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 기획을 기획하다
소설의 생명력
1.
마르셀 프루스트의 『쾌락과 나날』에 실린 「실바니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1)
이 문장을 읽는 시간 역시 독자의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빠르게 눈을 움직여 읽는다면 대략 5초 정도가 걸리겠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독자나 “왜 알렉시스는 눈물을 흘렸을까”하고 갸웃하는 독자라면, 이 한 문장에 더 오래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이 문장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문장을 읽던 중간에 잠시 전화를 받고 10분쯤 뒤에 다시 돌아와 문장의 남은 부분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독자의 생각과 상상, 그리고 읽는 속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마치 하나의 감각처럼 작동합니다. 이 감각은 독자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각자가 가진 감수성 안에서 움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차이 속에서 독자마다 ‘소설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문장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 속 사건을 겪는 어떤 인물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목소리이거나, 작가가 내세운 서술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정확히 어떤 억양, 크기, 속도, 피치, 뉘앙스를 지녔는지 확정하여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는 소설의 이야기 속을 여행하는 독자의 인식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는 단일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렷해지거나, 흐릿해지거나, 어쩌면 아예 없거나, 혹은 있다는 느낌만 남기도 합니다. 피도, 뼈도, 살도 없는 그 목소리는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나가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됩니다. 독자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속에 소설을 읽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저는 ‘양손프로젝트’(이하 ‘양손’)에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양손’은 배우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과 연출 박지혜, 이렇게 네 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연극팀입니다. ‘양손’은 2011년 단편소설의 무대화를 시도하는 ‘단편소설극장전’이라는 연극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황금풍경」 「축견담」 「직소」 세 편을 묶어서 만든 옴니버스 형식의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개는 맹수다〉를 공연합니다. ‘양손’은 그 후로도 같은 형태의 단편선 공연을 연속해서 창작하게 됩니다. 3년에 걸쳐 산울림 소극장의 기획프로그램인 ‘산울림 고전극장’에 참여하면서 〈현진건 단편선―새빨간 얼굴〉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 〈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를 공연했고, 이 단편선 작업 안에서 총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무대화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됩니다.
단편소설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시작했을 때, ‘양손’은 소설 텍스트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살려보는 것이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그 결과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지 않고, 배우가 소설 속 문어체의 문장을 그대로 발화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배우는 ‘스토리텔러’로서 무대에 서게 되었고, 서술자와 인물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양한 연기 문법을 발견해나가게 됩니다.
배우가 소설의 문어체 문장을 발화할 때 벌어지는 현상은 실로 흥미롭습니다. 이때 관객 앞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누군가’가 현전하게 됩니다. 책의 지면 위에 머물던 목소리가 무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때 배우는 단순히 소설의 문장을 낭독하는 전달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이야기의 끝까지 가본 자입니다. 그 이야기를 독자로서 경험하고 해석하며 감응한 바를 바탕으로, 각각의 문장을 어떻게 발화할지 결정합니다. 그 발화의 양상에는 1차 독자인 배우가 읽어낸 소설의 세계가 깊이 스며있습니다. 배우는 자신이 감지한 이야기의 리듬, 의미, 정서를 목소리와 몸을 통해 풀어내며 관객에게 그 세계를 다시 건넵니다.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은 2차 독자가 됩니다. 극장에 둘러앉은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 때 누리는 기쁨의 일부를 무대 위 배우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우리가 독자로서 누리는 시간의 자유, 이를테면 한 문장에 오래 머물거나, 다음 장으로 건너뛰거나, 잠시 책을 덮을 자유는 이 공간에서 사라집니다. 극장에서는 오직 배우가 문장을 발화해나가는 속도와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은 배우의 발걸음에 호흡을 맞추고, 그 순간의 그 속도로 소설의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생각과 상상을 소화해야 합니다. 극장의 독자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자신의 감수성 안에서 향유할 자유 역시 배우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던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극명하게 확정됩니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는 목소리뿐 아니라 눈앞에 선명한 얼굴을 보이며 현현합니다. 피와 뼈와 살을 지닌, 완전히 육화된 목소리가 무대 위에 출현한 것입니다.
공연의 시간 속에서 발화되는 소설의 문장은 배우의 다양한 몸과 결합합니다. 그 몸은 재현적이기도 하고, 표현적이기도, 때로는 상징적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문장은 그 육체를 타고 흐르며 배우의 에너지와 함께 관객에게 도달합니다. 관객은 문장과 배우의 몸이 맺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와 느낌을 따라가는 동시에, 들려오는 문장을 통해서 지면 위의 글자를 대하는 독서 때처럼 각자만의 생각과 상상을 불러내는 이중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관객들 모두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장면을 보고 있지만,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완성해나가게 됩니다. 관객은 연극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능동적으로 이미지와 영상을 머릿속에서 생성해가며 공연에 깊게 참여하게 되는 거지요. 무대에 선 배우가 관객에게 온몸으로 소설을 들려주는 이 독특한 공연 형식은 연극과 독서의 경계를 넘나들며, 텍스트와 몸, 의미와 감각, 소설과 독자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관객은 살아 움직이는 몸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경험하는 색다른 독서의 형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3.
〈데미안〉은 2021년 제가 구성과 실연을 맡아 혼자 무대에 섰던 공연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장편 소설 『데미안』을 텍스트로 삼아 창작한 이 작품에서는 이전 ‘양손’이 해왔던 소설의 무대화 작업과는 다른 시도를 감행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는 배우가 ‘스토리텔러’로서 다양한 방편을 구사하여 관객들이 소설 속 세계를 생생하게 체감하도록 만들면서, 그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배우가 원하는 해석의 영역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공연을 창작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에서는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 배우가 이야기와 맺는 관계를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았습니다. 이 공연에서는 배우의 퍼포먼스가 관객보다는 최대한 배우 자신을 향하고자 했습니다. 배우가 소설을 사적으로 깊이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을 한 결과, 이야기를 구현하려는 행위를 지양하고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습니다.
소설과 독자 사이에 놓여 있는 가장 근본적 행위는 ‘읽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적인 독서의 영역을 관객과 연결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접점은 ‘소리내어 발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소리내어 읽는 행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습관화된 일상의 행위이기에 배우가 가진 생명력을 충분히 끌어내기에는 적합하지는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상적인 읽기 행위에서 벗어나 탈-일상의 몸 에너지를 획득하고자, 배우는 소설의 모든 문장을 기억하여(암기하여) 발화하는 연습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더해 각각의 문장을 발화하는 물리적인 형식을 세밀하게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고정된 발화 형식을 통해 소설을 경험하는 것이 이야기의 속살을 더 내밀하게 감지할 수 있고, 매일의 연습을 면밀하게 비교 대조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발화의 속도, 장단, 고저, 크기, 질감 등을 내용에 따라 논리적으로, 때로는 직관적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혹은 내용과 무관하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음악적인 구성으로 결정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일상과는 다른 형태의 띄어읽기, 강세, 반복적인 발음 등을 통해 발화에 다양한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문장들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마치 랩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랩처럼 비트와 박자 위에서 말을 리듬감 있게 타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읽기와 말하기의 문법과는 다른 운용상의 규칙을 가진 새로운 읽기와 말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먼저 문장을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 발화의 형식을 디자인하고, 그 발화의 형식까지도 기억하는 일을 마칩니다. 이후에 소설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여, 그 디자인 된 길을 따라 발화하는 연습을 이어나갑니다. 배우의 몸은 문장의 글자들과 발화의 길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힘으로 가득 찹니다. 배우의 몸은 발화의 에너지에 따라 출렁거립니다. 공연은 총 네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는 〈데미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발화해나가며 하나의 독자로서 이야기를 충실히 (재)경험해나갑니다. 이제 배우는 더 이상 ‘스토리텔러’가 아닙니다. 관객들은 단지 소설의 문장을 발화해나가며 소설을 음미하는 배우의 몸을 목격할 뿐입니다. 저는 이 행위를 ‘텍스트 연주’라고 명명합니다.
이 ‘텍스트 연주’의 행위를 연습하면서, 그리고 이 행위를 ‘공연’이라는 형태 안으로 편입시키면서 저는 소설이 가진 ‘생명력’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어딘가에, 보통의 경우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의 모음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글자들을 읽어서 소설의 세계와 연결이 된다면 그것이 소설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소설을 읽는 행위는 소설의 세계가 흘러나올 수 있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눈으로 읽는 행위를 통해서 소설이 생명을 뻗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소설책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저는 〈데미안〉이라는 소설의 문장 거의 전부를 기억하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 동안 반복해서 그 문장들을 되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작업기간의 막바지에 왔을 때는 매일 한번씩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네 시간에 걸쳐 탈-일상의 방식으로 발화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연이라는 명목으로 수일에 걸쳐 여럿의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이 행위를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연하게도 저는 장편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데미안〉이라는 소설 역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낸 경험이 아마도 거의 없지 않았을까요? 이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저는 소설의 생명이 가진 빛깔이 무한하다는 것을 비로소 생생하게 실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빛깔들을 목격할 수 있는 통로들이 그만큼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통로들을 찾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소설’이라는 것, 그러니까 글자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 이야기를 전하는 그 ‘목소리’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뻗칠 수 있는 무한한 통로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소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통로 중,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 깊숙이 숨겨져 있던 통로 하나를 찾아낸 것뿐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공연이라는 행위 속에서 소설이 가진 또 다른 멋진 통로들을 찾아내보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애정하는 소설들이 가진 생명력들과 깊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배우’라는 존재의 근본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무수한 관계들을 샅샅이 경험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느낌과 풍경은 배우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희곡을 텍스트로 작업을 할 때보다 소설작업 속에서 더 복합적이고 인상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더 다채로운 느낌과 풍경들과 만나왔습니다. 희곡 속 한 명의 인물을 맡아서 연기할 때 배우의 체감은 그 인물이 겪는 경험의 테두리 안으로 수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할 때 배우의 경험은 이야기 전체 시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일렁거립니다. 그 일렁거림 안에서 소설의 세계가 배우의 몸이 가진 생명력을 끌어냅니다. 어쩌면 ‘텍스트 연주’라는 건 배우가 텍스트를 연주하는 동시에, 텍스트가 배우를 연주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공연이라는 매개 속에서 소설과 배우의 몸은 서로의 생명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과 현장이 대단히 멋지다고 느낍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쾌락과 나날』에 실린 「실바니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1)
이 문장을 읽을 때, 독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미끈한 검은 말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눈물이 맺힌 소년의 눈동자를, 또 누군가는 말을 선물 받고 기뻐하는 소년을 그려볼지도 모릅니다. 제목 속 ‘자작’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알렉시스에게 프랑스 귀족이 입을 법한 고급스럽고 윤기 나는 파란색 재킷을 입혀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지난주에 선물을 사달라며 조르던 자신의 열세 살 조카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겠지요. 어떤 독자는 별다른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은 채, 글자를 빠르게 훑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도 할 겁니다.말을 선물로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열세 살이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 너머로 알렉시스의 눈이 빛났다.
이 문장을 읽는 시간 역시 독자의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빠르게 눈을 움직여 읽는다면 대략 5초 정도가 걸리겠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독자나 “왜 알렉시스는 눈물을 흘렸을까”하고 갸웃하는 독자라면, 이 한 문장에 더 오래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이 문장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문장을 읽던 중간에 잠시 전화를 받고 10분쯤 뒤에 다시 돌아와 문장의 남은 부분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독자의 생각과 상상, 그리고 읽는 속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마치 하나의 감각처럼 작동합니다. 이 감각은 독자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각자가 가진 감수성 안에서 움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차이 속에서 독자마다 ‘소설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문장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 속 사건을 겪는 어떤 인물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목소리이거나, 작가가 내세운 서술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정확히 어떤 억양, 크기, 속도, 피치, 뉘앙스를 지녔는지 확정하여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는 소설의 이야기 속을 여행하는 독자의 인식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는 단일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렷해지거나, 흐릿해지거나, 어쩌면 아예 없거나, 혹은 있다는 느낌만 남기도 합니다. 피도, 뼈도, 살도 없는 그 목소리는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나가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됩니다. 독자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속에 소설을 읽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저는 ‘양손프로젝트’(이하 ‘양손’)에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양손’은 배우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과 연출 박지혜, 이렇게 네 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연극팀입니다. ‘양손’은 2011년 단편소설의 무대화를 시도하는 ‘단편소설극장전’이라는 연극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황금풍경」 「축견담」 「직소」 세 편을 묶어서 만든 옴니버스 형식의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개는 맹수다〉를 공연합니다. ‘양손’은 그 후로도 같은 형태의 단편선 공연을 연속해서 창작하게 됩니다. 3년에 걸쳐 산울림 소극장의 기획프로그램인 ‘산울림 고전극장’에 참여하면서 〈현진건 단편선―새빨간 얼굴〉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 〈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를 공연했고, 이 단편선 작업 안에서 총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무대화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됩니다.

〈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 공연 중 「목가」 부분 (사진: 양승호)
단편소설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시작했을 때, ‘양손’은 소설 텍스트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살려보는 것이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그 결과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지 않고, 배우가 소설 속 문어체의 문장을 그대로 발화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배우는 ‘스토리텔러’로서 무대에 서게 되었고, 서술자와 인물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양한 연기 문법을 발견해나가게 됩니다.
배우가 소설의 문어체 문장을 발화할 때 벌어지는 현상은 실로 흥미롭습니다. 이때 관객 앞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누군가’가 현전하게 됩니다. 책의 지면 위에 머물던 목소리가 무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때 배우는 단순히 소설의 문장을 낭독하는 전달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이야기의 끝까지 가본 자입니다. 그 이야기를 독자로서 경험하고 해석하며 감응한 바를 바탕으로, 각각의 문장을 어떻게 발화할지 결정합니다. 그 발화의 양상에는 1차 독자인 배우가 읽어낸 소설의 세계가 깊이 스며있습니다. 배우는 자신이 감지한 이야기의 리듬, 의미, 정서를 목소리와 몸을 통해 풀어내며 관객에게 그 세계를 다시 건넵니다.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은 2차 독자가 됩니다. 극장에 둘러앉은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 때 누리는 기쁨의 일부를 무대 위 배우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우리가 독자로서 누리는 시간의 자유, 이를테면 한 문장에 오래 머물거나, 다음 장으로 건너뛰거나, 잠시 책을 덮을 자유는 이 공간에서 사라집니다. 극장에서는 오직 배우가 문장을 발화해나가는 속도와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은 배우의 발걸음에 호흡을 맞추고, 그 순간의 그 속도로 소설의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생각과 상상을 소화해야 합니다. 극장의 독자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자신의 감수성 안에서 향유할 자유 역시 배우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던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극명하게 확정됩니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는 목소리뿐 아니라 눈앞에 선명한 얼굴을 보이며 현현합니다. 피와 뼈와 살을 지닌, 완전히 육화된 목소리가 무대 위에 출현한 것입니다.
공연의 시간 속에서 발화되는 소설의 문장은 배우의 다양한 몸과 결합합니다. 그 몸은 재현적이기도 하고, 표현적이기도, 때로는 상징적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문장은 그 육체를 타고 흐르며 배우의 에너지와 함께 관객에게 도달합니다. 관객은 문장과 배우의 몸이 맺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와 느낌을 따라가는 동시에, 들려오는 문장을 통해서 지면 위의 글자를 대하는 독서 때처럼 각자만의 생각과 상상을 불러내는 이중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관객들 모두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장면을 보고 있지만,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완성해나가게 됩니다. 관객은 연극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능동적으로 이미지와 영상을 머릿속에서 생성해가며 공연에 깊게 참여하게 되는 거지요. 무대에 선 배우가 관객에게 온몸으로 소설을 들려주는 이 독특한 공연 형식은 연극과 독서의 경계를 넘나들며, 텍스트와 몸, 의미와 감각, 소설과 독자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관객은 살아 움직이는 몸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경험하는 색다른 독서의 형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양손프로젝트 단편선 레파토리展〉 공연 중 「연애의 청산」 부분 (사진: 김일다)
3.
〈데미안〉은 2021년 제가 구성과 실연을 맡아 혼자 무대에 섰던 공연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장편 소설 『데미안』을 텍스트로 삼아 창작한 이 작품에서는 이전 ‘양손’이 해왔던 소설의 무대화 작업과는 다른 시도를 감행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는 배우가 ‘스토리텔러’로서 다양한 방편을 구사하여 관객들이 소설 속 세계를 생생하게 체감하도록 만들면서, 그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배우가 원하는 해석의 영역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공연을 창작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에서는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 배우가 이야기와 맺는 관계를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았습니다. 이 공연에서는 배우의 퍼포먼스가 관객보다는 최대한 배우 자신을 향하고자 했습니다. 배우가 소설을 사적으로 깊이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을 한 결과, 이야기를 구현하려는 행위를 지양하고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습니다.
소설과 독자 사이에 놓여 있는 가장 근본적 행위는 ‘읽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적인 독서의 영역을 관객과 연결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접점은 ‘소리내어 발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소리내어 읽는 행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습관화된 일상의 행위이기에 배우가 가진 생명력을 충분히 끌어내기에는 적합하지는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상적인 읽기 행위에서 벗어나 탈-일상의 몸 에너지를 획득하고자, 배우는 소설의 모든 문장을 기억하여(암기하여) 발화하는 연습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더해 각각의 문장을 발화하는 물리적인 형식을 세밀하게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고정된 발화 형식을 통해 소설을 경험하는 것이 이야기의 속살을 더 내밀하게 감지할 수 있고, 매일의 연습을 면밀하게 비교 대조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발화의 속도, 장단, 고저, 크기, 질감 등을 내용에 따라 논리적으로, 때로는 직관적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혹은 내용과 무관하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음악적인 구성으로 결정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일상과는 다른 형태의 띄어읽기, 강세, 반복적인 발음 등을 통해 발화에 다양한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문장들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마치 랩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랩처럼 비트와 박자 위에서 말을 리듬감 있게 타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읽기와 말하기의 문법과는 다른 운용상의 규칙을 가진 새로운 읽기와 말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먼저 문장을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 발화의 형식을 디자인하고, 그 발화의 형식까지도 기억하는 일을 마칩니다. 이후에 소설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여, 그 디자인 된 길을 따라 발화하는 연습을 이어나갑니다. 배우의 몸은 문장의 글자들과 발화의 길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힘으로 가득 찹니다. 배우의 몸은 발화의 에너지에 따라 출렁거립니다. 공연은 총 네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는 〈데미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발화해나가며 하나의 독자로서 이야기를 충실히 (재)경험해나갑니다. 이제 배우는 더 이상 ‘스토리텔러’가 아닙니다. 관객들은 단지 소설의 문장을 발화해나가며 소설을 음미하는 배우의 몸을 목격할 뿐입니다. 저는 이 행위를 ‘텍스트 연주’라고 명명합니다.

〈데미안〉 공연 (사진: 이강물)
이 ‘텍스트 연주’의 행위를 연습하면서, 그리고 이 행위를 ‘공연’이라는 형태 안으로 편입시키면서 저는 소설이 가진 ‘생명력’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어딘가에, 보통의 경우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의 모음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글자들을 읽어서 소설의 세계와 연결이 된다면 그것이 소설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소설을 읽는 행위는 소설의 세계가 흘러나올 수 있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눈으로 읽는 행위를 통해서 소설이 생명을 뻗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소설책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저는 〈데미안〉이라는 소설의 문장 거의 전부를 기억하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 동안 반복해서 그 문장들을 되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작업기간의 막바지에 왔을 때는 매일 한번씩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네 시간에 걸쳐 탈-일상의 방식으로 발화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연이라는 명목으로 수일에 걸쳐 여럿의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이 행위를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연하게도 저는 장편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데미안〉이라는 소설 역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낸 경험이 아마도 거의 없지 않았을까요? 이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저는 소설의 생명이 가진 빛깔이 무한하다는 것을 비로소 생생하게 실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빛깔들을 목격할 수 있는 통로들이 그만큼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통로들을 찾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소설’이라는 것, 그러니까 글자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 이야기를 전하는 그 ‘목소리’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뻗칠 수 있는 무한한 통로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소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통로 중,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 깊숙이 숨겨져 있던 통로 하나를 찾아낸 것뿐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공연이라는 행위 속에서 소설이 가진 또 다른 멋진 통로들을 찾아내보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애정하는 소설들이 가진 생명력들과 깊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배우’라는 존재의 근본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무수한 관계들을 샅샅이 경험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느낌과 풍경은 배우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희곡을 텍스트로 작업을 할 때보다 소설작업 속에서 더 복합적이고 인상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더 다채로운 느낌과 풍경들과 만나왔습니다. 희곡 속 한 명의 인물을 맡아서 연기할 때 배우의 체감은 그 인물이 겪는 경험의 테두리 안으로 수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할 때 배우의 경험은 이야기 전체 시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일렁거립니다. 그 일렁거림 안에서 소설의 세계가 배우의 몸이 가진 생명력을 끌어냅니다. 어쩌면 ‘텍스트 연주’라는 건 배우가 텍스트를 연주하는 동시에, 텍스트가 배우를 연주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공연이라는 매개 속에서 소설과 배우의 몸은 서로의 생명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과 현장이 대단히 멋지다고 느낍니다.
양종욱
양손프로젝트에서 활동하고 있다. 배우의 의미와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고 있다.
2025/10/15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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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프루스트, 『쾌락과 나날』, 최미경 옮김, 미행,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