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발라클라바 전투
색동저고리
여느 때처럼 여자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저녁이었어. 퇴근하는 직장인들 틈에서 나는 여자 친구의 집으로 출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예술하시는 분 아니세요? 라고 횡단보도에서 누군가 물어왔어. 사이비 종교가 틀림없었고 나는 웃으면서 그런 거 안 합니다, 라고 대답했지. 그런데도 예술하시는 분 같은데, 하면서 나를 가로막는 거야.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나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고 있었어.
내 차림이 웃기긴 했지. 핫핑크색 후드티에 네온그린색 패딩, 모자는 새파란 색 발라클라바를 쓰고 있었어.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보이지는 않을 거였어. 왜 그렇게 색깔이 많은 옷을 입냐고 하면, 이런 옷들만 세일을 하기 때문이야. 색이 점잖고 디자인이 예쁜 옷들은 세일이 오기 전에 모조리 품절되고, 이렇게 요란한 것들만 매대에 남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
십 년 전 내가 시인이 되었을 때 '이제 내가 좋아하는 옷들은 더이상 살 수 없겠구나, 나의 욕심을 모두 내려놓아야겠구나' 다짐했을 때가 잠시 떠올랐어. 그 이후에는 이렇게 이상한 옷들을 입으면서 욕망을 대신하고 있지. 해결되진 않는 거야……
2019년 봄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나는 전화를 걸고 있다. "아버지, 저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순례길 좀 다녀오겠습니다."
"너나 나나 제명에는 못 살겠구나……"
돌연 휴학계를 내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착한 학부생은 혼자 있고 싶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최서단까지 걸어가는, 커피와 토르티야, 맥주와 타파스로 배를 채우는 이 여행 상품은 한국의 예능에도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여행객의 삼십 퍼센트는 한국인. 저마다 인생의 분기점을 맞이했다. 취업과 은퇴. 졸업과 결혼. 첫사랑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일이 죽기보다 무서워 도망쳐 온 나.
신을 찾으러 오는 여행객은 극소수. 저렴한 물가와 도보 효율에 매혹돼 특별한 바캉스를 보내러 온 이들에게, 성 야곱의 유해가 묻혀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과 포도주가 수도꼭지에서 쏟아져나오는 이라체 수도원은 같은 종류의 즐길 거리일 뿐. 매일 삼십 킬로를 걸어 이 주 만에 완주를 목표하는 한국인과, 한 마을에 일주일 동안 죽치며 친구를 사귀는 유러피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들은 한국의 노년 커플. 경치 좋은 언덕에 돗자리를 펴고 오카리나를 불고 있다. 방목 중이던 소들이 하나씩 내려와 그들 주변에 앉는다. 선선한 바람이 불자 오카리나 멜로디, 소들이 목에 달고 있는 방울 소리, 잔디들끼리 스치며 내는 풀피리 소리가 합쳐져 음악을 이룬다. 나는 쌓여 있는 카톡에 답장할 말을 떠올린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아." 다시 언덕을 바라본다. 저 사람은 정말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다. 이 사랑은 정말 아무에게도.
1854년 10월 21일 오전 9시
크림반도의 남쪽 마을 발라클라바. 여느 때라면 오스만 군은 영국 군의 무능함에 관해, 영국 군은 오스만 군의 촌스러움에 관해 떠들고 있을, 연합군에게는 한없이 게을러도 좋은 아침 시간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이 연합해 개시한 이 전쟁은, 크림반도의 수도 세바스토폴을 성공적으로 포위하며 승기를 잡은 듯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예외가 된바, 오전 6시부터 시작된 '역사상 최악의 졸전'─발라클라바 전투는 벌써 막을 내린 후였다.
버려진 군마가 시체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영국 군의 얼굴을 덮고 있는 복면을.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겪을 손주를 걱정한 할머니가 털실로 짜주었던.
경기병 여단의 돌격
오전 6시. 전장을 내다보고 있던 영국 군 총사령관 래글런 경은 명령을 내린다. 러시아 군이 빼앗아간 우리 군의 대포를 탈환하라. 놀런 대위은 명령서를 받아들고 전장으로 질주한다. 혈기왕성한 서른여섯의 대위는 지휘관 카디건 경에게 대포를 탈환하라 다그친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 전장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놀런은 눈을 부라리며 카디건의 얼굴 바로 옆을 검지로 쏘아붙인다. 래글런이 말한 곳이 아니다. 러시아 군의 대포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계곡이다.
결국 카디건은 명령을 내린다. 서서히 진격하라. 무시하고 재빠르게 말을 달린 놀런은 대포에 맞아 가장 먼저 전사한다. 뒤따르던 경기병 673명 중 118명이 전사, 160명 부상, 군마 375필 사망. 십구 분이 걸린다. 195명이 말을 타고 복귀한다. 말과 다리와 팔을 잃은 경기병이 하나씩 걸어온다. 카디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직접 칼을 휘두르는 건 지휘관의 품위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그는 가장 먼저 후퇴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미친 짓이다. 프랑스 군 장군이 고개를 젓는다. 전쟁에선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총사령관 래글런은 받아친다. 래글런은 이백사십육 일 뒤 전후 우울증으로 사망한다. 영국은 매관매직 제도를 폐지한다. 카디건은 무모한 명령을 따른 용맹한 군인으로 추앙받는다. 십오 년 후 말을 타고 산책하다 떨어져 죽는다.
낡은 군복을 입고 당나귀를 탄 부대는
절대로 지휘 못 하지. 카디건 경은 매년 만 파운드를 들여 새로운 군복을 병사들에게 입혔다. 브이 자로 깊게 파인, 앞섶을 단추로 여밀 수 있는 스웨터 '카디건'을 만들었다. 잘생긴 장교들에게 입혀 놓고 사진을 찍는 게 취미. 흑백 사진 속에서도 미남들의 견장, 훈장, 건치는 반짝였다. 자신의 샴페인 파티에서 놀런 대위가 독일 맥주를 마신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내렸다.
발라클라바 전투의 총사령관, 래글런 경은 젊은 시절 오른쪽 팔을 잃었다. 코트를 입으면 오른쪽 소매가 휘적거리는 모습이 별로였다. 그는 목선에서부터 소매가 시작하는 코트를 디자인했다. '래글런' 코트. 휘적거리지 않고 어깨의 활동성이 좋았다.
1854년 10월 25일 오후 12시 발라클라바. 영국 군 막사. 부상병의 반쯤 잘린 팔을 다른 부상병이 마저 톱질하고 있다. 장교들은 서로에게 어울리는 휴가용 중절모를 골라주고 있다. 코즈웨이 고지에 도착한 러시아 사병들이 시체들을 뒤진다. 영국 군의 얼굴을 감싸던 복면이 러시아 군의 얼굴을 감싼다. 추위에 유용한 이 물건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한다.
말이 필요 없는 스포츠
한 달 동안 걸었던 800킬로의 길을 버스를 타고 열여섯 시간 만에 돌아왔다.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 입구. 젊은이들이 계단에 늘어앉아 담배를 피우고, 기다란 턱을 따라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이 모습을 구경하는 건 미술관의 유물들 사이를 걷는 일보다 훨씬 생생하고 흥미롭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관광객들은 매표소의 기다란 줄을 기다리며, 미술관 앞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케이터들의 젊음을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고 힐끔거린다. 경비원은 절대로 그들을 내쫓지 않는다.
누군가 보드를 타다 넘어진다. 몇 초 만에 보드는 굴러온다. 광장에 걸터앉아 있는 내게. 나는 보드에 올라타 킥 플립을 선보인다. 점프를 해서 보드를 180도 돌리는 기술, 몇 개 더 보여준다. 환호가 들려온다. 어느새 나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친구들이 건네주는 담배를 피우고,
디바와 디자이너
귀국행 비행기를 미룬 채 매일 미술관 앞으로 출근한다. 옆에 앉아 있는 p에게 중얼거린다. 어릴 적, 같이 보드를 타던 형들로부터 떨어져나오며 생각했지. 어째서 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욕을 하고, 영상을 찍는 거지? 영상을 인스타에 올리면 멋지다는 댓글이 달리지. 또 올리면 똑같은 댓글이 달리지.
조금 더 다르게 입고, 말하고, 영상을 찍는다면 각자 더 특별한 주목을 받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거지? 이렇게나 젊고, 잘생기고, 보드도 잘 타는데 말이야. 왜 다들 비슷하게 입고, 말하고, 찍고, 자신을 보여주는 거야?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안 돼.
디바 납셨네. p는 갑자기 내 사진을 찍는다. 여러 가지에 취해 부어 있는 행복한 얼굴. p는 이 사진을 자신이 만든 청바지에 인쇄할 거라고 말한다. 정작 무리 중에서 가장 낯을 가리는 건 그녀이지만. p의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모토는 우정, 지속가능성, 예술이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이듬해, 전 세계에 유행한 건 두 가지다. 코로나바이러스, 그리고 p가 만든 발라클라바 털모자. 이목구비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동그란 호빵처럼 감싼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바르셀로나의 겨울에도 보드를 타는 친구들을 위해 만들었다. 발라클라바는 인스타그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 서울에 도착한다. 2020년 겨울의 한강진, 사람들이 KF 마스크 위에 발라클라바를 덮어쓰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편집숍. "모자 그거 사" 누군가 말하고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잖아?" 누군가 모자를 내려놓는다. p는 자신이 만든 모자를 두고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할 거다. 귀여워 죽겠다, 예뻐 죽겠다…… 이런 말들은 한국의 연인들 사이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이야.
달려오면 줄을 당겨
연합군은 승리하고 발라클라바를 떠난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한다. 소련이 해체되고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다. 1930년. 영화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제작된다. 평야에 철사를 깔아놓고 말이 달려오면 줄을 당겨 넘어뜨린다. 스물다섯 마리의 말이 죽거나 안락사 당한다. 말에서 떨어진 스턴트맨 한 명이 사망한다. 헐리우드는 동물 보호법을 제정한다. 1968년. 영화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블록버스터로 제작된다. 아무도 죽지 않고 흥행에 참패한다. 2014년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하고 전쟁이 시작된다. 2025년 겨울.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p가 만들었던 발라클라바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다. 중고장터에서도 팔리지 않는다. 옷장 깊숙이 밀려난 털모자처럼 코로나 시기도 잊혀간다. 만나지 못한 육 년 동안 p는 세 아이를 낳았다. 세계의 대도시들에 지점을 냈다. 우리는 가끔 인스타그램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더이상 친구들의 사진을 인쇄한 바지를 팔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사흘 더 서쪽으로 걸어가면 스페인 영토의 최서단에 도착한다.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순례자의 전통을 따라한다. 자신이 신고 온 외투와 신발에 불을 붙여 태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지구에서 그날의 석양이 가장 먼저 타오르는 걸 보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한 달 만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복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p는 나를 작업실로 데려가 옷을 나눠주었다. p가 만든 건 아니었고 그녀의 브랜드도 아니었다.
그저 p가 입던 옷.
강상헌
2018년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유원지 왔니?』가 있다.
2026/08/19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