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의 작은 방이 큐브 형태로 겹겹이 쌓여 있다. 각 방 안에는 책상과 칸막이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비슷한 자세로 앉아 일하고 있다.

1.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언젠가부터 인간은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쉼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현대사회를 AI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 초연결 시대 등 온갖 혁신적으로 보이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치장한다. 확실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신기술을 장착한 사물들을 소유할 수 있으며 물리적인 이동 없이도 여행지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시대에 있다. 또한 기업들은 이제 곧 하루의 절반 이상을 여가 시간으로 채우는 탈노동 사회가 목전에 있다고 사람들을 고조시킨다. 이처럼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가 양적 성장을 이룬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구조, 특히 노동의 구조가 변할 수 있을까. 미래의 인간은 기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노동 없이도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노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쉽게 동의하긴 어려워 보인다. 일과 근면함은 맹렬히 날뛰는 듯한 질병이며, 삶의 엄청난 속도와 더불어 사람들의 정신과 눈은 어중간하게 또는 그릇되게 보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면1) 우리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이전보다 더 심각한 노예 제도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창조적인 질적 가치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현대인들은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불안에 잠식되어 있으며, 현대사회는 기술의 이점을 살려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 일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백가경의 첫 시집 『하이퍼큐비클』(문학과지성사, 2025)은 현대사회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비인간적인(Inhuman) 노동 구조를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시인의 말」)라는 것처럼 백가경의 시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실험체나 구경거리와 같은 대상으로 전락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이 시인이 계획적으로 구축한 공간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공간은 일종의 기획 전시의 구조를 띠고 있어 우리는 친절하게 안내되는 표시선을 따라 시인의 세계를 마음껏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다. 현실과 과학적 환상이 어우러져 손쓸 틈 없이 덮쳐오는 백가경의 가상 공간 속으로 함께 입장해보자.


2. 순수하고 으스스한 큐브 속에서

백가경의 시집에 입장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큐브같이 길이, 너비, 깊이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입체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이 구성한 세계의 면과 면들을 관람객들로 하여금 이리저리 돌려가며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이들에게 고차원의 시점을 부여하여 규칙적으로 배열된 공간의 면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에게 시의 공간은 낯설지만 위협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타임 루프가 계속되어 매번 다른 시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공간이나(「test 10」), 폐플라스틱이 만들어낸 미래의 공간(「플라스틱폐허애호회에 부치는 작자 미상 자료들」), 인간의 목을 조르는 5차원의 칸막이 모듈 큐비클 공간(「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 등 시의 공간들은 대부분 죽음을 향해 있어 불쾌한 감각을 선사하지만 큐브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이 아니며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다음 큐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안전감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시의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여러 가지 입체 가상 공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놀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간들이다. 로제 카이와에 의하면 놀이는 강요당하지 않은 활동이면서도 공간과 시간의 구분이 명확하고, 전개와 결과를 알 수 없는 비확정성을 가지며 재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하며, 일상의 법 대신 일시적인 규칙이 존재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조건 속에서 발생한다.2) 시인은 이같은 놀이의 방식을 빌려 사회가 유발한 죽음과 인간의 이면을 파헤치는 방식을 택한다. 아이들이 즐겁게 오르내리는 정글짐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추적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교차점을 발견하는 ‘하이퍼큐브’ 공간이나(「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에 진입한 것 같지만 사실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는 놀이기구(「유타나시아코스터」), 살인사건이 교묘하게 은폐된 펜션(「에델바이스 작은 뜰 펜션」) 등 백가경의 공간은 순수하게 즐거운 놀이를 통해 드러내기에 더욱 잔혹하다.

  1. 사고 현황 : 화재(방화 여부 조사 중)
  (…)
  5. 답사 공간 순서 : 현관 ⟶ 입구 계단 ⟶ 1층 대회의실(아곤 중도 포기) ⟶ 2층 방향 계단(알레아 중도 포기) ⟶ 2층 단체 숙박 공간(아곤, 알레아 복귀) ⟶ 3층 방향 계단(아곤 질식 후 졸도, 병원 호송) ⟶ 3층 식당(미미크리 졸도, 병원 호송) ⟶ 계단을 내려와 현관 앞 집합 ⟶ 마침
  (…)
  8. 참여자(일링크스)의 녹취:

  우리가 태어난 적이 있나요 태어난 적 없다면 죽음도 없나요 새카맣게 타버린 계단과 벽과 바닥과 온갖 물건들을 보았어요 그을린 곳에 피해자들의 지문이 별처럼 찍혀 있고요 별 행성 초신성 암흑이 우리를 뒤덮고요 아곤이 정신을 잃고 미미크리가 정신을 잃고 알레아와 나는 끝까지 갔어요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화염 속에서 죽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우리는 보고서를 남겨야 했으니까요

―「옥탈」 부분
앞의 시 역시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네 명의 참가자들은 화재가 일어난 건물을 탐색하고 다시 출발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 즉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정해진 루트를 모두 답사한 후 지정된 탈출구로 나와야 하는 놀이인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전개가 그러하듯이 탈락자가 속출하고 결국 건물에서 탈출한 것은 한 명뿐이지만 사고 직후에 녹취된 신원 확인 불명의 목소리들, 중도 포기한 알레아와 끝까지 함께 있었다는 일링크스의 증언에서 실제 참가자 외에 누군가가 함께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섬뜩함은 배가된다.
  그러나 시인이 이 공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있었던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만이 아니다. 재현의 공간이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3) 시의 장소는 참사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애도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속된 의식을 낱낱이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시인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백가경은 시의 초반 사건의 전개와 결말을 모두 제시한 후 다시 참가자들의 시점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아곤, 일링크스, 알레아, 미미크리의 시점으로 각각 전개되는 탈출 놀이는 놀이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순간 우리를 다시 화재가 난 건물 안으로 진입하게 하면서 관객을 사건 속에 가두는 것이다.
  네 명의 시점으로 건물에 몇 번씩 재진입하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던 참사를 제3자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철골구조”에 “네 면의 벽”과 “공기에 가로막혀” 죽어가야 했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카펫 타는 냄새 신발 밑창 타는 냄새 벽지 타는 냄새 사람 타는 냄새”를 맡으며 질식하게 된 순간은 과거에 완료된 일이 아닌 현재에도 지속하는 사건이 되고 우리를 출구 없는 공포 속으로 계속해서 밀어 넣는다. 다시 말해 시인은 우리를 관객의 위치에 두지 않고 참사의 당사자로 전환 시키는 방식으로 참사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사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하고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된다.


3. NO WAY OUT

참사의 현장에 반복해서 끌려가며 출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관객들은 입체 가상 공간에서 앞다투어 빠져나오려 하지만 분명히 손안에 놓여 있던 작은 공간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공간이 되어 우리를 집어삼킨 후다. 거대해 질대로 거대해진 가상 공간은 이제 현실을 재현한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고 현실을 침범하기에 이른다.
  재현 공간이 현실로 틈입할 때 매개가 되는 것은 ‘노동’이다. 백가경의 공간에 처음 진입할 때 ‘놀이’가 매개가 되었다면 ‘노동’은 현실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재현 공간을 현실로 만든다. “폭염 속에서 지하철 보수공사하던 일용직”노동자의 죽음이나 “주차장에서 휴식 없이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영화 「보이지 않는 영사기사」」)의 죽음은 우리가 있는 곳이 가상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운다. 이제 「test10」에서 멀리 떨어져 관람한 실험체의 죽음은 우리 곁에 없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지독하게 현실적인 죽음뿐이다.

  상자 하나를 연다

  벌레 하나가
  기꺼이
  상자 중앙으로 걸어나온다

  가장 긴 두 다리를 접어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가르치는
  순서와 속도로
  천천히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벌레의 노고를 높이 산 나는
  그를 인간이라 부르기로 한다

  인간
  인간 한 마리가 독백을 시작한다

상자 제목, (긴 휴지) 아이디어 회관

이곳은 일찍이 관아 형식을 좇다가 콘크리트가 모자라
사찰 형식으로 지어진 공간이오
산속 깊은 좁은 땅에 지어야 했기에 디귿 형태이지요
드높은 권세로 혁명적인 공간을 짓고자 했던
건축업자는 뽑아내려던 것이오
최고의 효율을
  (…)

인간 1: 우리는 다리를 선호합니다,
너무 빨리 날면 영혼이 달아나는 기분이 들거든요
인간 2: 다음은 걷는 즐거움에 대해 보여드리려 합니다
인간 3: 상자 제목, (긴 휴지) 가능한 한 더 빠르고 더
많은 아이디어


―「아이디어 라이더」 부분
과로를 종용하는 사회는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죽음으로 내몰고, 이러한 노동 구조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은 비인간(Nonhuman)과 다르지 않다. 「아이디어 라이더」에서는 인간의 위치가 벌레와 동등해지며 인간의 삶이 벌레의 삶과 구분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사회적 규범을 정확히 습득한 벌레를 만나게 된다. 정중하게 다가오는 벌레 앞에서 화자는 “벌레의 노고를 높이” 사서 그를 “인간”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벌레가 살아온 공간은 어떠한가. 벌레가 나온 상자는 ‘관아’ 형식을 따르려던 기존의 의도와 다르게 건축 자재의 부족으로 ‘사찰’ 형식으로 지어진 곳이다. 국가 권력과 결부된 ‘관아’가 종교적 수행 공간인 ‘사찰’로 바뀌었다는 것은 실제 상자가 내포하는 성격이 지배질서의 규범을 공고히 하는 곳임을 알게 한다. 지배계급의 목적이 노동자 계급을 분산시켜 이들을 지정된 장소에 적당히 배분하며, 사회의 다양한 흐름을 제도적인 규정에 따르도록 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면4) 벌레의 상자는 수행과 쉼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지배계급의 목적을 은폐하면서 오히려 노동을 시키기 위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공간이 된다. 최고의 속도로 최대한의 아이디어를 생산해야 하는 공간을 날아다니는 벌레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낀다. 바로 백가경의 시 초반에 관람했던 “큐비클” 공간이 벌레의 상자와 다름없다는 것을. 이렇게 벌레와 인간 화자, 그리고 현실의 관람객은 노동이라는 범주에 묶여 동등한 위치가 된다.
  과로로 인한 죽음은 배달 노동자나 일용직 노동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소음을 측정하는 일”을 하던 사무직 노동자나(「다른 창을 켤 수 있을까」) “흰 넥타이를 맨 사람들”(「결벽증과 미화원」) 역시 과로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일하다 죽을 수도 있나 일하다 죽게 되나 죽을 때까지 일하나 죽어서도 일하나”(「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는 자조적인 독백은 우리 역시 사회가 강요하는 노동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관람객들이 자살장(「매소루」)으로 향해야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절망하며 큐브에서 나오기를 포기할 때쯤 공간이 전환된다. 시인은 관람객들이 가상과 현실을 밟아가며 비관에 빠지는 순간 “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 좋은 밤 보내길」)라며 전시의 종료를 알린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실감나는 전시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시장 바깥에 나서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있는 현실이야말로 출구 없는 공간이며 우리는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게 되리라는 것을.
  백가경의 시는 출구 없는 지옥에서 죽게 될 우리에게 바치는 헌사(Tribute)와 다름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계속해서 묻는다. 피험체와 실험자의 위치를 바꾸고(「환상 솔레노이드」), 피해자와 참가자의 위치를, 노동자와 관람객의 위치를 뒤바꾸면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 마리의 인간으로 죽지 않기를, 타인의 고통에 웃다 눈알이 터지지 않기를(「비질」), 타인의 죽음을 바라다 결국 자신이 링 위에 올라 죽음을 자처하지 않기를(「타이틀 매치」)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언젠가 인간이 아닌 폐쇄적 구조에 조의를 보내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나 또한 죽음의 굴레에 속한 자로서 한 송이 꽃을 이곳에 내려놓는다.

황사랑

문학평론가.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비인간과 인간의 마주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시라는 장르는 놀이와 다름없는,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예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쓸모없음으로 효율의 세계를 부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 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무너뜨린 아름다운 세계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읽고 썼습니다.

2026/02/04
77호

1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276-277쪽.
2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4, 34쪽.
3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양영란 옮김, 에코리브르, 2011, 80쪽.
4
레미 에스, 「앙리 르페브르와 공간의 사유」, 앙리 르페브르, 같은 책, 17쪽,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