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
어둠 부르기
몇 년째 여기저기서 세계문학 기획 수업을 하면서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걸작이라도 손대서는 안 되는 금단의 소재들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 흑인을, 마치 못 본 것처럼 그냥 지나가세요. 남의 전쟁을, 유서 깊은 종교를, 뉴욕 이외의 지역에 사는 젠더퀴어와 인구 십만 이하의 도시에 사는 모든 인간을 모른 척 지나치세요. 이런 소재들을 다룬 작품은 아무리 걸작이라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혹은 비슷한 수준의 걸작에 비해 무조건 덜 팔린다고 이해해도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나 수업을 듣는 여러분이나 문학 독자들이 말 그대로 차별주의자는 아니라는 (혹은 아닐 거라는) 단서를 붙이곤 한다. 여기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가 어떤 인간과 사건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왜 이런 소재들은 선택받지 못할까? 간단히 말하면 내 돈과 시간을 쓸 만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흑인 소설을 예로 들면, “나는 흑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흑인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가능하다. 흑인 이야기는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다시 말해 흑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좋고 싫음을 불러일으키는, 즉 내가 정서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다. 물론 흑인들은 이 지구상에 실존하며 나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먼 곳에 살고, 안타깝게도 내가 세상에 쏟을 수 있는 애정과 관심은 한정되어 있어서 거기까지 다 나눠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하고 연대할 테지만(왜냐하면 그들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라는 항목이 ‘나’의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평화로이 무관심할 것이다. 그들은 내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나의 범주로 압축되어 다른 지식들과 함께 수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압축된 지식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될 수는 없다. 당신들에게 캐릭터의 역할을 줄 수 있을 만큼의 호감을 느끼지 못해 유감이다. 하지만 뭔가를 더 좋아하고 다른 뭔가를 덜 좋아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고,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저 먼 곳에서 태어난 것, 내가 여기서 태어난 것,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즐거운 것, 이미 좋아하는 것들 혹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추천한 것들을 읽자. 내 마음이 승인한 세계 속을 영영 걷자.
맞는 말이다. 사람이 내면 세계의 국경을 넓히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문학이 독자를 제자리에서 맴돌게만 놓아둔다면, 독자와 시장이 상호 승인한 세계에서 함께 파티를 여는 데 그친다면, 그게 정말로 재미있는 일일까? 여러 번 자문해보았지만, 역시 내겐 재미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독자들의 평균 세계 바깥에서 생산된 작품을 들이밀면서 이걸 보아달라고, 여기까지 나와보라고 읍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른 전략을 구상했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바깥으로 확장하기 어렵다면, 세계가 개인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과 그 바깥 사이의 장벽에 구멍을 내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위에 위화감과 의심을 덧칠하면, 앞선 믿음이 녹아내리면서 구멍이 태어난다. 그런 구멍을 여럿 갖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내면을 확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 구멍들의 이름은 ‘모름’이고, 따라서 ‘신비’이며, 그리하여 그 구멍에 눈을 들이대면 내가 구축한 메르헨을 포위한 모든 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영영 내 메르헨 안으로 포섭할 수 없을 저 멀고 이상한 것들을.
기획에 착수한 나는 동시대 문학 독자들의 평균에 해당하는 어떤 세계를 떠올린 다음, 그 세계의 질서 혹은 규칙을 이상한 방식으로 흐트러뜨리는 작품들을 수집했다. 예를 들어 토베 디틀레우센이 쓴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은 천재 여성 시인이 시대의 핍박을 딛고 일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내 그 삶은 연이은 외도와 약물 중독으로 얼룩지면서 선량한 독자들을 경악케 하고 그들의 기대를 내팽개친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의 주인공 주디스도 특히 애정이 가는 인물이다. 20세기 중반에 사십 대에 접어든 그녀는 사실상 공인된 노처녀(이하 주디스를 묘사한 부분은 모두 소설 속 표현에 따른 것이다)인데, 재미없고 못생기고 가난해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 세계를 관망하는 천사들, 즉 독자들조차 그녀를 보듬어주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작은 거짓말을 일삼고, 남을 헐뜯고, 술을 퍼마시는 걸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디스는 많은 이가 운명의 피해자에게 기대하는 일종의 무해함이나 고결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에, 그러면서도 완벽히 무능했기에, 많은 독자는 그녀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 고민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일부가 될 자격은 어떻게 부여받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작은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그런 구멍들, 동시대 문학 소비자들이 평균적으로 거주하는 세계에 빈틈을 내는 구멍들을 수집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골랐다. 구멍 아닌 것처럼 위장한 구멍, 여러 개의 폭이 좁고 깊은 구멍, 아주 커다랗고 검은 구멍. 만약 문학에 어떤 효용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 구멍들이야말로 최고의 효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다보면 그보다 더 큰 의심들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얽힌 줄기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내 작은 세계의 기반을 뿌리째 뒤엎어버릴 ‘아무런-정의(定義/情意)-없음’의 거대한 형체를 더듬을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저 ‘없음’의 감촉을 느끼고 나면 내가 세워놓았던 모든 기준과 그에 따른 분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 스스로 무너뜨리거나 재구축하기는 너무도 힘들어보였던 장벽이 바깥에서부터 부서지는 것이다. 그 부서진 틈으로 온 우주가 쏟아지면서 내가 취향껏 꾸며놓은 메르헨은 여기저기로 휩쓸려나갈 테고, 결국 나는 바깥으로 나서야만 한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이다. 물론 그 과정은 당연히 고통을 동반하지만…… 여기서는 소설가 조이 윌리엄스가 했던 말을 약간 바꾸어서 전해보겠다. 오로지 불행만이 인간을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충격을 통해서만 다음 시기 혹은 단계로 튕겨나가듯 움직이는데, 그 충격에는 행복과 불행이 있고, 그중 행복은 우리가 이미 구축했던 세계를 재확인하게 해주는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작품이 더 유익한 소설이다. 그 수렁 혹은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것: 다른 모든 존재가 나와 동등함을 아는 대신 실감하기. 아무 이유 없이도 존재하는 것들을 목격하기.
그때부터 문학은 삶과 마찬가지로 체험되는 것으로 변한다. 여기까지 온 독자는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머리를 들이민 구멍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세계문학 시리즈를 기획할 때는 이런 작품들이 ‘우리’의 외면을 받을까봐 걱정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앞서 펴낸 작품들을 충분히 감상했을 독자들을 위해 보다 선명한 구멍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아들』의 두번째 단편인 「두 남자」. 이 작품의 결말 시퀀스에 번져 있는 폭력과 살인의 에너지는 전반부의 전개와는 아무 상관 없이 충동적으로 터져올랐다가 아무런 해소나 폭발을 선보이지 않고 정지해버리는데, 그렇게 소설이 끝나는 순간 목적을 잃은 상당량의 에너지는 마치 무기고에 수납되는 폭탄처럼 독자의 내면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것은 만들어진 이유와 쓰일 목적을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신비한 에너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언급한 방식을 따르자면 순수한 권능이다. 주인공이 권총을 꺼내 (아마도) 무고한 사람의 머리를 겨누는 순간, 그가 원래 찾아온 사람이 여기 없다고 말하는데도 “상관없어”라고 대답하며 자기 행동에서 이유를 탈락시키는 순간 저 어딘가에서부터 호출된 목적 불명의 권능은 작품이 끝나면서 멈춰버린 모든 피조물 위에서, 독자의 머릿속에서 홀로 빛처럼 쏟아진다.
이런 장면은 나 자신의 마음속에 나 있는 구멍을 단번에 통과하면서 이상한 소리 같은 것들을 낸다. 그건 퍽 신기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어서, 이런 순간들을 계속해 찾아내는 건 업무치고는 너무 행복하지 않은가, 혹시 내가 뭘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 소리 중에는 눈을 감아도 뚫고 들어올 만큼 엄청나게 밝은 조명을 켜놓은 『수용소 군도』 속 고문실처럼 강렬한 파열음을 내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지나간다. 체호프가 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어떤 남자가 뜬금없이 혼자 수박을 먹는 순간이라거나, 각각 ‘다자이 오사무 주간’과 ‘365일 반찬 백과’라는 이름을 가진 두 고양이가 등장하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도입부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아마 방금 언급한 두 장면을 읽자마자 왜 찔찔 울었는지 평생 이해하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머리로 이해하지 못할 어둠이라서. 내가 직접 보듬고 살아온 어둠처럼 말이다. 어둠에 이름을 붙여 그것을 부를 수 있길 바라는 사람들은 보통 철학과 정신의학, 역사학과 생태학처럼 뼈대와 형체를 갖춘 교양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지만, 문학은 어둠을 명명하기는커녕(물론 그러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렇게 지목된 것들은 대개 유사품 같다) 그것의 위치를 지정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신 그 어둠 주위의 풍경을 스케치함으로써 그 한가운데에 빈칸처럼 자리 잡은 어둠을 드러내 보여준다. 나는, 독자는 그것을 그냥 본다.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에 나오는,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구멍 같은 바나나피시들.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에서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라도 읽은 적 있니?”라는 질문을 들은 사샤가 “살면 살수록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어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 둘의 온 주위를 부드럽게 둘러싸는 구멍. 고요한 영광 가운데 오로지 체험되어야만 하는 구멍.1)
나는 이런 구멍들을 내는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분류한다. 그러니까 내게 세계문학은 한국문학과 마주 보는 개념이 아니다. 국적은 상관없다. 나-문학 혹은 우리-문학의 맞은편 혹은 저 너머를 바라보고 포착하는 문학은 모두 세계-문학인 셈이다. 물론 한국문학과 우리-문학이 연결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그건 한국 출판 시장에 몸담은 내가 시장의 유행에 부합해 만들어진 한국산 신작들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생산된 문학 중에서도 이런저런 유행에 빠르게 탑승한 작품들을 접하다보면 역시 내 마음이 속한 업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내가 늘 감사해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은 그저 고집스럽게 자신의 구멍을 파는 사람들이다. 각기 다른 시대와 장르로 펼쳐진 문학의 거미줄을 모든 방향으로 다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소위 말하는 ‘내 장르’ 바깥에 나 있는 구멍을 나 스스로가 탐지하는 건 매우 피곤한 작업인데, 그걸 여기저기서 해내서 선물처럼 내게 안겨주는 동지들이 있달까, 마치 파이팅 넘치는 지하 탐사 동아리에 속한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올해 웨이크필드 프레스2)는 이쪽, 도로시 프로젝트3)는 저쪽을 부탁해. 이번 선봉은 오랜만에 달키 아카이브4)다. 무려 윌리엄 개스의 『터널』을 재출간한다니까 다들 놈의 헬멧을 한 번씩 두드려줘. 자, 올해도 자기 마음에 난 구멍을 얼룩으로 착각한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자부심을 되찾아주자! 총원 다이브, 오늘도 무사히!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나 수업을 듣는 여러분이나 문학 독자들이 말 그대로 차별주의자는 아니라는 (혹은 아닐 거라는) 단서를 붙이곤 한다. 여기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가 어떤 인간과 사건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왜 이런 소재들은 선택받지 못할까? 간단히 말하면 내 돈과 시간을 쓸 만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흑인 소설을 예로 들면, “나는 흑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흑인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가능하다. 흑인 이야기는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다시 말해 흑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좋고 싫음을 불러일으키는, 즉 내가 정서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다. 물론 흑인들은 이 지구상에 실존하며 나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먼 곳에 살고, 안타깝게도 내가 세상에 쏟을 수 있는 애정과 관심은 한정되어 있어서 거기까지 다 나눠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하고 연대할 테지만(왜냐하면 그들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라는 항목이 ‘나’의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평화로이 무관심할 것이다. 그들은 내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나의 범주로 압축되어 다른 지식들과 함께 수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압축된 지식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될 수는 없다. 당신들에게 캐릭터의 역할을 줄 수 있을 만큼의 호감을 느끼지 못해 유감이다. 하지만 뭔가를 더 좋아하고 다른 뭔가를 덜 좋아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고,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저 먼 곳에서 태어난 것, 내가 여기서 태어난 것,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즐거운 것, 이미 좋아하는 것들 혹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추천한 것들을 읽자. 내 마음이 승인한 세계 속을 영영 걷자.
맞는 말이다. 사람이 내면 세계의 국경을 넓히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문학이 독자를 제자리에서 맴돌게만 놓아둔다면, 독자와 시장이 상호 승인한 세계에서 함께 파티를 여는 데 그친다면, 그게 정말로 재미있는 일일까? 여러 번 자문해보았지만, 역시 내겐 재미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독자들의 평균 세계 바깥에서 생산된 작품을 들이밀면서 이걸 보아달라고, 여기까지 나와보라고 읍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른 전략을 구상했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바깥으로 확장하기 어렵다면, 세계가 개인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과 그 바깥 사이의 장벽에 구멍을 내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위에 위화감과 의심을 덧칠하면, 앞선 믿음이 녹아내리면서 구멍이 태어난다. 그런 구멍을 여럿 갖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내면을 확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 구멍들의 이름은 ‘모름’이고, 따라서 ‘신비’이며, 그리하여 그 구멍에 눈을 들이대면 내가 구축한 메르헨을 포위한 모든 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영영 내 메르헨 안으로 포섭할 수 없을 저 멀고 이상한 것들을.
기획에 착수한 나는 동시대 문학 독자들의 평균에 해당하는 어떤 세계를 떠올린 다음, 그 세계의 질서 혹은 규칙을 이상한 방식으로 흐트러뜨리는 작품들을 수집했다. 예를 들어 토베 디틀레우센이 쓴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은 천재 여성 시인이 시대의 핍박을 딛고 일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내 그 삶은 연이은 외도와 약물 중독으로 얼룩지면서 선량한 독자들을 경악케 하고 그들의 기대를 내팽개친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의 주인공 주디스도 특히 애정이 가는 인물이다. 20세기 중반에 사십 대에 접어든 그녀는 사실상 공인된 노처녀(이하 주디스를 묘사한 부분은 모두 소설 속 표현에 따른 것이다)인데, 재미없고 못생기고 가난해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 세계를 관망하는 천사들, 즉 독자들조차 그녀를 보듬어주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작은 거짓말을 일삼고, 남을 헐뜯고, 술을 퍼마시는 걸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디스는 많은 이가 운명의 피해자에게 기대하는 일종의 무해함이나 고결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에, 그러면서도 완벽히 무능했기에, 많은 독자는 그녀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 고민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일부가 될 자격은 어떻게 부여받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작은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그런 구멍들, 동시대 문학 소비자들이 평균적으로 거주하는 세계에 빈틈을 내는 구멍들을 수집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골랐다. 구멍 아닌 것처럼 위장한 구멍, 여러 개의 폭이 좁고 깊은 구멍, 아주 커다랗고 검은 구멍. 만약 문학에 어떤 효용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 구멍들이야말로 최고의 효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다보면 그보다 더 큰 의심들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얽힌 줄기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내 작은 세계의 기반을 뿌리째 뒤엎어버릴 ‘아무런-정의(定義/情意)-없음’의 거대한 형체를 더듬을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저 ‘없음’의 감촉을 느끼고 나면 내가 세워놓았던 모든 기준과 그에 따른 분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 스스로 무너뜨리거나 재구축하기는 너무도 힘들어보였던 장벽이 바깥에서부터 부서지는 것이다. 그 부서진 틈으로 온 우주가 쏟아지면서 내가 취향껏 꾸며놓은 메르헨은 여기저기로 휩쓸려나갈 테고, 결국 나는 바깥으로 나서야만 한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이다. 물론 그 과정은 당연히 고통을 동반하지만…… 여기서는 소설가 조이 윌리엄스가 했던 말을 약간 바꾸어서 전해보겠다. 오로지 불행만이 인간을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충격을 통해서만 다음 시기 혹은 단계로 튕겨나가듯 움직이는데, 그 충격에는 행복과 불행이 있고, 그중 행복은 우리가 이미 구축했던 세계를 재확인하게 해주는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작품이 더 유익한 소설이다. 그 수렁 혹은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것: 다른 모든 존재가 나와 동등함을 아는 대신 실감하기. 아무 이유 없이도 존재하는 것들을 목격하기.
그때부터 문학은 삶과 마찬가지로 체험되는 것으로 변한다. 여기까지 온 독자는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머리를 들이민 구멍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세계문학 시리즈를 기획할 때는 이런 작품들이 ‘우리’의 외면을 받을까봐 걱정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앞서 펴낸 작품들을 충분히 감상했을 독자들을 위해 보다 선명한 구멍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아들』의 두번째 단편인 「두 남자」. 이 작품의 결말 시퀀스에 번져 있는 폭력과 살인의 에너지는 전반부의 전개와는 아무 상관 없이 충동적으로 터져올랐다가 아무런 해소나 폭발을 선보이지 않고 정지해버리는데, 그렇게 소설이 끝나는 순간 목적을 잃은 상당량의 에너지는 마치 무기고에 수납되는 폭탄처럼 독자의 내면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것은 만들어진 이유와 쓰일 목적을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신비한 에너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언급한 방식을 따르자면 순수한 권능이다. 주인공이 권총을 꺼내 (아마도) 무고한 사람의 머리를 겨누는 순간, 그가 원래 찾아온 사람이 여기 없다고 말하는데도 “상관없어”라고 대답하며 자기 행동에서 이유를 탈락시키는 순간 저 어딘가에서부터 호출된 목적 불명의 권능은 작품이 끝나면서 멈춰버린 모든 피조물 위에서, 독자의 머릿속에서 홀로 빛처럼 쏟아진다.
이런 장면은 나 자신의 마음속에 나 있는 구멍을 단번에 통과하면서 이상한 소리 같은 것들을 낸다. 그건 퍽 신기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어서, 이런 순간들을 계속해 찾아내는 건 업무치고는 너무 행복하지 않은가, 혹시 내가 뭘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 소리 중에는 눈을 감아도 뚫고 들어올 만큼 엄청나게 밝은 조명을 켜놓은 『수용소 군도』 속 고문실처럼 강렬한 파열음을 내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지나간다. 체호프가 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어떤 남자가 뜬금없이 혼자 수박을 먹는 순간이라거나, 각각 ‘다자이 오사무 주간’과 ‘365일 반찬 백과’라는 이름을 가진 두 고양이가 등장하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도입부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아마 방금 언급한 두 장면을 읽자마자 왜 찔찔 울었는지 평생 이해하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머리로 이해하지 못할 어둠이라서. 내가 직접 보듬고 살아온 어둠처럼 말이다. 어둠에 이름을 붙여 그것을 부를 수 있길 바라는 사람들은 보통 철학과 정신의학, 역사학과 생태학처럼 뼈대와 형체를 갖춘 교양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지만, 문학은 어둠을 명명하기는커녕(물론 그러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렇게 지목된 것들은 대개 유사품 같다) 그것의 위치를 지정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신 그 어둠 주위의 풍경을 스케치함으로써 그 한가운데에 빈칸처럼 자리 잡은 어둠을 드러내 보여준다. 나는, 독자는 그것을 그냥 본다.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에 나오는,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구멍 같은 바나나피시들.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에서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라도 읽은 적 있니?”라는 질문을 들은 사샤가 “살면 살수록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어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 둘의 온 주위를 부드럽게 둘러싸는 구멍. 고요한 영광 가운데 오로지 체험되어야만 하는 구멍.1)
나는 이런 구멍들을 내는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분류한다. 그러니까 내게 세계문학은 한국문학과 마주 보는 개념이 아니다. 국적은 상관없다. 나-문학 혹은 우리-문학의 맞은편 혹은 저 너머를 바라보고 포착하는 문학은 모두 세계-문학인 셈이다. 물론 한국문학과 우리-문학이 연결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그건 한국 출판 시장에 몸담은 내가 시장의 유행에 부합해 만들어진 한국산 신작들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생산된 문학 중에서도 이런저런 유행에 빠르게 탑승한 작품들을 접하다보면 역시 내 마음이 속한 업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내가 늘 감사해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은 그저 고집스럽게 자신의 구멍을 파는 사람들이다. 각기 다른 시대와 장르로 펼쳐진 문학의 거미줄을 모든 방향으로 다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소위 말하는 ‘내 장르’ 바깥에 나 있는 구멍을 나 스스로가 탐지하는 건 매우 피곤한 작업인데, 그걸 여기저기서 해내서 선물처럼 내게 안겨주는 동지들이 있달까, 마치 파이팅 넘치는 지하 탐사 동아리에 속한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올해 웨이크필드 프레스2)는 이쪽, 도로시 프로젝트3)는 저쪽을 부탁해. 이번 선봉은 오랜만에 달키 아카이브4)다. 무려 윌리엄 개스의 『터널』을 재출간한다니까 다들 놈의 헬멧을 한 번씩 두드려줘. 자, 올해도 자기 마음에 난 구멍을 얼룩으로 착각한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자부심을 되찾아주자! 총원 다이브, 오늘도 무사히!
최원호
2018년부터 출판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현재 을유문화사에서 일하면서 기이프레스를 공동 운영한다.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 시리즈 전종 외에 『예수의 아들』 『조이 윌리엄스 단편집』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리스펙토르의 시간』 『투명한 힘』 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처음에는 업계 돌아가는 얘기를 쓰려 했다가, 기왕 지면이 주어진 김에 더 많은 독자가 내 얘기이기도 하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역시 미래를 생각하면 기회가 날 때마다 동지를 늘릴 수 있게끔 애써야겠다.
2026/10/21
81호
- 1
- 이 문장은 스티븐 킹의 유명한 추천사를 조금 바꾼 것이다. “볼라뇨의 초현실적인 소설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광적인 영광 가운데 체험되어야 한다.” 아마 그도 거기서 뭔가를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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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크필드 프레스(Wakefield Press). 19~20세기 환상 문학과 고딕 문학의 자장 안에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발굴해 소개 중인 출판사다. 현존하는 영어권 출판사 중에 독보적인 라인업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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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시 프로젝트(Dorothy Project). 특히 실험적이고 몽환적인 동시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 미국의 작은 출판사. 요즘은 일 년에 두 권씩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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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키 아카이브 프레스(Dalkey Archive Press). 플랜 오브라이언의 작품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출판사답게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소설을 열성적으로 파고드는 출판사다. 1984년에 설립되었고 발간 도서 목록이 1,000종이 넘어서 이쪽 업계의 대감님쯤 된다.