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일
   2023년 1월 31일,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지연돼 손실을 보는 시민들이야말로 사회적 약자이므로 전장연 측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이 한 정치인의 의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전장연 시위를 보도하는 기사에 덧붙여진 시민들의 의견들을 인용해보자. “서울 서대문구에서 경기 용인시로 출근한 직장인 이모(35)씨는 “집에서 명동성당 사거리까지 버스로 20분이면 가는데, 사람이 몰리며 버스 10대를 그냥 보내니 50분이나 걸렸다”며 “일하기 전부터 체력이 다 고갈된 느낌이라, 출근길 시위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직장인 조모(41)씨는 “자신들의 불편함을 호소하려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1)
   작년 7월, 청소 노동자들의 학내 시위로 인한 ‘소음’이 수업을 들을 학습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연세대 재학생 세 명은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청소 노동자들의 집회 방법과 소음 측정 자료와 사진 등을 분석했을 때 수업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본 사건은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교수님의 ‘말씀’을 들리지 않게 하는 ‘소음’이라고 여기는 여론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형성된 공감과 지지가 아니다. 손글씨로 쓴 대자보와 메모지 수십 장이 붙은 덕성여대 캠퍼스에는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판하는 문구로 가득했다. “학생볼모 하청파업 반대한다 철회하라” “노동자 out” 등의 문구들은 덕성여대 총장이 청소 노동자 임금을 동결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불만이 대학이 아닌 노동자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출근길에 시위를 마주한 시민들의 불만과 다르지 않다.
   이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느꼈던 서늘함과는 별개로 이런 일들을 ‘혐오’로 묶어 부르는 것은 더이상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전장연은 오히려 사회적 ‘강자’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한 명의 정치인 때문일 리 없다.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직장인과 학습에 열중하려는 학생들 모두 자신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쁜’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결론 내리면 마음이 잠깐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이 잦아들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기사에 인용된 서울 서대문구에서 경기 용인시로 출근하는 직장인 이모(35)씨와 서울 송파구에 사는 직장인 조모(41)씨는 무엇을 사회적 불합리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그들이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떻게 대처할까? 무언가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라고 여기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경험해본 적이 있을까? 그리고 질문들은 이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요즘 나는 왜 이런 것이 궁금할까?


   연대 실패
   아마도 내게 2023년 3월이라는 시간은 페미니즘 리부트로 시작되어 미투 운동을 거치고 팬데믹 시대가 여전히 지속 중인 현재 진행형의 시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돌봄 담론이 활발한 이때, 최근 7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내게 남은 감각으로 더듬어본다. 2016년 즈음, 젠더 폭력에 대한 거의 동시적인 자각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발견에 대한 놀라움과 열띤 환호가 있었다. 2019년이 저물어갈 무렵엔 왜 어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한 반추와 성찰에 도달했다. 이제 막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불화를 더욱 전면적으로 수용하면서 기존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바꿔보는 경험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바로 그 시기에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당신은 줌(zoom) 프로그램으로 확산되는 사회 운동을 상상할 수 있는가? 각종 온라인 매체에서 해시태그를 타고 시작된 젠더 폭력 말하기가 크고 작은 오프라인 연대체와 모임들로 이어진 것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지금 남은 것이 어정쩡하게 방치된 불화뿐이라 한들, 모이지 않았다면 그런 갈등은 애초에 발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도래는 불화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감염의 위험 속에서 각자 빠르게 흩어지게 만들었다. 2020년만 해도 코로나가 조금 잦아들면 그때 보자는 인사를 아마 당신도 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만남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우리가 지켜낸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출근길에 전장연 시위를 만나 불만을 토로하는 시민과 학습권을 침해받았다고 항의하는 학생들이, 2017년 주말마다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발간된 조문영의 『빈곤 과정』(글항아리, 2022)에서는 한 세기 전 유럽에서 형성된 복지 국가와 달리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 국가에서는 가족 중심 생존 전략이 곧 발전주의의 적극적 지원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복지 정책의 역할로 기능했음을 통찰한다. 21세기 초반 뒤늦게 등장한 국민기초생활법의 제정이 곧바로 개정 운동으로 이어져야만 했던 아이러니한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가족 중심의 생존 이외에는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우리 사회에 ‘사회적 연대’는 이제 불가능한 꿈의 언어2)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 중 하나가 다나카 다쿠지의 『빈곤과 공화국―사회적 연대의 탄생』(문학동네, 2014)에 놓여있다.
   다나카 다쿠지는 1970년대에 이르러 서구의 국내 정치에서 복지 국가 정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80~90년대에 이르러 그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마다 다양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목적은 복지 국가의 위기를 “제도적 차원이 아닌 사상적 차원에서 검토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에 도달하기 위해 복지 국가를 떠받들고 있었던 ‘연대’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 개념이 왜 더이상 그 실효성을 획득하기 어렵게 된 것인지를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박해남 역자가 이 책을 옮기게 된 우리 사회의 맥락이다.
   이 책이 2014년 9월에 출간되었음을 염두에 두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페미니즘 리부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시기다. IMF 구제 금융 사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 용산 참사를 겪으며 복지 국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으나 옮긴이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달성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다. 당연히 정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으나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개별 가족의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분배의 복지 제도가 구축된 시간이 오래되었기에3) 최소한의 생계도 어려워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연대가 부족하다는 점을 판단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를 앞두고 우리는 ‘국가의 실패’ 혹은 ‘정치의 실패’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문제, 즉 연대의 실패 혹은 ‘사회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4)


   눌린 자리
   여기까지 읽고 보면 2014년에 선언된 ‘연대 실패’와 2023년에 예견되는 불가능한 꿈의 언어로서의 ‘사회적 연대’는 그 사이에 있었던 촛불 광장과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 시기가 잠시 꿈꿨던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열렬한 상상과 곧이어 겪게 될 불화가 처한 조건을 앞뒤로 설명해주는 듯도 하다. 미투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등장한 동시적 현상이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이슈는 젠더 폭력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 그동안 한국 사회에 축적된 혈연 가족 중심의 국가 체제하에서 주도된 가부장적 공동체와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분할을 이해하고 재사유하는 일로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젠더 폭력에 대한 비판 담론이 빠르게 ‘위계’ 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로 전환되면서 위계 구조에 입각한 ‘당사자성’ 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다르게 바꿔나가려는 사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2020년 팬데믹 이후, 비평장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하다. 팬데믹을 기반으로 한 기후 위기와 비인간에 대한 재인식, 인간 사회 속에서의 돌봄, 그리고 2018년부터 본격화된 에세이 열풍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비평 독자로서 나는 이 세 가지 흐름이 각자의 방향의 세밀함을 좇느라 서로의 주제를 상호 간섭하는 일에 소홀하면서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담론 사이의 연속성을 억누르는 ‘의식적’ 단절이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여겨졌다. 하지만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부터 미투 운동을 통과하며 전면적으로 출현했다고 여겨진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독자’는 2018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에세이 열풍과는 과연 무관한 것일까?
   최근 소영현은 「에세이, 레퓨지아」에서 에세이 열풍이 독자의 요구에 대한 출판 시장의 대응임을 인지하는 동시에 자신의 감정적 운명을 혼자서 책임지기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원 서사인 자가 심리 치료의 기만일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거의 스무 권에 가까운 책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시장성이나 자기 계발 서사라는 평가만으로는 충분히 환원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을 포착한다. 당사자성에 입각한 최근의 일인칭 쓰기-기록 형식으로서의 에세이들이 어쩌면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는 삶과 아카이브 사이의 간격, 즉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는 그곳을 구현하려는 열망”5)이 아닌지 섬세히 조망할 때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동료 시민의 말들을 경청하는 ‘시민-독자’로서의 비평가이다.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문학장의 가장 큰 변화를 독자 중심주의로 보면서도 이 시기에 형성된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독자’가 그저 소비자 운동으로 안착하게 되었다고 평가함으로써 그 현재성을 완전히 종결시켜버리는 논의6)로부터 분명히 거리를 둘 뿐 아니라, 최근의 에세이들이 “자기 진실을 생산하고 그 진실을 사적 자원화하게 만드는 자아 생산 장치”7)로 기능한다고 장황하게 비판하면서도 단 한 권의 책도 직접 분석하지 않은 채 최근 자신이 출간한 책도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멀지 않다고 고백하는 방식으로 자기기만을 살며시 비켜가고자 하는 태도와도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나는 앞서 조문영과 박해남의 논의를 이어받아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를 국가나 정치 단위의 실패로 보기 이전에 연대 실패이자 사회의 실패로 바라보기를 제안했다. 이때의 연대 실패 혹은 사회의 실패란 좀더 구체적으로 대중교통 출근길이든 수업을 듣기 위한 강의실이든 그곳으로 직접 찾아와 목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동료 시민의 말들을 ‘소음’이자 ‘방해’로, 심지어는 ‘피해’로 평가하면서 기어코 ‘듣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읽기와 쓰기의 현장도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광장 중 하나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듣기’ 행위야말로 어떤 말들을 ‘들을 만한 것’으로 여길 것인지 결정하는 연대와 사회의 장소가 아닐까.


   이전의 듣기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야 할까? 점차 더 치열해지기에 그 잔혹함마저 쉽게 내면화하게 되는 경쟁 체제하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워 모두의 목소리를 지금 당장 전부 듣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말들로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을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1)를 읽으며 이어갈 수 있었다. 책의 앞날개에는 저자 소개 대신에 “말한 사람”에 해당하는 열 명의 이름과 “듣고 적은 사람”으로 소개된 열한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읽고 쓰기 이전에 무려 스물한 명이 말하고 들으면서 대화를 나눈 기록이며, 들은 것을 자신의 관점에 맞춰 모두 정리하여 ‘대신’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기보다 (인터뷰 내용을 다듬는 과정이 수반되었더라도) 독자들이 말하는 이들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내게는 최근 그 어떤 출판물보다 강렬한 읽기 경험을 주었다.
   이 인터뷰가 2020년 10월 29일부터 2021년 11월 1일까지 이루어졌다고 명시된 점을 고려할 때, 이 대화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마스크를 쓴 채 부단히 말을 걸고 말하며 들으려고 했던 기록임을 유추할 수 있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대문로5가 양동 11·12지구 재개발로 주민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동 쪽방촌을 오랫동안 지키며 살아온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고자” 모인 이들은 “홈리스 자신의 입으로 자기 경험과 생애 기억을 말하도록 돕고, 그간 겪어 온 다양한 어려움들(빈곤, 탈가정, 관계 단절, 질병, 중독, 노숙, 범죄, 낙인, 자괴 등)이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내며, 홈리스 당사자가 직접 자신들을 규정하는 국가·자본·사회의 관점과 정책에 대항하는 서사를 생산하도록 한다는 것”8)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이 목적이 단숨에 달성되는 것일 리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해 들려준 여덟 명은 현재 ‘쪽방촌 주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왔다. 한 명의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적은 사람들이 덧붙인 짧은 후기엔 자신들이 들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에세이에서 저자들이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스스로를 이루는 이질적 요소들까지도 적극적으로 탐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로 한 이들은 가명으로 인터뷰하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힌다. 소득이 잡히면 수급비에서 차감될 수 있고 ‘부정 수급’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용이 주민들의 수급 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듣고 적는 이들은 한껏 긴장하고 동시에 현재의 수급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내려는 두 가지의 어려운 목표 속에서 분투했다.
   또한 기록팀은 쪽방촌 주민들을 향한 편견의 눈초리들로부터 ‘들은 것’을 지켜낼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놀라울 만큼 부지런한 김강태의 삶을 듣고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것이 혹여 가난하지만 착한 빈민을 강조하거나, 가난을 도덕화하는 말로 들릴까 걱정스러웠다.”9)고 고백하거나, 삶에서 좋았던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문형국이 오히려 “끈질기게 일하질 못했어”라고 후회할 때, 이 자책을 어떻게 옮겨 써야 하나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니 이 구술 프로젝트는 “홈리스 당사자가 직접 자신들을 규정하는 국가·자본·사회의 관점과 정책에 대항하는 서사를 생산하도록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정작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것들을 어떻게 대항 서사로 만들 것인지를 고민한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스물 한명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더불어 고민하는 비평적 작업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고립
   만일 2018년부터 시작된 에세이 열풍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출현한 ‘시민-독자’들이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기 시작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에세이 열풍 못지않게 비슷한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인터뷰 기록들 역시 ‘시민-독자’들이 듣고 말하는 동안 대화 속에서 겪게 되는 역동성을 기록하려는 열망으로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1)뿐 아니라 선감학원의 피해 생존자를 만나 듣게 된 말들을 기록한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오월의봄, 2019), 과로사와 과로 자살 유가족들의 말이 담긴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나름북스, 2021), 김용균의 상사, 동료, 유가족의 말을 기록한 『김용균, 김용균들』(오월의봄, 2022)과 같은 책들은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숱한 어긋남을 애써 말끔히 봉합하는 대신 그 벌어진 틈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읽는’ 자들을 ‘듣는’ 자들로 만든다.
   최근 오혜진은 김병운의 소설에 나타난 ‘우리’를 분석하는 대목에서 보통 ‘연대(蓮帶)’가 이미 서로의 같음과 닮음을 전제하는 ‘공통의 것’으로 간주되기에 자기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것과 달리 ‘연루(連累)’는 서로가 서로에게 “볼모가 되는 방식”10)으로 공통적인 것이 탄생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고 구분한다. 이 구분은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스캔들 이후 동족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퀴어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것이다. 물론 ‘연루’는 페미니즘 리부트 당시 젠더적 한계로 인해 자신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연대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겸손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공동체 사고를 요청하며 이미 적극적으로 소환되었던 개념이기도 하다. 즉 ‘연루되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사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매번 다른 구체성을 띠고 등장하는 개념이므로 연루가 요청되는 서로 다른 위치성이야말로 따져보아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당사자성이 곧 윤리적 위치를 담보하지 않음을, 무해함이라는 용어에 그 차이와 불화를 멸균하려는 안전 감각이 숨어있지 않은지에 대한 비판으로 비평 담론이 뜨거운 바로 지금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정말 시급한 문제가 ‘당사자성’과 ‘무해함’일까? 글을 열며, 가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복지 제도로 인해 한국 사회는 제도적 안전망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 자체가 극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청소 노동자의 말이든, 전장연의 말이든, 누군가가 동료 시민으로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사회적 요구 자체를 ‘피해’라고 여기는 연대 실패의 사회를 지속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촉진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어떤 계층에 속해 있든 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극한의 경쟁 체제 하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은 누구의 말도 듣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비평은 이 불안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며 각자 누구의 말을 가장 중요하게 듣고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다음의 말은 ‘연대 실패’의 사회가 꼭 들어야 할 말 같다.

   어쨌든 지금 쪽방은 구조적 열악함 때문에 오히려 교류가 가능한 측면이 있어요. 안에서 문을 잠그면 열어 볼 수 없는 아파트 형태로 높이 쌓이게 된다면, 고립이 강화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사람들이 문 열고 나와서 얘기할 수 있는 광장 같은 공간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돼요. 또 주민들이 서비스 수혜자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고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동네가 되어야죠. 동자동만 가봐도 쪽방 상담소가 우람하게 지어져 있지만 우리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정말 없거든요.11)

   이동현 활동가는 양동에 만약 임대 주택이 지어진다면 고층 빌딩 형태가 될 것이고, 그 빌딩에 현재 쪽방촌 주민들이 입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다면 더 나은 집에서 각자 더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쪽방촌 주민 ‘당사자’의 말들로 축약하지 말자. 쪽방촌에 살고 있지 않은 이들 역시 바깥에서 열 수 없는 문들 앞에 고립되어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동현 활동가 인터뷰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집만 좋아진다고 그냥 모든 게 좋아지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쪽방촌 주민들의 싸움은 곧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듣기’ 역시 하나의 사회적 조건이어서 각자에게 듣는 존재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비평은 그런 장소인가? 현재 비평은 누구의 장소인가? 이 일이 단 한 편의 글로, 몇 명의 비평가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장은정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오래 써 왔습니다. 이제는 문학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비평으로 쓰면서 문학이 아니라고 여겨진 것들과 연결되려고 합니다.

2023/02/28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