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흑백의 목적지는 3,500번째 기억이다.

우리는 1982년에 사망한 한 여성 작가를 기리는 자리에서 1431년에 화형당한 여성의 마지막 하루를 그린 1928년작 무성 흑백 영화를 함께 보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성녀 잔 다르크. 영화는 화면을 꽉 채운, 소리 없는 얼굴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얼굴 있는 존재라는 걸 몇 번 깜짝 놀라며 새길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나 가까이 타인의 얼굴을 주시하는 게 처음인 것처럼 어색한 시선이 자꾸 얼굴들 밖으로 나간다. 민족적 대의가 명분이 된 전쟁에서 남장을 하고 승리를 이끈 여성이 가부장적 종교 권력 앞에서 젠더 경계를 혼란케 한 이단으로 몰린 상황이다. 취조와 대답의 내용이 중요한 재판 과정을 무성으로 처리했지만 국경 지역 방언을 쓰는 잔 다르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법정 남자들의 표정과 몸짓이 전하는 메시지만큼은 명확히 전달된다. 여성이 남성의 일을 했으므로 사형이다.

1982년 무방비로 폭력에 희생된 테레사 학경 차는 그의 유작에서 1431년에 세상을 떠난 잔 다르크를 여러 번 호명한다. 그뿐 아니라 그를 재연/재현하는 두 여성의 얼굴을 한 장의 시작과 끝에 배치한다. 두 얼굴 모두 거친 질감의 흑백사진 속 모호한 시간성 아래 놓여 있다. 첫 장의 여성은 수녀원에서 올린 연극에서 잔 다르크 역할을 맡은, 1897년에 사망한 성 테레즈 수녀이다. 마지막 여성은 영화 속 잔 다르크를 연기한, 194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배우 팔코네티다. 존재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거듭 재연/재현하는 전쟁과 국가 폭력은 한국 전쟁을 경험한 작가가 마련한 여백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포개진다. 그들의 얼굴과 얼굴이 생성하는 기억 역시 그렇다. 빛과 어둠의 기억으로 그려진 얼굴들은 뚜렷한 시간성을 상실하는 동시에 다른 시간, 다른 얼굴의 자리를 열어둔다. 그 어떤 시간도 지우지 않는 얽힘의 방식으로. 수많은 얼굴에서 얼굴 없음으로, 비인칭적 기억으로.

흑백 네거티브 기법으로 동굴 내부를 포착한 사진이다. 음화(네거티브) 기법의 특성상 명암이 반전되어 밝은 부분이 어둡게, 어두운 부분이 밝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동굴의 거친 질감과 갈라진 틈새가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다. 바닥 중앙에는 철길 형태의 목제 발판이 동굴 안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끝에는 작업용 수레가 놓여 있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들은 네거티브 효과로 인해 검은 점처럼 묘사되어 동굴 속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연출한다.
전리해, 〈감춰져 있던 약한 빛이 증언하는 이야기〉, 흑백 네거티브 필름, 2021-2025.

이 감각적이며 정치적인 형식은 자주 간과되는, 여성이 겪는 전쟁 기억의 시차를 환기한다. 힘의 논리로 세계를 재편하는 전쟁의 시작은 발포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끝은 고통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유예된다. 관계된 모든 이들의 삶에서 시작과 끝은 다르게 경험된다. 전쟁은 분쟁의 주체나 장소에서 그들과 연결된 다른 삶으로 옮겨온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코발트 광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버지, 남편, 아들을 잃은 여성들의 삶에 학살의 기억과 고통이 이식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개발된 코발트 광산은 1950년 7월 중·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경찰과 군인에 의해 집단 희생된 약 3,500명 이상의 공동 무덤이기도 하다. 서른여 명을 실은 트럭이 산 위로 올라가고 나면 사십 분 정도 총소리가 이어졌고 광산 아래 골짜기를 따라 핏물이 내려와 그 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는 증언 뒤로, 그해 산딸기가 유독 달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데 있어 동원해야 할 추가 감각을 요청한다. 전리해 작가의 사진 작업들은 그 요청에 응답한 결과다.

경산 코발트 광산 동굴 내부를 근거리에서 포착한 사진이다. 화면 좌측에는 미수습 유해와 토사를 수습한 밝은색 모래주머니들이 층층이 쌓여 벽을 이루고 있으며, 바닥면은 황토색 진흙과 고인 물이 뒤섞여 축축하고 생생한 질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반면 우측의 건조한 지면 위로는 누군가의 행적을 암시하는 신발 자국들이 여러 개 찍혀 있다. 강한 대비 효과로 인해 현장의 거칠고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전달한다.
전리해, 〈공작의 세계〉,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1.

코발트 광산에 들어갈 때 신었던 운동화를 다시 신지 못하고 있어요. 3,500여명이 희생되었으니 밟는 곳마다 이미 흙이 된 유해들이 섞여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어요. 유해 발굴중인 지점에서 발아래에서부터 질척한 느낌이 올라왔는데 엄청난 무게가 지하로 나를 당기는 것 같았어요. 총에 맞은 몸들이 수직 갱도로 추락하며 느꼈을 그 마지막 감각이 신발에, 꿈에 들러붙었어요.

처음 그 신발 이야기를 나눈 날 밤, 나는 꿈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가 짧은 한두 문장으로 전달한 감각이 놀랄 만큼 생생하게 꿈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바람에 나는 여러 번 있는 힘껏 발을 세게 털었다. 발을 털 때마다 새 문장이 발끝에 붙어서 한두 문장이 금방 서너 문장으로 증식했다. 발을 터는 사람이 나였다가 그였다가 또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 변했다. 문장이 각각 증식하며, 끈적하고 차갑게 들러붙는 발바닥 아래 감각과 함께 다른 얼굴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감각은 몸을 타고 스물스물 손바닥까지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동굴 안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뾰족해지더니 목덜미를 찔렀다. 이것은 대체 누구의 기억일까. 누구의 기억인데 내게 와서 신체화되는 걸까. 꿈에서도 이 감각을 기록해야지, 나중에 전해야지, 하며 마음이 연신 쫓겼다. 저 끝에 수직 갱도가 있다던데, 시선이 닿는 곳에 덩그러니 암흑의 덩어리가 얼굴 없는 기억처럼 놓여 있었다. 그 덩어리가 성큼 다가오는 참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의 흑백 사진들 속에 꿈의 현장이 있다. 손으로 문지르면 동굴 벽의 습기를 머금은 결들이 그대로 피부에 자국을 만들 것 같다. 사진 원본을 아날로그로 변환하고 싶었던 이유를 그는 오래 촉각을 쓰고 싶어서라고 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던 걸까, 감각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했던 걸까(기억의 연속체로서 둘 다 중요하다). 그는 원본 사진의 음영을 반전시켜 네거티브 이미지로 변환했다. 공식적인 기록물로서의 현장 사진은 그 색을 잃었고 시공간이 뒤틀렸다. 어떤 부분은 이상한 공기의 흐름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것처럼 빛과 어둠이 서로를 거칠게 교차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사진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질감이다. 어떤 새로운 시간성과 촉감의 사용이 공식적인 서사가 전하지 못하는 기억을 촉발하는 순간. 그의 작업 속 음영 반전된 부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그런 순간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획득한다.

흑백 인물 사진 네 장이 배열되어 있다. 각 사진 속 인물의 얼굴 부분은 잘려나가 흰 사각형으로 보인다. 한 장에서는 한 아이가 성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고, 나머지 세 장의 인물은 각각 다른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다.
우간다의 한 사진관의 쓰레기들 사이에서 발견된 신분증 사진. 사진사가 전신 사진을 찍은 후 얼굴 부분만 오려내는 방식이 더 저렴했다.1)


흑백 네거티브 기법을 활용하여 동굴 내부의 모습을 담아냈다. 중앙에 있는 목제 발판은 원경의 광원을 향해 뻗어 있으며,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전구들은 공간의 깊이감을 강조한다. 네거티브 반전으로 인해 하얗게 묘사된 암벽의 균열은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제공한다. 터널 끝에서 보이는 빛은 폐쇄된 공간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전리해, 〈감춰져 있던 약한 빛이 증언하는 이야기〉, 흑백 네거티브 필름, 2021-2025.

티나 M. 캠프트는 『이미지 듣기 Listening to Images2)에서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사진 이미지들을 촉각적 객체로 접근해 여러 시제(tenses)와 다중 시간성 안에서 감각한다. 사진이 스스로 움직여 우리를 만지고, 사진의 사건성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방식에 감응하려는 시도가 책 전반에 걸쳐 전개된다. 특히 책 표지와 내지에 놓인 마르티나 바치갈루포(Martina Bacigalupo)의 작업은 흑인 디아스포라가 찍은 사진에서 신분 증명용으로 잘라낸 부분, 그 빈곳을 채우고 있는 정동적 주파수를 감지하려 애쓴다. 나아가 프레임 밖에서 그들 스스로 창조하는, 국가나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정체성에도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어떤 부재를 듣는 일이다. 사진이 기록하고 있는 다른 청각적·감각적 파동에 자신의 감각을 맞춰보는 일이다. 코발트 광산의 희생자들과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의 기억을 담고 있는 남은 얼굴들 대신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기억, 그 울림의 색채를 붙잡은 전리해의 흑백 사진들 또한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감각하길 요청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육체적 맥락과 위치에 조응하며 시차를 두고 도착할 이야기들이 겨우 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 마비된 채 공포에 떨며 기다린다. 모두 안다―죽음이 임박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며 심장은 하나로 뛴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 (…) 산기슭에 수백 구의 시체를 어떻게 정당화하려고? 그들의 잔혹함을 숨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꾸며낼까?3)

코발트 광산의 기억보다 내게 먼저 도착한 건 1850년경 아프리카 모리셔스의 르 모르누 산 정상에서 자행된 학살 사건에 관한 인터뷰였다. 탈출한 노예들의 피난처였던 그곳에서 추격자들에게 쫓겨 다수의 노예들이 사망했는데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 자살했다는 이야기와 실은 대규모 학살이었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했다. 문서화된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노예 후손들의 인터뷰와 구전되는 기억들을 종합한 바로는 생매장, 끔찍한 살해,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증언들은 그동안 대규모 학살, 전쟁에 대해 여성들이 어렵게 조립해 구전한 기억들과 유사했다.

거칠고 어두운 동굴 내부를 포착한 흑백 사진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밝게 빛나는 전구가 매달려 있고, 중앙에는 쓰러진 목재 더미가 암벽에 기대어 있어 동굴 내부의 적막함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검 프린트(Gum Print) 특유의 거친 입자감은 동굴의 암벽 질감과 어우러져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는 사진 위로 겹친 텍스트와 결합하여, 코발트 광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의 참혹한 기억과 희생자 유족의 아픈 역사를 시각적으로 증언한다.
전리해, 〈성운과 선이〉, 검 프린트+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1-2025.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목소리들에 귀 기울여온 전리해 작가와 국가 폭력, 가정 폭력 피해자 여성들이 기억을 언어화하는 과정을 함께해온 나는 여성들의 증언이 많은 경우 경직되어 있고, 이미 공식 역사가 된 안전한 내용만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기 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해 사실의 진술이 자신과 남은 가족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지며, 그들을 오래 비밀과 침묵 속에 가두었으리라는 것도. 한편으로는 캐시 캐루스가 설명한 것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극복하려는 트라우마의 생존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다.

총성이 이어졌어요. 더 많은 비명이 들렸고요. 나는 거기 다른 어머니들을 바라보면서 닥쳐올 위험으로부터 내 아이들을 보호하려 애썼어요. (...) 총을 가진 자들이 소리를 지르면 모두 공포에 휩싸였어요. 고통의 비명소리가 마음을 찢어놓았어요. 그들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몇 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더 이야기해야 하나요? 아니요.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니, 진짜요. 뭔가 계속 끝나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게 힘들어요. 그냥 저기 남자들한테 물어보세요.4)


시아노타입(Cyanotype) 기법을 통해 푸른색 단색조로 표현한 사진이다. 화면 중앙과 우측에 자리한 앙상한 나무들은 복잡하게 얽힌 선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왼쪽 아래의 짙은 수풀은 묵직한 양감으로 덩어리져 있다. 배경이 되는 하늘은 질감이 거칠게 살아있어 프린트의 평면성을 넘어서는 촉각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전리해, 〈공작의 세계〉, 시아노타입+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1.

여성들은 옆집 개가 새끼를 낳은 날짜나 손녀의 생일, 산에서 핏물이 내려오던 날의 날씨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기억했다. 그들 몸이 기억하는 생생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술술 막힘없이 풀어내던 여성들은 객관적 사실과 선형적이고 역사적인 시간대가 포함된 질문 앞에서는 당황하며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자기 기억력이 얼마나 나쁜지 자책하거나,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사냐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야기에 시간성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기 과거에 의해 불가피하게 형성된 시간성, 자기 삶의 특정한 위치에서의 시간성을 우선한다. 공통의 기억이 묶인 한 사건이 각각의 삶에 도착하는 데 시차를 만드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난 건가요? 그곳에 얼마나 머문 거예요? 이런 질문들은 그들의 기억을 공적으로 구성하는 데에는 필수적이었지만 그 전에 대화를 단절시키기에 오히려 더 적절했다. 그들의 시간이 멈춘 지점, 기억이 잠겨버린 시점, 없던 일로 잘라낸 구역을 표시할 시간의 구두점이 필요했다. 의도치 않게 도움을 준 건 한 80대 여성 노인의 대답이었다.

우리가 옆 도시로 이사 가기 전이었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고, 이사한다고 애들을 가까운 언니 집에 데려다주고 오던 길이었어.5)


동굴 벽면의 거친 질감을 가까이서 포착한 흑백 사진이다. 화면 상단은 어둡고 단단한 암석의 덩어리가 차지하고 있으며, 하단부는 터뜨린 플래시 조명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눈부시게 하얗게 반사되어 있다. 이 강렬한 빛은 울퉁불퉁한 암벽의 표면과 미세한 입자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절박한 손바닥 자국들은 어느 존재의 흔적처럼 처절하게 드러난다.
전리해, 〈공작의 세계〉,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1-2025.

어째서인지 시간보다 위치나 장소가 여성의 몸과 더 긴밀히 연동했다. 공포와 고통으로 조각난 기억들이 몸에 새겨진 장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몸은 텅 비었는데, 그 윤곽을 따라 파편들이 모이면서 기억의 형태를 만들었다. 내 사막의 모래는 스스로 운반하겠다는 듯이. 정수리에서부터 시작해 윤곽선이 귀를 지나 팔뚝, 엉덩이,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과 발바닥을 지나…… 아, 질척이며 미끄러지던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 그것이 내게로 왔다. 다시 코발트 광산의 수평 갱도 안이다. 힘을 주자니 발바닥이 연신 밀린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벽에 손바닥을 대고 만다. 신발은 신지 않으면 될 텐데 이 손바닥은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손바닥 자국을 소거하면서도 간직하게 될 벽이 점점 차가워졌다. “지워진 것을 지켜내기 위”6) 한 그 벽이.

시아노타입(Cyanotype) 특유의 깊고 짙은 파란색 배경 위에 하얀 식물의 잎과 줄기가 섬세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위로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렇지요...."로 시작하여 학살 희생자 유족의 애끓는 구술 증언이 흰색 텍스트로 화면 전체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전리해, 〈귀분과 필용〉, 시아노타입+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1-2025.

나는 그의 사진 속에서 그가 나의 목소리를 듣도록 놔둔다. 코발트 광산 주변에서 채집한 식물들이 남겨진 언어 위에 포개어지는 것처럼. 19세기 사진 인화 기법인 시아노타입(cyanotype)과 검바이크로밋(gum bichromate, 검프린트)을 활용하여 존재하는 기억과 기록, 그것들의 몸을 재구성한다. 푸른 기억의 몸을, 우리의 몸을 어디에든 포개어야 한다. 그와 나는 지구 아래에서 연결되는 뿌리들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믿는 것처럼 여성들이 다른 시차의 전쟁 폭력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 역사적 시간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를 파랗고 영원한 기억의 잠복기 안에서 떠올린다. 그의 사진들이 그의 의도를 넘어서는 생명을 가지는 것처럼 그들의 비밀과 침묵이 그들이 두려워하던 그것을 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어떤 전쟁은 끝났다, 라는 문장은 그날에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진들이 그의 기억이다. 너무 빨리 도착하거나 너무 늦게 떠나는 전쟁 기억의 시차는 네거티브와 푸르게 덧입히기(superimposition)로 기록된다. 나 또한 그가 초대한 그의 기억에 시차를 두고 도착해 촉각적·청각적 층위에서 개입할 틈을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손바닥을 써서. 촉각을 발동시켜서. 우리가 한 여성 작가를 추모하며 함께 본 그 영화에서 화면을 꽉 채운 얼굴들보다 강렬했던 것은 화형장 주변에 모인 여성들의 얼굴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그들에게는 그날의 재와 연기와 날아가는 새들까지가 전쟁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 위로 손바닥을 포갠다.

비밀과 침묵으로, 흑백의 목적지를 향해

차학경의 책 『딕테』에 수록된 이미지로, 엘 카스티요 동굴 벽화에서 발견된 손자국 이미지로 추정된다.
엘 카스티요 동굴에 남은 손자국으로 추정. 네거티브 이미지로, 부재를 존재하도록 한다.7)


음화(내거티브) 기법을 사용하여 동굴 벽면의 질감을 극대화한 흑백 사진이다. 실제로는 어두웠을 암벽의 굴곡과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음화 처리를 통해 눈부신 하얀 선으로 살아나, 마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동굴 벽의 기억들이 빛으로 기록된 것처럼 보인다. 빛은 강렬한 백색으로 표현되며, 그 빛이 닿는 바위의 경계마다 날카로운 흰색의 실루엣이 형성된다. 저 멀리 보이는 환한 출구는 고립된 상황을 벗어나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통로이다.
전리해, 〈감춰져 있던 약한 빛이 증언하는 이야기〉, 흑백 네거티브 필름, 2021-2025.


김지승, 전리해

경계 안팎의 유동적 위치성을 체현하는 작가이자 독립연구자. 문학, 문화이론, 정신분석학을 공부했고 비영리단체 사업 기획 및 매체 업무를 통해 다양한 삶들을 만났다. 현재는 제도 밖에서 여성적 읽기-쓰기의 공간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모녀 서사와 디아스포라 서사 등을 주제로 강의와 다매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불편과 불안을 지탱하는 언어에 관심이 많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등을 썼다. (김지승)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현재 동 대학에 출강하며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 ‘반딧불–이미지–말들’(2021), ‘두려운 밤 시간에 너는 나를’(2018), ‘태연한 기울기’(2016), ‘사람, 장소, 생각 그리고 그사이’(2014) 등 다수의 개인전을 통해 작품 세계를 선보였으며, 2017년에는 사진집 『자갈마당』을 공동 출간했다. (전리해)

고통의 시작과 끝이 다른 몸들, 언어 없이 이어받는 기억을 어쩔 줄 모르는 몸들을 만나려고 혼자 떠난 시간들이 지난 몇 년 나를 살려왔다. 몽땅해진 연필과 모서리가 구겨진 수첩, 이제는 쓰지 않는 녹음기가 나를 어렵지 않게 그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제 나는 다른 몸이 되어서 그들에 관한 기억을 고쳐 담는다. 몇몇은 이제 세상에 없는, 80대 여성 노인들의 기록들을 다시 열어볼 일이 가까운 날들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 전리해 작가와의 첫 만남 이후 연쇄적으로 문이 열렸다. 아프리카 흑인 여성작가들의 기록들을 좇다가 연결된 신화와 인터뷰도 어느 새벽 같이 열렸다. 이미지를 듣고, 목소리를 만지고, 문장의 냄새를 맡는 동안 기억이 옮겨왔다. 그것들이 내게 온 것처럼 다시 어딘가로 옮겨가길 바란다. (김지승)

사진은 복잡다단한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사유의 도구였다. 주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지역)과 우리를 둘러싼 숨결(환경)에 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렌즈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왔다. 한 장의 사진 안에 내밀한 시선과 세상의 맨얼굴을 함께 담아내려 애썼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과 보이는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 문득 마주친 낯선 장면들, 그리고 김지승 작가와의 협업은 단순히 보는 행위를 넘어선 어떤 깨달음의 순간으로 이끌었다. (전리해)

2026/02/04
77호

1
Martina Bacigalupo, Gulu Real Art Studio, 2011-13. Courtesy of the artist. Original images are in color. Tina M. Campt, Listening to Image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7, p. 44.
2
Tina M. Campt, Listening to Images, Duke University Press, 2017.
3
1850년경 르 모르누 산 정상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에 관한 노예 후손들의 인터뷰 번역 및 재구성(Managing heritage in a contested space: the case of Le Morne Cultural Landscape in Mauritius). Anneloes Smitsman, “The Maroon Legend of Le Morne Mountain in Mauritius,” Medium, 2022-08-08. 바로가기
4
베트남전 여성 경험자 구술 인터뷰 번역 및 재구성. “Oral History Project Interviews,” The Vietnam Center & Sam Johnson Vietnam Archive, Texas Tech University. 바로가기
5
한국전쟁 여성 민간인 증언 재구성. Korean War Legacy Foundation, Korea’s Place in Teaching Human Geography, National Council for the Social Studies and World History Digital Education Foundation, 2020. 바로가기
6
Hélène Cixous, Correspondance avec le Mur, Galilée, 2017, p. 122.
7
Theresa Hak Kyung Cha: El Castillo, Hand in negativ. (Dictee, page 134), c. 1982; Color postcard, with adhesive tape on paper; postcard: 4 1/8 x 6 in.;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Gift of Reese Willi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