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중력가속도를 늦추는 애도 서사, SF
김보영의 『고래눈이 내리다』
‘고래눈’은 김보영의 소설집 『고래눈이 내리다』(래빗홀, 2025)1)의 제목에 쓰인 조어다. 이것은 표제작 「고래눈이 내리다」에 따르면, 마치 눈처럼 심해로 떨어지는 고래 사체의 조각들을 의미한다. 죽은 생물의 살점이 중력을 따라 수심 깊은 곳으로 하강하는 이미지를 눈이 내리고 있는 모양새에 빗댄 것이다. 눈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캄캄한 심해를 밝히는 생명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래눈이 내리는 날이면 소설 속 심해 생물들은 고래 사체를 양식 삼아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데, 이때 고래의 죽음이 다시 생명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한 순환 혹은 연속성에 대한 모티프는 김보영의 소설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문학의 유구한 테마이자 다수의 SF 텍스트들이 해체하고자 한 생물학적 규범이지만, 김보영 소설에서 죽음과 삶을 다루는 방식이 그중에서도 변별되는 이유는 논의의 범주를 생물을 넘어 비인간 사물들, 그리고 그것들의 연쇄적 관계망까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동물, AI, 플라스틱 쓰레기, 게임 시나리오와 게임 캐릭터, 디지털 세계의 지형지물, 기차와 지프차, 소행성에 건설한 모듈형 거주구까지, 소설에서 죽거나 소멸하는 것들은 다종다양하다. 이러한 비인간 사물들의 (유사-)죽음은 기존의 생명 범주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문시한다. 의학,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물의 죽음을 정의하는 방식은 계속 달라지고 있으며, 비인간종으로 시야를 넓혀 사유하면 개체의 존재 양태는 0과 1처럼 죽음과 삶의 이분법으로 완벽히 나눌 수 없음을, 소설은 과학의 담론적 진리가 변화한 근미래 세계를 상정하여 서사로써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김보영 소설이 구축한 세계에 존재하는 일정한 힘의 작용이다. 많은 관념 혹은 규범이 변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중력처럼 작용하는 항상적이고 강력한 힘은, 객체들의 연쇄적 관계망 속에서 무언가는 이 세계에 포함하고 무언가는 배제함으로써 끊임없이 죽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소설은 이 죽음들이 고래눈처럼 삶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놓치지 않고, 이 지점에서 죽은 것들에 대해 애도 작업을 수행한다.
1. 애도하는 SF
김보영의 소설이 행하는 애도 작업의 구체적인 방식은, 수록 단편 「껍데기뿐이라도 좋으니」에 잘 암시되어 있다. 소설은 인격을 데이터화할 수 있게 된 미래의 장례 문화로 전자 납골당을 제시한다. 전자 납골당이란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미리 데이터화해둔 인격을 AI에 덮어씌우고, AI가 일정 시간 동안 유서를 쓸 수 있도록 마련된 디지털 사후 세계다. 이 디지털 공간은 개인이 지불한 금액과 선호에 따라 하얗게 비어 있는 쪽방부터 먼 외국의 휴양지까지 다양하게 구현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 산장처럼 꾸며진 전자 납골당에 AI가 되어 들어와 있다. 그는 남겨진 자식들을 위해 귀중품의 위치, 사랑한다는 말 등을 유서에 쓴다. 그가 죽은 사람으로서 산 사람들을 위해 남기는 말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소설은 죽음 이후 그가(혹은 그의 인격이 업로드된 AI가) 무엇을 행하고 말하고 느끼면서 생애 서사를 마무리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는 이곳에서 유서만 쓰지 않는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책장에 꽂힌 책을 읽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려 요리를 해먹고, 심지어는 잠을 자길 원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행위를 혼자 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죽은 이 외에도 납골당의 운영자이자 안내인 역할을 하는 AI가 한 명 더 있기 때문이다. 안내인-AI에 업로드할 인격 또한 죽은 사람이 직접 지정할 수 있지만, “생명과 죽음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105쪽) 이미 죽은 사람의 인격만 AI로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중학생일 때 죽은 동생 ‘미주’를 AI로 불러온다. 그는 미주와 함께 대화를 하고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길 기다리면서, 뚝 끊긴 미주의 삶의 서사에 작은 결말을 덧붙일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느낀다. 더 나아가 미주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내 남은 아이들도 위로받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기를”(109-110쪽) 바란다. 이렇듯 김보영의 소설은 단순히 죽은 존재를 되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근미래의 과학기술을 통해 데이터화된 죽은 존재, 즉 디지털 유령 또한 삶의 스펙트럼의 일부에 위치시키며 죽은 존재의 서사를 연장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 작업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상실한 대상을 향하는 리비도를 철회하여 다른 대상에 투여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다.2) 김보영은 기술적·시간적 잔존물로서 죽은 존재를 들여다보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도, 미래를 향하는 중력 같은 힘에 따르는 필연적인 상실을 부정하지 않고, 소설이 할 수 있는 애도 작업―서사 덧붙이기를 충실히 수행한다.
2. 이미 삭제된 데이터
한창 코로나 팬데믹을 겪던 2020년대 초에는, 전 세계적인 메타버스 열풍이 불었다. 메타버스란 디지털 기반 온라인 세계에 현실을 구현하고 확장시킨 가상의 세계를 말한다. 물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오프라인 기반의 현실 세계가 이전과 같이 작동하기를 멈췄을 때,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의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심지어 몇몇 기업들은 메타버스가 물질적·물리적 생산과 소비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데이터의 무제한적 자원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이고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디지털 기반의 메타버스는 팬데믹이 불러온 여러 사회 문제를 해소하고, 심지어는 환경 문제도 유발하지 않는 낙원 같은 곳일까? 2021년에 발표된 김보영의 단편 「너럭바위를 바라보다」는 이러한 질문에 ‘아니’라고 간명하게 답하며 서사를 추동한다.
소설이 가정하는 근미래에 지구는 쓰레기와 공해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인류가 살 수 없는 세계다. 인류는 “예정된 종말을 맞이하느니 다음 세대를 위해 한 세대만 지구를 비워놓자는 운동”(86쪽)의 일환으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디지털 가상현실로 이주한다. 처음에 이곳은 자원과 재화로 넘쳐나 공해도 부동산 걱정도 없는 낙원과도 같았으나, 점차 인간이 양산한 쓰레기에 의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을 맞이한다. 실시간 데이터 잔량 주의보가 울리는 등 세상의 용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것이다. 정부는 데이터 용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자주 쓰이지 않는 사물들부터 삭제 처리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렇게 “듣지 않는 음반, 읽지 않는 책,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 가치 없는 것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86-87쪽)들이 점점 사라지며, 이 낙원 같던 디지털 세계도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효율성의 원칙에 의해 재정비된다. 사실 이건 예상 가능한 수순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인류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대지가 생긴다고 해도, 대지와 관계 맺는 새로운 방법을 인류가 터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설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는 기술 유토피아 담론에 비판적 관점을 제기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지배한 세계에서 사라지는 사물들, 잊히는 존재들에 대한 애도가 있다. 주인공이 어릴 때 샀던 인디밴드의 CD가 가지는 낭만성, 주인공의 이웃인 ‘예지 씨’의 집이 상징하는 최소한의 안정망 등을 소설은 하나하나 짚는다. 물론,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과 예지 씨는 이제 곧 사라질 아름다운 자연 명소인 ‘너럭바위’ 곁을 지킨다. 너럭바위 또한 디지털 세계의 지형지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이미 삶의 조건이자 일부가 되어버린 인류의 환경이기도 하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세계에서, 어떤 디지털 객체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역설적으로 그 기술의 쓸모를 다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주인공은 예지 씨에게 ‘바위를 못 지킬 것 같다’고 말하고, 예지 씨 또한 ‘그럴 것 같다’고 동의하지만, 그들은 하염없이 바위 앞에 앉아 세계의 풍경을 두 눈에 열심히 담는 것으로 애도를 이어간다.
「저예산 프로젝트」 또한 현실을 재현하는 가상현실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미래에 사라져가는 가치들을 살핀다. 소설은 어플 개발자 주인공이 한때 함께 게임 만드는 일을 했던 동업자이자 그가 속했던 게임 회사의 CEO ‘이세연’의 죽음 이후, 어떻게 이세연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지 보여준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게임 시나리오 작가였던 이세연의 유작 게임을 실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간 방랑자’라는 게임은 AR(증강현실) 기술을 기반으로 하며, 선택지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와 결말을 볼 수 있는 어드벤처 게임이다. 늘 돈에 쪼들렸던 이세연의 게임답게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게임은 게임 속 주인공 ‘홍운’을 연기하는 배우가 한 명 등장할 뿐, 이렇다 할 실감나는 그래픽도 없다. 하지만 이세연의 특장점인 복잡하고 다양하면서도 탄탄한 시나리오는 이 게임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덕분에 주인공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생전에 이세연이 게임에 대해 가졌던 신념, 그에게 했던 말들을 곱씹는다.
이세연은 어드벤처/스토리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자기 앞에 놓인 갈림길을 다 가볼 수 있을 거라는 깨달음과 그 깨달음으로 비롯하는 주인공 의식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선택지 앞에서 세계의 이면, 즉 모든 가능성과 경로와 결과를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주인공으로서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게임이 선사하는 궁극의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이세연의 지론은, 막상 게임 산업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삶의 가능성이 다시 주어지는 진정한 멀티버스의 세계관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낭만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이세연이 몇 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연구하는 동안, AR 기술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도록 발전한다. 이제 체험을 통해 현실감을 주는 것은, 고난과 역경이 있는 지난한 서사가 아니라 화려한 기술력이다. 주인공은 게임 개발을 진작 관두었고 이세연의 게임은 세상 저편으로 사라진 지금의 상황은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주인공이 계속 플레이하는 이세연의 유작 게임, 퍽 하면 죽어버리는 홍운을 계속해서 살려야만 하는 ‘시간 방랑자’처럼, 이세연과 그의 게임이 추구했던 가치를 끊임없이 서사 위에 복구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돈 벌 생각도 없이 게임 제작에 목매면서 언젠가부터는 자신에게 제대로 보수도 주지 않았던 이세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에필로그에서 다시 만난 홍운의 잘 지냈냐는 인사에 화답할 준비를 하면서 죽은 이세연과 이세연이 상징하는 지난 시절의 소중했던 가치를 떠나보내려고 한다.
3. 버림받은 (삶의) 기술
앞서 두 편의 소설이 ‘지구에 사는 미래의 인류가 발전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디지털 세계를 구축한다면’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상상된 이야기를 보여주었다면, 「새벽 기차」와 「귀신숲이 내리다」는 물리적으로 지구에서 벗어나 또다른 행성 혹은 소행성 위에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새벽 기차」는 작가가 밝혔듯이,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와 초기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재난 서사다. 이 소설에서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평생 기차에서만 생활하는 인류가 등장한다. 다만 이들은 지구에 살지 않고, 극지방에 바다가 있고 적도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대륙이 형성되어 있는 ‘키바’라는 행성에 살고 있다. 이들도 처음부터 기차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태양 폭풍으로 오존층이 망가진 이후, 키바의 한낮은 평소 온도인 55도보다 높아져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고, 잘 사는 사람들은 태양을 피해 지하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적당한 온도의 시간대에 머물기 위해 키바의 자전 속도를 따라 전진하는 기차에 올라타기 시작하면서 기차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키바의 시간이 지구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소설은 부연한다.
소설은 <설국열차>처럼 재난 이후 원초적인 생존 투쟁 상태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갈등이 빚어지는지 그린다. 그런데 기차 안의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계급을 구별짓기보다, 기차 바깥에 타자를 만들어내며 자기들끼리 더 똘똘 뭉치기를 택한다. 그렇게 ‘나’를 잃고 ‘우리’가 된 인물들은 지구인들의 구조를 기다리며 거의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로 무의미한 하루를 살아간다. 개인이 곧 집단이고, 집단이 곧 개인이 되는 전체주의 사회의 규범에서 개성이나 자의식 따위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한편 기차 밖에는 이들에게 속하지 못한 지프차 한 대가 시간선을 따라 달리고 있다. 지프차의 남자는 기차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게 스스로 운전하고 가끔 멈춰서서 잠도 자며, 알아서 먹을 것을 구해다 먹는다. 이 남자는 존재 자체만으로 일률적인 삶을 살아가는 기차 안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타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기차를 멈춰 세워 그 남자를 태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기차는 멈췄고, 엔진이 고장 난 지프에서 내린 남자는 기차에 올라탄다. 기차 내부 사람들은 남자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거라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면서 폭력까지 일삼는다. 남자는 굴하지 않고 하루(키바의 하루는 지구의 한 달과 같다) 동안 꾸준히 엔진을 수리하여, 자신의 지프차를 고치기 위해 다시 기차에서 내리고자 한다. 소설의 서술자 ‘나’는 그런 남자를 이해할 수 없어 묻는다. “어차피 그의 목적이 행성을 도는 것이라면, 왜 이처럼 편안하고 안전한 기차에 머물지 않고 굳이 그의 초라한 지프로 돌아가려 한단 말인가?”(196쪽) 기차의 규범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지프는 이미 죽어야 마땅한 존재다. ‘나’는 급기야 남자가 만든 엔진을 망가뜨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남자는 ‘나’의 이름 두 글자를 부르고 비로소 ‘나’는 ‘우리’라는 집단의 규범으로 말살되었던 자아-정체성을 잠시 자각한다. 소설은 종말이 임박한 세상에서 기술로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여 단지 목숨을 연장하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진정 삶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낡고 부서진 지프는 “지난 시대의 유물 같은 낡은 생물”(201쪽)이지만,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겪어내는 삶 그 자체다.
「귀신숲이 내리다」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산천’은 우주에 떠 있는 소행성 전체를 둘러싼 모듈형 인공 거주구다. 이 비인간 존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생각하고 인간을 위협하는데, 이는 마치 고딕 소설의 ‘귀신들린 집’ 모티프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산천은 논리적으로 해설할 수 없는 경이로운 현상이 아니다.3) 이 우주 거주구가 무서운 귀신숲이 된 데에는 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 산천은 “파킨슨, 루게릭, 전신 마비 환자,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진 노인들”(224쪽) 등을 위한 요양 병원이었다. 우주에서는 근육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서 이들이 죽기 전까지나마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 병원 안 농원의 숲은 환자와 고객들을 위해 개발된 풍부한 식량의 원천으로서 산천을 낙원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한 생물이 그러하듯, 이 식물들도 걷잡을 수 없이 많은 돌연변이를 낳았다. 생명력으로 들끓는 숲에서는 마찬가지로 많은 것들이 썩고 죽었다. 온갖 포자와 곰팡이가 자라고 벌레가 끓었으며 끔찍한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이 농원 문을 개방하여 산천 전체가 썩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산천의 병원장이자 우주 거주구의 함장 ‘현아라’였다. 그가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천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터지자 국가기관은 산천의 제어센터에 강제 접속해 군사 모듈에 있던 생화학 미사일을 지상으로 낙하시켜 지구에 포탄을 터뜨렸다. 이에 현아라는 산천이 전쟁에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거주구 전체를 더이상 인간들이 쓸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게 산천은 표피는 죽은 산호와 버섯 같은 다세포 균사체로 뒤덮이고, 내부는 온갖 생물이 자라면서 썩는 오지 밀림으로 가득한 살아 숨쉬는 사물들의 네트워크가 된다.
하지만 소설에서 산천은 또한번 인간들에 의해 전쟁 무기로 쓰일 위기에 처한다. 산천은 여기에 맞서 자신을 찾아온 인간들을 처치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다짐의 이유에는 현아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있다. 현아라의 시체는 여전히 제대로 수습조차 안 된 채 거주구를 둘러싸고 형성된 토성의 고리 같은 테에 붙어 여전히 산천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반전은, 그 산천을 찾아온 인간들 중 하나인 ‘노랑’이 현아라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노랑 또한 엄마의 거주구가 전쟁에 쓰이는 것을 두고볼 수 없다며 차라리 산천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한다. 노랑은 산천을 지구로 낙하시켜 마찰열에 의해 모조리 소멸시킬 계획이었지만, 산천은 그 계획에 변수를 만든다. 생물의 돌연변이가 잔뜩 자라고 있는 자신의 일부를 지구의 지상으로 안착시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다 썩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파국이 아니다. 마치 고래눈처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비하는 윤리적인 애도 작업이다.전쟁의 폐허들, 포화들, 부서진 콘크리트 건물과 불 꺼진 건축물들, 뭉그러진 들판, 검게 물든 강들, 쓰레기로 뒤덮인 해안가, 모든 노폐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썩지 않는 것들.
내가 다 썩게 하리라.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리라.
(…)
내 귀신들린 숲이 너희를 남김없이 잡아먹고 자라나리라. 모든 죽은 것들이 살아서 들뛰고 생동하게 하리라.
그렇게 화산처럼 폭발하며 증식하다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져 스스로를 먹을 것이며, 그러다 소멸해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다 으스러져 사라진 자리에 새 숲이 자라나리라. (257-258쪽)
4.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
순간이동 기술은 현재로서는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김보영의 소설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는 한 개체를 이루는 물질과 정보를 모조리 복사해서 다른 장소에서 전송함으로써 순간이동처럼 보이는 기술을 선보인다. 이 기술은 엄연히 따지자면 순간이동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 개체/물체의 정보를 스캔하고 “원소 단위로 분해해서 원자 탱크에 저장한 뒤, 얽힌 양자 다발을 통해 정보를 전송하면 도착지에서 다른 원자 탱크의 원자를 써서 전송받은 설계도대로 물건을 제작”(118-119쪽)하는 원리다. 원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물질이니, 꼭 원본 물체를 분해한 원자를 쓰지 않아도 동일한 개체가 복사된다고 보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 기술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출장이나 여행을 위해서도 쓰인다. 기술 초기에는 원화 한 점을 외국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데에 사용하는 것에도 논란이 일었고, 생물을 복사하는 것은 완전히 금기시되었으나 점차 과학적으로 복사-전송 기술에 따른 물질의 훼손도가 크지 않으며, 오히려 생물의 항상성이 물질의 변동을 상쇄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생물-인간 또한 이 기술을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이 기술의 안정성이 확보되었을지라도, 한 사람이 분쇄/소멸되고 다시 생성되었을 때, 그것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물질 환원주의자4)들은 모든 정보가 물질에 의해 전부 복원되었으니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전송 대행을 해주는 시민단체 ‘워퍼’에 소속된 ‘권현수’는 빈번한 전송을 거칠 때마다 자아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매번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권현수도 실은 매번 다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본인은 그 사실을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 이렇듯 소설은 한 개체의 동일성, 자아의 연속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하는 걸까.
일부 사람들은 그 답으로 ‘믿음’을 제시한다. 어떤 종교단체는 믿음을 통해 영혼도 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가톨릭 정통 교리에 따르면 영혼은 절대 복제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신이 만든 것이니, 한 번 분쇄된 인간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까 어떤 신념을 가지냐에 따라 같은 물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는 ‘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한예림 아가타 수녀’는 가톨릭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비행기 사고 직전 ‘마태오 수사’의 간곡한 부탁을 떠올리며 자신을 스캔하고 인천공항에 전송했지만, 스스로를 이전의 ‘나’라고 믿지 않는다. 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의 부모님에 의해 사고와 동시에 서류상으로 사망 처리가 되어버린다. 교리와 신앙에 따르면 그게 옳지만, 그는 사고 직전의 기억과 지금의 기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정말 죽었다고 볼 수 있는지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믿음의 틈을 권현수는 집요하게 파고들고, 급기야 신앙심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뼛속까지 물질 환원주의자인 줄 알았던 권현수도 사실은 영혼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사의 후반부에 밝혀진다. 그는 단지 자신이 매번 죽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타인의 시선에 의하면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다. 그렇다면 권현수가 자신의 믿음을 배반해가면서까지 전송을 밥 먹듯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의 중심에는 이타심이 있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로서 권현수가 하는 일들은 보통 타인을 살리는 일이며, 더 근본적으로 권현수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 대신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권현수의 서사를 통해 소설은 ‘나’를 ‘나’이게 하는 근거는 오직 ‘타인’ 혹은 ‘타인과의 관계’라고 답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주인공 한예림 또한 이것을 몸소 깨닫는다. 전송에 따른 죽음과 삶의 문제로 계속 반목하던 주인공과 권현수는 전송 과정에서 누락된 디지털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합심한다. 난민들을 구하는 작업에 착수한 뒤, 그들은 하나둘씩 전송기를 통해 걸어나왔지만 권현수는 전송기 오류로 인해 제때 전송되지 않는다. 한예림은 고민도 하지 않고 그를 구하기 위해 전송기로 뛰어든다. 권현수가 전에 알려준, 전송기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을 구하는 방법을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권현수의 이론에 따르면, 해킹된 신분증을 가지고 그 신분증을 가진 사람이 이전에 전송했던 곳을 끊임없이 되짚어가다보면 언젠간 그 사람과 함께 전송될 수 있다. 한예림은 수없이 반복되는 전송을 통해 완전히 낯선 장소를 거치면서 죽음과 생명의 무한한 연속성 속에서 믿음이나 ‘나’의 동일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165쪽) 한예림의 반복된 죽음은 결국 권현수를 살려낸다. 권현수는 한예림에 의해, 한예림은 권현수에 의해 삶을 ‘이어’간다.
0. 김보영의 지구에도 고래눈이 내린다
김보영의 SF에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지식에 기반한 경이로운 근미래의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 세계의 작동 논리나 인간이 중시하는 가치 등을 완전히 떠난 초자연적 판타지 세상은 아니다. 이 세계에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논리나, 계급 사회의 규범 등 지금-여기에서도 익숙한 힘의 논리가 중력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언제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중심적인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김보영의 소설이 현실을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봄으로 가는 문」은 주인공의 집 한복판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 생긴 환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문 너머로 보이는 낯선 풍경은 마치 몰디브나 마이애미처럼 이국적이고 자연이 아름다운 낙원 같은 세상이다. 주인공은 잠깐 동안 다른 세계에 고개를 들이밀고서는 그곳을 진짜 세상이라고 믿었다가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두 번 다시 문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친구는 문의 존재를 발견한 뒤 “저 너머가 내 고향”(265쪽)이며, “여기가 잘못된 세상이고 저쪽이 진짜 내 세상”(266쪽)이라 말하고는 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간다. 친구는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하지만, ‘나’는 끝내 거절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문 하나를 두고 나뉘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훌륭한 은유는 김보영의 SF가 견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세상을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동시에, 이 세상을 결코 떠나서 사유하지 않는 것. 이 세상의 삐걱거림과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고래눈은 중력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내릴 수 있다. 수많은 죽음들, 동등한 무게감으로 떨어지는 죽음들을 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김보영의 SF 서사가 수행하는 것이다.어린 날 내가 너와 함께 이 세상으로 건너왔다.
내게 딱 맞는 세상을 뒤로하고, 내가 원래 잘 끼워져 있었던 곳을 박차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부대끼거나 거스르지 않는 세상을 내버리고. 그저 낯선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익숙지 않은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호기심과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새처럼 날아 이곳에 왔다.
그러니 나는 여기 머물고자 한다. 이곳이 내 세상이니. 이 낯섦이 내가 원한 것이니. 이 삐걱거림이 내 갈망이었으니. 저 너머의 내가 바란 것이 바로 내 이 삶이니. (269쪽)
정의정
문학평론가. 2025년 동아일보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나’를 ‘나’로 의식하도록 하는 동일성(identity)은 도대체 무엇에서 비롯할까? 포스트-구조주의자라면 자기의식이 시작되는 기원이란 없으며, 사회구성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 순간에 발생하는 동일성이 모여 자기의식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SF가 자기동일성의 환상을 부수기 위해 수행하는 물질의 재배치 또한 우연히 돌발하는 ‘나’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나’를 이루는 원자 물질을 분쇄하고 새로운 원자로 다시 태어나는 김보영의 인물들처럼, 다른 나-되기를 예비하는 수행으로서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2026/02/04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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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인용 시 본문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 2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멜랑콜리」, 『프로이트 전집 4』, 홍준기 옮김,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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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적인 것(fantanstic)과 기이한 것(uncanny), 경이로운 것(marvelous)을 모두 구별한다. 초자연적 현상을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며, 반대로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는 절대 해설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은 경이로운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도 단숨에 확정할 수 없는 망설임에 있다. 김보영의 소설에서 거주구-물질이 생각하고 생동하는 것은 환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과학기술, 산천의 과거 서사를 바탕으로 두고, 물질과 생명의 이분법을 파기하는 생기적 유물론(제인 베넷)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순수-기이가 된다.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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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서는 ‘유물론자’라는 넓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 경우 인간의 환원 불가능한 현상학적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물리주의자’가 더 좁은 표현으로서 정확하다. 이 글에서는 조금 더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물질 환원주의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