일드를 지켜라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것
by. 레이첼

안녕. 재밌는 얘기 해줄까?
사실 재미없는 얘기야. 최근에 면접 봤는데 떨어졌다. 이미 면접하러 가면서부터 떨어질 거 알고 있었어. 잘 볼 마음이 안 들었거든. 그렇게 간절하게 지원서 제출했으면서 사람이 참 이상하지? 마음은 왜 제멋대로 우악스럽게 부풀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푹 꺼져버리는지. 면접 망치고 조용히 지내면서 깨달았어. 내가 와일드를 잃어버렸다는걸. 와일드가 뭐냐 하면……
(…)
그 언니한테 잘 붙어서 배우려고 했어. 살아가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많잖아. 재테크 같은 거. 그 언니가 많이 가르쳐줬어. 빠삭하더라. 가스비, 전기세 덜 나오는 방법이랑 막힌 변기 뚫는 법 같이 자잘한 것도 알려줬어. 나한테도 진짜 어른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뻤어. 이 사람은 진짜네. 나이 많고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덥석 믿었다가 한두 번 당했어야지. 접점이 없는 사이인 것도 좋았어. 알바비 뜯어먹거나 성적으로 접근해 올 위험 부담이 없잖아.

그 언니가 처음에는 깍듯하게 대해줬어. 먹을래? 입어볼래? 시간 되면 알바 할래? 이랬거든. 근데 점점 말투가 바뀌었어. 집으로 와, 먹어, 입어, 이렇게. 기분 더러웠어. 그런 말투로 말하면 먹기 싫은 것도 먹고, 입기 싫은 것도 입게 되거든.
좋은 거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그 언니 탓하는 거, 피해의식이래도 할말 없어.

일부러 돈이 궁할 때 그 언니 찾았어. 만나면 밥 사주고 선물도 주니까. 나는 내가 그 언니를 잘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나고 돌아오면 너무 우울한 거야. 시간이 흐르면 나도 그 언니처럼 살고 있을까. 안 되더라고. 그 언니랑 있으면 내가 너무 작아져서 만나기 주저했어. 그래도 만났어. 작아지는 것보다 돈 없는 게 더 무섭거든. 한 끼 두 끼 아끼면 생각보다 큰돈 되니까. 그때, 내가 작아질 때마다 와일드가 빠져나가고 있었나봐.

있잖아, 와일드를 빼앗기면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이상한 짓. 어이없는 짓. 남이 보면 ‘쟤 왜 저래?’ 싶을 만큼 비상식적인 행동들. 심지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거야.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자기를 돌보면서 잘 사는 거 그렇게 힘든 일일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있잖아. 왜 그런 줄 알아? 망가져서 그래. 줏대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거지. 사람이 망가지면 안 하던 짓을 한다.
이상한 짓을 해.

#자취 #취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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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채의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동안 남편이 욕실에서 나왔다. 엎드려 있는 내 위에 올라탔다. 물기가 채 닦이지 않은 남편의 몸은 축축하고 뜨끈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가만히 있어. 남편의 말대로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생각했다. 와일드를 빼앗기면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이상한 짓. 와일드를 빼앗긴다는 건 와일드를 빼앗는 대상이 있다는 거잖아. 와일드를 빼앗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차피 뺏고 빼앗기는 거라면 빼앗는 쪽으로 사는 게 낫지 않나. 자기 혼자 움직이던 남편이 포니테일을 묶듯 내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그러모으더니 얼굴을 더듬어왔다. 당신 왜 울어, 그렇게 좋아?

와일드 게임은 말 그대로 와일드하게 노는 것이다. 쉽게 해내는 건 재미없으니 목표를 높게 잡는 편이 좋다. 위험을 감수하거나, 아슬하게 자신의 신념을 넘나든다면 더욱더 와일드를 즐길 수 있다. 이채가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채의 디지털 흔적을 파헤쳤다. 이메일, 연락처를 시작으로 이채가 살아온 자취를 따라 밟아볼 수 있었다. 내가 알아낸 정보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이러했다. 지역 교회 청소년부에서 성가대로 활동, 문화센터에서 목공예 강좌 클래스 수강, 등하원 돌봄 선생님 아르바이트, 눈썹 문신 시연 모델 아르바이트, 그 외 각종 보조 아르바이트, 중고로 산 물건을 새것인 양 가격을 높여 팔았다가 중고 카페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름, 당근마켓 애용. 당근마켓에서 주로 샀던 물건은 샴푸나 참치통조림 등의 생필품, 팔았던 물건은 실사용 1회뿐인 조말론 향수. ‘제 닉네임이 각인되어 있긴 한데 잘 안 보여요. 향이 생각보다 저랑 안 어울려서 팔아요. ㅠㅠ’ 부지런히도 살았네. 사고파느라 연락 주고받고, 포장해서 배송 부치는 것도 다 일인데 부지런해 정말. 나는 새로 판 아이디로 임장 카페에 가입했다. 한 게시물에 댓글을 달고 글쓴이에게 쪽지를 보내놓았다. 연락은 텔레그램으로 주고받았다. 이채와 나는 일주일 뒤, 가족의 연을 맺기로 했다.
  이채는 프라다 원피스를 입고 왔다. 짧은 기장의 원피스 위로 싸구려 애나멜가죽 가방이 보였다. 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내가 공인중개사 입구를 향해 앞서 걸었다. 원래 같으면 이쯤에서 통성명해야겠지만 이채는 너무 놀란 건지 별로 개의치 않은 건지 나를 막아 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언니와 동생이 되었다. 나는 갓 취직한 동생이 혼자 살 집을 같이 봐주러 온 엄마 같은 언니 역을 맡았다. 이채가 보러온 매물은 서초동의 오피스텔이었다. 실거주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급하게 룸스프레이를 뿌린 건지 신발장에서부터 편백 향이 지나치게 강했다. 이채는 진짜로 이 집에 살 것처럼 꼼꼼하게 내부를 살피며 이것저것 물었다. 실거주자는 이채 또래의 젊은 여자였다. 신진 브랜드의 소파, 테이블, 커튼, 하나하나 사 모은 식기들. 한눈에 보아도 자기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마치 수제 청첩장 고객의 집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모든 물건이 ‘내가 고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까다로운 고객이 우리에게 한껏 미소 짓고 있었다. 집을 빨리 빼야 하는지 침실이며 욕실까지 직접 문을 열어주고 커튼을 젖혀 창밖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채는 공인중개사 직원이 아닌 거주자를 바라보고 물었다.
  관리비는 얼마 나와요? 주차비는 따로 내요? 몇 대까지 가능해요?
  이채는 속도 조절에 능했다. 뜸을 들이며 궁금한 점을 하나씩 내뱉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풍경 안에 녹아 있을 뿐이었다. 주차 얘기를 할 때는 조금 웃겼다. 이채는 면허가 없었다. 보증금 올리고 월세 조정 가능해요? 얼마까지? 공인중개사 직원이 이채의 주의를 끌며 빠르게 답했다. 집주인분이랑 얘기해봐야 하는데, 아마 보증금 천만원 올리면 월 오만원 낮출 수 있을 거예요. 이채는 침착했고 자연스러웠으며 이 상황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 우리가 집을 나설 때 거주자가 말했다. 혹시, 골프 좋아하세요? 옥상에 골프 퍼팅장도 있어요. 이채는 고개를 여유롭게 끄덕이며 여자의 말을 잘랐다.
  집 잘 봤습니다.

보통 이 라인 좋아하세요. 직장 근처라. 공인중개사 직원은 생각해보시고 연락 달라고 한 뒤 빠르게 사라졌다. 이채는 감사 인사를 두 번 반복했다. 첫 도둑질을 이제 막 성공적으로 끝마친 아이처럼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프라다 원피스 자락이 바람을 품고 크게 부풀었다. 가슴 부근에 삼각 로고가 박힌, 검은색 실크 재질의 민소매 미니 드레스였다. 원가는 이백만원 정도였지만 나는 그 원피스를 중고로 사십만원에 샀다. 전 남친과 헤어지기 전이었고, 전세 사기를 당하기 전이었고, 직장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채와 가장 비슷하게 생활하던 때였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가 멀다고 내 미래를 점쳤다. 이렇게 살아서는 이런 미래가, 저렇게 살아서는 저런 미래가 따라오겠지. 그때의 내게는 뻔한 상상이 옴처럼 붙어 있었다.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서 나는 가장 바쁜 시간대만 투입되어 일했다. 손님이 크게 밀려왔다가 빠진 후면 큰 사장님은 내게 아이스티 한잔을 만들어주었다. 큰 사장님의 딸인 작은 사장님은 자기들이 얼마나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후한 고용주인지 자주 이야기했다. 너무 자주 말해서 그렇게 깜빡 속았던 적도 있었다. 쿠키를 챙겨주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수다 떨며 일하게 해주고.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쿠키를 인심 쓰듯 떠넘긴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걸 받아와서 저녁 대용으로 먹었다. 수다의 주제는 늘 다른 아르바이트생 뒷담화였다. 나는 그들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받겠다고 말하면 되지 쿠키니 아이스티니 다 처먹어놓고 그들을 원망하는 거, 내 피해의식이겠지.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후 나는 프라다 원피스를 중고로 샀다. 작은 사장님이 갖고 싶어 했으나 비싸서 사지 못한 제품이었다. 나는 그 옷을 입고 그들의 카페에 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생과일 빙수를 주문했다. 한 입도 먹지 않고 실수인 척 바닥에 엎지른 뒤 카페를 나왔다.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미스코리아처럼 손을 흔들며.

와일드가 흔들리면 인간이 안 하던 짓을 한다. 이상한 짓을 한다. 왜냐면 금이 갔거든. 실금. 어쩌면 시간이 메워줄 수도 있을 만큼 얇은 실금. 누군가는 그 가느다란 실금에 입술을 대고 다른 사람의 와일드를 쪽쪽 빨아먹어. 영혼이나 와일드나 줏대나 하여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왜 하나같이 어슴푸레 휘어지는 모양인지. 이채야. 감사 인사는 한 번만 해야 해. 그리고 저 사람 이미 네가 계약하지 않을 거 다 알 걸. 네가 입은 옷이랑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잖아.
  원피스가 휘날리는 방향으로 이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채는 용기를 쥐어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였다. 말하는 내내 내 눈을 이 초 이상 마주치지 못했고, 손의 위치나 말투가 입력된 명령어를 그대로 뱉어내는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른 몸 안쪽에서 뛰고 있을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냥 나를 차단해버리면 될걸. 있는 힘 없는 힘 다 끄집어내서 굳이 말하네. 얘 대단하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용기를 낸 적이 없었다. 따지고 들거나 괜히 상대해서 더 스트레스받고 괴로울 바에 입 다물고 내 일상이나 잘 꾸리자는 주의였다. 그렇게 가슴에 묻어버린 일들은 어디로 갔나. 가긴 어딜 가. 썩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나는 가끔 과거로, 어느 시간대로, 어떤 사람 앞으로. 언제고 가버렸다. 이채는 대단하네. 가진 것도 쥐뿔 없으면서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용기 내 덜덜 떨고 있는 꼴이 대단하고 같잖았다. 프라다 원피스는 진심으로 준 거였다. 어떤 종류의 진심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채는 하여간 재능이 있었다. 임장을 한 이유를 열심히 포장했다. 자기 연민, 치기 어린 시절의 한 때. 발음이 정확하고 말의 속도도 적당했다. 절망적이되 우습게 보이지 않았고, 간절하되 처절해 보이지 않았다. 이채는 면접에 붙었다는 거짓을 덧붙이며 자존심도 챙겼다. 언니, 그래서 말인데요, 조언 안 해줘도 돼요. 저 언니한테 배우고 싶은 거 없어요. 나는 흘러내린 가방끈을 이채의 어깨에 다시 걸쳐주었다. 너 재능 있더라. 수제 청첩장이랑 같이 답례품 사업할 건데 함께 하자는 말에 이채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직원이에요? 공동사업자예요?

최미래

소설집 『모양새』 『녹색 갈증』이 있다. 2024년 이상문학상 우수작에 선정되었다.

어쩌면 나는 혹부리 영감처럼 ‘와일드’를 떼었다 붙였다, 잃었다 되찾았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 말고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원래 이 소설의 제목은 ‘와일드를 되찾아’였으나, 되찾아주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 조금 쓸쓸한 기분.

2025/10/15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