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홍수가 나 강둑이 터져 순식간에 밀려오는 강물처럼, 나는 어떤 방패도 없이 밀려오는 슬픔을 맞으며 서 있다. 그럴 때마다 넓고 희미한 세상 속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순간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슬프고 약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이겨내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내가 어릴 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장담하건대, 청소년 때는 모두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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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쯤의 이야기부터 꺼내고 싶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불렸던 별명 중 하나는 ‘울지마’였는데 아마 하루도 빠짐없이 울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 같이 먹을 친구 한 명 사귀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건, 입학 후 두 계절이 지나갈 때쯤이었다. 함께 밥을 먹었던 아이들이 나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고 점심 종이 울리자마자 다른 애들과 뛰어가는 걸 보았던 날에서 멀지 않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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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만화를 그리고 소비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자 골몰하다보면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교집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 그렇다.
   어린 시절은, 한순간 자아가 비대해지는 시절. 누군가가 날 알아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던 시절.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팽창하던 시절. 나의 비밀을 말하고 상대방의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 신비롭고 귀하던 때.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다는 열망이 싹트던 때.
   그리고 누군가의 창작물을 원 없이 읽고 보고 들었던 때. 함부로 소비하고 비판하고 감상을 내뱉으면서 죄책감 느끼지 않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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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처음으로 만든 이야기는 무엇이었냐면, 어떤 종류의 표절이었다. 그 해 감명 깊게 읽었던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내용과 형식을 바탕으로 내가 설정을 짠 주인공에 개성을 조금 덧붙인 것이었다. 주인공은 나를 닮아 있었지만 나보다 더 멋지고 강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남의 소설을 가져다 따라 쓴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공책에 이야기를 줄줄 쓰고 지도와 인물을 그리며 느꼈던 감각은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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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나는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으로서 만화라는 매체는 나에게 있어 편하고 비교적 쉬웠으며 적합하게 느껴졌다.
   만화 그리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한다며, 인터넷 속 사람들이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를 추천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았고, 내 기억에 의하면 그것이 처음으로 본 퀴어 만화이다. (하지만 분명 어릴 때 모르고 읽었던 수많은 퀴어 서사가 있을 것이다.) 당시 크게 감명 받았던 나는 그 비슷한 창작물을 찾아다녔다.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하던 때에는 국내 퀴어 창작물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과 매체를 뒤적여볼 생각을 못했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그래서 퀴어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리스트가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었다.
   지금은 퀴어한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인들이 주변에 존재한다. 문학, 영화, 웹툰, 만화 등의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며 나는 국내의 퀴어 창작물을 소비하고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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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단편 만화를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려 블로그에 개재하던 때에 나는 자연스럽게 퀴어한 인물에 대해 그리기 시작했다. 퀴어한 인물을 그린다고 해서 만화 내용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만화 속 인물에게 나의 퀴어한 부분을, 혹은 내가 봐왔고 관찰해본 퀴어한 부분을 부여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내 만화가 퀴어한 것이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퀴어의 범주가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다르거나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말했던 것처럼 “누가 퀴어인지, 무엇이 퀴어한지를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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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고 있어』를 만든 건 그동안 그려왔던 단편 만화 중에 ‘퀴어한’ 것들을 모아 편집해서 출간해보자, 는 욕구에서 오게 되었다. (스스로 실천하는 모든 일은 어떤 욕구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책 출간을 위한 펀딩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도대체 책을 누가 사가는지 궁금했다. 독자분 중 퀴어한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퀴어한 사람 중에 만화를 소비하는 사람 비율이 높은 걸까? 퀴어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것인가?
   혹은 퀴어한 이야기인지 모르고 산 사람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후회하거나 내 책을 불태웠을까? 아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아가씨>나 <캐롤> 속 인물이 퀴어한 줄 모르고 자매나 절친한 사이로 봤다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봄이 오고 있어』를 자가출판했던 직후가 내 만화 인생 중에서 중요한 지점이 된 듯하다. 검색하고 후기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내 앞의 많고 복잡한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수십 개의 구덩이와 진흙길을 조금씩 헤쳐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집에 와서 이야기를 만들고. 감이 잡힌다는 감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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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실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다.
   퀴어한 이야기를 만들고 팔면서 이런 것도 모르냐, 고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러도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퀴어 소재로 만화를 그릴 때,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법과 개인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법에 대해. 사람들이 바라는 퀴어 서사가 뭔지. 내가 바라는 퀴어 서사 또한 대체 뭔지. 퀴어한 사람, 혹은 퀴어하지 않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작업하는 내내 그런 것들을 알 수가 없다. 이야기가 공개된 후에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까. 나는 항상 어리둥절하고 자주 두려우며 언제나 아무것도 모른다.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나는 단순하다. 그렇지만 언제나 유의하고자 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가진 인물에 대해 함부로 묘사하는 것을 경계하고 존중한다. 여성 혐오적이거나 퀴어 배제적인 부분 없이 누구나 편하고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길 바라면서. 내가 만든 이야기로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와중에 만화가 재미없으면 큰일이다. 어떻게든 재밌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야기가 공개된 후에는, 독자분의 반응들을 보고 놀라워하거나 납득하거나 재미를 느낀다. 이야기가 누군가의 환경과 가치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고 비판되는 것이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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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두려운 순간이 닥쳐온다. 가끔은 어릴 때처럼 울고 싶다. 이제는 어른다워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 혼란스럽다. 지금은 울지 않고 누군가가 쓴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 개인의 선택과 반응을 본다. 아, 이 인물은 이럴 때 이런 말을 하는구나, 이런 행동을 취하는군, 멋지다, 이상해, 왜 저런 말을 하지, 아, 지리멸렬하다, 정말 비루하다. 내가 하지 않았을 선택을 보며 경탄하고 비판하는 일.
   이야기가 읽히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럴 때는 이야기를 쓴다.
   만든 단편이 쌓이고 쌓여 비공식적인 것을 합해 스무 개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어느 정도 슬픔을 앞두고 그것을 견디는 법을 조금 알게 된 듯하다. 그건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으며 감히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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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는 서사를 펼치는 다양한 매체 중 하나일 뿐이다. 얼마 전 다녔던 단편 소설 워크숍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소설을 쓰는 건 다른 매체로 표현이 안 돼서 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로, 만화로, 영화로 해결이 안 되니까 소설을 쓰는 거죠.”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만화로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만화로 만든다.

   나는 언제나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 만화를 그리는 일을 평생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수록 척박한 시장이다. 만화를 소비하는 사람은 적고 여기서 더 늘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내가 속해 있다고 여기는 이 씬 자체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혀 예측 할 수 없다.
   다만 아직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고 만들어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을 뿐이다. 할 이야기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퀴어 서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소비해주길 바라면서,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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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10여 년 전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일과 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한다. 지금의 난, 그때의 내가 꿈꿨던 어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따라가 있을까. 내 모습 어때 보일까. 궁금하다. 어떤 어른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이제는 예전처럼 많은 것이 궁금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렸고 조금 행복해졌다. 그리고 싶은 만화가 있다.



무지개책갈피(근하)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근하
그래픽노블 작가. 계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습니다. 다양한 출판물에 만화와 삽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20/01/28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