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큐레이션
문학으로 돌보는 계절과 시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어느 날, 웹진 《비유》 편집부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제가 다원예술을 ‘큐레이팅’(기획)하고 이에 대한 글을 의뢰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글을 의뢰받았습니다. 메일 본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글과 글 사이를 표류하며 제가 느낀 것은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모니터 안에서 변화하는 계절과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무언가를 ‘돌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큐레이팅은 흔히 선별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어원은 돌보는 것에 있습니다. 라틴어 ‘cūrō’는 ‘돌보다’(care for)라는 뜻이었고, 중세 시대에 큐레이터(curator)는 미성년자, 아픈 이의 법적 보호자를, 후에는 박물관에서 예술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의 뜻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해석은 “to refresh oneself with food, sleep, etc.”와 “to tend (plants or animals)”입니다.2) 먹고 자는 것처럼, 돌보는 것은 계속되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마치 계절이 순환하며 자신을 혹은 (식물과 동물을 포함해서) 서로를 돌보듯, 큐레이팅은 성장과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불안을 마주해야 하는 긴 시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비유》에 담긴 계절과 시간의 변화, 그리고 《비유》가 문학을 통해 제안하고자 했던 두터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획의 말과 에디토리얼을 다시 읽으며,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과 돌보고자 했던 마음을 아래와 같이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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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기 편집위원, 「기획의 말」 click
② 김지은, 「기획의 말」 click
③ 김나영, 「문학은 어쩌면…」click
④ 김중일,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click
⑤ 장은정, 「약 4분의 1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요」 click
⑥ 장은정, 「문학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click
⑦ 고영직, 「푸르른 오월입니다.」 click
⑧ 황현진, 「언제나 36.5도로 완성되는 기적 같은 삶」 click
⑨ 장은정, 「폭설의 밤에 달리는 방법」 click
⑩ 김나영, 「돌봄의 계절」 click
⑪ 이종산, 「지붕 없는 곳에서 잠드는 동물들」 click
⑫ 하재연, 「빙하가 꾸는 꿈」 click
⑬ 하재연, 「튤립이나 히아신스, 아네모네 같은」 click
⑭ 이종산, 「계절을 말하는 낱말들」 click
⑮ 김유진, 「바람의 물리학」 click
⑯ 하재연, 「안녕을 묻습니다」 click
⑰ 소영현, 「돌봄의 온도」 click
⑱ 소영현, 「곁에, 함께」 click
⑲ 서효인,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click
‘큐레이션’ 원고…… 어떤 글을 써야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각예술/다원예술 큐레이터로 몇 년간 일을 해오고 있긴 하지만 문학 웹진에서 ‘큐레이션’ 원고가 어떤 글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전화로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글을 어떻게 써야할지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몇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왔고 12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창밖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실내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늦여름에 받았던 메일을 다시 열어보았습니다. ‘큐레이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비유》의 여러 글을 읽고 그 안에서 관계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 미션은 그동안 제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인상 깊게 읽었던 한 문장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동시대의 유명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2015년에 쓰고 2020년에 국문으로 번역된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터 되기 Ways of Curating』에 실린 구절입니다.《비유》의 ‘큐레이션’은 《비유》에 게재되었던 지난 글 및 프로젝트 중에서 일부를 주제별로 묶어서 톺아보는 자리입니다. 필진에 따라 작품을 보는 각기 다른 관점을 제안하고, 분기별로 업데이트됩니다. 기존 원고 중 최소 두 편 이상을 엮어 다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안해주시면 됩니다. 글의 형식은 자유롭게 구성하시되, 웹진 상에서 원고 하단에 ‘관련 작품 바로가기’ 링크가 덧붙여진다는 점만 참고해주시면 되고요. 발행된 원고의 일부분을 발췌 인용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어쩌면 편집부가 제게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지도 제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글과 글을 연결하고, 글과 독자, 서로 다른 필자가 《비유》 안에서 다시 네트워킹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새로운 지도 제작을 위해 저는 먼저 《비유》 각 호의 기획의도를 열심히 살펴봅니다. 하지만 각 호의 목적과 의도를 파헤치려는 제 탐험은 칠십 여개의 에디토리얼과 연결된 수십 편의 글을 살피면서, 결국 길을 잃고 맙니다.큐레이팅의 기본은 독립된 각각의 요소들을 연결하고,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네트워킹하는 것이다. 큐레이팅은 문화의 교류를 시도하는 것이다. 큐레이팅은 도시, 사람, 그리고 세계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여는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다.1)
글과 글 사이를 표류하며 제가 느낀 것은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모니터 안에서 변화하는 계절과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무언가를 ‘돌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큐레이팅은 흔히 선별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어원은 돌보는 것에 있습니다. 라틴어 ‘cūrō’는 ‘돌보다’(care for)라는 뜻이었고, 중세 시대에 큐레이터(curator)는 미성년자, 아픈 이의 법적 보호자를, 후에는 박물관에서 예술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의 뜻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해석은 “to refresh oneself with food, sleep, etc.”와 “to tend (plants or animals)”입니다.2) 먹고 자는 것처럼, 돌보는 것은 계속되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마치 계절이 순환하며 자신을 혹은 (식물과 동물을 포함해서) 서로를 돌보듯, 큐레이팅은 성장과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불안을 마주해야 하는 긴 시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비유》에 담긴 계절과 시간의 변화, 그리고 《비유》가 문학을 통해 제안하고자 했던 두터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획의 말과 에디토리얼을 다시 읽으며,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과 돌보고자 했던 마음을 아래와 같이 꺼내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문학인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언젠가는 둑이 툭 터져, 흘러야 마땅했던 물결처럼 작가들이 밀려오는 상상을 합니다. 《비유》는 문학으로 함께 교류하고 공감하는 모든 일들을 만들어갑니다.—1기 편집위원, 「기획의 말」 부분(2018년 1월호)
문학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 서서 달라지는 문학의 체온을 나누고 싶습니다. 당연하게도 작품은 저마다 다른 온기를 가지고 있겠지요. 조그만 화면의 스크롤을 만지면 그 수은주의 고요한 오르내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처 없는 변온동물 같은 문학의 생태계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를 바랍니다.—김지은, 「기획의 말」 부분(2018년 2월호)
나무마다 짙은 초록의 이파리가 빼곡히 매달리는, 새로운 계절의 초입입니다. 울창한 숲속 그늘에 누워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를 상상해 봅니다. 때로는 그런 평안한 기운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을 채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눈과 마음은 뙤약볕에 선 듯 어렵습니다. 당장 자신이 누릴 그늘 한 점이 없어도 흔쾌히 거리로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 문학은 어쩌면 그늘 한 점 없는 거리에서 나무 그늘을 상상하고, 나무 그늘에서도 뙤약볕의 어떤 얼굴들을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김나영, 「문학은 어쩌면…」 부분(2018년 7월호)
정류장까지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수가 어느 때보다 짙푸른 계절입니다. 폭염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불현듯 폭설 속의 눈사람을 떠올립니다. (…) 몸 없이도 사철 두 팔은 바람 속에 남아 우리를 안아주고, 두 다리는 땅속에 남아 지구를 굴리며 우리를 찾아오는 눈사람에 대한 상상. 이제 여기 없는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세상 곳곳의 명백한 어떤 부재가 현재 속에서 몸을 만들고 바람을 만들고 깊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문학을 상상합니다.—김중일,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부분(2018년 8월호)
약 4분의 1 정도밖에 남지 있지 않다고 해요. 인류 문명이 발달한 이래 한 번도 녹지 않았던 빙하가 녹고 있다고 합니다. 1980년대와 비교하면 현재 약 4분의 1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 기후처럼 모두가 포함되는 거대한 이야기로부터 낱낱이 쪼개어지는 문학에 대해서도 상상합니다.—장은정, 「약 4분의 1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요」 부분(2018년 10월호)
결국은 4월입니다. 화창한 봄날일수록 더욱 슬퍼지는 4월, 어김없이 바다를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장은정, 「문학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부분(2019년 4월호)
푸르른 오월입니다. 지금, 당신은, 푸르른 오월의 봄날을 한껏 즐기고 계신가요? 무너지지 않는 일상을 위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계신가요? 그런 경이로움의 감각과 감정은 다른 시간을 상상하게 하고, 직접 그런 시간을 살게 합니다. 곧 무성한 여름이 옵니다. 오월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줄 알고, 사람 사는 도리를 생각할 줄 아는 겸허한 시심(詩心)을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고영직, 「푸르른 오월입니다.」 부분(2019년 6월호)
공공장소에서 체온을 체크할 때마다 긴장하곤 했습니다. 36.5도의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큰 기적인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항상성을 갖기란 그토록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36.5도로 완성되는 삶, 그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지속에 대한 의지 아닐까요.—황현진, 「언제나 36.5도로 완성되는 기적 같은 삶」 부분(2020년 5월호)
폭설이 내렸습니다. 따뜻한 실내에서 내다보는 눈은 아름답지만, 기후 위기라고 했습니다.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냉기를 가둬두는 제트기류가 하강하면서 몰아닥친 폭설이라고 합니다. 아름답다고 감탄하기엔 두렵습니다. 기후 난민이라는 단어가 더이상 낯설지 않은 현재, 코로나가 닥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일상에서 실감합니다.—장은정, 「폭설의 밤에 달리는 방법」 부분(2021년 2월호)
입춘이 지났습니다. ‘봄’이라는 말은 참 좋지요. 작게 발음해보는 일만으로도 벌써 주위에 환하게 온기가 도는 것 같고요. 한 연두와 또 한 연두의 기척이 작은 발소리처럼 다가오는 것도 같고요. 우리가 오래 경험한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잊지 않는다면,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느 틈엔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마주 ‘봄’의 감격을 선사할 것입니다. 시도 소설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도 그런 만남을 닮은 것 같습니다.—김나영, 「돌봄의 계절」 부분(2021년 3월호)
올여름, 캐나다에서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는 무거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상기후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진 2021년의 여름날, 길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지붕 없는 곳에서 잠드는 동물들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모쪼록 모두 무사히 이 여름 나시기를. 그럼 이만 총총.—이종산, 「지붕 없는 곳에서 잠드는 동물들」 부분(2021년 8월호)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온 빙하에 대하여, 모두 녹아 사라지기 직전의 빙하가 꾸는 꿈에 대하여 상상해봅니다. 인간이 시를 쓰고 나누는 것은, 차갑고 고통스럽게 빛나는 이 꿈의 이미지를 기록하여 전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하재연, 「빙하가 꾸는 꿈」 부분(2021년 9월호)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 튤립이나 히아신스, 아네모네 같은 구근들은 가을 구근으로 분류되곤 합니다. 가을에 심어두었다 찬 겨울을 보내고 봄에 싹트는 초록 잎들에서 꽃봉오리가 시작되지요. 해를 넘겼으니 늦은 셈이지만, 좀 늦더라도 봄꽃은 필 테니까요. 조그만 알뿌리들을 흙속에 도도록하게 묻어두고 추위를 함께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새 글들을 읽습니다.—하재연, 「튤립이나 히아신스, 아네모네 같은」 부분(2022년 2월호)
계절이 변하는 나날이어서인지 이번호 ‘…’(쓰다)의 원고에는 유독 날씨를 이루는 낱말이 많이 보입니다.—이종산, 「계절을 말하는 낱말들」 부분(2022년 4월호)
매번 돌아오는 사계절이 선사하듯 반복에서 안정감을 얻으면 좋으련만 정체 속에서 반복이란 퇴보에 가까워 보입니다. 반복과 변화, 퇴보와 진보, 체념과 희망의 이분법이 도돌이표로 흐르거나 시소 타기를 끝내지 않는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새바람이 불기를 기다리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김유진, 「바람의 물리학」 부분(2022년 7월호)
지구의 기온은 점점 높아지고, 폭우에 나라 곳곳이 패고 잠겼습니다. 언젠가부터 가족과 지인들의 안부를 묻는 일이 더욱 자주 생기고, 예전보다 그 일에 훨씬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 독자 여러분은 안녕하신지요. 부디 안녕하시기를요.—하재연, 「안녕을 묻습니다」 부분(2022년 9월호)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다는 의미의 ‘돌보다’라는 말과 노동이나 서비스와 같은 말과 함께 놓여야 덜 어색해 보였던 ‘돌봄’이라는 말 사이의 간극이 단박에 좁혀졌지요. 돌봄 바깥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면서, 따지자면 저 말들이 언제나 겹쳐진 지대를 가리킨다는 것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말에도 온도가 있다면 돌봄이라는 말에는 체온의 미지근함이 배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요.—소영현, 「돌봄의 온도」 부분(2022년 12월호)
《비유》에 실린 글들을 빌려 말해보자면, ‘서로의 입속에 도토리를 심는 마음’이나, ‘일렁이는 빛과 철썩대는 소리로 상상되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물속 같은 온기로, 곁에, 함께 있는 일이야말로 언제나 해야 할 문학의 일입니다.—소영현, 「곁에, 함께」 부분(2023년 3월호)
그렇습니다. 웹진 《비유》의 기획의 글과 에디토리얼은 계절의 변화와 순환에 대한 예민한 목소리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 안부를 묻기도 했고, 코로나와 기후위기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해 문학으로 응답하기도 합니다. “문학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 서서 달라지는 문학의 체온을 나누고 싶습니다.”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문학의 지속성을 믿습니다. “36.5도의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큰 기적인지.” 우리의 항상성을 생각하며, 여전히 문학과 예술의 항상성과 역할을 생각합니다. “폭설이 내렸습니다. 따뜻한 실내에서 내다보는 눈은 아름답지만, 기후 위기라고 했습니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공연이든, 현실과 분리된 순수한 아름다움은 불가능합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면 돌봄이라는 말에는 체온의 미지근함이 배어 있지 않을까.” 이 글들은 문학과 돌봄의 본질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올해 여름은 무척이나 길었고, 그만큼 덥기도 더웠다. 시간이 지나면 여름 지나 가을이 오고 무쌍했던 더위도 스르르 물러날 것임을 우리는 알지만 한창 더울 때면 이러다 영영 여름이지 않을까 걱정인데, 마냥 흰소리만은 아닌 게 우리가 자초한 기후 위기에 속수무책일 미래를 생각하면 이 걱정은 실존에 가깝다.—서효인,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부분(2024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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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기 편집위원, 「기획의 말」 click
② 김지은, 「기획의 말」 click
③ 김나영, 「문학은 어쩌면…」click
④ 김중일,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click
⑤ 장은정, 「약 4분의 1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요」 click
⑥ 장은정, 「문학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click
⑦ 고영직, 「푸르른 오월입니다.」 click
⑧ 황현진, 「언제나 36.5도로 완성되는 기적 같은 삶」 click
⑨ 장은정, 「폭설의 밤에 달리는 방법」 click
⑩ 김나영, 「돌봄의 계절」 click
⑪ 이종산, 「지붕 없는 곳에서 잠드는 동물들」 click
⑫ 하재연, 「빙하가 꾸는 꿈」 click
⑬ 하재연, 「튤립이나 히아신스, 아네모네 같은」 click
⑭ 이종산, 「계절을 말하는 낱말들」 click
⑮ 김유진, 「바람의 물리학」 click
⑯ 하재연, 「안녕을 묻습니다」 click
⑰ 소영현, 「돌봄의 온도」 click
⑱ 소영현, 「곁에, 함께」 click
⑲ 서효인,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click
성용희
성용희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다원예술 등을 기획하고 있다. 최근 기획으로는 다원예술 2024 ‘우주 엘리베이터’,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다원예술 2020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등이 있다.
2025/04/02
- 1
-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터 되기 Ways of Curating』, 양지윤 옮김, 아트북프레스, 2020, 9쪽.
- 2
- Peter G. W. Glare, Oxford Latin Dictionary, Clarendon Press, 1982, pp. 473-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